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이들 가운데 다수는 실증사학과 랑케 사학의 차이를 잘 모르고 랑케를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초기 연구자들이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에게 배웠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문제는 랑케의 사관이 일본이 정립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사관, 즉 황국사관이 아니라 오히려 약소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부합했던 것이다.
대다수 역사학 이론 관련 강좌와 서적에서는 본 칼럼에서 그동안 다루었던 논제들 외에도 ‘역사 서술의 형식과 방법’, ‘역사관’, ‘시대 구분’, ‘역사의 과학성 여부’,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역사의 현재성’, ‘역사에서의 진보 사상’ 등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필수로 다룬다. 역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인데,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본 칼럼의 특성상 이를 모두 세세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다만 이 가운데 ‘역사의 과학성 여부’ 문제는 흔히 말하는 실증사학의 핵심 주장이고 역사의 법칙성, 보편성, 진보사상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 칼럼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독일 출신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유사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이른바 ‘강단사학자’를 모두 ‘랑케 실증사학’의 후예로 분류하면서 ‘실증사학이 곧 식민사학’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러한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무슨 근거로 생겼으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제대로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이 근대역사학의 태동 과정에서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실증적(positive)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배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수의 유사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그런 도식, 즉 랑케의 실증사관이 곧 식민사관이라든가, 식민사학의 계보가 지금도 강단사학의 주류로 계승되고 있다는 도식은 성립할 수 없다. 실제로 식민사학의 사관(史觀) 자체가 랑케의 사관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역사를 수준 낮은 학문으로 폄하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
역사학은 ‘사실(事實, fact)’을 중시하는 학문이지만, 중세까지는 동서양 모두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범 사례를 제시하여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짙었다. 가령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이나 서양의 기독교 역사 등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역사적 사실로 자주 인용되었다. 또한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선악 판단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또한 전근대에는 문자 기록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어 주관적인 서술이나 후세의 소급된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세기 초반까지는 역사학이 문학의 영역으로 인식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점을 지적하면서 역사학을 수준 낮은 학문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시(詩)보다 못하다(덜 철학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데카르트는 “역사가가 과거 사실을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추가하여 기록하기 때문에 역사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런데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구 자전 등 자연과학적 사실이 증명되자 여타의 학문은 과학을 무시하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상황에 당면하였다. 역사는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이러한 시대 변화와 관련이 있다. 역사학도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은 실증주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의 합리주의 계몽사상을 근거로 형성된 사회철학이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프랑스 출신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를 들 수 있다. 콩트는 19세기 과학과 기술이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데 경도되어 미래에는 인류 최초의 황금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 때문에 과학만이 유일한 지식이며, 철학 역시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은 과학인가’를 둘러싼 논쟁들
실증주의 역사학을 창시한 버클(좌)의 대표작 『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 표지(우) (이미지 출처: amazon)
7개 국어를 구사하고 19종의 문자를 읽었다고 전하는 영국의 역사학자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은 이러한 실증주의 철학을 역사학에 접목하여 실증주의 역사학을 창시했다. 버클은 종래의 역사 서술에서는 현상의 원인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화적인 사고에 따라 우연이나 신적(神的)인 섭리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기껏해야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고찰로 장식되었다고 주장), 또한 역사란 종교적, 도덕적인 힘의 영향에서 독립하여 토지와 기후, 식량과 같은 외면적 요인들의 영향 속에 있으며, 이들과 인간 정신과의 상호 영향 속에서 역사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학문은 개별 현상들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고 증명하는 것이며, 역사학에서도 통계 등 자연과학적 방법을 응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서양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도 역사를 ‘실증적인 연구를 통한 과학’으로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존 버리(John B. Bury, 1861~1927)의 1903년 교수 취임 연설과 콜링우드(R. G. Collingwood. 1889~1943)와 E. H. 카(E. H. Carr, 1892~1982)의 저술 및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와 칼 헴펠(Carl Gustav Peter Hempel, 1905~1997) 등의 철학에서 역사의 과학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역사학자 트레벨리언(G. M. Trevelyan, 1876~1962)이 같은 대학에 재직하던 존 버리의 연설에 전면으로 반박하는 등 역사를 과학으로 보는 경향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역사학이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유의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역사학을 저급한 학문으로 인식하여 역사가 시(詩)보다 못하다거나 역사가 과학이 될 수 없다고 한 데 반해, 트레벨리언 등은 역사학의 장점을 부각하면서 과학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트레벨리언은 “역사는 위대한 국민문학의 일부이며 일반 대중의 문학으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전문가들을 위한 과학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의 불변하는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 … 역사라는 예술은 항상 설화(說話)의 예술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과 문학의 중간쯤… 역사가 문학에 가깝다는 시각
E. H. 카(좌)의 『WHAT IS HISTORY(역사란 무엇인가)』 표지(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현재는 역사학이 가진 과학과 문학의 양면성을 모두 인정하는 선에서 절충하면서도 문학에 가깝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예를 들어 한 역사학 서적에서는 “역사는 과학과 문학 사이에 어떤 것이며, 굳이 가리라면 문학 쪽에 조금 더 가깝다.”고 설명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널리 읽힌 까닭에 진보적인 입장의 연구자나 교양인들을 중심으로 ‘역사는 과학’이라는 생각이 한동안 크게 유행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 종합대학들이 사학과가 포함된 인문대학을 인문과학대학으로 개칭하였다가 추후 다시 인문대학으로 환원한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이 과학이라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가 수그러든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과학성 여부 논쟁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양면성을 모두 인정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으므로 현재의 시각에서는 다소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 이론의 정립 과정 당시에는 매우 첨예한 논쟁으로 다루어졌고, 특히 역사가 과학이라는 입장(특히 실증주의)에서는 보편성, 법칙성, 진보 등을 강조하여 각국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증주의 역사학을 창시한 버클은 유럽 문명과 비(非)유럽 문명을 구분하고 근대의 자연과학 발전을 이룩한 유럽 문명이 비유럽 문명보다 보편적이고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바, 실증주의 역사학 태동의 저변에 추후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 악용될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1)
1) 버클에 대해서는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인 김영한 교수의 논문 「실증주의 사관 – 콩트와 버클을 중심으로」(차하순 편저, 『사관이란 무엇인가』, 청람, 1980에 수록)를 소개할 만하다. 다만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다.
차하순의 『사관이란 무엇인가』 표지 (이미지 출처: YES24)
비록 그러한 생각 자체는 자기 문명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일 뿐 폭력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에 악용될 위험성이 있었다. 즉 중세 봉건 시대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된 유럽 문명이 보편적이고 법칙적이며 선진·우등한 문명이고, 그렇지 않은 문명은 후진·열등한 문명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선진·우등한 자기들이 후진·열등한 이들을 지배하거나 선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식민사학(정체성론)과 그에 대한 반론(자본주의 맹아론) 및 재반론(식민지 근대화론)이 있었고 현재에도 진행 중(가령 이영훈 등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와 관련한 논쟁 등)인데, 이러한 논쟁들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증사학에서 강조한 역사의 과학성, 보편성, 법칙성, 역사의 진보 주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근대역사학의 아버지가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오해받은 이유
랑케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계몽주의 사상가와 실증주의 역사가의 이러한 시각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랑케를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꼽는 이유는 과학적 역사학 방법론, 즉 실증적 사료비판을 역사학의 기본으로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학 이론 관련 서적들을 일별해 보면 랑케를 실증주의 역사학자로 분류하기도 하고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기도 해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스럽다. 왜 그럴까? 바로 랑케 역시 역사를 ‘실증적 연구를 통한 과학’으로 보았으므로 실증주의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지만, 역사가 진보한다거나 인간이 이성을 가진 보편적 존재라는 생각에 반대했고(랑케가 인정하는 진보는 물질 면에서의 진보뿐이었고, 그에게 인간은 나름의 감정과 개성을 가진 개별적 존재였다), 인류사회의 보편성 주장에도 반대했으므로(인류사회가 각각 나름의 문화와 제도와 역사를 가진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랑케를 콩트나 버클과 함께 분류하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 1861~1928) (이미지 출처: Wikipedia)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이들 가운데 다수는 실증사학과 랑케 사학의 차이를 잘 모르고 랑케를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초기 연구자들이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 1861~1928)에게 배웠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동경제국대학을 설립하고(1886년) 서구의 근대역사학을 기반으로 황국사관을 정립했다. 그리고 이에 복무할 일본사 및 한국사 연구자를 길러낼 요량으로 리스를 주임교수로 초빙하여 사학과를 창설했다(1887년). 우리나라 역사학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1854~1922)도 이 과정에서 배출된 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랑케의 사관이 일본이 정립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사관, 즉 황국사관이 아니라 오히려 약소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부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랑케의 사관이 아니라 랑케가 비판했던 버클의 사관(과학기술이 앞선 나라의 역사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역사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가까운 일본식 실증주의 역사학을 만들어냈다. 유사역사가들은 이런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랑케의 사관이 곧 실증주의며 실증주의가 곧 식민사학이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랑케의 제자로부터 배웠으며, 해방 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우리나라의 실증사학자들을 그들이 키웠으니 식민사학이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다는 식의 타령을 하는 것이다.
역사 왜곡 극복 노력에도 불구, 사제 관계 연결은 억지 논리
물론 모든 유사역사가들의 수준이 이렇게 낮지는 않다. 유사역사학 관련 도서를 주로 펴내는 한 출판사에서는 서양사 전공자를 초빙하여 위와 같은 일본 실증사학의 성립 과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도식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의 식민사학이 한국사학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때에는 스스로가 비판한 도식을 사용한다. 랑케의 제자 리스에게 배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사관(史觀)이 랑케 철학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잘 소개해놓고 한국 역사학의 계보를 설명하면서는 사제 관계로 인해 식민사학이 계승되었다는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근대역사학이 일본에 도입되고 변질되는 과정,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태동과 전개 과정은 매우 복잡하여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게다가, 유사역사가들이 이를 도식적으로 왜곡하여 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우리나라 역사연구자들은 식민사학에서 자행한 한국사의 역사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의 사제 간 계보를 연결하여 그럴싸한 억지소리를 하는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으로 인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다음(12회) 칼럼부터 2~3회에 걸쳐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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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역사의 과학성을 강조한 실증주의 역사학
- 서양 역사학이 한국사학에 미친 영향과 오해 (1)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07-19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이들 가운데 다수는 실증사학과 랑케 사학의 차이를 잘 모르고 랑케를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초기 연구자들이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에게 배웠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문제는 랑케의 사관이 일본이 정립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사관, 즉 황국사관이 아니라 오히려 약소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부합했던 것이다.
‘실증사학=식민사학’이라는 주장은 사실일까?
지금까지 ‘역사의 정의와 역사의 효용성(2회)’, ‘역사학 방법론으로서의 사료와 사료 비판(3회)’, ‘역사에서의 객관성과 주관성(4회)’, ‘사료 비판의 실례와 역사교육의 문제(5회)’, ‘민족주의 문제(6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명암(7회)’, ‘역사에서의 인과의 문제(8회, 9회)’, ‘역사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하는 문제(10회)’ 등을 다루었다. 이제부터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서양의 근대역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일어났던 논쟁들, 이를테면 식민사학의 한국사 왜곡과 그 극복 과정,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한 기초적 이해,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논쟁, 유사역사학(사이비역사학) 문제 등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대다수 역사학 이론 관련 강좌와 서적에서는 본 칼럼에서 그동안 다루었던 논제들 외에도 ‘역사 서술의 형식과 방법’, ‘역사관’, ‘시대 구분’, ‘역사의 과학성 여부’,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역사의 현재성’, ‘역사에서의 진보 사상’ 등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필수로 다룬다. 역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인데,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본 칼럼의 특성상 이를 모두 세세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다만 이 가운데 ‘역사의 과학성 여부’ 문제는 흔히 말하는 실증사학의 핵심 주장이고 역사의 법칙성, 보편성, 진보사상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 칼럼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독일 출신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유사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이른바 ‘강단사학자’를 모두 ‘랑케 실증사학’의 후예로 분류하면서 ‘실증사학이 곧 식민사학’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러한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무슨 근거로 생겼으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제대로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이 근대역사학의 태동 과정에서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실증적(positive)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배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수의 유사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그런 도식, 즉 랑케의 실증사관이 곧 식민사관이라든가, 식민사학의 계보가 지금도 강단사학의 주류로 계승되고 있다는 도식은 성립할 수 없다. 실제로 식민사학의 사관(史觀) 자체가 랑케의 사관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역사를 수준 낮은 학문으로 폄하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
역사학은 ‘사실(事實, fact)’을 중시하는 학문이지만, 중세까지는 동서양 모두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범 사례를 제시하여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짙었다. 가령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이나 서양의 기독교 역사 등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역사적 사실로 자주 인용되었다. 또한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선악 판단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또한 전근대에는 문자 기록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어 주관적인 서술이나 후세의 소급된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세기 초반까지는 역사학이 문학의 영역으로 인식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점을 지적하면서 역사학을 수준 낮은 학문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시(詩)보다 못하다(덜 철학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데카르트는 “역사가가 과거 사실을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추가하여 기록하기 때문에 역사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런데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구 자전 등 자연과학적 사실이 증명되자 여타의 학문은 과학을 무시하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상황에 당면하였다. 역사는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이러한 시대 변화와 관련이 있다. 역사학도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은 실증주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의 합리주의 계몽사상을 근거로 형성된 사회철학이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프랑스 출신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를 들 수 있다. 콩트는 19세기 과학과 기술이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데 경도되어 미래에는 인류 최초의 황금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 때문에 과학만이 유일한 지식이며, 철학 역시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은 과학인가’를 둘러싼 논쟁들
실증주의 역사학을 창시한 버클(좌)의 대표작 『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 표지(우) (이미지 출처: amazon)
7개 국어를 구사하고 19종의 문자를 읽었다고 전하는 영국의 역사학자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은 이러한 실증주의 철학을 역사학에 접목하여 실증주의 역사학을 창시했다. 버클은 종래의 역사 서술에서는 현상의 원인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화적인 사고에 따라 우연이나 신적(神的)인 섭리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기껏해야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고찰로 장식되었다고 주장), 또한 역사란 종교적, 도덕적인 힘의 영향에서 독립하여 토지와 기후, 식량과 같은 외면적 요인들의 영향 속에 있으며, 이들과 인간 정신과의 상호 영향 속에서 역사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학문은 개별 현상들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고 증명하는 것이며, 역사학에서도 통계 등 자연과학적 방법을 응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서양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도 역사를 ‘실증적인 연구를 통한 과학’으로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존 버리(John B. Bury, 1861~1927)의 1903년 교수 취임 연설과 콜링우드(R. G. Collingwood. 1889~1943)와 E. H. 카(E. H. Carr, 1892~1982)의 저술 및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와 칼 헴펠(Carl Gustav Peter Hempel, 1905~1997) 등의 철학에서 역사의 과학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역사학자 트레벨리언(G. M. Trevelyan, 1876~1962)이 같은 대학에 재직하던 존 버리의 연설에 전면으로 반박하는 등 역사를 과학으로 보는 경향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역사학이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유의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역사학을 저급한 학문으로 인식하여 역사가 시(詩)보다 못하다거나 역사가 과학이 될 수 없다고 한 데 반해, 트레벨리언 등은 역사학의 장점을 부각하면서 과학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트레벨리언은 “역사는 위대한 국민문학의 일부이며 일반 대중의 문학으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전문가들을 위한 과학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의 불변하는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 … 역사라는 예술은 항상 설화(說話)의 예술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과 문학의 중간쯤… 역사가 문학에 가깝다는 시각
E. H. 카(좌)의 『WHAT IS HISTORY(역사란 무엇인가)』 표지(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현재는 역사학이 가진 과학과 문학의 양면성을 모두 인정하는 선에서 절충하면서도 문학에 가깝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예를 들어 한 역사학 서적에서는 “역사는 과학과 문학 사이에 어떤 것이며, 굳이 가리라면 문학 쪽에 조금 더 가깝다.”고 설명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널리 읽힌 까닭에 진보적인 입장의 연구자나 교양인들을 중심으로 ‘역사는 과학’이라는 생각이 한동안 크게 유행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 종합대학들이 사학과가 포함된 인문대학을 인문과학대학으로 개칭하였다가 추후 다시 인문대학으로 환원한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이 과학이라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가 수그러든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과학성 여부 논쟁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양면성을 모두 인정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으므로 현재의 시각에서는 다소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 이론의 정립 과정 당시에는 매우 첨예한 논쟁으로 다루어졌고, 특히 역사가 과학이라는 입장(특히 실증주의)에서는 보편성, 법칙성, 진보 등을 강조하여 각국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증주의 역사학을 창시한 버클은 유럽 문명과 비(非)유럽 문명을 구분하고 근대의 자연과학 발전을 이룩한 유럽 문명이 비유럽 문명보다 보편적이고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바, 실증주의 역사학 태동의 저변에 추후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 악용될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1)
1) 버클에 대해서는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인 김영한 교수의 논문 「실증주의 사관 – 콩트와 버클을 중심으로」(차하순 편저, 『사관이란 무엇인가』, 청람, 1980에 수록)를 소개할 만하다. 다만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다.
차하순의 『사관이란 무엇인가』 표지 (이미지 출처: YES24)
비록 그러한 생각 자체는 자기 문명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일 뿐 폭력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에 악용될 위험성이 있었다. 즉 중세 봉건 시대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된 유럽 문명이 보편적이고 법칙적이며 선진·우등한 문명이고, 그렇지 않은 문명은 후진·열등한 문명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선진·우등한 자기들이 후진·열등한 이들을 지배하거나 선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식민사학(정체성론)과 그에 대한 반론(자본주의 맹아론) 및 재반론(식민지 근대화론)이 있었고 현재에도 진행 중(가령 이영훈 등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와 관련한 논쟁 등)인데, 이러한 논쟁들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증사학에서 강조한 역사의 과학성, 보편성, 법칙성, 역사의 진보 주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근대역사학의 아버지가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오해받은 이유
랑케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계몽주의 사상가와 실증주의 역사가의 이러한 시각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랑케를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꼽는 이유는 과학적 역사학 방법론, 즉 실증적 사료비판을 역사학의 기본으로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학 이론 관련 서적들을 일별해 보면 랑케를 실증주의 역사학자로 분류하기도 하고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기도 해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스럽다. 왜 그럴까? 바로 랑케 역시 역사를 ‘실증적 연구를 통한 과학’으로 보았으므로 실증주의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지만, 역사가 진보한다거나 인간이 이성을 가진 보편적 존재라는 생각에 반대했고(랑케가 인정하는 진보는 물질 면에서의 진보뿐이었고, 그에게 인간은 나름의 감정과 개성을 가진 개별적 존재였다), 인류사회의 보편성 주장에도 반대했으므로(인류사회가 각각 나름의 문화와 제도와 역사를 가진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랑케를 콩트나 버클과 함께 분류하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 1861~1928) (이미지 출처: Wikipedia)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이들 가운데 다수는 실증사학과 랑케 사학의 차이를 잘 모르고 랑케를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초기 연구자들이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 1861~1928)에게 배웠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동경제국대학을 설립하고(1886년) 서구의 근대역사학을 기반으로 황국사관을 정립했다. 그리고 이에 복무할 일본사 및 한국사 연구자를 길러낼 요량으로 리스를 주임교수로 초빙하여 사학과를 창설했다(1887년). 우리나라 역사학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1854~1922)도 이 과정에서 배출된 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랑케의 사관이 일본이 정립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사관, 즉 황국사관이 아니라 오히려 약소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부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랑케의 사관이 아니라 랑케가 비판했던 버클의 사관(과학기술이 앞선 나라의 역사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역사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가까운 일본식 실증주의 역사학을 만들어냈다. 유사역사가들은 이런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랑케의 사관이 곧 실증주의며 실증주의가 곧 식민사학이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랑케의 제자로부터 배웠으며, 해방 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우리나라의 실증사학자들을 그들이 키웠으니 식민사학이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다는 식의 타령을 하는 것이다.
역사 왜곡 극복 노력에도 불구, 사제 관계 연결은 억지 논리
물론 모든 유사역사가들의 수준이 이렇게 낮지는 않다. 유사역사학 관련 도서를 주로 펴내는 한 출판사에서는 서양사 전공자를 초빙하여 위와 같은 일본 실증사학의 성립 과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도식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의 식민사학이 한국사학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때에는 스스로가 비판한 도식을 사용한다. 랑케의 제자 리스에게 배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사관(史觀)이 랑케 철학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잘 소개해놓고 한국 역사학의 계보를 설명하면서는 사제 관계로 인해 식민사학이 계승되었다는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근대역사학이 일본에 도입되고 변질되는 과정,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태동과 전개 과정은 매우 복잡하여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게다가, 유사역사가들이 이를 도식적으로 왜곡하여 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우리나라 역사연구자들은 식민사학에서 자행한 한국사의 역사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의 사제 간 계보를 연결하여 그럴싸한 억지소리를 하는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으로 인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다음(12회) 칼럼부터 2~3회에 걸쳐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11. 역사의 과학성을 강조한 실증주의 역사학
- 지난 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10.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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