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부터 열리는 국내 최초의 존 레논 전시회(예술의 전당)를 위해 내한한 세계적인 사진작가 밥 그룬(Bob Gruen)은 존 레논을 가리켜 “사적으로 농담을 즐기고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좋아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며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공적인 이미지와 실제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존 레논의 대외적, 역사적 위상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고 그를 위해 실천한 인물’과 관련한다. 분명 이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적 완성도 외에 별도의 사회적 중량감이 더해졌다.
사랑과 평화의 대전제는 언제나 사람
1999년, 권위 있는 영국의 인명록 <인터내셔널 후즈 후(International Who's Who)>는 ‘20세기를 움직인 100인’을 선정하면서 대중가수로는 유일하게 존 레논을 올려놓았다. 그는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자 음악위인으로 숭앙된다. 그런데 밥 그룬은 ‘사적으로 유쾌한 사람’이라며 실제와 이미지에 간극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아이크 앤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를 시작으로 레드 제플린, 섹스 피스톨스, 패티 스미스, 데이비드 보위, 클래시 등 록 스타의 사진에 집중해온 사진작가 밥 그룬은 특히 존 레논이 비틀스 해산 후 1971년부터 뉴욕에 정착했던 시절을 전담, 존과 아내 요코의 일상을 카메라로 포착한 작가로 유명하다. 레논이 뉴욕 시티가 새겨진 흰 티셔츠를 입고 찍은 것과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 밥 그룬과 그가 찍은 존 레논 ⓒ비하인드 포토그래프 (http://behindphotographs.com/)
가까이서 지켜본 그에 따르면 존 레논은 평생의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의 이상세계로 향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과 함께 해야 비로소 그것이 펼쳐질 것으로 본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people)이 대전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이란 곡을 썼다.
‘당신이 부리는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못 받고 노동하고 있지/
그러니 그들의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줘요/ 민중에게 권력을!...’
그의 적이라고 할 제도, 권력, 권위와 싸우기 위해서 민중, 평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존 레논은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출신 자손이며 어릴 적 사실상 고아로 자랐다. 다만 그는 평민의 한 사람을 넘어 그들의 지도자적 위치를 꿈꾸었다. 이 시각을 반영한 노래가 ‘노동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다.
‘그들은 당신을 종교 섹스 TV로 중독 시키지/ 그런데 당신은 현명하고 지위에 차별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거야/...노동계급의 영웅은 될 만해. 생각이 있다면 나를 따르라구..’
겉으로는 혁명과 사회변화를 주창하면서 개인적으로 차별적 지위를 누리는 표리부동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디어를 통하든 뭐든 우리는 만나야 한다고, 뭉쳐야 한다고 외쳤다. 레논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오로지 우리들, 먹고 살아간다지만 실상 돈과 편견으로 조종되고 억압되고 소외되고 있는 민중에 시점을 맞추었다.
가족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 실천주의자
그렇다면 이러한 억압과 피억압의 불평등 구조에서 신음하는 대표적 계층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존 레논은 제목에 이미 모든 것을 심은 곡 ‘여성은 세계의 노예’(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를 통해 가부장제와 여성학대 풍조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에는 아내 요코 오노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 무렵은 1969년 뉴욕에서 제1회 페미니스트 회의가 개최되었고 1970년대 중반까지 우먼리브(Woman lib)라는 이름의 여성해방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친 시절이었다.
때문에 존 레논은 페미니즘 사조에 있어서도 예술가 가운데 선구자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솔직히 모든 부와 명예를 거머쥔 비틀스의 리더 격 존재가 이런 입장을 취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시절 존 레논은 거침이 없었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라고 떠들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에 이른다. ‘생각편향’을 사양하고 행동으로 엮어간 실천주의자였던 것이다. 아내 요코와 아예 남녀역할 교체에 나선다. 바깥일은 요코에게 넘기고 자신은 집에 들어앉아 아들 숀의 육아에 전념한다. 그는 스스로를 집에서 일하는 남편 이를테면 ‘하우스 허스번드’(house-husband)로 일컬었다.
▲ 존 레논과 그의 아내 오노 요코
숀은 나중 성장해 이버지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 아버지는 셋에 모든 것을 바쳤다. 하나는 사랑과 평화, 둘은 엄마 요코, 마지막은 나였다.” 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가정은 존의 관심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요코에 대한 헌신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아마도 그에게 가정이란 사회와 대립 항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와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의 살아있는 세포’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받드는 ‘가족가치’는 때로 보수적일 수 있지만 건강한 의미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호모 레논스를 기다리며…
존 레논은 누가 봐도 당대 개혁세력을 지배한 좌파의 가치, 정확히 말하면 ‘신좌파’의 이념을 수용하고 실천한 인물이었다. 영국인이 미국 땅에 들어와 좌파적인 행동인 사랑과 평화를 주창하고 공개적으로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비판하였으니 그는 당시 닉슨 보수 정부의 시선에선 눈엣가시이자 ‘좌파 게릴라’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미국 정부는 그를 미국에서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 존 레논이 공화당 전당대회와 같은 시각에 예정된 반전 콘서트에 참여할 것이라는 정보를 포착한 후 그를 국외로 추방하기로 하고 실행에 돌입한다. 표면적으로는 레논의 대마초 소지였지만 실은 좌파이념에 물든 문화게릴라의 척결을 위해서였다.
이에 레논은 반전 반정부 집회와 텔레비전 출연을 통해 닉슨 정부를 공격의 수위를 높였지만 미국법원은 가차 없이 60일 이내에 미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대중가수에게 미국 정부가 내린 최초의 추방령이었다. 분기탱천한 레논은 더욱 격하게 닉슨 행정부에 덤벼들었다. 결과는 레논의 승리였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닉슨은 사임했고 이듬해 추방령은 자연스레 기각되었다.
존 레논은 1975년 임시영주권인 그린카드를 발급받고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인의 삶을 찾았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5년의 공백을 끝내고 새 앨범으로 컴백한지 며칠 되지 않아 마이크 채프먼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 팬이 쏜 총탄에 현장 즉사했다. 1980년 12월 8일이었다. 이번 한국 전시회도 레논 사망 38주년 기일에 맞춰 개막한 것이다. 미확인 정보지만 사망할 당시부터 흘러나온 ‘미국 CIA의 조종에 의한 살해’설을 지금까지도 믿는 사람이 꽤 많다.
존 레논은 1970년 반(反)종교적, 반국가주의적, 반권위적, 반자본주의적 관점에서 ‘Imagine’을 만들었다. 좌파와 개혁세력을 위한 국가를 쓰려는 야망의 산물이었다. 미국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1월 1일 새해로 바뀌는 순간 흘러나오는 이 곡은 평화의 찬가로, 전 세계적인 명곡으로 살아 남아있다. 그 숭고한 평화와 평등의 메시지는 바로 우리 보통사람들을 보듬는 포용의 가치에 맞닿아있다.
나 혼자 산다와 혼술의 풍조에 밀린 탓일까. 그토록 떠들어대던 공동체의 미덕도 근래에는 퇴각하는 듯한 양상이다.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가야 할 평범한 사람들이 돈과 외모와 학벌이 기염을 토하는 사회에서 절망의 한숨을 쉰다. 존 레논이 ‘Imagine’을 부른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도 진척된 것은 없다. 자유롭지도 평화롭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그가 꿈꾸던 세상의 실현은 지금도 요원하다. 우리는 다시 ‘생각과 행동’을 함께 갖춘 존 레논과 같은 사람, ‘호모 레논스’(Homo Lennons)를 기다린다.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사랑과 평화로 하나가 되길 꿈꿨던 몽상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사랑과 평화로 하나가 되길 꿈꿨던 몽상가
존 레논의 삶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이상세계
임진모
2018-12-10
12월6일부터 열리는 국내 최초의 존 레논 전시회(예술의 전당)를 위해 내한한 세계적인 사진작가 밥 그룬(Bob Gruen)은 존 레논을 가리켜 “사적으로 농담을 즐기고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좋아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며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공적인 이미지와 실제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존 레논의 대외적, 역사적 위상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고 그를 위해 실천한 인물’과 관련한다. 분명 이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적 완성도 외에 별도의 사회적 중량감이 더해졌다.
사랑과 평화의 대전제는 언제나 사람
1999년, 권위 있는 영국의 인명록 <인터내셔널 후즈 후(International Who's Who)>는 ‘20세기를 움직인 100인’을 선정하면서 대중가수로는 유일하게 존 레논을 올려놓았다. 그는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자 음악위인으로 숭앙된다. 그런데 밥 그룬은 ‘사적으로 유쾌한 사람’이라며 실제와 이미지에 간극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아이크 앤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를 시작으로 레드 제플린, 섹스 피스톨스, 패티 스미스, 데이비드 보위, 클래시 등 록 스타의 사진에 집중해온 사진작가 밥 그룬은 특히 존 레논이 비틀스 해산 후 1971년부터 뉴욕에 정착했던 시절을 전담, 존과 아내 요코의 일상을 카메라로 포착한 작가로 유명하다. 레논이 뉴욕 시티가 새겨진 흰 티셔츠를 입고 찍은 것과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 밥 그룬과 그가 찍은 존 레논 ⓒ비하인드 포토그래프 (http://behindphotographs.com/)
가까이서 지켜본 그에 따르면 존 레논은 평생의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의 이상세계로 향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과 함께 해야 비로소 그것이 펼쳐질 것으로 본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people)이 대전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이란 곡을 썼다.
‘당신이 부리는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못 받고 노동하고 있지/
그러니 그들의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줘요/ 민중에게 권력을!...’
그의 적이라고 할 제도, 권력, 권위와 싸우기 위해서 민중, 평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존 레논은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출신 자손이며 어릴 적 사실상 고아로 자랐다. 다만 그는 평민의 한 사람을 넘어 그들의 지도자적 위치를 꿈꾸었다. 이 시각을 반영한 노래가 ‘노동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다.
‘그들은 당신을 종교 섹스 TV로 중독 시키지/ 그런데 당신은 현명하고 지위에 차별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거야/...노동계급의 영웅은 될 만해. 생각이 있다면 나를 따르라구..’
겉으로는 혁명과 사회변화를 주창하면서 개인적으로 차별적 지위를 누리는 표리부동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디어를 통하든 뭐든 우리는 만나야 한다고, 뭉쳐야 한다고 외쳤다. 레논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오로지 우리들, 먹고 살아간다지만 실상 돈과 편견으로 조종되고 억압되고 소외되고 있는 민중에 시점을 맞추었다.
가족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 실천주의자
그렇다면 이러한 억압과 피억압의 불평등 구조에서 신음하는 대표적 계층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존 레논은 제목에 이미 모든 것을 심은 곡 ‘여성은 세계의 노예’(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를 통해 가부장제와 여성학대 풍조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에는 아내 요코 오노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 무렵은 1969년 뉴욕에서 제1회 페미니스트 회의가 개최되었고 1970년대 중반까지 우먼리브(Woman lib)라는 이름의 여성해방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친 시절이었다.
때문에 존 레논은 페미니즘 사조에 있어서도 예술가 가운데 선구자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솔직히 모든 부와 명예를 거머쥔 비틀스의 리더 격 존재가 이런 입장을 취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시절 존 레논은 거침이 없었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라고 떠들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에 이른다. ‘생각편향’을 사양하고 행동으로 엮어간 실천주의자였던 것이다. 아내 요코와 아예 남녀역할 교체에 나선다. 바깥일은 요코에게 넘기고 자신은 집에 들어앉아 아들 숀의 육아에 전념한다. 그는 스스로를 집에서 일하는 남편 이를테면 ‘하우스 허스번드’(house-husband)로 일컬었다.
▲ 존 레논과 그의 아내 오노 요코
숀은 나중 성장해 이버지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 아버지는 셋에 모든 것을 바쳤다. 하나는 사랑과 평화, 둘은 엄마 요코, 마지막은 나였다.” 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가정은 존의 관심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요코에 대한 헌신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아마도 그에게 가정이란 사회와 대립 항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와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의 살아있는 세포’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받드는 ‘가족가치’는 때로 보수적일 수 있지만 건강한 의미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호모 레논스를 기다리며…
존 레논은 누가 봐도 당대 개혁세력을 지배한 좌파의 가치, 정확히 말하면 ‘신좌파’의 이념을 수용하고 실천한 인물이었다. 영국인이 미국 땅에 들어와 좌파적인 행동인 사랑과 평화를 주창하고 공개적으로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비판하였으니 그는 당시 닉슨 보수 정부의 시선에선 눈엣가시이자 ‘좌파 게릴라’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미국 정부는 그를 미국에서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 존 레논이 공화당 전당대회와 같은 시각에 예정된 반전 콘서트에 참여할 것이라는 정보를 포착한 후 그를 국외로 추방하기로 하고 실행에 돌입한다. 표면적으로는 레논의 대마초 소지였지만 실은 좌파이념에 물든 문화게릴라의 척결을 위해서였다.
이에 레논은 반전 반정부 집회와 텔레비전 출연을 통해 닉슨 정부를 공격의 수위를 높였지만 미국법원은 가차 없이 60일 이내에 미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대중가수에게 미국 정부가 내린 최초의 추방령이었다. 분기탱천한 레논은 더욱 격하게 닉슨 행정부에 덤벼들었다. 결과는 레논의 승리였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닉슨은 사임했고 이듬해 추방령은 자연스레 기각되었다.
존 레논은 1975년 임시영주권인 그린카드를 발급받고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인의 삶을 찾았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5년의 공백을 끝내고 새 앨범으로 컴백한지 며칠 되지 않아 마이크 채프먼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 팬이 쏜 총탄에 현장 즉사했다. 1980년 12월 8일이었다. 이번 한국 전시회도 레논 사망 38주년 기일에 맞춰 개막한 것이다. 미확인 정보지만 사망할 당시부터 흘러나온 ‘미국 CIA의 조종에 의한 살해’설을 지금까지도 믿는 사람이 꽤 많다.
존 레논은 1970년 반(反)종교적, 반국가주의적, 반권위적, 반자본주의적 관점에서 ‘Imagine’을 만들었다. 좌파와 개혁세력을 위한 국가를 쓰려는 야망의 산물이었다. 미국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1월 1일 새해로 바뀌는 순간 흘러나오는 이 곡은 평화의 찬가로, 전 세계적인 명곡으로 살아 남아있다. 그 숭고한 평화와 평등의 메시지는 바로 우리 보통사람들을 보듬는 포용의 가치에 맞닿아있다.
나 혼자 산다와 혼술의 풍조에 밀린 탓일까. 그토록 떠들어대던 공동체의 미덕도 근래에는 퇴각하는 듯한 양상이다.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가야 할 평범한 사람들이 돈과 외모와 학벌이 기염을 토하는 사회에서 절망의 한숨을 쉰다. 존 레논이 ‘Imagine’을 부른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도 진척된 것은 없다. 자유롭지도 평화롭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그가 꿈꾸던 세상의 실현은 지금도 요원하다. 우리는 다시 ‘생각과 행동’을 함께 갖춘 존 레논과 같은 사람, ‘호모 레논스’(Homo Lennons)를 기다린다.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사랑과 평화로 하나가 되길 꿈꿨던 몽상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폭염과 싸우는 음악
임진모
대중음악, 기억과 추억의 언어
임진모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