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인간의 가장 최악의 범죄인 살인 사건을 주제로 한 통속 소설이기 때문에 예술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추리소설도 엄격하게 말해 소설, 즉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이 갖춰야 할 예술성을 물론 지니고 있다. 살인 사건과 범인을 추적하는 머리 좋은 탐정, 그리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과 트릭으로 재미를 만들 뿐이라는 생각은 추리소설의 인간 탐구라는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해서... ...
추리소설이 흥미만 추구하는 오락문학이라고?
아서 코난 도일(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추리소설 마니아들은 무엇에 매혹되어 있을까? 물론 짜릿한 재미에 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은 흥미만을 추구하는 오락문학일까, 아니면 사람의 궁금증을 담보로 하는 게임문학일까? 혹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나쁜 범죄인 살인을 테마로 한 이야기일 뿐일까. 이렇게 추리소설에서 사랑, 고독, 소외, 우정, 불안 등 인문학적 요소와 순문학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추리소설이 가장 가치를 두고 하는 것은 물론 ‘재미’이다. 따라서 문학성이나 인문학적 가치가 중심은 아니다. 이 때문에 추리소설은 문학의 장르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추리소설도 소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상 문학임에 틀림없고 문학이 가지는 예술성과 인문학적 효능, 철학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몇 가지 분석의 틀이 있어야 한다.
추리소설의 형식적 가치, 추리소설의 윤리적 가치, 추리소설의 문학적 가치와 추리소설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초기 범인 등장, 단서 공유 등... 추리소설의 형식적 가치
문학에는 형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 형식성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르가 시조(時調)와 한시(漢詩)다.
특히 시조는 내용보다 형식이 절대적이다.
3.4.3.4(초장)
3.4.3.4(중장)
3.5.4.3(종장)
이 형식 중에 절대로 자수를 지켜야 하는 것은 종장일 것이다.
한시는 대표적인 것이 오언절구, 칠언절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복잡한 형식이 있지만 대표적인 형식을 들면 이 두 종류일 것이다.
한시는 반드시 운율(韻律)에 맞추어 지어야 한다. 운(韻)이라는 것이 종류가 많고 복잡하여 사전을 보고 글자를 찾아야 할 정도이다. 위 두 형식에서 두 연(聯) 이상의 끝 글자는 정해진 운(韻)을 써야 한다. 상당히 경직된 형식이다. 시조의 종장 5자를 지켜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추리소설은 글자 수나 운자(韻字)같은 것은 없지만 플로트(plot)라는 공식이 있다. 이 공식을 시조나 한시의 규칙처럼 지켜야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추리소설의 공식은 처음에 등장해 고전이 된 작품에서 시작되었지만 뒤에는 모든 추리소설이 이 공식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이 공식 때문에 추리 애호가가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종류는 크게 클래식(classic)과 하드보일드(hardboild)로 구분하지만 세분하면 더 많은 종류로 갈라진다.
추리소설 작법 공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로널드 녹스(Ronald Knox, 1888-1957, 영국 성공회 대주교)라는 작가가 만든 ‘추리소설 작법 10계’이다.
〈1〉 범인은 이야기의 초기 단계부터 등장해야 한다.
〈2〉 초자연적인 마력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3〉 비밀의 방이나 통로는 하나면 족하다.
〈4〉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독극물과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과학적인 장치 등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5〉 중국인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6〉 탐정이 우연히 죽을 고비를 넘긴다든가 근거 없는 직감이 적중했다는 등의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7〉 탐정 자신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
〈8〉 탐정이 단서를 발견했을 때는 이를 곧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9〉 탐정의 우둔한 친구, 즉 왓슨은 그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지능은 독자보다 조금 낮아야 한다.
〈10〉 쌍둥이 또는 쌍둥이라 할 만큼 닮은 사람을 등장시킬 때는 그 존재 이유를 독자에게 인식 시켜야 한다.
추리소설 작가이며 예술 평론가인 반 다인(Van Dine, 1888~1939)은 ‘추리소설 20’ 법칙을 내놓았다.
S. S. Van Dine의 〈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s〉 책 표지(이미지 출처: kobo)
“추리 소설에서 연애담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탐정은 범인을 재판정에 보내려는 것이지 예식장에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셜록 홈스는 이보다 훨씬 먼저 탄생한 탐정이지만 뒷날 이러한 법칙이 나올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 같다. 코난 도일은 제인 렉키라는 부인이 있었지만 작품에는 여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범인은 초기 단계에 등장해야 하고 단서는 독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공식은 대단히 지키기 어려운 규칙이다. 그러나 추리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반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복선이다. 시조에서 종장의 3.5.4.3을 지켜야 하는 것이나 한시의 끝 연에 운자를 꼭 넣어야 하는 것과 같은 규칙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요소가 다른 문학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추리소설의 독창성을 말해준다.
‘범죄는 꼭 소멸돼야’... 추리소설의 윤리적 측면
추리소설은 독재 국가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일본의 어느 평론가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직전 추리소설을 전부 불태웠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독재 국가에서는 추리소설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추리소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 연방 시절에는 추리소설이 없었으나 러시아로 체제가 바뀌자 추리소설 붐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라 마리니나(Alexandra Marinina, 1957∼)라는 여류 작가는 소련이 붕괴한 1990년을 계기로 추리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해 초대형 작가가 되었다. 〈도난당한 꿈〉은 1,8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북한에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없다. 중국에는 2015년에 찬호께이(陳浩基, 1975~)라는 추리작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홍콩 출신으로 대만 추리작가협회 공모전으로 데뷔했다.
왜일까?
추리소설은 감성의 문학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논리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지극히 논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원칙도 있다. 범죄 사회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권력을 동원해 체크 고문을 하는 등 비민주적인 수사를 하기 때문이다. 아예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있다.
나치 지도층은 추리소설이 국민을 논리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에 독재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으로 추리소설 말살을 기도했다.
추리소설은 귀족 문학이라고 했을 정도로 이론을 숭상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추리소설은 민주주의와 함께 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추리소설 규칙 중에는 범인은 반드시 잡힌다는 것이 있다. 범죄를 소멸시키는 것이 추리소설의 목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로운 플로트에 몰입하는 동안 범인필포(犯人必捕)의 정의 구현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 스미스의 〈탤런트 리플리〉 책 표지(좌)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클래식 추리소설의 명작 중에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예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출신의 추리작가 하이 스미스(Patricia Highsmith, 1921~1995)의 〈탤런트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에는 범인을 체포하는 장면이 없다. ‘탤런트 리플리’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배우 앨런 드롱이 주연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 개봉)로도 유명하다. 세계 3대 여류 추리작가로 꼽히는 프랑스의 카트린 아를레(Catherine Arley)의 〈지푸라기 여자〉도 이 종류에 속하는 명작이다.
프랑스 여류 추리소설 작가 카트린 아를레와 찍은 사진 왼쪽부터 필자, 아를레이, 노원, 김성종 작가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한국 추리소설로는 필자의 〈악녀 두 번 살다〉 (1987년 초판, 제3회 한국추리문학 대상)는 한국추리문학 사상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범인은 체포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몇 편의 작품이 범인이 체포되지는 않지만 누구라는 것은 밝히고 있다.
이상우의 〈악녀두번살다〉 책 표지(이미지 출처: YES24)
인간의 깊은 내면 탐구... 추리소설의 예술성
범죄
추리소설은 인간이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인 살인 사건을 다루는 통속 소설이기 때문에 예술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추리소설도 엄격하게 말해 소설, 즉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이 갖춰야 할 예술성을 당연히 지니고 있다.
살인 사건과 범인을 추적하는 머리 좋은 탐정, 그리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과 트릭으로 재미만 추구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리소설의 인간탐구라는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해서 나온 것이다.
예술성도 있고 재미도 있다면 오히려 상위의 문학이 아니겠는가.
작가 조르주 심농(좌)와 저서 〈누런 개〉의 책 표지(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교보문고)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Georges Simeon, 1903~1989)은 모든 작품에서 인간의 일생을 감성적 측면으로 해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추리소설을 가장 많이 쓴 다작 작가로 알려졌지만 모든 작품이 높은 예술성을 품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앙드레 지드, 서머셋 모음, 카뮈 같은 대가들도 “노벨상을 주어야 할 작가”라고 할 만큼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메그레 경감 시리즈는 범인을 체포하는 프랑스 경찰청 형사의 활약을 줄거리로 한 작품이지만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걸작으로 꼽히는 〈누런개〉(Le Chien jaune, 1931)는 한 인간의 기구한 인생을 재현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좌)와 모리무라 세이치(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fujinkoron)
한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파헤쳐 범죄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다거나, 현실 세계에 뛰어들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가들을 가리켜 ‘사회파 추리작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심리 소설을 발표하거나 사회문제를 파헤친 작가로는 일본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1909~1992)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 1933~)가 있다. 이 둘을 사회파 추리의 2대 산맥이라고 한다.
특히 모리무라 세이치의 〈증명 시리즈〉 중에 〈인간의 증명〉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모리무라 세이치의 〈인간의 증명〉 책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2차 세계 대전 후 미군이 일본에 진주했던 시절, 일본 여인은 점령군의 노리개가 된 경우가 많았다. 미군은 귀국하고 혼자 남게 된 여자들은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자라면서 더욱 비극적 환경에 처하게 된다. 사회 환경이 만든 이 불행은 개인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가진 모자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가족애를 다룬 명작으로 꼽힌다. 어느 순수 문학 작품 못지않게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국내에도 사회파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은 한국전쟁에 희생된 어느 여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필자의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는 군부 독재 시절 운동권 남녀가 처한 극한적 상황을 다룬 작품이다.
한국의 많은 순수문학 작가들이 추리소설 집필을 시도했다. 추리라는 명함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추리소설로밖에 볼 수 없는 소설도 많다.
일반 작가들이 쓴 소설 중에도 추리소설로 분류할 수 있거나, 평론가가 추리소설이라고 분류한 작품이 상당수다.
평론가나 추리작가의 눈에 분명히 추리소설을 쓴 작가로는 박경리, 전상국, 이문열, 유현종, 조해일, 정소성, 한승원, 문순태, 이병주, 선우휘, 박범신, 박양호 등이 있다.
특히 박경리의 〈타인들〉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6.25 때 실종된 가족의 행적을 추적하는 중편),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 〈불꽃〉(살인 의도의 실행), 정소성의 〈아테네 가는 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시체의 연유를 추적 수사하여 행적을 밝힌다) 등의 작품을 추리소설로 볼 수 있다.
특히 박경리의 여러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가을에 온 여인』, 『타인들』, 『겨울비』는 추리적 기법으로 박경리 문학의 대중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박경리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여성 정체성 탐구과정의 길을 연 작품들이다. 박경리는 범죄의 원인과 사건의 결말이 명쾌한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서사 구조와는 달리, 범죄 자체가 아니라 범죄의 과정에서 드러난 범인의 내면 의식과 사회적인 배경에 주목한다.”
(출처: 최경희 논문 ‘박경리 소설에 나타난 추리소설적 모티프의 의미와 양상연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발간 〈어문연구〉 38권 4호)
추리소설 창작 상에서 작품에서 예술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은 범행의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 1894~1965)는 범죄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일본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 감정의 범죄: 연애, 복수, 우월감, 열등감, 도피, 이타(利他)의 범죄 등
(2) 의욕의 범죄: 유산 상속, 탈세, 호신 방위, 비밀유지, 이상심리, 살인광 등
(3) 예술로서의 살인: 아버지로서의 콤플렉스 등
(4) 신념의 범죄: 종교, 사상, 정치 등
(5) 미신
인간의 욕망 가장 많이 다뤄온 장르
욕망
인간의 욕망에 관한 문제를 가장 많이 다룬 문학이 추리소설일 것이다. 욕망이 어떤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문학의 영원한 과제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범죄와 탐정, 그리고 추리의 결과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트릭은 어떤 예술도 추구할 수 없는 추리소설만의 매력이다.
추리소설이 ‘냉정한 문학’, ‘논리의 문학’, ‘과학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라는 평도 있지만, 추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논리성, 과학성, 그리고 인간탐구의 내면 등 복합적 예술성이다.
추리작가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을 5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6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1983년 한국추리작가협회를 창설하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 발전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 포장 등 수상. 50판까지 출판한 초베스트셀러 <악녀 두 번 살다>를 비롯, <신의 불꽃>,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 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추리소설 잘 쓰는 공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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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문학’은 성립할 수 있다!
- 장르 문화 속 인문 찾기 -
이상우
2022-04-21
추리소설은 인간의 가장 최악의 범죄인 살인 사건을 주제로 한 통속 소설이기 때문에 예술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추리소설도 엄격하게 말해 소설, 즉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이 갖춰야 할 예술성을 물론 지니고 있다. 살인 사건과 범인을 추적하는 머리 좋은 탐정, 그리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과 트릭으로 재미를 만들 뿐이라는 생각은 추리소설의 인간 탐구라는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해서... ...
추리소설이 흥미만 추구하는 오락문학이라고?
아서 코난 도일(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추리소설 마니아들은 무엇에 매혹되어 있을까? 물론 짜릿한 재미에 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은 흥미만을 추구하는 오락문학일까, 아니면 사람의 궁금증을 담보로 하는 게임문학일까? 혹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나쁜 범죄인 살인을 테마로 한 이야기일 뿐일까. 이렇게 추리소설에서 사랑, 고독, 소외, 우정, 불안 등 인문학적 요소와 순문학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추리소설이 가장 가치를 두고 하는 것은 물론 ‘재미’이다. 따라서 문학성이나 인문학적 가치가 중심은 아니다. 이 때문에 추리소설은 문학의 장르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추리소설도 소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상 문학임에 틀림없고 문학이 가지는 예술성과 인문학적 효능, 철학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몇 가지 분석의 틀이 있어야 한다.
추리소설의 형식적 가치, 추리소설의 윤리적 가치, 추리소설의 문학적 가치와 추리소설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초기 범인 등장, 단서 공유 등... 추리소설의 형식적 가치
문학에는 형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 형식성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르가 시조(時調)와 한시(漢詩)다.
특히 시조는 내용보다 형식이 절대적이다.
3.4.3.4(초장)
3.4.3.4(중장)
3.5.4.3(종장)
이 형식 중에 절대로 자수를 지켜야 하는 것은 종장일 것이다.
한시는 대표적인 것이 오언절구, 칠언절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복잡한 형식이 있지만 대표적인 형식을 들면 이 두 종류일 것이다.
한시는 반드시 운율(韻律)에 맞추어 지어야 한다. 운(韻)이라는 것이 종류가 많고 복잡하여 사전을 보고 글자를 찾아야 할 정도이다. 위 두 형식에서 두 연(聯) 이상의 끝 글자는 정해진 운(韻)을 써야 한다. 상당히 경직된 형식이다. 시조의 종장 5자를 지켜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추리소설은 글자 수나 운자(韻字)같은 것은 없지만 플로트(plot)라는 공식이 있다. 이 공식을 시조나 한시의 규칙처럼 지켜야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추리소설의 공식은 처음에 등장해 고전이 된 작품에서 시작되었지만 뒤에는 모든 추리소설이 이 공식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이 공식 때문에 추리 애호가가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종류는 크게 클래식(classic)과 하드보일드(hardboild)로 구분하지만 세분하면 더 많은 종류로 갈라진다.
추리소설 작법 공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로널드 녹스(Ronald Knox, 1888-1957, 영국 성공회 대주교)라는 작가가 만든 ‘추리소설 작법 10계’이다.
〈1〉 범인은 이야기의 초기 단계부터 등장해야 한다.
〈2〉 초자연적인 마력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3〉 비밀의 방이나 통로는 하나면 족하다.
〈4〉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독극물과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과학적인 장치 등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5〉 중국인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6〉 탐정이 우연히 죽을 고비를 넘긴다든가 근거 없는 직감이 적중했다는 등의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7〉 탐정 자신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
〈8〉 탐정이 단서를 발견했을 때는 이를 곧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9〉 탐정의 우둔한 친구, 즉 왓슨은 그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지능은 독자보다 조금 낮아야 한다.
〈10〉 쌍둥이 또는 쌍둥이라 할 만큼 닮은 사람을 등장시킬 때는 그 존재 이유를 독자에게 인식 시켜야 한다.
추리소설 작가이며 예술 평론가인 반 다인(Van Dine, 1888~1939)은 ‘추리소설 20’ 법칙을 내놓았다.
S. S. Van Dine의 〈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s〉 책 표지(이미지 출처: kobo)
“추리 소설에서 연애담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탐정은 범인을 재판정에 보내려는 것이지 예식장에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셜록 홈스는 이보다 훨씬 먼저 탄생한 탐정이지만 뒷날 이러한 법칙이 나올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 같다. 코난 도일은 제인 렉키라는 부인이 있었지만 작품에는 여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범인은 초기 단계에 등장해야 하고 단서는 독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공식은 대단히 지키기 어려운 규칙이다. 그러나 추리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반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복선이다. 시조에서 종장의 3.5.4.3을 지켜야 하는 것이나 한시의 끝 연에 운자를 꼭 넣어야 하는 것과 같은 규칙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요소가 다른 문학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추리소설의 독창성을 말해준다.
‘범죄는 꼭 소멸돼야’... 추리소설의 윤리적 측면
추리소설은 독재 국가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일본의 어느 평론가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직전 추리소설을 전부 불태웠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독재 국가에서는 추리소설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추리소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 연방 시절에는 추리소설이 없었으나 러시아로 체제가 바뀌자 추리소설 붐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라 마리니나(Alexandra Marinina, 1957∼)라는 여류 작가는 소련이 붕괴한 1990년을 계기로 추리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해 초대형 작가가 되었다. 〈도난당한 꿈〉은 1,8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북한에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없다. 중국에는 2015년에 찬호께이(陳浩基, 1975~)라는 추리작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홍콩 출신으로 대만 추리작가협회 공모전으로 데뷔했다.
왜일까?
추리소설은 감성의 문학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논리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지극히 논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원칙도 있다. 범죄 사회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권력을 동원해 체크 고문을 하는 등 비민주적인 수사를 하기 때문이다. 아예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있다.
나치 지도층은 추리소설이 국민을 논리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에 독재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으로 추리소설 말살을 기도했다.
추리소설은 귀족 문학이라고 했을 정도로 이론을 숭상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추리소설은 민주주의와 함께 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추리소설 규칙 중에는 범인은 반드시 잡힌다는 것이 있다. 범죄를 소멸시키는 것이 추리소설의 목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로운 플로트에 몰입하는 동안 범인필포(犯人必捕)의 정의 구현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 스미스의 〈탤런트 리플리〉 책 표지(좌)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클래식 추리소설의 명작 중에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예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출신의 추리작가 하이 스미스(Patricia Highsmith, 1921~1995)의 〈탤런트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에는 범인을 체포하는 장면이 없다. ‘탤런트 리플리’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배우 앨런 드롱이 주연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 개봉)로도 유명하다. 세계 3대 여류 추리작가로 꼽히는 프랑스의 카트린 아를레(Catherine Arley)의 〈지푸라기 여자〉도 이 종류에 속하는 명작이다.
프랑스 여류 추리소설 작가 카트린 아를레와 찍은 사진 왼쪽부터 필자, 아를레이, 노원, 김성종 작가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한국 추리소설로는 필자의 〈악녀 두 번 살다〉 (1987년 초판, 제3회 한국추리문학 대상)는 한국추리문학 사상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범인은 체포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몇 편의 작품이 범인이 체포되지는 않지만 누구라는 것은 밝히고 있다.
이상우의 〈악녀두번살다〉 책 표지(이미지 출처: YES24)
인간의 깊은 내면 탐구... 추리소설의 예술성
범죄
추리소설은 인간이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인 살인 사건을 다루는 통속 소설이기 때문에 예술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추리소설도 엄격하게 말해 소설, 즉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이 갖춰야 할 예술성을 당연히 지니고 있다.
살인 사건과 범인을 추적하는 머리 좋은 탐정, 그리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과 트릭으로 재미만 추구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리소설의 인간탐구라는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해서 나온 것이다.
예술성도 있고 재미도 있다면 오히려 상위의 문학이 아니겠는가.
작가 조르주 심농(좌)와 저서 〈누런 개〉의 책 표지(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교보문고)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Georges Simeon, 1903~1989)은 모든 작품에서 인간의 일생을 감성적 측면으로 해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추리소설을 가장 많이 쓴 다작 작가로 알려졌지만 모든 작품이 높은 예술성을 품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앙드레 지드, 서머셋 모음, 카뮈 같은 대가들도 “노벨상을 주어야 할 작가”라고 할 만큼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메그레 경감 시리즈는 범인을 체포하는 프랑스 경찰청 형사의 활약을 줄거리로 한 작품이지만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걸작으로 꼽히는 〈누런개〉(Le Chien jaune, 1931)는 한 인간의 기구한 인생을 재현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좌)와 모리무라 세이치(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fujinkoron)
한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파헤쳐 범죄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다거나, 현실 세계에 뛰어들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가들을 가리켜 ‘사회파 추리작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심리 소설을 발표하거나 사회문제를 파헤친 작가로는 일본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1909~1992)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 1933~)가 있다. 이 둘을 사회파 추리의 2대 산맥이라고 한다.
특히 모리무라 세이치의 〈증명 시리즈〉 중에 〈인간의 증명〉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모리무라 세이치의 〈인간의 증명〉 책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2차 세계 대전 후 미군이 일본에 진주했던 시절, 일본 여인은 점령군의 노리개가 된 경우가 많았다. 미군은 귀국하고 혼자 남게 된 여자들은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자라면서 더욱 비극적 환경에 처하게 된다. 사회 환경이 만든 이 불행은 개인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가진 모자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가족애를 다룬 명작으로 꼽힌다. 어느 순수 문학 작품 못지않게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국내에도 사회파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은 한국전쟁에 희생된 어느 여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필자의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는 군부 독재 시절 운동권 남녀가 처한 극한적 상황을 다룬 작품이다.
한국의 많은 순수문학 작가들이 추리소설 집필을 시도했다. 추리라는 명함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추리소설로밖에 볼 수 없는 소설도 많다.
일반 작가들이 쓴 소설 중에도 추리소설로 분류할 수 있거나, 평론가가 추리소설이라고 분류한 작품이 상당수다.
평론가나 추리작가의 눈에 분명히 추리소설을 쓴 작가로는 박경리, 전상국, 이문열, 유현종, 조해일, 정소성, 한승원, 문순태, 이병주, 선우휘, 박범신, 박양호 등이 있다.
박경리의 〈타인들〉(좌)과 전상국 〈아베의 가족〉(우) (이미지 출처: 알라딘, 교보문고)
특히 박경리의 〈타인들〉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6.25 때 실종된 가족의 행적을 추적하는 중편),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 〈불꽃〉(살인 의도의 실행), 정소성의 〈아테네 가는 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시체의 연유를 추적 수사하여 행적을 밝힌다) 등의 작품을 추리소설로 볼 수 있다.
특히 박경리의 여러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가을에 온 여인』, 『타인들』, 『겨울비』는 추리적 기법으로 박경리 문학의 대중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박경리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여성 정체성 탐구과정의 길을 연 작품들이다. 박경리는 범죄의 원인과 사건의 결말이 명쾌한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서사 구조와는 달리, 범죄 자체가 아니라 범죄의 과정에서 드러난 범인의 내면 의식과 사회적인 배경에 주목한다.”
(출처: 최경희 논문 ‘박경리 소설에 나타난 추리소설적 모티프의 의미와 양상연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발간 〈어문연구〉 38권 4호)
추리소설 창작 상에서 작품에서 예술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은 범행의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 1894~1965)는 범죄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일본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 감정의 범죄: 연애, 복수, 우월감, 열등감, 도피, 이타(利他)의 범죄 등
(2) 의욕의 범죄: 유산 상속, 탈세, 호신 방위, 비밀유지, 이상심리, 살인광 등
(3) 예술로서의 살인: 아버지로서의 콤플렉스 등
(4) 신념의 범죄: 종교, 사상, 정치 등
(5) 미신
인간의 욕망 가장 많이 다뤄온 장르
욕망
인간의 욕망에 관한 문제를 가장 많이 다룬 문학이 추리소설일 것이다. 욕망이 어떤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문학의 영원한 과제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범죄와 탐정, 그리고 추리의 결과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트릭은 어떤 예술도 추구할 수 없는 추리소설만의 매력이다.
추리소설이 ‘냉정한 문학’, ‘논리의 문학’, ‘과학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라는 평도 있지만, 추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논리성, 과학성, 그리고 인간탐구의 내면 등 복합적 예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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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작가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을 5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6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1983년 한국추리작가협회를 창설하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 발전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 포장 등 수상. 50판까지 출판한 초베스트셀러 <악녀 두 번 살다>를 비롯, <신의 불꽃>,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 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추리소설 잘 쓰는 공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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