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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정체성 심리 가족

[세상의 모든 옷] poet

by 성동혁 / 2016.01.28

세상의 모든 옷

poet


사랑하는 엄마, 내일은 친척 형의 결혼식이야. 낮에 청첩장을 찍어서 메시지로 보내던 엄마. 전화를 해 늦지 말고 오라고 신신당부하던 엄마. 우린 내일 만나겠네? 

형은 대기업에 취직해 자리를 잡았고 형수가 되실 분은 공무원이라며? 여느 결혼식에서나 볼 수 있듯 모든 어른들이 자식 자랑에 한껏 열을 올릴 텐데 난 벌써 걱정이야. 남의 집 자식들의 취직이나 혼사를 왜 그렇게들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어. 분명 어른들은 좋은 직장을 잡고 근사한 정장을 입고 온 사람들을 자랑스러워 하시겠지? 때가 되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겠지? 난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아 걱정이야, 엄마. 여전히 수트가 어울리지 않고 직장도 없어. 시인은 전문직은 맞지만 정규직은 아니라는 농담이 생각나네. 괜히 억하심정에 후드티를 입고 농구화를 신고 가고 싶지만 예의를 차려야겠지?

엄마, 나는 옷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어. 그래서 만날 사람이 기어코 만나듯 물건도 주인을 꼭 찾아간다고 생각해. 아무리 비싸도 영혼이 없는 물건은 금세 값어치가 없어지더라고. 그리고 이사를 하고 나서야 알아. 그 옷이 어디 갔지? 반면 영혼이 있는 옷들은 내가 직접 박스 안에 차곡차곡 넣기 때문에 잃어버릴 일도 없어. 박스가 흔들려도 영혼이 멍들지 않게 차곡차곡 넣거든.


1 평소에 나는 내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해. ‘시인’이란 말은 남들에게 떠벌릴 때가 아닌 스스로의 명치에 맺혀 있을 때 아름다운 말이니까. 스스로를 시인이라 떠벌리는 사람의 시가 거짓인 걸 나는 종종 보았거든. 낯선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 나를 시인이라 소개할 때 내가 얼마나 난처할 정도로 뻣뻣해지는지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알 거야. 근데 몇 년 전 일본에 처음에 갔을 때 나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 지하철역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 일본인이 와서 도와준 일이 있었어. 가는 길이 같아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 그가 스스로를 기자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르키며 “포엣! 포엣!”이라고 말했어. 낯선 타국에서 스스로를 설명할 길이 ‘포엣, 포엣’ 뿐인 걸 그때야 깨달았던 것 같아.

그는 “포에또?” 하며 신기한 표정을 했던 것 같아. 자신이 생각한 시인의 이미지와 달랐을 수도 있고 너무 어려 보여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 시인은 뭔가 중후한 멋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모자
ⓒ성동혁

 

2

모자는 또다른 표정. 그날 어떤 모자를 썼느냐에 따라 챙 밑의 표정이 정해지는 것 같아. 긴 챙의 모자를 쓴 날은 깊숙이 숨고 싶고, 니트로 짜여진 모자를 쓰면 조금은 귀여운 로맨스를 꿈꾸게 되는 것 같아. 모자로 인해 모자 밑의 낯빛이 정해져.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해지면서 모자의 취향도 천천히 바뀌는 것 같아. 그중 하나가 소재에 대한 취향이야. 여전히 야구 모자를 좋아하지만 머리에 닿는 느낌 때문인지 요즘은 페도라나 니트 비니를 많이 쓰는 것 같거든. 피부 위에 붕 뜨는 느낌보다 감기듯 쓰여지는 모자들이 좋더라고. 

좋아하는 편집숍이 있어 둘러 보던 중 멋진 페도라 하나를 발견했어. 거의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모자 브랜드야. 디자인과 제조까지 한 국가에서 마친 제품이라 더더욱 좋았던 것 같아. 여전히 그곳엔 모자를 짓는 장인들이 있는 것 같았거든. 그런 분들이 영혼이 깃든 물건을 만들어내는 걸 나는 아니까, 제조와 디자인이 달라 방황하다가 사라지는 물건의 영혼이 많은 걸 나는 아니까. 잔고가 걱정되지 않더라고.

그 모자는 내가 가진 모자 중에 제일 비싼 모자가 되었어. 나는 그저 어서 포장해달라고 한 뒤, 집에 와 거울 앞에서 싱그럽게 웃어본 것 같아. 엄마가 들으면 잔소리할 가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엄마, 이 모자는 정말 영혼이 있어


 3 poet. 이 말을 찾은 건 한참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였어. 모자 안에 ‘poet’이라고 쓰여져 있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모르고 산 그 페도라에는 왜 ‘시인’이란 말이 쓰여져 있었을까. 그 모자는 기어코 나를 찾아와 ‘poet’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너는 시인이야. 작은 소년, 그러니까 어깨를 펴.” 하고.


페도라
▲ ⓒ성동혁

 


페도라는 이제, 여행 때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모자가 되었어. 이 모자는, 방랑자들을 위한 여행 아이템이야. travel items for vagabond. 보통 페도라는 챙의 각이 중요해 함부로 다룰 수 없는데 이 모자는 아니야. 함부로 다룬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느 곳에도 함께 갈 수 있어. 이 모자는 챙이 자유롭게 접히는 모자야. 반으로 접어 돌돌 말면 전용 케이스에 들어가는 모자야. 다시 케이스에서 빼면 원 상태 그대로 펴지는 모자야. 보통 페도라는 부피를 많이 차지하기도 하고 모자의 형태가 어그러질까봐 함부로 캐리어 안에 담지 못하곤 하는데 이 모자는 아니야. 작게 작게 접어 케이스 안에 넣고 캐리어의 남는 부분에 넣으면 끝이야. 그래서 나는 꼭 이 모자를 가지고 다녀. 100% 울이라 머리에 오랜 시간 닿아도 전혀 불편함을 주지 않아. 페도라 치고 얇은 편이라 사계절 내내 써도 무방한 모자야. 울이라고 더울 땐 못할 것 같지만 덥지도, 땀이 나도 전혀 불쾌해지지 않아. 이 모자는 방수가 되거든. 정말 방랑자들을 위한 모자지?


4

난 그렇게 모자를 잘 쓰고 다닐수록 새삼스럽게 모자를 만든 회사에 고맙더라고. 100년 가까이 방랑자들을 잊지 않아서, 아직도 ‘시인’이란 말을 버리지 않아서 말이야. 시인은 100년 전에도,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있었고 방랑자는 더더욱 그랬을 텐데 우린 어느새 그 말들을 잊어가고 있잖아. 모두 시적으로 살고 방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어느 순간부터 나만 사람들로부터 방랑자가 된 기분이야.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 그래도 엄마. 난 참 자유로워. 대낮 텅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기쁨을, 대낮에 미술관 앞에서 페도라를 쓰고 선글라스를 쓴 채 멍하니 있는 기쁨을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1년마다 집을 옮겨 다녀도, 어른들이 벌이와 결혼에 대해 물어봐도 나는 참 자유로워. 나는 충분히 방랑하고 있어.

엄마,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 남의 돈 빼앗으며 살지 않고 성실히 가난하게 살고 있어. 그렇지만 돈이 모이면 종종 스테이크도 먹고 좋은 커피도 마시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어. 난 스스로 안 부끄러우려고 노력 중이야. 엄마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 난 포엣, 포엣. 시인이야. 엄마가 낳은 시인. 엄마가 낳은 어여쁜 부랑자. 모자 안쪽 ‘poet’이란 글씨를 생각하며 의젓한 얼굴로 갈게. 곧 만나 엄마. 오늘은 꼭, 친척들에게 나를 시인이라고 소개해줘.


모자 안쪽 새겨진 글씨 poet
▲ ⓒ성동혁

 

 

시인 세상의모든옷 성동혁 문학 예술 엄마 정규직 페도라
필자 성동혁
성동혁
1985년 태어났다.
2011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2014년 시집 『6』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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