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매달아 죽는 게 낫다고.
누군가 그이를 찾아와 줄을 끊어 살려내면 그이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쓰게 될 텐데 적어도 목매달아 죽으려다 실패한 이야기라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소설을 쓰기 위해 자살을 시도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게 실패와 수치의 기록을 뜻한다면 귀담아들어도 좋을 듯하다.
아무려나 소설가에게 가장 큰 실패는 그러한 삶의 실패를 소설로 쓰는 일에 실패하는......
순위표 최고 밑바닥의 삶이라 해도
소설가가 된 걸 후회하는 소설가가 있을까. 누가 억지로 떠밀어서 된 건 아니니 속으로는 후회해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이도 있을 테고 자신이 소설가라는 현실에 기꺼이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도 없지 않을 테다. 그렇지만 아마 대부분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랴 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순전히 그러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진실을 알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일 텐데 유감스럽지만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 해도 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쨌든 잊을 만하면 어느 기관에서 가장 벌이가 신통치 못한 직업의 순위를 발표하고 순위표 맨 밑바닥에는 거의 변함없이 시인과 소설가가 자리하고 있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이 뉴스를 보면서 씁쓸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젠가 문예창작학과에 강사로 출강할 때 그 대학의 학과별 취업률이 게시된 걸 본 적이 있다. 문예창작학과가 꼴찌였다. 근소한 차이가 아니라 압도적인 차이로 수십여 개의 학과 가운데 꼴찌였다. 하마터면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강의마저 작파할 뻔했다. 바로 가서 학생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멋지고 비범한지를 그리고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열렬한 어조로 말했는데 학생들은 내 말을 좀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는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가기 힘든 늪이니 각오가 필요하다고. 멀쩡한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면 약간 괴짜가 되고 본래 좀 괴짜였던 사람이라면 폐인이 되기 십상이라고. 이런 은근한 협박에 아하 그렇군요 하며 물러나 주면 한 사람을 구제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말을 듣고 수긍하며 물러나는 지망생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여전히 이 늪으로 유인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한 데다 대단한 부를 거머쥘 가능성 역시 몇몇에 한정되어 있는데. 그 외 나머지 대부분은 비참까지는 아니라 해도 치사하고 한심한 일상을 감당하며 한평생 순위표 맨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할 텐데. 나만은 아닐 거라는 기대 탓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을 듯하다.
시인과 소설가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면 물론 순위표 맨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다. 순위표 맨 밑바닥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넌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며 날마다 힐난하는 늙은 부모와 툭하면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게 낫겠다며 우는 연인과 돈 벌어오라고 악다구니를 퍼붓는 배우자와 엄마 혹은 아빠는 왜 이렇게 무능해요!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자식들에 둘러싸여 사는 일상을 생각하면 실감이 좀 될 것이다. 오랜 친구들조차 연락을 받지 않으면 거의 갈 데까지 간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느냐 여부가 누가 시인이고 소설가인지를 모두 설명해 준다고 할 수는 없다.
실패와 수치를 기록하는 사람
내가 오래 곱씹는 시 가운데 한 편이 김남주 시인의 <가엾은 리얼리스트>이다.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하략)
-김남주 시 <가엾은 리얼리스트> 중에서-
시인(시적 화자)은 시골길과 바닷가가 처음인 친구와 함께 그곳을 거닐면서 친구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걸 본다. 친구가 아카시아 향기에 넋을 잃을 때 시인은 농부의 주름살을 보고 친구가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힐 때 시인은 가뭄에 오그라든 벼를 본다. 결국 이 시는 구차한 삶을 떠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끝난다. 이 세계에 순수하게 감탄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친구야말로 시인에 가까워 보이며 그런 순수함을 열망하면서도 거기에 다가가지 못하는 시인이야말로 시인에서 가장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시를 한 편의 시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이 시를 쓴 가장 시인답지 않은 시인이야말로 진짜 시인인 셈이다. 시인은 순수한 친구를 비난하기는커녕 친구처럼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열망과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고백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될 수 없는 스스로를 고백함으로써 그는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은 타인의 결점과 약점을 찾아내어 비난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기록하는 자이다.
▲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미지 출처 : pixabay)
시인은 그렇다 치고 소설가란 어떤 사람인가. 순위표 밑바닥을 함께 지키는 처지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매달아 죽는 게 낫다고. 누군가 그이를 찾아와 줄을 끊어 살려내면 그이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쓰게 될 텐데 적어도 목매달아 죽으려다 실패한 이야기라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헤밍웨이의 말처럼 소설을 쓰기 위해 자살을 시도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누군가 구해준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게 실패와 수치의 기록을 뜻한다면 귀담아들어도 좋을 듯하다. 아무려나 소설가에게 가장 큰 실패는 그러한 삶의 실패를 소설로 쓰는 일에 실패하는 것일 테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되는가
삶에서의 실패를 기록한 수많은 소설 가운데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을 떠올리는 이유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긴 소설이어서가 아니라 대체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되는지를 생각하게 해서이다. 유대계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토바이어스 울프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유대계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게 된 뒤 그는 의붓아버지와 심각한 불화를 겪고 어느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하지만 서류를 위조한 게 들통이 나서 퇴학을 당하는 등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실패로 가득하다.
▲ 토바이어스 울프의 장편소설 <올드 스쿨>(이미지 출처 : 문학동네)
<올드 스쿨>에는 문학청년 시절의 토바이어스 울프가 투영된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다. 소년은 학교 수위인 게르손과 마주쳤을 때 입학 전에 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배운 멜로디를 아무 생각 없이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학생주임에게 불려간 소년은 자신이 휘파람으로 부른 노래가 나치 행진곡이라는 것과 게르손의 가족 대부분이 나치에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변명하고 게르손을 찾아가 용서를 빌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비유대인 가톨릭교도의 환경에서 자라난 소년은 편견과 차별의 시험대에 올라가느니 차라리 비유대인 가톨릭교도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소년에게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다니는 명문 학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여겨진다. 소년은 이 수치를 공표하거나 기록할 생각이 아직 없다.
소년의 학교는 한 해에 세 번씩 유명 작가를 초청하며 문학 경연대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경연대회 우승자에게만 초청 작가와의 개인 면담의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경연대회에는 졸업반 학생만 참여할 수 있다. 소년이 졸업반이 되었을 때 로버트 프로스트를 시작으로 아인 랜드 그리고 헤밍웨이가 차례차례 초청된다. 헤밍웨이의 방문을 앞두고 벌어진 경연대회에 소년은 열광한다. 헤밍웨이에 대한 존경과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소년은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감은 다가오지만 소년은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어느 날 소년은 5년 전에 발행된 문학잡지에 실린 소설 한 편을 호기심으로 읽는다. 한 유대인 소녀의 내면이 훤히 드러난 소설을 읽으면서 소년은 점점 충격에 빠지고 이 소설이야말로 자신이 써야 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소년은 인물의 이름과 배경을 조금 바꿨을 뿐 자신도 모르게 그 작품을 표절하고야 만다. 이로써 소년은 자신의 수치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년이 유대인 핏줄임을 알게 될 것이므로. 소년의 고백이 표절이라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소년의 실패 가운데 가장 비참한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수치의 기록마저도 실패의 형식으로 이루어내야 했으니까. <올드 스쿨>은 표절의 도덕성을 묻는 작품은 아니다. 소년은 결국 수상이 취소되고 학교에서도 쫓겨난다. 표절의 대가는 치른 셈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소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수긍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헤밍웨이식으로 말하자면 소년은 수치를 기록하는 일에 실패한 과정을 넣음으로써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수치’가 아닌 ‘수치’를 이길수 있다면
최근에 세월호 유가족의 기록을 읽었다. 유가족의 공통된 태도 가운데 하나는 타인에게 굳이 유가족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형제자매의 경우 아직 어리거나 젊어서 주위 사람들의 노골적이거나 과장된 태도를 회피하기 위해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올드 스쿨>의 소년이 히브리인을 비난하는 동급생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이들 역시 세월호 피해자와 유가족을 조롱하고 헐뜯는 사람들 앞에서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바로 유가족이에요. 내가 바로 동생이고 오빠이고 누나예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피해자의 형제자매만이 아니라 모든 유가족과 생존 학생들의 진술에는 하나로 수렴되는 정서가 있다. 그이들은…… 외로워했다. 그이들은 매번 유가족이자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인정하고 확인하고 규정하는 데 실패했다. 그게 수치가 아닌데도 수치로 치부하는 시대여서다. 그이들이 일상 속에서 수치를 느끼지 않고 유가족이며 생존자임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이 실패가 부끄럽거나 서글프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 역시 소설가가 된 걸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해 볼 작정이다.
차마 말 못 하는 당신께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손홍규
2020-09-18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매달아 죽는 게 낫다고. 누군가 그이를 찾아와 줄을 끊어 살려내면 그이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쓰게 될 텐데 적어도 목매달아 죽으려다 실패한 이야기라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소설을 쓰기 위해 자살을 시도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게 실패와 수치의 기록을 뜻한다면 귀담아들어도 좋을 듯하다. 아무려나 소설가에게 가장 큰 실패는 그러한 삶의 실패를 소설로 쓰는 일에 실패하는......
순위표 최고 밑바닥의 삶이라 해도
소설가가 된 걸 후회하는 소설가가 있을까. 누가 억지로 떠밀어서 된 건 아니니 속으로는 후회해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이도 있을 테고 자신이 소설가라는 현실에 기꺼이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도 없지 않을 테다. 그렇지만 아마 대부분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랴 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순전히 그러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진실을 알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일 텐데 유감스럽지만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 해도 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쨌든 잊을 만하면 어느 기관에서 가장 벌이가 신통치 못한 직업의 순위를 발표하고 순위표 맨 밑바닥에는 거의 변함없이 시인과 소설가가 자리하고 있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이 뉴스를 보면서 씁쓸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젠가 문예창작학과에 강사로 출강할 때 그 대학의 학과별 취업률이 게시된 걸 본 적이 있다. 문예창작학과가 꼴찌였다. 근소한 차이가 아니라 압도적인 차이로 수십여 개의 학과 가운데 꼴찌였다. 하마터면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강의마저 작파할 뻔했다. 바로 가서 학생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멋지고 비범한지를 그리고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열렬한 어조로 말했는데 학생들은 내 말을 좀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는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가기 힘든 늪이니 각오가 필요하다고. 멀쩡한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면 약간 괴짜가 되고 본래 좀 괴짜였던 사람이라면 폐인이 되기 십상이라고. 이런 은근한 협박에 아하 그렇군요 하며 물러나 주면 한 사람을 구제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말을 듣고 수긍하며 물러나는 지망생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여전히 이 늪으로 유인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한 데다 대단한 부를 거머쥘 가능성 역시 몇몇에 한정되어 있는데. 그 외 나머지 대부분은 비참까지는 아니라 해도 치사하고 한심한 일상을 감당하며 한평생 순위표 맨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할 텐데. 나만은 아닐 거라는 기대 탓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을 듯하다.
시인과 소설가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면 물론 순위표 맨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다. 순위표 맨 밑바닥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넌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며 날마다 힐난하는 늙은 부모와 툭하면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게 낫겠다며 우는 연인과 돈 벌어오라고 악다구니를 퍼붓는 배우자와 엄마 혹은 아빠는 왜 이렇게 무능해요!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자식들에 둘러싸여 사는 일상을 생각하면 실감이 좀 될 것이다. 오랜 친구들조차 연락을 받지 않으면 거의 갈 데까지 간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느냐 여부가 누가 시인이고 소설가인지를 모두 설명해 준다고 할 수는 없다.
실패와 수치를 기록하는 사람
내가 오래 곱씹는 시 가운데 한 편이 김남주 시인의 <가엾은 리얼리스트>이다.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하략)
-김남주 시 <가엾은 리얼리스트> 중에서-
시인(시적 화자)은 시골길과 바닷가가 처음인 친구와 함께 그곳을 거닐면서 친구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걸 본다. 친구가 아카시아 향기에 넋을 잃을 때 시인은 농부의 주름살을 보고 친구가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힐 때 시인은 가뭄에 오그라든 벼를 본다. 결국 이 시는 구차한 삶을 떠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끝난다. 이 세계에 순수하게 감탄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친구야말로 시인에 가까워 보이며 그런 순수함을 열망하면서도 거기에 다가가지 못하는 시인이야말로 시인에서 가장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시를 한 편의 시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이 시를 쓴 가장 시인답지 않은 시인이야말로 진짜 시인인 셈이다. 시인은 순수한 친구를 비난하기는커녕 친구처럼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열망과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고백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될 수 없는 스스로를 고백함으로써 그는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은 타인의 결점과 약점을 찾아내어 비난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기록하는 자이다.
▲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미지 출처 : pixabay)
시인은 그렇다 치고 소설가란 어떤 사람인가. 순위표 밑바닥을 함께 지키는 처지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매달아 죽는 게 낫다고. 누군가 그이를 찾아와 줄을 끊어 살려내면 그이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쓰게 될 텐데 적어도 목매달아 죽으려다 실패한 이야기라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헤밍웨이의 말처럼 소설을 쓰기 위해 자살을 시도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누군가 구해준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게 실패와 수치의 기록을 뜻한다면 귀담아들어도 좋을 듯하다. 아무려나 소설가에게 가장 큰 실패는 그러한 삶의 실패를 소설로 쓰는 일에 실패하는 것일 테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되는가
삶에서의 실패를 기록한 수많은 소설 가운데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을 떠올리는 이유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긴 소설이어서가 아니라 대체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되는지를 생각하게 해서이다. 유대계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토바이어스 울프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유대계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게 된 뒤 그는 의붓아버지와 심각한 불화를 겪고 어느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하지만 서류를 위조한 게 들통이 나서 퇴학을 당하는 등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실패로 가득하다.
▲ 토바이어스 울프의 장편소설 <올드 스쿨>(이미지 출처 : 문학동네)
<올드 스쿨>에는 문학청년 시절의 토바이어스 울프가 투영된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다. 소년은 학교 수위인 게르손과 마주쳤을 때 입학 전에 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배운 멜로디를 아무 생각 없이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학생주임에게 불려간 소년은 자신이 휘파람으로 부른 노래가 나치 행진곡이라는 것과 게르손의 가족 대부분이 나치에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변명하고 게르손을 찾아가 용서를 빌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비유대인 가톨릭교도의 환경에서 자라난 소년은 편견과 차별의 시험대에 올라가느니 차라리 비유대인 가톨릭교도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소년에게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다니는 명문 학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여겨진다. 소년은 이 수치를 공표하거나 기록할 생각이 아직 없다.
소년의 학교는 한 해에 세 번씩 유명 작가를 초청하며 문학 경연대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경연대회 우승자에게만 초청 작가와의 개인 면담의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경연대회에는 졸업반 학생만 참여할 수 있다. 소년이 졸업반이 되었을 때 로버트 프로스트를 시작으로 아인 랜드 그리고 헤밍웨이가 차례차례 초청된다. 헤밍웨이의 방문을 앞두고 벌어진 경연대회에 소년은 열광한다. 헤밍웨이에 대한 존경과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소년은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감은 다가오지만 소년은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어느 날 소년은 5년 전에 발행된 문학잡지에 실린 소설 한 편을 호기심으로 읽는다. 한 유대인 소녀의 내면이 훤히 드러난 소설을 읽으면서 소년은 점점 충격에 빠지고 이 소설이야말로 자신이 써야 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소년은 인물의 이름과 배경을 조금 바꿨을 뿐 자신도 모르게 그 작품을 표절하고야 만다. 이로써 소년은 자신의 수치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년이 유대인 핏줄임을 알게 될 것이므로. 소년의 고백이 표절이라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소년의 실패 가운데 가장 비참한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수치의 기록마저도 실패의 형식으로 이루어내야 했으니까. <올드 스쿨>은 표절의 도덕성을 묻는 작품은 아니다. 소년은 결국 수상이 취소되고 학교에서도 쫓겨난다. 표절의 대가는 치른 셈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소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수긍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헤밍웨이식으로 말하자면 소년은 수치를 기록하는 일에 실패한 과정을 넣음으로써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수치’가 아닌 ‘수치’를 이길수 있다면
최근에 세월호 유가족의 기록을 읽었다. 유가족의 공통된 태도 가운데 하나는 타인에게 굳이 유가족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형제자매의 경우 아직 어리거나 젊어서 주위 사람들의 노골적이거나 과장된 태도를 회피하기 위해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올드 스쿨>의 소년이 히브리인을 비난하는 동급생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이들 역시 세월호 피해자와 유가족을 조롱하고 헐뜯는 사람들 앞에서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바로 유가족이에요. 내가 바로 동생이고 오빠이고 누나예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피해자의 형제자매만이 아니라 모든 유가족과 생존 학생들의 진술에는 하나로 수렴되는 정서가 있다. 그이들은…… 외로워했다. 그이들은 매번 유가족이자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인정하고 확인하고 규정하는 데 실패했다. 그게 수치가 아닌데도 수치로 치부하는 시대여서다. 그이들이 일상 속에서 수치를 느끼지 않고 유가족이며 생존자임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이 실패가 부끄럽거나 서글프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 역시 소설가가 된 걸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해 볼 작정이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차마 말 못하는 당신께
소설가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 지성사), 『그 남자의 가출』(창비)이 있고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 중앙),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이슬람 정육점』(문학과 지성사), 『서울』(창비), 『파르티잔 극장』(문학동네), 산문집 『다정한 편견』(교유서가),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교유서가)이 있다. 노근리 평화문학상, 백신애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채만식 문학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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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빛나는 밤에
박상영
마침내 닫힌 방문을 연 숨겨진 사람들의 꿈
권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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