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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은 한 몸, 그래도 상상력이라는 분리 가능한 공간이

- 이달의 답변 -

정홍수

2021-08-04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달의 질문] ‘나쁜’ 작가의 ‘좋은’ 작품은 성립하는 것일까요? / 질문자 - 최재봉(한겨레신문 기자)

 

Q. 나쁜 작가의 좋은 작품은 성립하는 것일까요? 말을 바꿔 보자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거나 필요한 일일까요?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정홍수(문학평론가)



A. 작가와 작품은 한 몸, 그래도 상상력이라는 분리 가능한 공간이



필립 로스의 소설은 종종 작가의 자전적 삶과 분리되지 않은 채로 도덕적 비난과 시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헤어진 전 부인의 개인적 폭로에 대한 작가의 소설적 앙갚음으로 이해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저는 굳이 하나의 입장을 택하라면,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주커먼의 상상력에 대한 믿음에 마음이 기웁니다.



역사, 시대와 함께하는 문학



시대 변화와 문학

시대 변화와 문학



최재봉 선생님의 질문지는 “나쁜 작가의 좋은 작품은 성립하는 것일까요? 말을 바꿔보자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거나 필요한 일일까요?”라는 두 개의 의문문으로 끝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질문이 있지만, 실상은 같은 문제를 다르게 물어보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두 개의 ‘같은’ 질문에 모순되는 답변을 함으로써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쁜 작가의 좋은 작품은 성립합니다(이때 ‘나쁜’은 작가의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겠죠). 그러나 동시에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앞의 질문에는 ‘분리’에 손을 들었고, 뒤의 질문에는 ‘분리되지 않는다’에 손을 든 셈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문학은 실체적으로, 혹은 내재하는 본질 같은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역사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로 우리 곁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리아드』나 『햄릿』, 『홍길동전』을 문학 작품으로 향수하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 한편, 바로 10년 전 한국 소설의 문장이나 화법에서 낡음이나 낯섦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최초의 문학 이론서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문학’ 안에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은 없습니다. 당시 희랍 사람들에게 문학은 비극과 서사시였던 거죠. 흔히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소설(novel)이라는 명칭은 서사 형식으로서 ‘새로운 것(novel)’을 일컬었던 말이라고 합니다. 상상력이 문학을 정의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 것도 ‘낭만주의’ 이후라고 하고요. 독일의 문예 이론가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1892~1957)는 『미메시스』에서 유럽 서사 문학이 ‘스타일 분리(고귀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비극의 경우 고상한 스타일을 쓰고, 하층민의 이야기에서는 비속한 스타일을 쓴다는 거죠)’에서 ‘스타일 혼합’으로 발전하면서 현실 묘사 능력을 강화해왔다고 말하는데, 인물의 신분적 위계와 글의 스타일을 대응시킨 ‘분리’의 발상은 상당한 정도로 그 문학 작품들이 존재했던 시대의 인간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을 테죠. 그렇다면 소설 장르에서 가장 튼실하게 뿌리 내린 문학의 리얼리즘은 인간 개개인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하게 된 민주주의의 진전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겠죠. 요컨대 문학이 ‘언어의 특별한 사용’이라는 느슨한 공통분모를 지닌 채 역사적 시대적 조건과 교섭하며 유동적이고 가변적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한때 우리 문학판에서도 논란이 분분했던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의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주장은 이제 구문(舊聞)이 된 느낌이지만, 원리적으로 본다면 발생이 있는 곳에 사멸, 종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고진이 끝났다고 말하는 근대 문학의 특별한 역할은 그 자체로 문학의 좌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고요.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주장한 ‘신비평’



미국에서 신비평 운동을 일으킨 문학평론가 존 크로 랜섬(John James Ransom, 1853–1934)(좌)과 그의 저서 『John James Ransom ★ The New Criticism ★ An Examination Of The Critical Theories Of I. A. Richards, T. S. Eliot, Yvor Winters, William Empson ★ New Directions』(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Literariness)/John Crowe Ransom THE NEW CRITICISM New Directions

미국에서 신비평 운동을 일으킨 문학평론가 존 크로 랜섬(John James Ransom, 1853~1934)(좌)과 

그의 저서 『The New Criticism』(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Literariness)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명제 역시 나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기되었습니다. 20세기 중반 미국 남부 일군의 영문학자·비평가들은 시를 시인의 감정의 토로로 본 낭만적 이해에 반기를 들고, 시를 그 자체로 자족적인 의미를 지닌 독립적인 대상으로 다루고자 했죠. 이때 시인만이 아니라 역사 혹은 현실도 시의 자족적인 세계를 위해 같이 소거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종의 ‘감동 교육’에 치우쳐 온 기왕의 문학 교육의 느슨함에 대한 반성, 시 텍스트의 전기적(傳記的) 환원에 대한 온당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신비평(New Criticism)’의 이름으로 전개된 일련의 작업은 그 ‘자족적 의미’의 분석 또한 인간 경험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들이 시 해석에서 배제하고자 한 시인의 경험 및 시를 둘러싼 사회적·정치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비평 이론가들의 다수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인종 혐오나 엘리트주의의 색채를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들의 ‘순수한’ 시 분석을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에 이들의 극단적 ‘분리’ 이론은 시 장르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둘 일입니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연이어 ‘저자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여기서는 ‘저자(작가)’가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니 ‘분리’의 강도는 더 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 역시 한쪽으로 심하게 구부러진 막대에 대한 경고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 결정에서 저자의 권위가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사태에 대한 비판이었던 거죠. 이들은 ‘저자’의 자리에 ‘저자 기능’을 놓음으로써 텍스트의 담론 구조에 천착할 길을 연 것입니다. 바르트의 경우는 의미의 생산자로서 ‘독자’의 자리를 더 강조하기도 했고요. ‘저자’를 ‘저자 기능’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거기서 실제 저자가 제거될 수는 없는 거겠죠. 부분적으로 ‘저자 기능’으로 흡수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강조점의 이동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론들이 거듭 제기된다는 것은 그만큼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죠.



문학의 의미 결정에 존재하는 분리의 공간



작가의 창작 활동

작가의 창작 활동



그런데 ‘의도의 오류(작가의 의도는 작품 속에 그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신비평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죠)’든 ‘텍스트의 자족성’이든 ‘저자의 죽음’이든 그 주장의 극단성을 제한다면, 여기에는 역설적으로 문학의 의미 결정 공간이 ‘전적으로’ 작가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발견이 있습니다. 적어도 문학 작품의 ‘의미’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작가와 작품 사이에 ‘상대적인 분리’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대적인 분리’로부터 문학 작품의 언어적 성격과 조직, 구조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텍스트의 틈을 활성화하는 독자의 능동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더 많이 생각해볼 수 있겠죠. ‘윤리적으로’ 나쁜 작가의 ‘문학적으로’ 좋은 작품이 성립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분리의 공간으로부터겠죠.


그러나 ‘저자의 죽음’이 판권란의 ‘저자’의 소멸이 아닌 것처럼(푸코도 바르트도 자신의 저서를 출간하여 인세를 받았을 겁니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실정적(實定的)인 관계를 부인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문학 담론의 구조 속에 있는 ‘작가(저자) 기능’으로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 의미의 생산에서 실제 작가의 몫은 상대적으로 가장 클 겁니다. 이론적 논의에서는 분절해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체험하는 문학 작품의 의미와 감동은 작가와 분리된 중립적인 구조나 기능의 작동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작품이 작가의 체험, 독서, 사색, 통찰, 상상, 조사와 연구, 문학적 수련, 그리고 힘겨운 글쓰기의 노동을 통과해서 나온 것임을 압니다(이는 작가의 자리에 대한 ‘낭만적 신비화’와 거리를 두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작가에 대한 존경은 그 쉽지 않은 시간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가의 작품이 얼마간은 문학사 속의, 혹은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때조차도, 작가의 창조성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작가는 작품 생산의 주체(이 고약한 말에 담긴 온갖 논란을 포함하여)입니다. 작가와 작품의 분리는 가능하지 않다는 저의 또 다른 답변은 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변화를 향한 거센 요구…… 새로 쓰는 한국 문학사



손희정 평론가(좌)가 펴낸 책 『페미니즘 리부트』 표지(우) (이미지 출처: Project38, 교보문고)/Feminism Reboot 페미니즘 리부트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손희정 지음 나무연필

손희정 평론가(좌)가 펴낸 책 『페미니즘 리부트』 표지(우) (이미지 출처: Project38, 교보문고)



저는 지금 최재봉 선생님이 제기한 질문의 현재성을 모르지 않습니다. 한가한 문학 원론으로 도망칠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일단 작가와 작품이 한 몸이되 부분적으로 분리 가능한 공간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새삼 되짚는 것은 문제의 복잡성에 대응하는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문학이 늘 ‘역사적으로’ 자신의 ‘시대’와 함께 존재하고 변해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죠. ‘전 세계적인 미투의 물결’은 변화하는 세상, 변화를 촉구하는 세상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입니다. 여기에는 여성 혐오의 오랜 시간,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가 여성에게 가해온 유무형의 온갖 폭력의 역사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거부의 몸짓이 실려 있습니다. 변화는 불가피하고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발견이라는 근대의 추상적인 이상은 계급, 인종, 젠더의 구체적 시험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는 더디지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상의 흐름은 문학이 언제든 감당하고 담아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페미니즘 리부트(2015년 이후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페미니즘 재조명 현상)’ 이후 한국 소설에서 젠더 감수성의 문제는 소설의 테마, 서사, 재현의 윤리 등 곳곳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국 소설은 불가피하게 이 시간을 살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설의 형질 변화와 소설에 대한 재정의의 요구는 현재의 문제로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 문학사를 허물고 문학사를 다시 쓰는 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문학은 당위적 윤리의 직접적이고 선동적인 제시가 아닙니다. 만일 그런 작품들이 있다면, 당장의 주목을 끌 수는 있을지 모르나 시간의 압력을 이겨낼 수는 없겠죠. 요컨대 지금 분출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 역시도 문학의 내적 형식 안에서 일정한 조정을 거치면서 유동하는 문학사의 시간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변화의 흐름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변화는 그전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영역이 돌출하고 생겨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IT 문명의 사회 관계망 서비스가 주도하는 세상은 과도할 정도의 투명성과 근접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낭만적 의미에서 문학의 신비화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급속하게 취향의 상품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취향은 사회 관계망 서비스의 자기 전시 기능과도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문학의 울타리에 작가 혹은 문학에 대한 특권적 존중의 영역이 작게라도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문학 내적/외적 경계로 나뉠 수 있는 작가의 발언이나 행동의 공간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앞서 제가 어설프게 정리해본 작가-작품의 분리에 대한 문학 원론적인 논의의 틀 바깥에서 새롭게 ‘문학의 현실’이 되고 있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작가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차원의 고발이나 비판은 사회 관계망 서비스의 세상에서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의 비례 범위를 넘어서 증폭되곤 합니다. 여기서 그 책임의 범위가 작품 쪽으로 과도하게 넘쳐난다고 하더라도(가령 문제가 있는 작가의 작품을 교과서나 강의 목록에서 배제하는 식으로) 이를 작가와 작품의 분리에 대한 원론적 논의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지금 이러한 과도함도 ‘문학’이 감내해야 할 변화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모순에 대한 관용, 타자의 자리에 대한 수락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 1933-2018)(좌)와 그의 소설 『유령퇴장』 (박범수 옮김, 문학동네, 2014)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한겨레신문, 교보문고)/Phillp Roth 유령 퇴장 필립 로스 장편소설 박범수 옮김 EXIT GHOST 문학동네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 1933~2018)(좌)와 그의 소설 『유령퇴장』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한겨레신문, 교보문고)



최재봉 선생의 질문지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이야기로 답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유령 퇴장』(박범수 옮김, 문학동네, 2014)은 네이선 주커먼이라는 소설가-화자가 등장하는 이른바 필립 로스의 ‘주커먼 시리즈’의 한 작품입니다. 소설에는 주커먼이 존경하는 I. A. 로노프라는 단편 소설의 대가가 등장합니다(물론 허구의 인물입니다). 로노프의 미발표 유작 장편을 작가의 개인사의 비밀로 환원하려는 ‘폭력적’인 시도에 맞서, 주커먼은 작가의 상상력이 지닌 공간을 적극 옹호합니다. 주커먼은 누이와의 근친상간이라는 로노프의 비밀에 대해,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비밀(호손과 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근친상간과 관련된 학계의 “교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추측”)이 로노프의 자기 현실로 재발명되고 상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옹호가 주커먼이 자신의 소설(혹은 상상력)에 대한 믿음을 수행적으로 보증하고 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잘 아는 대로 필립 로스의 소설은 종종 작가의 자전적 삶과 분리되지 않은 채로 도덕적 비난과 시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13)는 헤어진 전 부인의 개인적 폭로에 대한 작가의 소설적 앙갚음으로 이해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저는 굳이 하나의 입장을 택하라면,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주커먼의 상상력에 대한 믿음에 마음이 기웁니다. 그 믿음이 수행적이기 때문에도 문학은 인간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시도와 모험의 장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인간이 소설이라는 장르에 허용한 상상력의 공간이 단순히 흥미롭고 풍성한 이야기에 대한 기대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리의 공간에는 인간 스스로의 모순에 대한 관용, 최종적으로는 무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자리에 대한 겸허한 수락도 있었을 겁니다. 한국 문학이 겪고 있는 변화가 상상력이라는 관용과 겸허의 공간을 지켜내는 가운데 진행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8월 [이달의 답변] 작가와 작품은 한 몸, 그래도 상상력이라는 분리 가능한 공간이

- 지난 글: 8월 [이달의 질문] ‘나쁜’ 작가의 ‘좋은’ 작품은 성립하는 것일까요?

- 다음 글: 9월 [이달의 질문]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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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정홍수

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6년 『문학사상』 평론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으로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산문집으로 『마음을 건다』가 있다.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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