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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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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고

by 배병삼 / 2020.08.31

군자고(君子考) 기획 칼럼 ④

역사에 대한 흥미롭고 주체적인 상상과 비평, '웹역사소설' 기획 칼럼 ③

소설을 읽는다는 것, 역사 그 이상을 감각하는 일 기획 칼럼 ②

국가 간의 역사적 화해는 가능한가 기획 칼럼 ①

 





로는 워낙 폭력배 출신의 강골이다. 무력으로 국가들을 제압함으로써 천하 통일을 이루는 길 외에 따로 ‘현실적인 방안’이 없다고 굳게 믿은 사람이다. 시대의 상식을 대변하는 이가 그였다. 당연히 그에게 ‘군자’란 용맹을 갖춘 지휘관이어야 마땅했다. 언젠가 그는,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자기가 아는 군자 사이가 자꾸 어긋나고 비끗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질문이 없었던 그가 놀랍게도......



공자의 절망...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다니’


 

공자 초상화

▲ 공자 초상화(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공자는 아뜩했다. 훗날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다가, 이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구나!’라고 맹자가 개탄했듯 춘추시대의 사람 짓과 세상 꼴에 절망했다. 사람이 먹어야 할 곡식을 외려 짐승에게 먹이니(마소를 살찌워야 전쟁터로 끌고 갈 수 있었다. )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 꼴이요, 사람 목을 쳐서 귀를 떼어야 공적을 증명하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양새였다. 그 참혹한 세월이 2백여 년이었다.


워낙 모친이 무당이던 터. 공자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밤낮을 새우며 천지신명께 빌고 물었다.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추락한 야만의 시대를 극복할 방안을. 한날 밤 ‘사람이 변해야 세상이 바뀌리라’는 응답을 얻었다. 천하 통일을 이뤄야 세상의 질서를 도모할 수 있다는 당대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모시킬 때라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공자는 이 메시지를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네 글자로 요약했다. 또다시 그 방법을 묻고 빌었다. 이레 뒤 새벽녘. ‘네 하기 싫은 일을, 외려 네가 하라’라는 응답을 들었다. 그는 이 말씀을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여덟 글자로 요약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기 마련. 그러니 내 하기 싫은 일을 상대에게 미루지 말뿐만이 아니라, 외려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에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해결할 처방이 들었다는 말씀.


공자는 당혹했다. 시대의 잘못을 바로잡을 처방전이 바깥이 아니라 나 속에 있다는 놀라운 소식에 어리둥절했고 또 분노하고 개탄하고 있는 자신이 외려 해결의 주체로서 문제의 한가운데 있다는 위치 이동도 놀라웠다. 그는 말씀을 곱씹고 또 헤아렸다. 급기야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오히려 내가 하기’라는 역설만이 세상 변화의 참된 처방임을 수긍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공자는 생각이 바뀌고 몸이 변했다. 마치 곰이 사람으로 바뀌듯 그러했다.


마을로 내려가 일을 시작하려 할 적에, 공자는 의외의 문제에 봉착했다. 새로운 인간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줘야 하느냐는 것. 새사람에 걸맞게 새로운 이름이어야겠는데, 새이름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실은 새사람에게 합당한 개념을 형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영웅’이라고 하자니 홀로 뚜렷하되 함께하는 맛이 없고, ‘호걸’이라 하자니 걸출하긴 하나 사람을 부리는 모양새고, ‘대인’이라고 하려니 스스로 뻐기는 듯한 맛이 있고, ‘초인’이라고 이름하려니 탈속하여 세상을 잊은 자 같았다.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공자는 그 이름을 짓지 못했다. 이젠 낯익은 말들 속에서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다. 상대방 덕택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 남의 처지를 내게로 끌어들여 고민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방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 그렇다고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하지 않는 사람. 의외로 이런 의미들을 담을 이름을 사전 속에서 찾기도 쉽지가 않았다. 해가 뉘엿 질 무렵에야 ‘군자’라는 말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묵어 낡은 것이 흠이긴 했다. 군자는 말 그대로 ‘임금(君)의 자손(子)’이란 뜻이니 왕족을 가리키는, 정치적이고 권력적이며 세습적인 개념이던 것이다. 다만 세속의 한쪽에서 귀족처럼 우아하고, 신사처럼 범절에 깍듯하며, 현자처럼 박식하고, 귀인처럼 너그럽다는 의미로 번져서 쓰이기도 했다. 언어란 세월이 흐르면 그렇게 응용되기 마련인 터. 군자라는 말 역시 지배계급이라는 공식적 지칭 외에 교양인, 도덕군자라는 의미로도 ‘암시장’에 통용되고 있었기에 공자는 거기에 기대어 군자라는 말로 그의 뜻을 담고자 했다. 그때 노자가 던진 말을 떠올리며 공자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이름을 이름으로 표현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노라’(名可名非常名)던 말.



‘군자’, 같은 말인데 이해는 서로 달랐던



공자가 가리킨 것은 달이었으나

▲ 공자가 가리킨 것은 달이었으나(이미지 출처 : pixabay)



역시 문제는 군자라는 말에서 발생했다. 공자가 군자라는 말로 가리키는 달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손가락만 바라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거의 처음 만난 제자인 자로(子路)의 경우가 상징적이다. 자로는 워낙 폭력배 출신의 강골이다. 무력으로 국가들을 제압함으로써 천하 통일을 이루는 길 외에 따로 ‘현실적인 방안’이 없다고 굳게 믿은 사람이다. 시대의 상식을 대변하는 이가 그였다. 당연히 그에게 ‘군자’란 용맹을 갖춘 지휘관이어야 마땅했다. 언젠가 그는,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자기가 아는 군자 사이가 자꾸 어긋나고 비끗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질문이 없었던 그가 놀랍게도 스승에게 질문을 던졌다. “군자란 용맹을 숭상하는 사람이겠지요?” ‘내가 아는 군자가 스승님이 말씀하신 군자와 진배없겠지요’라는 확인용 질문이다. 허나 공자는 단호하게 답한다. “아니다. 군자➋란 정의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군자➊가 정의를 무시하고 용맹을 부리면 반란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맹만 취하면 도적이 되고 말지!”1)

1) 子路曰, “君子尙勇乎?” 子曰, “君子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爲亂, 小人有勇而無義爲盜.”(논어, 17:23)



공자의 답변 속에 군자가 두 가지 용례로 쓰이는 점에 주의하자. ‘군자➋’는 공자가 제시하려는 ‘신인간’이다. 한편 자로가 질문한 ‘군자’는 지배계층(위정자)을 뜻한다, 자로에게 군자는 지배계급, 곧 군사전략에 밝고 용맹을 갖춘 군사지휘자이니 ‘군자’만이 그의 뜻이다. 한데 공자는 군자를 두 가지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지배계층으로서 군자(군자)를 딛고서 새로운 ‘군자➋’를 가리키는 손가락 끝! 여기에 새 술(사상)과 그것을 담는 헌 부대(개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자옥하게 엉켜있다. 공자만 그랬으랴!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고 대중설법에 나서려던 참에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서 말문을 닫으려 했고, 노자는 짧은 글을 남기면서 ‘도를 도라고 부른다면 이미 참된 도가 아니라’는 변명을 말머리에 달아야 했으며, 소크라테스는 잠자는 아테네 시민들의 잠을 깨우려 언어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다가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 아니던가.


공자의 대화록, <논어>에는 헌 말의 부대 속에 든 새 술(뜻)이 대중과 충돌하고 언어시장에서 갈등하는 일들이 속출한다. 재아(宰我)라는 제자가 삼년상을 줄이자며 주장하던 와중에도 ‘군자=위정자’라는 등식을 내세우며 덤벼들고 스승은 ‘군자=성찰하는 인간’으로 응대하는 장면이 그러하고, 사마우(司馬牛)라는 제자가 군자에 대해 물었을 때, 스승은 ‘자신을 성찰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內省不疚)로 답했다가 제자의 차가운 눈총을 감내해야 했다.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만 찾던 사람들의 눈길을 안으로 되돌려 자기 속에서 문제를 찾고,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새로운 군자의 의미는, 대중들 처지에서는 알기도 따라 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선각자의 비극이 생겨나거니와, 그렇다고 뒷걸음질 칠 수는 없는 노릇. 깨닫고 나면 다시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러하다.


다시 자로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딴에 그는 공자의 군자론을 이모저모 헤아렸던 모양이다. ‘배운 것을 체화하지 못하면 또다시 배우려 들지 않는’ 우직함이 그의 미덕이기도 했던 터다. 한 시절 고민 끝에 다시금 ‘군자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스승에게 묻는다. 이건 먼젓번 질문과 다른 것이다. 앞의 ‘군자란 용맹을 숭상하는 존재이겠지요?’가 상식을 깔고 행한 자기 확인용 물음이라면, 지금 질문은 스승의 입장에까지 나아가 새로운 군자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이게 진짜 질문이다. ) 공자는 흔쾌히 “자신을 돌이켜 덕성을 닦는 존재”라고 답한다. 수기이경(修己以敬). 이 네 글자에 공자 군자론의 속살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정녕 회광반조(回光返照 : 눈길을 안으로 되돌려 나 속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불교 용어)야말로 공자가 뜻하는 군자론의 출발점이다. 자신을 성찰하여 거기서 발견하는 덕성이 새로운 군자의 정체성이요, 그것을 체화함으로써 내뿜는 매력의 힘을 주변에서부터 멀리로 발산하여 점점 차차 세상을 맑히고 밝혀 평화와 질서로 탈바꿈하는 프로그램이 공자의 사상이다.

 

자로는 세상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권력적 존재로서 군자를 생각했을 뿐, 눈을 안으로 되돌려 성찰하는 회로는 애당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육안(肉眼)을 눈길의 전부로 알았던 충혈된 무사 자로에게 심안(心眼)은 얼마나 낯선 말이었겠으며, 성찰(敬)은 또 얼마나 어리둥절한 개념이었을까! 그러니 황망한 소식에 자로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것이 ‘다만 그것이 군자일 뿐입니까?’라는 질문을 거듭한 까닭이다.2)

2) 자로가 ‘군자’를 물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수기이경脩己以敬하는 존재지.” 자로가 말했다. “다만 그렇게 하면 군자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수기이안인脩己以安人. 곧 수기하여 사람들을 평안케 하면 더 좋지.” 자로가 또 말했다. “다만 그렇게 하면 군자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흠. 수기하여 만백성까지 평안케 한다면 최고지. 허나 이건 역사적 성왕이신 요순임금도 그러지 못해 병통으로 여기셨을 터.”(논어, 14:45)



끝내 자로는 스승의 군자가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개는 밥을 주는 주인을 위해 짖고, 무사는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죽는다’라는 묵은 습관을 떨치지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하고 만다.(<춘추좌전>) 스승은 또 그의 죽음이 아파서 이레를 앓다가 따라 죽고 만다. 애재!




하이젠베르크와 공자, 다른 시대 하지만 같은 고민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 Gesprache im Umkreis der Atomphysik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 서커스 정식 한국어판

▲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이미지 출처 : 서커스 출판상회)



지금 양자역학의 역사를 서술한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고 있는 중이다. 뉴턴 물리학의 명증하고 절대적인 시공간이, 확률론적 애매함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원자 세계의 진실 앞에서 당혹하고 혼란한 물리학자들의 고민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나아가 새로운 양자역학의 세계로 가는 길에 봉착하는 언어와 이해, 표현과 진실 사이의 갈등이 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만 기존 언어 너머의 진리를 발견했을 때,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또 개념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과학에서도 실질적인 신세계는 지금까지 과학이 의존하고 있던 토대를 박차버리고, 말하자면 허공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을 때만 얻어질 수 있다”라고 하이젠베르크가 말했을 때, 나는 공자의 고독을 느꼈다.


기존의 언어를 사용해서는 새로운 발견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미흡한 심정, 그럼에도 기존 개념 외엔 따로 없어 유사한 말을 빌려 쓰긴 하지만 역시 미진한 느낌, 그 빌린 말로 표현했을 때 왜곡돼 전파될 의미의 비틀림에 대한 염려 등. 이것은 공자가 군자라는 말을 빌려 그가 꿈꾼 새 인간을 표현했을 때와 동질의 미진함이었으리라.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로써 확률의 세계를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았을 때, 문득 공자의 새 군자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자로의 죽음을 연상하게도 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고의 근거가 되어왔고 과학적인 연구의 기반이 되어왔던 표상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안타까움은 공자의 그것과 겹치거니와, 나아가 오늘날 내 주변에서 툭툭 불거지는 새로운 현상들, 이를테면 페미니즘, 성 소수자 문제, 환경문제 등에 대한 나의 짜증과 고집을 돌이켜보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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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배병삼
1959년 경남 김해출생.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儒道會 한문연수원에서 수학했고, 한국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교 사상을 오늘날 시각으로 해석하는 일을 과업으로 삼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맹자, 마음의 정치학>(전3권),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전2권),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공자, 경영을 論하다>,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이 있고, 공저로 <고전 강연>, <예술과 삶에 대한 물음>, <고전의 향연>, <글쓰기의 최소원칙>, <유학, 시대와 通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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