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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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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사회/이슈 심리

미스터M : 개인의 탄생

by 장근영 / 2016.09.27

개인의 탄생


번역 전문가인 야나부 아키라의 연구서 『번역어 성립사정』에 따르면,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근대의 단어들, 예를 들어 ‘의무’ ‘권리’ ‘사회’ ‘개인’ 같은 단어들은 모두 처음에 일본 인문학자들이 유럽의 문헌을 번역하면서 창조해낸 것들이다. 이들이 이 단어들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당시 봉건사회였던 동아시아 문화권에는 이에 해당하는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individual’인데, 여기에는 ‘분리된 인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개인’은 남과는 다른, 명확히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로서의 나를 의미한다. 봉건사회에 개인이 없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족구성원 혹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만 생각했지, 남들과 분리된 고유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마치 자신은 남들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자는 철이 덜 든 어린아이들뿐이며, 혹여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또는 오만방자한 자로 간주되어 배척당하거나 큰 처벌을 받았다.

근대사회의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라는 것도 개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다. 어떤 안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다른 의견들을 알아보고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대안으로 수렴해나가기 위한 제도, 즉 민주주의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비슷하다면, 굳이 의견을 물어볼 필요도 없고, 선거 같은 번거로운 제도를 시행할 이유도 없다.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영역,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개인이 없어지면 민주주의도, 사회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독재자들은 자기가 지배하는 국민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막는다. 사람들이 남과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환경,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인 사회일수록 강력한 권력자가 통제하기 쉽다.

개인은 심리학에서도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봉건사회의 전통이 여전했던 19세기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덕률과 가치관을 무의식 깊숙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양심이 생겨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만 있다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이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 부모의 마음을 그대로 빼다 박은 클론 같은 후손들만 있을 뿐이다.


혼자 얼굴을 내민 인형


나는 왜, 어떤 면에서 남과 다른가?


하지만 그로부터 한 세대 후의 심리학자 에리크 에릭슨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도덕성도 중요하고, 지식과 기술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왜, 어떤 면에서 남과 다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 생각과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전에는 우리는 성인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나에 대한 인식을 ‘정체성identity’이라고 부른다. 정체성이 생긴 다음에야 진짜 ‘내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내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내 배우자’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릭슨에 따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태어날 때 내 선택과 상관없이 주어진 가족이나 지역공동체를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가족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다. 내가 선택한 배우자와 자녀, 내가 선택한 회사나 동료들이 그 새로운 가족이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독립된 어른이 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일단 괜찮은 직업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남자의 경우 정규직을 구하는 시점이 평균 31세쯤이라고 한다. 만약 경제적인 독립을 독립된 성인의 조건으로 따진다면, 한국 남성의 평균 성인진입 시기가 31세 이후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에릭슨의 이론에 따르면 순서가 뒤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직업을 가지는 것은 일단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난 다음의 일이다. 혹여 젊은 나이에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주체적으로 그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 부모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면 그는 여전히 성인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선택하려면 오랫동안 스스로 이것저것 선택하며 축적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 말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가 시키는 과외공부만 하느라 혼자 알아서 공부해본 경험도 별로 없이 성장한 사람들이 자기 전공이나 진로를 선택할 때 의존할 수 있는 자신감이라는 게 뭐가 있을까. 옷을 입거나 머리를 다듬거나 식사를 하거나 책이나 영화를 볼 때조차도 주변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결국 개인을 구성하는 자기정체성과 자신감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전공도 부모나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정하고, 졸업 후에는 바로 그렇게 정해진 길이 막히면 막막해지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사회가 발전할수록 다양성이 증가하며, 직업의 종류도 엄청나게 늘어난다. 그중에는 나에게 딱 맞는 일자리도 있을 것이지만, 이렇게 획일적으로 남에 맞춰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자리들은 아예 보이지 않거나 남들이 그런 일을 하는 나를 어떻게 볼지를 생각하다 보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 인형


우리는 모두가 다르다. 근대사회에서 남과 다른 건 잘못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여러 면에서 수십 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러나 갈수록 한국인의 행복도가 하락하는 상황을 보면 정작 우리는 이렇게 좋아진 환경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근본 원인은 남과 다른 나, 개인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근대사회에서는 남과 다른 게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일이다. 그 다름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립이 가능하며, 자기만의 삶이 풍성해지고, 행복이 생겨난다.


Stress Syndrome Psychology Emotion Mentality Identity

 

 

심리 장근영 개인 individual 민주주의 정체성 자신감
필자 장근영
장근영
(심리학자)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과 일본 리니지 유저의 라이프스타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년 문화심리학과 매체 심리학, 사이버공간의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으며, 영화와 만화, 게임 등을 이용한 심리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팝콘 심리학』 『심리학 오디세이』 『싸이코 짱가의 영화 속 심리학』 『소심한 심리학자와 무심한 고양이』 등을 저술했고,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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