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에는 ‘취생몽사(醉生夢死)’가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는 ‘취하여 자는 동안 꿈속에서 살고 죽는 것’이라지만 영화 속 의미는 달랐다. 영화 속 인물은 지난 일을 잊기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려 술을 마신다. 취하면 현재의 기억들이 꿈처럼 사라지는 술. 만약 그런 술이 있다면 누가 가장 원할까?
기억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만약,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마음과 연관이 있다면 마음은 곧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과 복제인간을 가늠하는 기준은 바로 ‘기억’이다. 복제인간에게는 기억을 주입하기 때문에 어딘가 허점이 드러난다. 그 허점을 통해 인간과 복제 인간을 구분한다. 마음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 기술로는 주입 불가능한 기억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과거, 이야기, 역사. 그것이 바로 ‘나’라는 정체성의 핵심이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가며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의 주인공 ‘알리타’는 쓰레기 더미에서 구해져 파편화된 기억을 복구하며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된다. 영화 <캡틴 마블>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이다. 타인이 불러주는 이름 ‘비어스’가 자신인 줄 오해하던 그녀는 기억을 복구하면서 ‘캐럴 댄버스’라는 이름을 회복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되찾는다.
▲ <알리타: 배틀 엔젤 (Alita: Battle Angel, 2018)>ⓒ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캡틴 마블 (Captain Marvel, 2019)ⓒ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마들렌 한 조각이 건드린 맛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순간을 회복시킬 수도 있고,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산딸기>에서처럼 과거 어떤 순간 망막에 남은 한 장면이 평생의 숙제가 될 수도 있다. 기억은 삶에 흔적을 남긴다. 망각한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이다. ‘기시감’, ‘데자뷔’라 부르기도 하고, 때론 논리적 설명을 넘어선 어떤 교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소년과 소녀처럼 그렇게 공유된 추억이 기억 너머로 사라질 수도 있다. 생각하므로 고로 존재하는 인간이란, 기억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된 기억으로부터 도피
그렇다면 기억은 인간에게 축복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까?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잊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기억의 흔적을 소환하는 따뜻한 장면도 많지만, 사실 더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기억 때문에 존재의 위기를 겪는 인물들을 종종 만난다. 기억하면 죽고 잊으면 살 수 있어서, 차라리 취생몽사가 낫다고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이 그 중 하나이다.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고 있는 남자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기억이 10분 단위로 지워져, 논리를 가진 선형적 사고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겨, 부족한 뇌의 용량을 대신한다. 외장하드를 들고 다니듯이 그렇게 기억의 외부 저장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 <메멘토 (Memento, 2000)>ⓒ(주)엔케이컨텐츠, (주)팝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단기 기억상실증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위해 싸우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조작한 것이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언니가 앓았던 불편함도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연관된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살인자들의 섬》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수사관 ‘테디’의 형편도 마찬가지이다. 감당할 수 없는 기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는 것, 어쩌면 인간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그 기억은 현재의 삶을 갉아먹기도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기에 과거의 잘못은 수정되거나 교정되지 않는다. 복구할 수 없는 잘못, 사죄할 수 없는 상처는 결국 기억의 공간 안에 상처로 자리 잡는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상처는 기억을 통해 거듭 현재화된다. 그렇기에 기억이 상처가 딱지가 되고, 군살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에 망각으로 그것을 덮으려 한다. 오히려 기억하지 못할 때, 아프지 않은 역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꼭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사라진 기억 역시도 나의 일부이며 내 정체성이다. 개인의 내면적 문제로 파고들 때, 기억은 고통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개인의 사적인 기억이 아닌 집단 기억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를 위해 훨씬 더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에는 기억되어야만 하는 사건들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부른다. 잊지 말아야 할 고통도 있는 것이다. 아니 고통스럽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을 넘어 사회적 약속이 되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조금 더 나은, 반 발자국 정도 더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이런 집단의 기억도 개인의 기억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비극은 피해자 하나하나의 기억과 증언, 기록을 통해 인류사의 트라우마로 각인되었다. 그 고통은 그저 개인의 것으로 국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어와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 그 고통을 같이 기억하고자 했다. 여기엔, 빅터 프랭클린이나 프리모 레비와 같은 작가들이 남긴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인 증언과 기록이 있다. 아프고 괴롭지만 그 순간을 기억해 두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언어로 복구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개인사로 축소되거나 사적 트라우마로 묻힐 수 있었던 기억의 순간을 집단적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소설, 드라마, 영화와 같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트라우마를 우리의 상처로 남겨야 하는 것이다. 기억해야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4월을 앞두고, 소설과 영화를 통해 2014년의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복구하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대녕 작가의 소설집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에 실린 〈서울-북미간〉에서, 정범 감독이 영화 <악질경찰>에서, 이종언 감독이 영화 <생일>에서 그날을 직접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기억과 고통을 사회적 기억과 고통 안에 놓아둠으로써 그 고통을 소용없는 눈물이 아닌 의미 있는 아픔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기억해야 할 일은 꼭 기억해야만 한다.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2005년 조선, 경향,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되며 생애 최고의 주목을 받았다. 우연인 줄 알았던 영화평론가의 길이 필연이 된 삶에 감사하며, 취미가 일이 된 것도 다행스럽게 여긴다. 강남대학교에서 최선의 열정을 학생들과 나누며, 매년 한 권 이상 책을 엮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천생 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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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
강유정
2019-03-22
기억함으로 존재하는 인간
20세기 말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에는 ‘취생몽사(醉生夢死)’가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는 ‘취하여 자는 동안 꿈속에서 살고 죽는 것’이라지만 영화 속 의미는 달랐다. 영화 속 인물은 지난 일을 잊기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려 술을 마신다. 취하면 현재의 기억들이 꿈처럼 사라지는 술. 만약 그런 술이 있다면 누가 가장 원할까?
기억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만약,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마음과 연관이 있다면 마음은 곧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과 복제인간을 가늠하는 기준은 바로 ‘기억’이다. 복제인간에게는 기억을 주입하기 때문에 어딘가 허점이 드러난다. 그 허점을 통해 인간과 복제 인간을 구분한다. 마음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 기술로는 주입 불가능한 기억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과거, 이야기, 역사. 그것이 바로 ‘나’라는 정체성의 핵심이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가며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의 주인공 ‘알리타’는 쓰레기 더미에서 구해져 파편화된 기억을 복구하며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된다. 영화 <캡틴 마블>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이다. 타인이 불러주는 이름 ‘비어스’가 자신인 줄 오해하던 그녀는 기억을 복구하면서 ‘캐럴 댄버스’라는 이름을 회복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되찾는다.
▲ <알리타: 배틀 엔젤 (Alita: Battle Angel, 2018)>ⓒ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캡틴 마블 (Captain Marvel, 2019)ⓒ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마들렌 한 조각이 건드린 맛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순간을 회복시킬 수도 있고,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산딸기>에서처럼 과거 어떤 순간 망막에 남은 한 장면이 평생의 숙제가 될 수도 있다. 기억은 삶에 흔적을 남긴다. 망각한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이다. ‘기시감’, ‘데자뷔’라 부르기도 하고, 때론 논리적 설명을 넘어선 어떤 교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소년과 소녀처럼 그렇게 공유된 추억이 기억 너머로 사라질 수도 있다. 생각하므로 고로 존재하는 인간이란, 기억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된 기억으로부터 도피
그렇다면 기억은 인간에게 축복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까?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잊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기억의 흔적을 소환하는 따뜻한 장면도 많지만, 사실 더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기억 때문에 존재의 위기를 겪는 인물들을 종종 만난다. 기억하면 죽고 잊으면 살 수 있어서, 차라리 취생몽사가 낫다고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이 그 중 하나이다.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고 있는 남자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기억이 10분 단위로 지워져, 논리를 가진 선형적 사고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겨, 부족한 뇌의 용량을 대신한다. 외장하드를 들고 다니듯이 그렇게 기억의 외부 저장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 <메멘토 (Memento, 2000)>ⓒ(주)엔케이컨텐츠, (주)팝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단기 기억상실증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위해 싸우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조작한 것이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언니가 앓았던 불편함도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연관된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살인자들의 섬》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수사관 ‘테디’의 형편도 마찬가지이다. 감당할 수 없는 기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는 것, 어쩌면 인간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그 기억은 현재의 삶을 갉아먹기도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기에 과거의 잘못은 수정되거나 교정되지 않는다. 복구할 수 없는 잘못, 사죄할 수 없는 상처는 결국 기억의 공간 안에 상처로 자리 잡는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상처는 기억을 통해 거듭 현재화된다. 그렇기에 기억이 상처가 딱지가 되고, 군살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에 망각으로 그것을 덮으려 한다. 오히려 기억하지 못할 때, 아프지 않은 역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꼭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사라진 기억 역시도 나의 일부이며 내 정체성이다. 개인의 내면적 문제로 파고들 때, 기억은 고통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개인의 사적인 기억이 아닌 집단 기억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를 위해 훨씬 더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에는 기억되어야만 하는 사건들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부른다. 잊지 말아야 할 고통도 있는 것이다. 아니 고통스럽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을 넘어 사회적 약속이 되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조금 더 나은, 반 발자국 정도 더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이런 집단의 기억도 개인의 기억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비극은 피해자 하나하나의 기억과 증언, 기록을 통해 인류사의 트라우마로 각인되었다. 그 고통은 그저 개인의 것으로 국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어와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 그 고통을 같이 기억하고자 했다. 여기엔, 빅터 프랭클린이나 프리모 레비와 같은 작가들이 남긴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인 증언과 기록이 있다. 아프고 괴롭지만 그 순간을 기억해 두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언어로 복구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개인사로 축소되거나 사적 트라우마로 묻힐 수 있었던 기억의 순간을 집단적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소설, 드라마, 영화와 같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트라우마를 우리의 상처로 남겨야 하는 것이다. 기억해야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4월을 앞두고, 소설과 영화를 통해 2014년의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복구하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대녕 작가의 소설집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에 실린 〈서울-북미간〉에서, 정범 감독이 영화 <악질경찰>에서, 이종언 감독이 영화 <생일>에서 그날을 직접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기억과 고통을 사회적 기억과 고통 안에 놓아둠으로써 그 고통을 소용없는 눈물이 아닌 의미 있는 아픔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기억해야 할 일은 꼭 기억해야만 한다.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2005년 조선, 경향,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되며 생애 최고의 주목을 받았다. 우연인 줄 알았던 영화평론가의 길이 필연이 된 삶에 감사하며, 취미가 일이 된 것도 다행스럽게 여긴다. 강남대학교에서 최선의 열정을 학생들과 나누며, 매년 한 권 이상 책을 엮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천생 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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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기억은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대중음악, 기억과 추억의 언어
임진모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삶도
홍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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