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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3
이 글은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솔직해지기가 이렇게 힘들다
방0정 (청주지역자활센터)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갈래?”
“미안해, 나 집에 일찍 가야 해서.”
“이따 쇼핑 갈 건데 너도 가자, 응?”
“미안, 나 쇼핑 별로 안 좋아해.”
집에 일찍 가야 했던 것도, 쇼핑을 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돈이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해 둘러댔을 뿐이었다.
문제집이나 보충수업비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는 ‘깜빡 잊어버려서’,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 는 ‘몸이 약해서.’
어릴 적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가난 앞에서 솔직해지기가 참 힘들었었다.
일찌감치 결혼은 포기했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도 졸업 못 했고, 변변한 직장도 없고, 체력은 평균을 한참 밑도는 데다 집에 빚까지 있었으니까.
근근이 먹고 사는 가운데 쉼터가 되어준 건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 하나와 나만 믿고 의지하는 고양이 두 마리였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데뷔하더라도 시간을 들인 만큼 더 좋은 이야기를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졌고, 결혼한 오빠들에게 맡으라고 할 순 없어 서 내 역할이 되었다.
‘내가 돈을 달래 뒷바라지를 해 달래? 그냥 내 시간 내 맘대로 쓰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
하기 싫다고 울면서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어릴 때도 안 하던 짓을 서른이 훌쩍 넘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가난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오빠들 앞에서 솔직해지는 게 가장 힘들었다.
오빠들이 같이하던 사업이 파산하고 작은 월세 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계속해서 짐을 줄이고 월세와 보증금도 줄여 나갔다.
심부전을 앓던 내 첫째 고양이가 열다섯 살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2년 후 둘째도 열여섯 살로 하늘나라로 떠 났다. 그러고 엄마는 대소변과 식사도 혼자 하지 못할 만큼 치매와 간암이 악화되셨다.
이후의 몇 달간을 전쟁 같았다.
생계비 대출받은 것을 쪼개 생활하면서, 복수 때문에 식사를 새 모이만큼밖에 못하는 엄마를 위해 하루 여섯 번 의 밥을 차리고 두 시간에 한 번씩 기저귀를 갈았으며 치매 때문에 하는 이상행동과 돌발행동들로 간을 졸이는 날 들이 이어졌다. 엄마가 신생아처럼 수면 패턴이 불규칙해졌기 때문에 나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내 건강도 나날이 나빠져 갔다.
닥쳐오는 매일매일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코앞에 닥쳐온 엄마의 마지막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서 허우적대는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서 나는 집안에 엄마와 단둘이 고립된 채 지낼 수밖에 없었고 엄마 앞에서는 늘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억눌렀다.
솔직해지는 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집에 남겨져서야 내 상황들을 천천히 점검해 볼 수 있었다. 몸도 마음도 바닥 이었고, 도움을 줄 사람은커녕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곁에 없었다. 당장 대출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지 만 경력도 체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마치 쓰나미가 쓸어간 뒤 폐허가 된 마을에 혼자 남겨진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바닥에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솔직하게 도움을 청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복지로에 글을 쓰고 얼마 후 상담사에게 전화가 와서 현재 상황을 전했고, 며칠 뒤 바로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긴급 생계비를 받고 자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멀쩡한 정신의 사람들은 자활에서 못 버틴다 등의 부정적인 정보들을 인터넷으로 접한 상태에서 두려움과 패배감에 휩싸여 자활 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로 그 정보들도 일정 부분 맞는 소리였고 자활 안에서 나 역시 적응이 힘들어 사업단을 옮기거나 아예 센터를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곳도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고 고조용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성실하고 좋은 분들도 계셨다. 그리고 그분 들과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집에 남겨져서야 내 상황들을천천히 점검해 볼 수 있었다. 몸도마음도 바닥이었고, 도움을 줄사람은커녕 함께 이야기를 나눌사람조차 곁에 없었다.
몇 년 만에 적지만 고정적인 월급을 받고, 정 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으로도 조금씩 살아갈 힘이 생겨나는 것 같다. 또 자활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떤 식으로든 바닥을 쳐 본 분들이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분들이기 때 문에 내 지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분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꽤 위로가 되어 주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게 너무 없어서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게 별로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고싶었기에 사람들에게 먼저 웃으며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청주 자활에 들어온 지 이제 9개월째다. 아직 개인 워크아웃 중이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정한 건 아무것도 없다.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면 이제 더는 예전처럼 괜찮은 척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돈이 없으면 솔직히 없다고 하고, 어디가 아프 면 아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리고 엄마를 돌보는 데 썼던 시간과 노력을 이제 날 돌보는 데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 감정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내 욕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언갈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여기 와서 다시 한번 느꼈다.
물론 지금 내가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고 싶었기에 사람들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공공근로를 하시 는 분들이나 같이 일하시는 분들, 매점에 오시는 손님들께 인사를 드리면 대부분의 분들은 마주 활짝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신다. 그럴 때마다 마치 손이라도 마주 잡은 듯 온기가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온기에 힘을 얻어 나는 하루하루 아기가 걸음마를 하듯이 나한테 조금씩 더 솔직해지고 그 마음을 타 인에게 불편하지 않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49살에야 비로소 나는 나한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해지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사업소개
한국형 클레멘트코스 <디딤돌 인문학>은 배제와 단절의 자리에 학습공동체를 세루는 참여형 인문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제 1회 팬지문학상은 팬지꽃의 꽃말 ‘나를 생각해 주세요’처럼 교정시설·노숙인시설·자활센터 등에서 상실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희망과 회복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입니다.
사업대상 노숙인 시설, 지역자활센터, 교정시설
주최·주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최우수상] 솔직해지기가 이렇게 힘들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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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솔직해지기가 이렇게 힘들다
2026-02-13
이 글은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솔직해지기가 이렇게 힘들다
방0정 (청주지역자활센터)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갈래?”
“미안해, 나 집에 일찍 가야 해서.”
“이따 쇼핑 갈 건데 너도 가자, 응?”
“미안, 나 쇼핑 별로 안 좋아해.”
집에 일찍 가야 했던 것도, 쇼핑을 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돈이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해 둘러댔을 뿐이었다.
문제집이나 보충수업비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는 ‘깜빡 잊어버려서’,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 는 ‘몸이 약해서.’
어릴 적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가난 앞에서 솔직해지기가 참 힘들었었다.
일찌감치 결혼은 포기했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도 졸업 못 했고, 변변한 직장도 없고, 체력은 평균을 한참 밑도는 데다 집에 빚까지 있었으니까.
근근이 먹고 사는 가운데 쉼터가 되어준 건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 하나와 나만 믿고 의지하는 고양이 두 마리였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데뷔하더라도 시간을 들인 만큼 더 좋은 이야기를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졌고, 결혼한 오빠들에게 맡으라고 할 순 없어 서 내 역할이 되었다.
‘내가 돈을 달래 뒷바라지를 해 달래? 그냥 내 시간 내 맘대로 쓰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
하기 싫다고 울면서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어릴 때도 안 하던 짓을 서른이 훌쩍 넘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가난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오빠들 앞에서 솔직해지는 게 가장 힘들었다.
오빠들이 같이하던 사업이 파산하고 작은 월세 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계속해서 짐을 줄이고 월세와 보증금도 줄여 나갔다.
심부전을 앓던 내 첫째 고양이가 열다섯 살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2년 후 둘째도 열여섯 살로 하늘나라로 떠 났다. 그러고 엄마는 대소변과 식사도 혼자 하지 못할 만큼 치매와 간암이 악화되셨다.
이후의 몇 달간을 전쟁 같았다.
생계비 대출받은 것을 쪼개 생활하면서, 복수 때문에 식사를 새 모이만큼밖에 못하는 엄마를 위해 하루 여섯 번 의 밥을 차리고 두 시간에 한 번씩 기저귀를 갈았으며 치매 때문에 하는 이상행동과 돌발행동들로 간을 졸이는 날 들이 이어졌다. 엄마가 신생아처럼 수면 패턴이 불규칙해졌기 때문에 나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내 건강도 나날이 나빠져 갔다.
닥쳐오는 매일매일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코앞에 닥쳐온 엄마의 마지막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서 허우적대는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서 나는 집안에 엄마와 단둘이 고립된 채 지낼 수밖에 없었고 엄마 앞에서는 늘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억눌렀다.
솔직해지는 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집에 남겨져서야 내 상황들을 천천히 점검해 볼 수 있었다. 몸도 마음도 바닥 이었고, 도움을 줄 사람은커녕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곁에 없었다. 당장 대출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지 만 경력도 체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마치 쓰나미가 쓸어간 뒤 폐허가 된 마을에 혼자 남겨진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바닥에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솔직하게 도움을 청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복지로에 글을 쓰고 얼마 후 상담사에게 전화가 와서 현재 상황을 전했고, 며칠 뒤 바로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긴급 생계비를 받고 자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멀쩡한 정신의 사람들은 자활에서 못 버틴다 등의 부정적인 정보들을 인터넷으로 접한 상태에서 두려움과 패배감에 휩싸여 자활 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로 그 정보들도 일정 부분 맞는 소리였고 자활 안에서 나 역시 적응이 힘들어 사업단을 옮기거나 아예 센터를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곳도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고 고조용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성실하고 좋은 분들도 계셨다. 그리고 그분 들과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집에 남겨져서야 내 상황들을
천천히 점검해 볼 수 있었다. 몸도
마음도 바닥이었고, 도움을 줄
사람은커녕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곁에 없었다.
몇 년 만에 적지만 고정적인 월급을 받고, 정 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으로도 조금씩 살아갈 힘이 생겨나는 것 같다. 또 자활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떤 식으로든 바닥을 쳐 본 분들이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분들이기 때 문에 내 지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분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꽤 위로가 되어 주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고
싶었기에 사람들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청주 자활에 들어온 지 이제 9개월째다. 아직 개인 워크아웃 중이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정한 건 아무것도 없다.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면 이제 더는 예전처럼 괜찮은 척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돈이 없으면 솔직히 없다고 하고, 어디가 아프 면 아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리고 엄마를 돌보는 데 썼던 시간과 노력을 이제 날 돌보는 데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 감정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내 욕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언갈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여기 와서 다시 한번 느꼈다.
물론 지금 내가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고 싶었기에 사람들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공공근로를 하시 는 분들이나 같이 일하시는 분들, 매점에 오시는 손님들께 인사를 드리면 대부분의 분들은 마주 활짝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신다. 그럴 때마다 마치 손이라도 마주 잡은 듯 온기가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온기에 힘을 얻어 나는 하루하루 아기가 걸음마를 하듯이 나한테 조금씩 더 솔직해지고 그 마음을 타 인에게 불편하지 않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49살에야 비로소 나는 나한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해지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사업소개
한국형 클레멘트코스 <디딤돌 인문학>은 배제와 단절의 자리에 학습공동체를 세루는 참여형 인문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제 1회 팬지문학상은 팬지꽃의 꽃말 ‘나를 생각해 주세요’처럼 교정시설·노숙인시설·자활센터 등에서 상실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희망과 회복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입니다.
사업대상 노숙인 시설, 지역자활센터, 교정시설
주최·주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최우수상] 솔직해지기가 이렇게 힘들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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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위법(違法)의 벽을 넘어 위법(爲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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