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17주 동안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라웠던 것은, 다른 어려운 주제를 모두 즐겁게 해냈지만 오직 ‘평등’이라는 주제만큼은 학생들과 교감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가운데 중요한 두 획을 차지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가운데 평등에 낯설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
새해를 맞이하여 이런 구석 글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들의 가정에 만복이 깃들길 바랍니다. 만드는 분들도 고맙지만, 읽어 주는 분들은 더욱 고맙습니다. 이런 글은 어려워지면 안 되기에 일상적인 필치로 여러분과 만나고자 합니다.
필치(筆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니 ‘필세의 운치’라고 나오는데 그 말이 더 어렵네요. 힘찬 필치, 예리한 필치라고 할 때의 필치네요. 그런 필치를 지닌 분이 물음을 건네 주신 김선희 교수님이신데, 그분께 물음을 건네받으니 좋네요. 김 교수님은 동서양의 만남을 ‘18세기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중세 기독교와 유교의 접점’을 중심으로 연구하신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실질적인 비교 철학자입니다. 교양서 가운데 『동양철학스케치』라는 잘 읽히는 책도 내셨는데, 나도 스케치하듯 써 내려갈 작정입니다.
죽음과도 바꾼 사상, ‘문제 현실’주목한 철학자들
현실을 중시했던 위대한 사상가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사상의 중요성은 다들 아십니다. ‘머릿속에 똥만 들었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 없거나 지저분한 생각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꾸로, 사상을 갖고 있지 않음은 머릿속에 똥만 넣고 다니는 것과 같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은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제대로, 어렵지만 끝까지, 묻고 또 묻는 작업을 철학이라는 학문이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머릿속에 똥만 든 철학 교수도 많거든요. 특히 남모르는 소리를 지껄이고,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고, 말할 때 괜히 외국어 쓰는 철학자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철학이 현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택도 없는’, 어림없는 말입니다. 정말로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공자는 ‘예악(禮樂)의 붕괴’라고 일컬어지는 주나라 질서의 훼손에 발끈했고, 소크라테스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신물이 났습니다. 왕양명은 유학의 이론이 너저분해지는 것에 싫증을 냈고, 칸트는 경험을 빼놓고 이성만으로 진리를 떠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공자는 아침에 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면서 경전에 매달리고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감옥에서 꺼내 준다는데도 도망가지도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죽음과도 바꾸는 것이 생각이고, 철학이고, 사상이고, 주의입니다.
그런데도 시류는 철학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변명은 하나같이 똑같습니다. ‘먹고살기 바빠서’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바꾸노라면 ‘머리에 똥만 싸놓기 바빠서’가 됩니다. ‘방랑객 공자’,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알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정말로 아쉬운 일입니다. 모두가 철학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철학을 해줘야 사람 꼴도, 나라 꼴도 바로 선다는 말입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쓸데없다고 욕보이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물론 철학자들이 밥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철학자가 관심 갖는 문제가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현실 문제가 아닌 ‘문제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히딩크가 강조한 건 ‘정신력’이 아닌 ‘사고력’
2002 월드컵 한국팀 경기 모습(좌)과 히딩크 감독(우) (이미지 출처: 2002 FIFA World Cup Official Website, Guus Hiddink Foundation)
벌써 스무 해가 지나가고 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봅시다. 그는 ‘멘탈리티(mentality)’를 강조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번역이 잘못되는 바람에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한 점이 나는 아쉽습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을 통해 자신감 있게 세계의 무대에 섰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외국인인데도 히딩크는 갑자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지요. 박항서 감독이 월남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것과 같지요. 히딩크가 선수들에게 내세운 멘탈리티는 과연 무엇일까요?
언론에서는 그것을 모두 ‘정신력’으로 번역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정신력이라고 하면 6, 70년대 축구에서 후반전 끝날 즈음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났을 때 매번 하던 이야기였거든요. 중계자는 경기 종료 시간을 앞두고 늘 외쳤지요. ‘우리 선수들,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 선수들, 정신력으로 버텨야 합니다!’ 히딩크가 이것을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히딩크가 말한 것은 ‘사고력’이었습니다. 그저 뛰지만 말고 운동장을 머릿속에 띄워 놓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공은 어디로 보내야 할지 생각 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현대 축구의 ‘쓰리 백’ 같은 것처럼 전술과 전략을 떠올리며 뛰어다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공만 쫓아 몰려다니지 말고! 유럽 축구를 보십시오.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탁탁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한국 축구가 히딩크 이전에 몰랐던 것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을 ‘정신력’으로 번역했으니, 아이고, 6, 70년대로 돌아가고 만 것이지요. 조끼 딸린 양복의 구성처럼 ‘쓰리 피스’ 작전도 필요했지요. 공을 몰고 달려가다, 빈 곳이 있다 싶으면 반대쪽으로 깊게 넣어 주고, 그러면 다시 가운데의 공격수에게 차 주는 식의 축구 말입니다. 이렇게 세트가 되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머릿속에 늘 그리고 있어야 하지요. 혼자 하는 축구가 아니니 말입니다. 바둑이 수가 많다지만, 운동장은 줄조차 없으니 수가 더 많아지지요.
축구에서조차 그러니, 사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력이고 판단력이고 지성입니다. 앗! 박 ‘지성’. 나는 개인적으로 운동 선수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턱대고 뛰지만 말고 생각을 해, 생각을! 철학이 바로 이런 작업입니다.
물음을 보시죠. 자율 주행이나 우주 여행 같은 과학적 진보를 이루어낸 인류가 어떤 지식도 기술도 없는 바이러스 앞에 맥 못 추고, 국경을 넘나들며 마구 돌아다니는 그놈은 우리에게 연대와 공존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에서, 동서양의 철학은 어떤 대화로 어떤 소통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과학기술이나 보편주의라는 명분이 동아시아가 오랫동안 쌓아온 지적 통찰을 덮어 버린다면, 우리는 스스로 돌아볼 거울도 밖을 내다볼 창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거울과 창 없이 어떻게 삽니까. 정녕 여러분은 스스로 거울을 깨고, 창을 닫아 버릴 작정이십니까? 설사 어떤 방향과 대안을 제시할 수 없더라도 간신히 마음 한구석에 매달아 놓은 쪽박조차 부수어 버리시겠나이까?
고등학생들 ‘평등’외면, 치우친 사고에 충격
고등학교에 17주 동안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다는데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라웠던 것은, 다른 어려운 주제를 모두 즐겁게 해냈지만 오직 ‘평등’이라는 주제만큼은 학생들과 교감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가운데 중요한 두 획을 차지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가운데 평등에 낯설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이었습니다.
듣자 하니, 내가 열심히 해서 어떤 대학을 가든, 그리하여 그 대학을 배경으로 권력과 돈을 얻든, 다 내 능력이자 노력이지, 웬 평등을 말하냐는 것이었습니다. 큰일입니다. 큰일났습니다!
형식적으로만 말해도 자유만을 말하고 평등을 빼놓는다는 것은 시민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인데도, 학생들은 손쉽게 평등을 자유라는 개념으로 대치해 버리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모순되는 개념이기는 합니다. 내가 맘껏 자유롭다가는 남의 평등을 짓밟기 쉽거든요. 거꾸로 평등만 내세우다가는 자유를 빼앗기거든요. 그럼에도 현대의 민주주의에서 그 둘을 이념의 쌍으로 한 데 묶어 놓는 것은 그때그때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사고력을 믿은 결과일 겁니다.
내가 젊은 학생들을 설득한 최후의 언어는 정말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몇 년 살아요? 100년 넘나요? 여러분들, 밥 몇 공기 먹어요? 다섯 공기 이상 먹나요? 여러분들, 세상에 나오고 싶어 나오고,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 있나요?” 불교식 생로병사에 기댄 이 소박한 논법에 학생들은 그제야 동의를 표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볼게요. 평등의 가치를 못 배우고 이 사회에 나오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고 주류일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돌아갈 것 같습니까? 무섭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하고, 철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서양의 생각 차이, 비교 철학의 중요성
바나나, 원숭이, 강아지
‘바나나와 원숭이와 강아지’의 그림을 놓고 둘씩 묶어 보라면, 서양 사람들은 같은 포유류인 원숭이와 강아지를 한데 묶는답니다. 그런데 동양 사람은 많은 경우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한데 묶는답니다. 심리학자의 실험 결과입니다.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훨씬 관계 개념이 발달했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어떤 배경을 보거나 안 보는 것에서도 동양인과 서양인은 달랐습니다. 사람을 환경 속에서 보는 쪽이 동양인이라면, 사람을 환경과 독립시켜 보는 쪽이 서양인입니다. 동양인은 배경을 잘 기억하는데, 서양인은 앞의 사람만을 주로 기억했습니다.
적어도 이천 년 동안 동서양은 다르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만나 이야기하며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 서로에게 배울 것은 없는지, 서로 섞어 볼 것은 없는지 따져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는 당혹해 했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공동체주의가 유교적이라서 잘 통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반발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샌델은 이 경험을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이론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인 서구 문화에서는 신선한 것이었지만, 전통주의와 가족주의에 익숙한 한국의 문화에서는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고요. 실제로도 샌델과 같은 공동체주의자인 알래스데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1929~, 『덕의 상실』 저자) 같은 윤리학자는 주자의 제자인 진순의 『북계자의(北溪字義)』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교 철학을 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교 철학을 무시하는 태도는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비교 철학은 두 쪽을 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다른 맥락을 한 데서 말하다 보니 거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서구화되어 있습니다. 언어와 개념이 곧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오히려 우리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양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이 바로 한국의 철학입니다.
한국 철학하면 퇴계, 율곡의 심성론과 이후의 복잡다단한 논쟁만을 떠올립니다. 그것이 젊은 학생들을 질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속의 한국 철학이지, 현실 속의 한국 철학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많은 한국 철학 전공자는 한국사상사 전공이지 한국의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서양 철학 전공자에게도, 중국 철학 전공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결국 철학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도, 철학적 전통 내부에서도, 철학적 전통의 수용과 배반의 관계에서도, 철학적 오해와 창조의 과정에서도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도, ‘비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아니, 비교를 하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는 겁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겁내고, 남을 겁내고, 우리를 겁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겁 없이 덤벼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최근에 나는 노자와 루소를 비교하는 책을 연거푸 두 권을 냈습니다. 루소는 서양 사상사에서 완전한 사생아이고, 노자는 유가들에 이단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만날까요? 나는 성선설이라는 끈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자식 다섯을 모두 고아원으로 보낸 루소가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인 까닭은 바로 ‘애들은 내버려 두어도 잘 큰다’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노자가 말하는 ‘내버려 둬’이고 ‘스스로 그러함’ 아닙니까? 영어 좀 쓰겠습니다. ‘Let it be’, 아니, ‘Let it go!’
나도 철학의 가능성과 힘을 믿습니다. 아무리 낭만적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서구 전통에서 낭만은 질풍노도 같은 감정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조에도 쓰인다는 것을.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같은 시인만이 낭만파가 아니라, 산업 혁명 당시 몸집이 작아 탄광과 굴뚝에 들여보내던 아이들을 보며 분노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같은 시인도 낭만파인 것입니다.
블레이크를 누가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도자기와 밥상을 사랑한 문필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였습니다. 그리고 그 야나기를 극복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인천 출신의 개성 박물관장 고유섭(1905~1944)입니다. 야나기는 가녀린 그릇만 보았지만 고유섭은 하늘로 날려는 힘찬 탑도 보았거든요.
어제 나는 야나기와 고유섭을 비교하는 책을 탈고했습니다. 나는 1930년대 활동하던 고유섭의 한국미에 대한 평어(評語)가 우리말로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신이 났습니다. ‘군짓, 무딤, 빡빡함, 헐거움’이 없는 ‘멋 부리지 않은 멋, 구수한 맛, 고소한 맛, 맵자함(맵시)’을 한국 미술의 특징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어른 같은 아이’, ‘구수한 큰 맛’도 그의 말입니다.
고유섭이 왜 그리 말했겠습니까? 그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우리의 힘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예술이 좌우대칭에 매달릴 때 한국 예술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가락에 맞춰 춤을 춥니다.
만나야 하는 까닭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통에 대한 폭넓은 관심입니다. 서양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동양 철학을 모릅니다. 동양 철학을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양 철학을 공부해야 하지만요. 일단 우리 것과 우리 사람,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상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넘쳐나는 서양 책의 번역만큼 필요한 것이 우리 것에 대한 소개입니다. 위에서 말한 고유섭과 같은 인물에 대한 탐구가 절실합니다.
신년벽두에 꿀은 아니라도 밥이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은 좋든 싫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비교 철학을 열심히 하는 것이 동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만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구수하게 큰 맛 나는 된장 많이 드세요. 올해는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닌 어른 같은 아이로 살아보세요.
충북대 철학과 교수
국립대만대 박사. 한국철학회 회장.
워싱턴주립대와 대만삼군대에서 강의했고 대동철학회 회장을 세 차례 연임했으며 여러 철학회에서 연구위원장 및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철학상담학회, 한국공자학회, 한국서예학회, 율곡학회 등의 이사, 그리고 한국철학회 부회장으로 전국철학자연합대회, 남북철학자대회, 인문진흥위원장, 도덕 및 융합교육위원장 일을 했다.
저서로는 동전의 양면 같은 『노자와 루소, 여든하나의 방』과 『노자와 루소, 그 잔상들』이 있고, 쌍둥이 책인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및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어머니의 철학으로 읽는 『노자 도덕경』, 불교에서 윤회를 버리자는 『윤회와 반윤회』, 학계와 교육에 대한 평론집인 『철학으로 비판하다』가 있고, 편서로는 노장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모은 『위진현학』이 있다. 서예 이론의 결정판인 『광예주쌍집』(상, 하)을 해제와 도판을 넣어 번역했고, 중국어로는 대만 학생서국에서 『장자기화론(莊子氣化論)』(중국철학총간34)을 냈다. 다수의 저서가 학술원과 문화부, 대학출판인협회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으며, 공저를 포함하여 30여 권의 책과 1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국내외에서 60회 이상 학술발표를 했고,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등단한 미술평론가다.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 철학 분야 심사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최근에는 세계인물철학사 시리즈로 『캉유웨이, 야나기, 고유섭』을 정리하고 있으며, 국가온라인 공개 강좌인 KMOOC에서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세계종교 기행’(무료강의, English caption)을 진행하고 있다. 칼럼으로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철학자의 가벼움’ 등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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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과 조화...비교 철학은 동서양의 전통을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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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2022-01-12
고등학교에 17주 동안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라웠던 것은, 다른 어려운 주제를 모두 즐겁게 해냈지만 오직 ‘평등’이라는 주제만큼은 학생들과 교감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가운데 중요한 두 획을 차지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가운데 평등에 낯설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
새해를 맞이하여 이런 구석 글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들의 가정에 만복이 깃들길 바랍니다. 만드는 분들도 고맙지만, 읽어 주는 분들은 더욱 고맙습니다. 이런 글은 어려워지면 안 되기에 일상적인 필치로 여러분과 만나고자 합니다.
필치(筆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니 ‘필세의 운치’라고 나오는데 그 말이 더 어렵네요. 힘찬 필치, 예리한 필치라고 할 때의 필치네요. 그런 필치를 지닌 분이 물음을 건네 주신 김선희 교수님이신데, 그분께 물음을 건네받으니 좋네요. 김 교수님은 동서양의 만남을 ‘18세기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중세 기독교와 유교의 접점’을 중심으로 연구하신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실질적인 비교 철학자입니다. 교양서 가운데 『동양철학스케치』라는 잘 읽히는 책도 내셨는데, 나도 스케치하듯 써 내려갈 작정입니다.
죽음과도 바꾼 사상, ‘문제 현실’주목한 철학자들
현실을 중시했던 위대한 사상가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사상의 중요성은 다들 아십니다. ‘머릿속에 똥만 들었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 없거나 지저분한 생각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꾸로, 사상을 갖고 있지 않음은 머릿속에 똥만 넣고 다니는 것과 같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은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제대로, 어렵지만 끝까지, 묻고 또 묻는 작업을 철학이라는 학문이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머릿속에 똥만 든 철학 교수도 많거든요. 특히 남모르는 소리를 지껄이고,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고, 말할 때 괜히 외국어 쓰는 철학자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철학이 현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택도 없는’, 어림없는 말입니다. 정말로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공자는 ‘예악(禮樂)의 붕괴’라고 일컬어지는 주나라 질서의 훼손에 발끈했고, 소크라테스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신물이 났습니다. 왕양명은 유학의 이론이 너저분해지는 것에 싫증을 냈고, 칸트는 경험을 빼놓고 이성만으로 진리를 떠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공자는 아침에 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면서 경전에 매달리고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감옥에서 꺼내 준다는데도 도망가지도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죽음과도 바꾸는 것이 생각이고, 철학이고, 사상이고, 주의입니다.
그런데도 시류는 철학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변명은 하나같이 똑같습니다. ‘먹고살기 바빠서’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바꾸노라면 ‘머리에 똥만 싸놓기 바빠서’가 됩니다. ‘방랑객 공자’,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알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정말로 아쉬운 일입니다. 모두가 철학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철학을 해줘야 사람 꼴도, 나라 꼴도 바로 선다는 말입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쓸데없다고 욕보이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물론 철학자들이 밥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철학자가 관심 갖는 문제가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현실 문제가 아닌 ‘문제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히딩크가 강조한 건 ‘정신력’이 아닌 ‘사고력’
2002 월드컵 한국팀 경기 모습(좌)과 히딩크 감독(우) (이미지 출처: 2002 FIFA World Cup Official Website, Guus Hiddink Foundation)
벌써 스무 해가 지나가고 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봅시다. 그는 ‘멘탈리티(mentality)’를 강조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번역이 잘못되는 바람에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한 점이 나는 아쉽습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을 통해 자신감 있게 세계의 무대에 섰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외국인인데도 히딩크는 갑자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지요. 박항서 감독이 월남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것과 같지요. 히딩크가 선수들에게 내세운 멘탈리티는 과연 무엇일까요?
언론에서는 그것을 모두 ‘정신력’으로 번역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정신력이라고 하면 6, 70년대 축구에서 후반전 끝날 즈음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났을 때 매번 하던 이야기였거든요. 중계자는 경기 종료 시간을 앞두고 늘 외쳤지요. ‘우리 선수들,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 선수들, 정신력으로 버텨야 합니다!’ 히딩크가 이것을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히딩크가 말한 것은 ‘사고력’이었습니다. 그저 뛰지만 말고 운동장을 머릿속에 띄워 놓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공은 어디로 보내야 할지 생각 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현대 축구의 ‘쓰리 백’ 같은 것처럼 전술과 전략을 떠올리며 뛰어다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공만 쫓아 몰려다니지 말고! 유럽 축구를 보십시오.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탁탁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한국 축구가 히딩크 이전에 몰랐던 것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을 ‘정신력’으로 번역했으니, 아이고, 6, 70년대로 돌아가고 만 것이지요. 조끼 딸린 양복의 구성처럼 ‘쓰리 피스’ 작전도 필요했지요. 공을 몰고 달려가다, 빈 곳이 있다 싶으면 반대쪽으로 깊게 넣어 주고, 그러면 다시 가운데의 공격수에게 차 주는 식의 축구 말입니다. 이렇게 세트가 되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머릿속에 늘 그리고 있어야 하지요. 혼자 하는 축구가 아니니 말입니다. 바둑이 수가 많다지만, 운동장은 줄조차 없으니 수가 더 많아지지요.
축구에서조차 그러니, 사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력이고 판단력이고 지성입니다. 앗! 박 ‘지성’. 나는 개인적으로 운동 선수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턱대고 뛰지만 말고 생각을 해, 생각을! 철학이 바로 이런 작업입니다.
물음을 보시죠. 자율 주행이나 우주 여행 같은 과학적 진보를 이루어낸 인류가 어떤 지식도 기술도 없는 바이러스 앞에 맥 못 추고, 국경을 넘나들며 마구 돌아다니는 그놈은 우리에게 연대와 공존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에서, 동서양의 철학은 어떤 대화로 어떤 소통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과학기술이나 보편주의라는 명분이 동아시아가 오랫동안 쌓아온 지적 통찰을 덮어 버린다면, 우리는 스스로 돌아볼 거울도 밖을 내다볼 창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거울과 창 없이 어떻게 삽니까. 정녕 여러분은 스스로 거울을 깨고, 창을 닫아 버릴 작정이십니까? 설사 어떤 방향과 대안을 제시할 수 없더라도 간신히 마음 한구석에 매달아 놓은 쪽박조차 부수어 버리시겠나이까?
고등학생들 ‘평등’외면, 치우친 사고에 충격
고등학교에 17주 동안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다는데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라웠던 것은, 다른 어려운 주제를 모두 즐겁게 해냈지만 오직 ‘평등’이라는 주제만큼은 학생들과 교감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가운데 중요한 두 획을 차지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가운데 평등에 낯설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이었습니다.
듣자 하니, 내가 열심히 해서 어떤 대학을 가든, 그리하여 그 대학을 배경으로 권력과 돈을 얻든, 다 내 능력이자 노력이지, 웬 평등을 말하냐는 것이었습니다. 큰일입니다. 큰일났습니다!
형식적으로만 말해도 자유만을 말하고 평등을 빼놓는다는 것은 시민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인데도, 학생들은 손쉽게 평등을 자유라는 개념으로 대치해 버리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모순되는 개념이기는 합니다. 내가 맘껏 자유롭다가는 남의 평등을 짓밟기 쉽거든요. 거꾸로 평등만 내세우다가는 자유를 빼앗기거든요. 그럼에도 현대의 민주주의에서 그 둘을 이념의 쌍으로 한 데 묶어 놓는 것은 그때그때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사고력을 믿은 결과일 겁니다.
내가 젊은 학생들을 설득한 최후의 언어는 정말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몇 년 살아요? 100년 넘나요? 여러분들, 밥 몇 공기 먹어요? 다섯 공기 이상 먹나요? 여러분들, 세상에 나오고 싶어 나오고,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 있나요?” 불교식 생로병사에 기댄 이 소박한 논법에 학생들은 그제야 동의를 표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볼게요. 평등의 가치를 못 배우고 이 사회에 나오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고 주류일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돌아갈 것 같습니까? 무섭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하고, 철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서양의 생각 차이, 비교 철학의 중요성
바나나, 원숭이, 강아지
‘바나나와 원숭이와 강아지’의 그림을 놓고 둘씩 묶어 보라면, 서양 사람들은 같은 포유류인 원숭이와 강아지를 한데 묶는답니다. 그런데 동양 사람은 많은 경우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한데 묶는답니다. 심리학자의 실험 결과입니다.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훨씬 관계 개념이 발달했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어떤 배경을 보거나 안 보는 것에서도 동양인과 서양인은 달랐습니다. 사람을 환경 속에서 보는 쪽이 동양인이라면, 사람을 환경과 독립시켜 보는 쪽이 서양인입니다. 동양인은 배경을 잘 기억하는데, 서양인은 앞의 사람만을 주로 기억했습니다.
적어도 이천 년 동안 동서양은 다르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만나 이야기하며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 서로에게 배울 것은 없는지, 서로 섞어 볼 것은 없는지 따져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는 당혹해 했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공동체주의가 유교적이라서 잘 통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반발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샌델은 이 경험을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이론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인 서구 문화에서는 신선한 것이었지만, 전통주의와 가족주의에 익숙한 한국의 문화에서는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고요. 실제로도 샌델과 같은 공동체주의자인 알래스데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1929~, 『덕의 상실』 저자) 같은 윤리학자는 주자의 제자인 진순의 『북계자의(北溪字義)』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교 철학을 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교 철학을 무시하는 태도는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비교 철학은 두 쪽을 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다른 맥락을 한 데서 말하다 보니 거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서구화되어 있습니다. 언어와 개념이 곧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오히려 우리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양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이 바로 한국의 철학입니다.
한국 철학하면 퇴계, 율곡의 심성론과 이후의 복잡다단한 논쟁만을 떠올립니다. 그것이 젊은 학생들을 질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속의 한국 철학이지, 현실 속의 한국 철학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많은 한국 철학 전공자는 한국사상사 전공이지 한국의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서양 철학 전공자에게도, 중국 철학 전공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결국 철학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도, 철학적 전통 내부에서도, 철학적 전통의 수용과 배반의 관계에서도, 철학적 오해와 창조의 과정에서도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도, ‘비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아니, 비교를 하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는 겁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겁내고, 남을 겁내고, 우리를 겁내는 것입니다.
노자와 루소, 블레이크와 야나기 무네요시 그리고 고유섭
왼쪽부터 책 『노자와 루소』, 블레이크,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위키백과, 경기일보)
여기서 내가 겁 없이 덤벼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최근에 나는 노자와 루소를 비교하는 책을 연거푸 두 권을 냈습니다. 루소는 서양 사상사에서 완전한 사생아이고, 노자는 유가들에 이단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만날까요? 나는 성선설이라는 끈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자식 다섯을 모두 고아원으로 보낸 루소가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인 까닭은 바로 ‘애들은 내버려 두어도 잘 큰다’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노자가 말하는 ‘내버려 둬’이고 ‘스스로 그러함’ 아닙니까? 영어 좀 쓰겠습니다. ‘Let it be’, 아니, ‘Let it go!’
나도 철학의 가능성과 힘을 믿습니다. 아무리 낭만적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서구 전통에서 낭만은 질풍노도 같은 감정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조에도 쓰인다는 것을.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같은 시인만이 낭만파가 아니라, 산업 혁명 당시 몸집이 작아 탄광과 굴뚝에 들여보내던 아이들을 보며 분노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같은 시인도 낭만파인 것입니다.
블레이크를 누가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도자기와 밥상을 사랑한 문필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였습니다. 그리고 그 야나기를 극복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인천 출신의 개성 박물관장 고유섭(1905~1944)입니다. 야나기는 가녀린 그릇만 보았지만 고유섭은 하늘로 날려는 힘찬 탑도 보았거든요.
어제 나는 야나기와 고유섭을 비교하는 책을 탈고했습니다. 나는 1930년대 활동하던 고유섭의 한국미에 대한 평어(評語)가 우리말로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신이 났습니다. ‘군짓, 무딤, 빡빡함, 헐거움’이 없는 ‘멋 부리지 않은 멋, 구수한 맛, 고소한 맛, 맵자함(맵시)’을 한국 미술의 특징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어른 같은 아이’, ‘구수한 큰 맛’도 그의 말입니다.
고유섭이 왜 그리 말했겠습니까? 그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우리의 힘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예술이 좌우대칭에 매달릴 때 한국 예술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가락에 맞춰 춤을 춥니다.
만나야 하는 까닭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통에 대한 폭넓은 관심입니다. 서양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동양 철학을 모릅니다. 동양 철학을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양 철학을 공부해야 하지만요. 일단 우리 것과 우리 사람,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상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넘쳐나는 서양 책의 번역만큼 필요한 것이 우리 것에 대한 소개입니다. 위에서 말한 고유섭과 같은 인물에 대한 탐구가 절실합니다.
신년벽두에 꿀은 아니라도 밥이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은 좋든 싫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비교 철학을 열심히 하는 것이 동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만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구수하게 큰 맛 나는 된장 많이 드세요. 올해는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닌 어른 같은 아이로 살아보세요.
1월 [이달의 답변] 균형과 조화...비교 철학은 동서양의 전통을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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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 철학과 교수
국립대만대 박사. 한국철학회 회장. 워싱턴주립대와 대만삼군대에서 강의했고 대동철학회 회장을 세 차례 연임했으며 여러 철학회에서 연구위원장 및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철학상담학회, 한국공자학회, 한국서예학회, 율곡학회 등의 이사, 그리고 한국철학회 부회장으로 전국철학자연합대회, 남북철학자대회, 인문진흥위원장, 도덕 및 융합교육위원장 일을 했다. 저서로는 동전의 양면 같은 『노자와 루소, 여든하나의 방』과 『노자와 루소, 그 잔상들』이 있고, 쌍둥이 책인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및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어머니의 철학으로 읽는 『노자 도덕경』, 불교에서 윤회를 버리자는 『윤회와 반윤회』, 학계와 교육에 대한 평론집인 『철학으로 비판하다』가 있고, 편서로는 노장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모은 『위진현학』이 있다. 서예 이론의 결정판인 『광예주쌍집』(상, 하)을 해제와 도판을 넣어 번역했고, 중국어로는 대만 학생서국에서 『장자기화론(莊子氣化論)』(중국철학총간34)을 냈다. 다수의 저서가 학술원과 문화부, 대학출판인협회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으며, 공저를 포함하여 30여 권의 책과 1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국내외에서 60회 이상 학술발표를 했고,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등단한 미술평론가다.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 철학 분야 심사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최근에는 세계인물철학사 시리즈로 『캉유웨이, 야나기, 고유섭』을 정리하고 있으며, 국가온라인 공개 강좌인 KMOOC에서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세계종교 기행’(무료강의, English caption)을 진행하고 있다. 칼럼으로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철학자의 가벼움’ 등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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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어떻게 만나야 할까?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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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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