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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영화 천문/우주 정체성

마침내 닫힌 방문을 연 숨겨진 사람들의 꿈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by 권희정 / 2020.09.22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마침내 닫힌 방문을 연 숨겨진 사람들의 꿈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는?

 

 

체성 폭력에 시달리는 천재가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할 때 그 손해는 전체의 것이 된다. 해리슨 부장은 모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화장실 문패를 뜯어내고 간단하게 선언한다. “가까운 곳으로 가라. 나사에서는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본다.” 소변 색뿐이겠는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욕구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달랐던 것은 부모의 피부색, 그 하나......



도로 위 차량고장, 범죄가 아닌데도



허허벌판 도로 위에 고장 난 차가 서 있다. 난감한 운전자 앞에 때마침 경찰차가 나타난다면 구세주의 등장일 터. 그러나 당사자들은 반색이 아니라 난색을 한다. 경찰차가 가까워지는 동안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점검하며 다가올 상황에 대비한다. 범죄자일까? 아니다. 이들은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는 직원들이고 지금은 출근 중이다. 문제는 이들이 흑인 여성들이라는 점. 이들의 방어적 태도는 축적된 기억의 실체를 짐작게 한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세명의 흑인 여성, 이들은 왜 숨겨졌나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히든 피겨스 2017년 첫 감동실화 절찬 상영중

▲ 히든 피겨스 포스터(이미지 출처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나사의 우주 개발에 참여했던 세 흑인 여성들을 다룬 이야기다. 캐서린은 무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액 장학금을 받고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에 조기 입학했던 수학 천재다. 도로시는 현재 나사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 계산원들을 이끄는 리더고, 메리는 여성에게는 접근 기회조차 없었던 엔지니어의 꿈을 좇는 공학자다. 영화는 이 세 명이 각자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나사의 핵심 요원이 되어 가는 성장사를 다룬다. 성공한 인사들의 영웅담이니 역경을 이겨내는 감동이 있고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이니 당연히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우주로 사람을 보내는 일과 흑인 여성들이 나사에서 시민권을 인정받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빨랐을까? 답은 ‘숨겨진 사람들(hidden figures)’, 답은 제목 안에 있다. 



 ‘유색인종’,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된 존재



영웅담이 긴장감을 유발하려면 싸워야 할 적이 강력하고 끈질겨야 한다. 그러나 <히든 피겨스>에서 세 여성을 괴롭히는 적은 특정인도 권력자도 악인도 아니다. 캐서린이 새로 배정받은 나사 연구소 내 ‘우주 임무 그룹’ 사람들은 우수한 두뇌로 열심히 우주선 발사 궤도를 연구하는 최고의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흑인 여성이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동료로 일하는 것이 불쾌했다. 나사 연구소가 있던 버지니아주는 당시 인종분리정책이 시행되던 곳이다. 유색인종은 식당도 사무실도 공공 도서관도 백인들과 따로 사용하는 것이 법이었다. 캐서린이 우주 임무 그룹에 배치된 다음 날, 사무실 안에는 오직 단 한 사람을 겨냥한 유색 인종 전용 커피포트가 등장한다. ‘너는 우리와 같은 물을 마실 수 없어. 너와 우리는 동등하지 않아.’ 말없이 진행되는 집단의 배제 행위는 누구를 향해 따져 물어야 하는지 과녁을 정할 수 없다. 공기처럼 가득 차 있다가 바람처럼 때리고 지나갈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언급했듯이, 사회가 관습을 이유로 개인에게 내리는 명령은 정치적 압제보다 훨씬 더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의 정신 그 자체를 노예화한다. 타자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말하지 못하는 존재, 여기 있으나 있지 않은 것처럼 취급되는 존재,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된 존재, 그녀는 숨겨진 사람이다. 



나사에서는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셋 중 가장 얌전한 성격의 캐서린에게도 참기 힘든 순간이 왔다. 화장실 문제 때문이다. 나사 내에서 하위직에 해당하는 계산원은 모두 여성이다. 같은 계산원인데도 백인은 동관에, 흑인은 서관 지하에서 따로 일한다. 깨끗하고 쾌적한 동관과 달리 서관 지하는 어둡고 낡은 곳이다. 이쪽 화장실은 비누가 떨어져도 바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이 캐서린에게 허락된 유일한 화장실이다. 유색인종 화장실은 서관에만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캐서린이 촌각을 다투며 방대한 분량의 계산을 하다가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 800미터를 달려야 한다는 점이다. 버스 정류장 2개만큼의 거리, 아니 서울에서라면 4개쯤 될 수도 있겠다. 화장실을 오가느라 자리를 비우는 동안 상급자였던 해리슨 부장은 업무 태만을 지적한다. 아무도 그녀의 사정을 알지 못했고 캐서린은 불성실하다는 평판을 얻는다. 화장실에 갔다가 폭우를 맞고 돌아온 날, 해리슨의 질책을 받자 캐서린도 마침내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폭발시키듯 털어놓는다. 모두의 집중과 정적. 캐서린의 독보적인 해석기하학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겪는 불합리에는 무관심했던 덕분에 자그마치 미국의 우주 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었던 셈이다. 



Identity and Violence 정체성과 폭력 The Illusion of Destiny 운명이라는 환영 아마르티아 센 지음 Amartya Sen

▲ 아마르티아 센의 ‘정체성과 폭력’(이미지 출처 : 바이북스)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그의 책 <정체성과 폭력>에서 한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을 무시한 채 인종이나 성별 등의 단일 정체성으로 개인을 귀속시키는 것은 개인의 자기 의식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폭력이라고 보았다. 정체성 폭력에 시달리는 천재가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할 때 그 손해는 전체의 것이 된다. 해리슨 부장은 모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화장실 문패를 뜯어내고 간단하게 선언한다.  

“가까운 곳으로 가라. 나사에서는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본다.” 

소변 색뿐이겠는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욕구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달랐던 것은 부모의 피부색, 그 하나다.



“이것은 규정이다. 그러려니 하라” 



영화에는 자주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캐서린이 국방부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요청할 때 상급자이자 수석 엔지니어였던 스태포드는 온갖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여자라서 안된다’, ‘민간인이라서 안된다’, ‘보안인가가 없어서 안된다’, ‘절차상 안된다’, ‘그냥 그러려니 하라’. 

임시직은 주임이 될 수 없어 불만이 컸던 도로시가 새롭게 뜨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하기 위해 공립 도서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백인 전용 섹션에만 있는 포트란 책을 보러 갔다가 흑인은 나가라는 제지를 받고 아이들과 함께 쫓겨난다. 이때 도로시가 말한다. “그러려니 하지 말라, 바르게 행동했으면 떳떳한 것이다.” 

메리 또한 마찬가지다. 나사 엔지니어 훈련을 받으려면 버지니아 대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새 규정이 생겼는데 그곳은 흑인에게 입학 자격을 주지 않는 곳이다. “우리가 앞서 나갈 기회가 생기면 늘 결승선을 옮긴단 말야.” 기분 나빠하는 메리에게 백인 여성 정규직 미첼은 ‘나는 규정을 따랐을 뿐’이라며 차갑게 응수한다. 

프랑스 출신 문학평론가인 르네 지라르는 공동체 내에서 주체들에 의해 성원권이 부정되어 배제되는 사람들을 사회적 약자라고 불렀다. 사회적 약자는 폭력 앞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희생양이 된다. 사회적 약자가 견딜 수 있는 차별의 모래주머니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흑인, 여성, 임시직, 하위직으로 경험하는 복합 차별은 온갖 문화적 옷을 입고 나타나 차가운 목소리로 끈질기게 명령한다. 

“규정이니 따르라. 맘에 안 들어도 그러려니 하라“


 

차별은 구조적 폭력이다



관습과 타인의 시선은 늘 우리의 행동과 심리를 강제한다. 정착된 관습에 의문을 품으면 사회는 비난이나 처벌을 통해 개인의 자아를 위축시킨다.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된 개인은 저항하거나 순응하지만 어느 쪽이건 심리적 상처를 수반한다. 그래서 차별은 폭력이다. 도로시를 무시해 온 백인 여성 미첼이 미래 기술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쳐달라고 저자세로 부탁하면서 그동안 악감정은 없었다고 과거를 미화하려 하자, 도로시는 말한다. “당신 스스로는 그렇게 알고 있겠지.” 차별적 구조에 눈 감은 사람이 그 업무를 열심히 수행할 때 능동적 악의가 없었더라도 그 자체로 구조적 폭력의 대리 행위가 된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Peace by Peaceful Means 요한 갈퉁 지음 Johan Galtung 들녘

▲ 요한 갈퉁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이미지 출처 : 들녘)



노르웨이 출신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그의 저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에서 폭력을 인간의 욕구 실현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천재성과 열정이 가득한 세 여인은 정체성의 욕구와 자유의 욕구 측면에서 가장 큰 억압을 받은 셈인데, 이들이 입은 피해는 긍정적 자기의식의 훼손이라는 영혼의 상처다. 이 폭력은 신체를 직접 위해하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기에 무관심한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죄책감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게다가 구조적 폭력은 제도와 법을 통해 작동해서 힘이 세다. 문화적 폭력도 종교, 사상, 예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 채 다른 유형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한다. 갈퉁은 직접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이 폭력의 삼각형을 이루고 서로 맞물려 차별과 배제를 계속 유지시킨다고 설명하였다. 과연 삼각축 안에 갇힌 숨겨진 사람들은 탈출이 가능한 걸까?


 

 ‘미래인의 눈’으로 닫힌 방문을 연다면

 


프렌드십 7호에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미지 출처 : NASA)

▲ 프렌드십 7호에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미지 출처 : NASA)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미국 최초의 유인위성이었던 프렌드십 7호 발사 직전 캐서린이 계산한 궤적 값을 탐사선에 긴급하게 넘겨준 때다. 관제실 안은 계산 값만 들어갈 수 있고 캐서린은 들어갈 수 없다. 우주는 갈 수 있지만 화장실은 갈 수 없던 때와 비슷하다. 닫힌 문은 선을 넘지 말라는 짧은 지시어다. 흑인, 여성, 비정규직, 보조 계산원. 가장 큰 공을 세운 그녀지만 닫힌 문 앞에 선 채 가쁜 숨과 멍한 정신으로 자신의 신분을 재확인한다.


차별받는 소수자는 어떻게 이 선을 넘어 방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영화는 각기 다른 세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나사의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공학자 메리는 백인고등학교의 물리학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버지니아주가 이를 불허하자 소송을 걸었다. 메리는 재판정에서 백인 판사에게 100년 후에도 기억될 최초의 판결을 내리라고 설득한다. 해리슨 부장이 “먼저 도달하는 자가 규칙을 만든다.”고 했던 것처럼 최초의 법원 판례는 모든 흑인 여성의 길을 여는 표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색인종 계산팀 리더 도로시는 동지애를 바탕으로 서관 계산원 전체를 나사의 IBM 컴퓨터실 정규직 직원으로 만들었다. 미국 흑인 여성 역사에는 복합 차별에 맞서기 위해 맺어온 공동체적 유대 관계와 특유의 자매애 문화 전통이 있다. 리더십이 강했던 도로시가 “누구의 도약이든 모두의 도약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세 여성도 강력한 연대로 서로를 잡아줬기에 선을 넘어 방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천재 수학자 캐서린은 인간 계산기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숫자 너머의 원리와 의미를 추구했다. 마음이 이미 달나라에 가 있는 사람은 지구의 수가 아니라 우주의 수를 해석하는 사람이니까. 인간이 우주에 발을 딛는 일은 상상의 일이고 미래의 일이다. 흑인 여성이 인간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없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것, 캐서린의 방법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같은 것이 되게 했다. 지구를 벗어나듯 차별을 넘어서려면 차별이 해소된 미래인의 눈으로 현재에 대응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과 관련하여, 어떤 것을 폭력으로 정의 내린 주체는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정의를 독점하는 권리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나를 괴롭히는 이 차별은 누가 정했으며 그 규범을 독점할 권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지금 우리 사회도 다양한 차원에서 차별적 현실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다. 미래의 현실과 만나려면 캐서린의 방법처럼 철학적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지 모른다. 해석의 지반을 바꿀 때 규범의 독점권도 해체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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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숭실대 철학과에서 철학교육학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철학적 사고를 재미있어하고 삶을 즐거워하기를 바라며 어떻게 도와줄지 고민합니다. 학생도 교사도 수업 종료령이 울리면 새로운 앎보다 새로운 무지가 더 많아지는 그런 수업을 꿈꿉니다. 펴낸 책으로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전 콘서트>(공저), <나를 찾는 독서논술>(공저), <고등학교 철학>교과서(공저), <고등학교 생활과 철학>교과서(공저),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교과서(공저), <노마의 발견>(공역), <철학적 탐구>(공역)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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