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친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왔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공정과 정의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팀플’이라고 합니다. 팀으로 같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임승차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팀플은 인생이고 팀플은 운명이라고……
Q. 계속 흔들리는 공정의 가치… 방향을 잡기 힘들어요
고민
요즘에는 무엇보다 공정의 가치가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취업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고 물가와 집값은 우리 같은 청년들이 오롯이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재력과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주위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공정의 가치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고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A. 공정 뒤의 숨은 그림을 찾아보세요: 경쟁, 능력주의 그리고 친애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느꼈을 좌절감은 요즘 대다수 청년들이 가져 봤을 감정일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강남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한 또래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늘 밀린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가슴 졸이며 수능 시험 점수를 기다리고 나름 낮춰 지원한 학과에서도 줄줄이 낙방하여 재수하고 겨우 대학에 들어간 자신의 입장에서는, 일부 정치인들의 자녀가 부모님 도움으로 각종 화려한 스펙으로 장착한 후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학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모가 법조계, 정치계에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억대 상여금을 받고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계와 법조계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정적 혐오를 태우며 분노를 유발시키는 불의는 더욱 교묘하게 우리 사회를 물들여 나갈 수도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나서 그 불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꼼꼼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원전 1세기 노예 출신의 로마 시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Publilius Syru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Veterem iniuriam ferendo invitamus novam.
우리가 오래된 불의를 참는다면 새로운 불의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공정한 세상을 투표 몇 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우리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공정한 세상,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우리 같은 국민은 몇 년에 한 번씩 행사하는 투표권으로 잘못된 권력을 심판만 하면 정의로운 민주사회가 구현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정치하는 인간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면서 투표장에 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선거 몇 번으로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꽃이 피기 위해 뿌리부터 줄기를 거쳐 이파리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있어야 하는지 실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같이 만들어 가는 풀뿌리 민주주의, 다양한 의견들을 내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심의 민주주의의 과정, 각종 시민 단체들과 언론의 활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여론을 만들어 가는 노력. 이 모든 것들이 진정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기초적인 활동입니다. 선거는 마지막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없는 선거는 무력할 뿐 아니라 이용당할 소지가 많은 위험한 절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거로 합법적 집권 후 안 물러나는 독재자들
히틀러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습니다. 히틀러도 ‘민주적인 선거’의 과정을 통해 집권했고 독일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인종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전두환 씨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습니다. 12.12 쿠데타와 5.18 학살을 통해 언론과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그러한 반란을 정당화한 것이 당시 실정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대외적으로 미화되며 선전되는 데 이용된 선거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 집권한 제5공화국의 표어가 ‘정의 사회 구현’이었다는 점은, 끝까지 사죄하지 않고 사라진 전 씨의 기억과 함께 아직도 저를 분노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기억입니다.
독재자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쉬이 물러나려 하지 않습니다. 선거를 통해 물러나는 독재자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독재자들의 특성입니다. 1936년 스페인에서 쿠데타와 내전을 일으켜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40년 가까이 독재를 한 프랑코와 2021년 초 아웅산 수치의 선거 압승 다음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 모두 민주적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폭거였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2차 대전 이후 자민당 일당 체제가 무너진 적은 거의 없었고,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을 해도 서민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빈부의 격차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는 이렇게 쉽게 축복처럼 한꺼번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지역, 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하나씩 바꿔 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공정이라는 말에 숨은 독소...‘경쟁 중독’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공정이라는 말에는 잘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추상 명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정한 ~’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용사로 쓰일 때가 많은 거죠. 그래서 꾸며 주는 명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쟁입니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이 이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의 뜻입니다.
“수시 전형은 공정하지 않으니 수능 시험으로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공정은 수능 시험이라는 ‘공정한 경쟁’ 과정을 의미합니다. 요즘에는 마치 경쟁을 하지 않으면 공정이 확보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때가 많습니다. 대학 성적도 상대 평가로 줄을 세워 산출해야 공정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쟁 중독은 오래된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것을 경쟁으로 해결하고 그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신자유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강화된 현상입니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게임에서 등수와 레벨, 진출자와 탈락자를 정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의 디폴트 상태가 경쟁의 문화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능력은 순수한 노력의 결과?’...능력주의의 환상!!
우리의 공정 개념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숨은 그림은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뽑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처럼 보입니다. 능력주의는 공정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서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능력(merit)이라는 말은 우리의 노력을 측정한 결과가 아닙니다. 사실 노력만을 순수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여전히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가 한 사람이 어떤 직장을 다닐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어느 대학을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학생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재력으로 대표되는 집안의 교육 환경이 수능 성적과 내신 성적에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어떤 사회도 능력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대우한 곳은 없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점을 냉철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좌)와 마이클 영(Michael Young)(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 미국 출신의 정치철학자, 하버드대 교수)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에 따라 선발해야 한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그 능력이 없는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집안에 태어났는가’와 같이 운이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능력을 마치 공정성의 유일한 기준인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샌델의 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 1969~, 미국 예일대 교수)는 『엘리트 세습』이라는 책에서 불평등한 교육 기회를 통해 세습되는 부가 지금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수십 년 전에 ‘능력주의’라는 말을 처음 만든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15~2002,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도 『능력주의』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점으로 유리한 기회가 세습되어 계층 이동성이 차단되고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능력’이냐 하는 점이 핵심적입니다. 진정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능력(merit)이 아니라 공적(desert)입니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좌우하는 능력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능태이지만, 공적은 이미 스스로 경력을 통해 증명한 현실태입니다. 대학 졸업장이 평생 직업을 한꺼번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쌓아가는 경력이 조금씩 직업 생활을 변화시키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입니다.
진화생물학의 대답 “인류 발전 원동력은 공감”
경쟁과 능력주의 외에도 남은 한 가지 문제점은 공정, 정의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현생 인류를 타 유인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프란스 데 발(Frans de Waal, 1948~, 네덜란드 출신 동물행동학자. 에모리대 심리학과 교수)이나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 1950~, 미국 출신의 영장류학자.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명예 소장)는 현생 인류가 생존하고 성공적으로 문화를 이루어냈던 것은 같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도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덕의 두 기둥으로 공감과 정의감을 제시했습니다. 인류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분배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 유인원들까지도 공유하는 더욱 근원적인 능력은 공감입니다. 이 사실은 정의나 공정보다 공감이 인류 사회를 더 오랫동안 지탱해 왔던 핵심 가치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경쟁보다는 뒤처진 구성원의 상처를 보듬고 같이 살려고 하는 태도가 우리 인류를 진화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사랑”
아리스토텔레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덕 중 최고의 덕으로 정의를 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주제는 친애(philia)였습니다. 그리고 정의의 최상의 형태는 친애의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친애가 추가로 필요하지만, 친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감과 친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왔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공정과 정의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팀플’이라고 합니다. 팀으로 같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임승차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팀플은 인생이고 팀플은 운명이라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팀플은 디폴트라고. 원시 사회에서도 고대 사회에서도 얌체 같은 사람들은 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얌체들이 미워서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한 순간, 한 세대에 이룩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공감과 애정입니다. 그래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 목마른 당신을 위한 〈인생 비타민🍊〉 ◆
왼쪽에서부터 책 『공정하다는 착각』, 책 『공감의 시대』,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미지 출처: 알라딘, 넷플릭스)
① 책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저,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20)
신자유주의가 조장한 능력주의의 착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폭로하고 공동선을 만드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② 책 『공감의 시대』 (프란스 데 발 저, 최재천·안재하 역, 김영사, 2017)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공감 능력이 어떻게 도덕의 기초를 마련하여 사회 생활과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는지 설명합니다.
③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우리가 사는 계급 사회에는 공정 경쟁이란 없다는 점과 공정 경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줍니다.
[MZ 세대와 함께 하는 철학 카페] 6. 공정, 과연 최고의 가치일까요?(feat. 아리스토텔레스, 마이클 샌델)
강원대 철학과 교수. 철학박사.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성 토마스 대학에서 서양중세철학,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리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철학상담사로 활동했고 철학카페를 조직하여 이끌어왔다. 사고와 표현과 같은 대학교양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종교철학』, 『나는 긍정심리학을 긍정할 수 없다』 등을 썼고, 『신학대전 28: 법』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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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정, 과연 최고의 가치일까요?(feat. 아리스토텔레스, 마이클 샌델)
- “인류 사회를 지탱해 온 오랜 핵심 가치는 ‘공감’과 ‘친애’” - MZ세대와 함께 하는 철학 카페 -
이진남
2021-12-27
공감과 친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왔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공정과 정의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팀플’이라고 합니다. 팀으로 같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임승차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팀플은 인생이고 팀플은 운명이라고……
Q. 계속 흔들리는 공정의 가치… 방향을 잡기 힘들어요
고민
요즘에는 무엇보다 공정의 가치가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취업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고 물가와 집값은 우리 같은 청년들이 오롯이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재력과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주위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공정의 가치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고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A. 공정 뒤의 숨은 그림을 찾아보세요: 경쟁, 능력주의 그리고 친애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느꼈을 좌절감은 요즘 대다수 청년들이 가져 봤을 감정일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강남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한 또래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늘 밀린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가슴 졸이며 수능 시험 점수를 기다리고 나름 낮춰 지원한 학과에서도 줄줄이 낙방하여 재수하고 겨우 대학에 들어간 자신의 입장에서는, 일부 정치인들의 자녀가 부모님 도움으로 각종 화려한 스펙으로 장착한 후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학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모가 법조계, 정치계에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억대 상여금을 받고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계와 법조계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정적 혐오를 태우며 분노를 유발시키는 불의는 더욱 교묘하게 우리 사회를 물들여 나갈 수도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나서 그 불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꼼꼼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원전 1세기 노예 출신의 로마 시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Publilius Syru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Veterem iniuriam ferendo invitamus novam.
우리가 오래된 불의를 참는다면 새로운 불의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공정한 세상을 투표 몇 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우리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공정한 세상,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우리 같은 국민은 몇 년에 한 번씩 행사하는 투표권으로 잘못된 권력을 심판만 하면 정의로운 민주사회가 구현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정치하는 인간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면서 투표장에 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선거 몇 번으로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꽃이 피기 위해 뿌리부터 줄기를 거쳐 이파리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있어야 하는지 실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같이 만들어 가는 풀뿌리 민주주의, 다양한 의견들을 내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심의 민주주의의 과정, 각종 시민 단체들과 언론의 활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여론을 만들어 가는 노력. 이 모든 것들이 진정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기초적인 활동입니다. 선거는 마지막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없는 선거는 무력할 뿐 아니라 이용당할 소지가 많은 위험한 절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거로 합법적 집권 후 안 물러나는 독재자들
히틀러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습니다. 히틀러도 ‘민주적인 선거’의 과정을 통해 집권했고 독일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인종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전두환 씨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습니다. 12.12 쿠데타와 5.18 학살을 통해 언론과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그러한 반란을 정당화한 것이 당시 실정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대외적으로 미화되며 선전되는 데 이용된 선거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 집권한 제5공화국의 표어가 ‘정의 사회 구현’이었다는 점은, 끝까지 사죄하지 않고 사라진 전 씨의 기억과 함께 아직도 저를 분노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기억입니다.
독재자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쉬이 물러나려 하지 않습니다. 선거를 통해 물러나는 독재자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독재자들의 특성입니다. 1936년 스페인에서 쿠데타와 내전을 일으켜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40년 가까이 독재를 한 프랑코와 2021년 초 아웅산 수치의 선거 압승 다음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 모두 민주적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폭거였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2차 대전 이후 자민당 일당 체제가 무너진 적은 거의 없었고,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을 해도 서민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빈부의 격차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는 이렇게 쉽게 축복처럼 한꺼번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지역, 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하나씩 바꿔 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공정이라는 말에 숨은 독소...‘경쟁 중독’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공정이라는 말에는 잘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추상 명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정한 ~’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용사로 쓰일 때가 많은 거죠. 그래서 꾸며 주는 명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쟁입니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이 이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의 뜻입니다.
“수시 전형은 공정하지 않으니 수능 시험으로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공정은 수능 시험이라는 ‘공정한 경쟁’ 과정을 의미합니다. 요즘에는 마치 경쟁을 하지 않으면 공정이 확보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때가 많습니다. 대학 성적도 상대 평가로 줄을 세워 산출해야 공정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쟁 중독은 오래된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것을 경쟁으로 해결하고 그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신자유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강화된 현상입니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게임에서 등수와 레벨, 진출자와 탈락자를 정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의 디폴트 상태가 경쟁의 문화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능력은 순수한 노력의 결과?’...능력주의의 환상!!
우리의 공정 개념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숨은 그림은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뽑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처럼 보입니다. 능력주의는 공정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서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능력(merit)이라는 말은 우리의 노력을 측정한 결과가 아닙니다. 사실 노력만을 순수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여전히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가 한 사람이 어떤 직장을 다닐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어느 대학을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학생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재력으로 대표되는 집안의 교육 환경이 수능 성적과 내신 성적에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어떤 사회도 능력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대우한 곳은 없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점을 냉철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좌)와 마이클 영(Michael Young)(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 미국 출신의 정치철학자, 하버드대 교수)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에 따라 선발해야 한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그 능력이 없는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집안에 태어났는가’와 같이 운이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능력을 마치 공정성의 유일한 기준인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샌델의 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 1969~, 미국 예일대 교수)는 『엘리트 세습』이라는 책에서 불평등한 교육 기회를 통해 세습되는 부가 지금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수십 년 전에 ‘능력주의’라는 말을 처음 만든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15~2002,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도 『능력주의』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점으로 유리한 기회가 세습되어 계층 이동성이 차단되고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능력’이냐 하는 점이 핵심적입니다. 진정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능력(merit)이 아니라 공적(desert)입니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좌우하는 능력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능태이지만, 공적은 이미 스스로 경력을 통해 증명한 현실태입니다. 대학 졸업장이 평생 직업을 한꺼번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쌓아가는 경력이 조금씩 직업 생활을 변화시키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입니다.
진화생물학의 대답 “인류 발전 원동력은 공감”
경쟁과 능력주의 외에도 남은 한 가지 문제점은 공정, 정의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현생 인류를 타 유인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프란스 데 발(Frans de Waal, 1948~, 네덜란드 출신 동물행동학자. 에모리대 심리학과 교수)이나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 1950~, 미국 출신의 영장류학자.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명예 소장)는 현생 인류가 생존하고 성공적으로 문화를 이루어냈던 것은 같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도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덕의 두 기둥으로 공감과 정의감을 제시했습니다. 인류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분배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 유인원들까지도 공유하는 더욱 근원적인 능력은 공감입니다. 이 사실은 정의나 공정보다 공감이 인류 사회를 더 오랫동안 지탱해 왔던 핵심 가치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경쟁보다는 뒤처진 구성원의 상처를 보듬고 같이 살려고 하는 태도가 우리 인류를 진화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사랑”
아리스토텔레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덕 중 최고의 덕으로 정의를 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주제는 친애(philia)였습니다. 그리고 정의의 최상의 형태는 친애의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친애가 추가로 필요하지만, 친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감과 친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왔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공정과 정의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팀플’이라고 합니다. 팀으로 같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임승차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팀플은 인생이고 팀플은 운명이라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팀플은 디폴트라고. 원시 사회에서도 고대 사회에서도 얌체 같은 사람들은 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얌체들이 미워서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한 순간, 한 세대에 이룩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공감과 애정입니다. 그래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 목마른 당신을 위한 〈인생 비타민🍊〉 ◆
왼쪽에서부터 책 『공정하다는 착각』, 책 『공감의 시대』,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미지 출처: 알라딘, 넷플릭스)
① 책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저,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20)
신자유주의가 조장한 능력주의의 착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폭로하고 공동선을 만드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② 책 『공감의 시대』 (프란스 데 발 저, 최재천·안재하 역, 김영사, 2017)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공감 능력이 어떻게 도덕의 기초를 마련하여 사회 생활과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는지 설명합니다.
③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우리가 사는 계급 사회에는 공정 경쟁이란 없다는 점과 공정 경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줍니다.
[MZ 세대와 함께 하는 철학 카페] 6. 공정, 과연 최고의 가치일까요?(feat. 아리스토텔레스, 마이클 샌델)
- 지난 글: [MZ 세대와 함께 하는 철학 카페] 5. 의미 없고 상처만 주는 직장 생활을 버티려면 (feat. 존 그레이/디오게네스)
강원대 철학과 교수. 철학박사.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성 토마스 대학에서 서양중세철학,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리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철학상담사로 활동했고 철학카페를 조직하여 이끌어왔다. 사고와 표현과 같은 대학교양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종교철학』, 『나는 긍정심리학을 긍정할 수 없다』 등을 썼고, 『신학대전 28: 법』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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