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라는 독
정확히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어떤 흐름이 한 사회의 문화적 기저에 등장하는 때가 있다. 가령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CCM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대중문화와 사회 한 가운데 등장할 때. 이 노래의 제목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거위의 꿈’이나 ‘아빠 힘내세요’ 같은 유사한 심리적 흐름의 노래가 빈번히 들릴 때. 이때 그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회에도 심리라는 게 있어서, 한국은 이제 자존감이 문제가 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자존감이 정신적 건강의 중핵이라면, “자존감”을 이야기할 일이 적을수록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야기할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가령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문제가 될 때 말이다. 게다가 실제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 아닐까?
『자존감이라는 독』 류샹핑 지음 / 류샹핑은 스스로 ‘멋진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머리에 입력시키는 직접적인 행동이 자존감을 높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다. 중국의 심리학자 류샹핑은 『자존감이라는 독』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중에는 자존감 향상에 관한 자기계발서가 넘쳐난다. 날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멋진 사람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말하는 책들도 있다. 그런데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그런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자존감을 높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류샹핑이 한국의 자존감 향상 베스트셀러 『자존감 수업』을 읽는다면 아마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끝을 맺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순간에도 잊지 말자. 당신은 밀림의 왕이다. 세상의 중심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다.”
밀림의 왕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알다시피 왕의 특징은 소통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처럼 가끔 소통할 줄 아는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묘사된 왕이 특별해 보이는 정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왕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정도와 비례할 것이다. 보통 왕은 동등한 자격으로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부에 군림하면서 신하의 청을 들어주거나 신하에게 명령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왕 말고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할 더 좋은 것은 없을까?
자존감이 떨어진 밀림의 왕을 『자존감 수업』의 저자 윤홍균은 “슬픈 사자”라고 부른다. 사자가 사는 곳은 밀림 내지는 정글이다. “세상엔 우리를 위협하는 것투성이다.” 밀림에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물들이 산다. 그것이 사자가 사는 밀림의 이미지다.
자존감이 낮아진 현대인들은 가족과 사회라는 생태계의 도태 속에서 ‘슬픈 사자’ 신세가 되고 있다.
줄리엣 미첼은 『동기간』에서 이 밀림이 실은 형제자매들이 있는 작은 사회인 가족이라고 보았다. “인간에게 ‘야생의 것들이 있는 곳’은 여기, 가족 안이다.” 그곳은 매일매일 동기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미첼은 이 전쟁의 결과를 낙관한다. “더 어린아이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일반적 무력함에 더 나이든 동기에게 죽임을 당하는 두려움을 덧붙여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경험들은 치유될 것이고 두려움과 충격은 증오와 사랑, 경쟁과 우정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낙관론은 유지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즉 가족이라는 생태계는 점점 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첫째, 가족 안의 동기간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둘째, 오늘날 아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우상과 범죄의 이미지에 무한히 노출되고 있으며, 가족을 둘러싼 더 큰 생태계인 마을은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밀림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다.
마음속 카페
자존감이 높은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왕들이 사는 사회일까?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 젤딘은 왕과 기사들을 용기 있게도 ‘폭력 중독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인간을 노예 상태로 굴복시키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노예들은 왕과 기사들과 여타 폭력 중독자들에게 멸시받는 것에 동의했다. 노예들에게도 자존감이 있었을까? 아무리 비굴한 삶을 살더라도 인간인 한 자존감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젤딘은 말했다, “노예들―또는 적어도 슬픔을 잊기 위해 영원히 술에 취하지 않았던 노예들―과 관련해 가장 두드러진 성질은 존엄이었다.” 존엄은 자존감을 발견하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는 자존감의 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노예들이 있었던 시대에는 그들의 자존감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자존감 수업’ 책은 발간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에게 굴욕적인 삶은 운명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노예들은 낮은 자존감조차 운명으로 여겼지만, 현대인들은 자유를 얻은 만큼 더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자존감이 문제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노예에게 없었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노예들이 느꼈을 그 느낌, 즉 낮은 자존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젤딘은 인류의 전체 역사를 조망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대화는 간신히 시작되었을 뿐이다.” 노예제는 196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노예제는 이제 간신히 끝났을 뿐이다. 그리고 대화는 이제 간신히 시작되었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점에서 문제처럼 보이는 것도 종종 관점을 바꿔 역사적 관점을 취할 때,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씨앗처럼 보인다. 그럴 때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왕도 아니고 밀림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진짜 대화다. 나는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에 성공하는 경험이 축적되고, 대화를 통해 좋고 아름다운 것을 공유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개인과 사회의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개별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는 오늘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가 거리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게 기쁘다. 우리 마음속에도 카페가 들어서면, 그곳에서 자존감이 자랄 것이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자존감]자존감의 서막'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자존감]자존감의 서막
사회적 관점에서 자존감 바라보기
이성민
2017-12-07
자존감
자존감이라는 독
정확히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어떤 흐름이 한 사회의 문화적 기저에 등장하는 때가 있다. 가령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CCM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대중문화와 사회 한 가운데 등장할 때. 이 노래의 제목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거위의 꿈’이나 ‘아빠 힘내세요’ 같은 유사한 심리적 흐름의 노래가 빈번히 들릴 때. 이때 그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회에도 심리라는 게 있어서, 한국은 이제 자존감이 문제가 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자존감이 정신적 건강의 중핵이라면, “자존감”을 이야기할 일이 적을수록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야기할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가령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문제가 될 때 말이다. 게다가 실제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 아닐까?
그런데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다. 중국의 심리학자 류샹핑은 『자존감이라는 독』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중에는 자존감 향상에 관한 자기계발서가 넘쳐난다. 날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멋진 사람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말하는 책들도 있다. 그런데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그런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자존감을 높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류샹핑이 한국의 자존감 향상 베스트셀러 『자존감 수업』을 읽는다면 아마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끝을 맺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순간에도 잊지 말자. 당신은 밀림의 왕이다. 세상의 중심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다.”
밀림의 왕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알다시피 왕의 특징은 소통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처럼 가끔 소통할 줄 아는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묘사된 왕이 특별해 보이는 정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왕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정도와 비례할 것이다. 보통 왕은 동등한 자격으로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부에 군림하면서 신하의 청을 들어주거나 신하에게 명령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왕 말고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할 더 좋은 것은 없을까?
자존감이 떨어진 밀림의 왕을 『자존감 수업』의 저자 윤홍균은 “슬픈 사자”라고 부른다. 사자가 사는 곳은 밀림 내지는 정글이다. “세상엔 우리를 위협하는 것투성이다.” 밀림에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물들이 산다. 그것이 사자가 사는 밀림의 이미지다.
줄리엣 미첼은 『동기간』에서 이 밀림이 실은 형제자매들이 있는 작은 사회인 가족이라고 보았다. “인간에게 ‘야생의 것들이 있는 곳’은 여기, 가족 안이다.” 그곳은 매일매일 동기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미첼은 이 전쟁의 결과를 낙관한다. “더 어린아이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일반적 무력함에 더 나이든 동기에게 죽임을 당하는 두려움을 덧붙여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경험들은 치유될 것이고 두려움과 충격은 증오와 사랑, 경쟁과 우정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낙관론은 유지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즉 가족이라는 생태계는 점점 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첫째, 가족 안의 동기간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둘째, 오늘날 아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우상과 범죄의 이미지에 무한히 노출되고 있으며, 가족을 둘러싼 더 큰 생태계인 마을은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밀림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다.
마음속 카페
자존감이 높은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왕들이 사는 사회일까?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 젤딘은 왕과 기사들을 용기 있게도 ‘폭력 중독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인간을 노예 상태로 굴복시키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노예들은 왕과 기사들과 여타 폭력 중독자들에게 멸시받는 것에 동의했다. 노예들에게도 자존감이 있었을까? 아무리 비굴한 삶을 살더라도 인간인 한 자존감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젤딘은 말했다, “노예들―또는 적어도 슬픔을 잊기 위해 영원히 술에 취하지 않았던 노예들―과 관련해 가장 두드러진 성질은 존엄이었다.” 존엄은 자존감을 발견하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는 자존감의 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노예들이 있었던 시대에는 그들의 자존감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자존감 수업’ 책은 발간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에게 굴욕적인 삶은 운명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자존감이 문제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노예에게 없었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노예들이 느꼈을 그 느낌, 즉 낮은 자존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젤딘은 인류의 전체 역사를 조망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대화는 간신히 시작되었을 뿐이다.” 노예제는 196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노예제는 이제 간신히 끝났을 뿐이다. 그리고 대화는 이제 간신히 시작되었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점에서 문제처럼 보이는 것도 종종 관점을 바꿔 역사적 관점을 취할 때,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씨앗처럼 보인다. 그럴 때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왕도 아니고 밀림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진짜 대화다. 나는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에 성공하는 경험이 축적되고, 대화를 통해 좋고 아름다운 것을 공유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개인과 사회의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개별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는 오늘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가 거리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게 기쁘다. 우리 마음속에도 카페가 들어서면, 그곳에서 자존감이 자랄 것이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자존감]자존감의 서막'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자존감]자존감, 나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박병성
[자존감]디자이너의 자존감, 과대망상과 자괴감 사이에서
최범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