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인문360인문360

인문360

인문360˚

인문 사업 아카이브

[대상] 창백한 아이

2026-02-13

이 글은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창백한 아이
강0민(베다니마을뜨란채쉼터)

 

 

--서두-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일기,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이다.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들. 그때의 사건들이 통째로 관통해 이후의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도 많겠지……. 하지만 비슷한 경험일지라도 결코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는 1994 서울 가을로 접어들 때다.

엄마가 떠나간다. 살인 나와 다섯 여동생인 우리 남매는 그저 손잡고 하염없이 바라만 뿐이다. 

1994 가을 엄마는 그날 식당 문을 일찍 닫으셨다. 평소엔 오후 늦게 열어 새벽 1시까지 영업했었는데 그날은 뭔가 느낌이 차가웠다. 

아빠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틈틈이 가게 일을 보곤 하셨다. 가게 닫고 집으로 아무 없이 어온 엄마.

오늘은 식당 해요? 엄마?”

응…… 오늘은 일이 있어서. 차려줄게.”

그러곤 조용히 저녁 준비하시는 엄마. 평소 같았으면 숙제는 했냐? 자전거 연습은 했냐?”라며 온갖 잔소리를 퍼부어 댔는데 정말 조용했다. 

그렇게 남매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남매는 눈치 없이 헤헤거리며 먹는다. 이미 새가 이상해 일부러 웃으며 분위기를 벗어나려 애썼다. 

그런 남매를 말없이 바라만 보는 엄마. 우리가 저녁을 먹는 사이 옷가지들을 가방에 챙기고 있었다.

엄마 어디 가요?”

아냐, 어서 먹어.”

그러나 이미 느끼고 있었다. 나가시는구나’라고……. 이미 전에도 식당 문제, 아빠의 문제로 격하게 우고 나갔다 들어오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해야 했다.

지금 엄마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만류하며 놔주는 것. 아니면 다시 돌아오시겠지’ 하고 놔드리는 것. 

이미 전에 나가는 엄마를 붙잡고 놔줬다가 뺨을 사정없이 맞으면서 애비한테 가서 물어봐. 엄마가 이러는 지.” 이런 소리를 들었기에…….

짐을 모두 챙기신 엄마는 그렇게 앞에서 서술한 모습대로 나가셨다. 적막해지고 싸늘한 집안……. 그때 통의 전화가 왔다. 아빠였다

엄마랑 집에 있는 거야?”

무척 당혹해하다가 사실 그대로 말씀드려야 했다.

엄마가 저희 차려 주시고 나서 가방 챙기시고 하고 나가셨어요.” 아빠의 몹시 흥분되고 화나신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온다.

엄마 잡고 했어, xxx야! 기다려 금방 들어갈 거야.”

동생이랑 기다리며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이윽고 집에 들어오신 아빠. 집안 장롱, 식당 수입 금액을 보관하던 가죽가방까지 모두 확인하던 아빠는 굉장히 분노해 있었고 잠시 밖으로 나가 시더니 술을 드시고 다시 들어오셨다.

아빠, 죄송해요. 제가 엄말 잡아야 했는데…….” 순간 갑자기 나에게 주먹을 날리셨다.

자리에서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고 이미 눈이 뒤집힌 아빠는 플라스틱 자루 빗자루를 가져와 온몸과 굴을 구타하기 시작하셨다. 방구석에 처박혀진 채로…….

플라스틱 자루가 휘어져 힘이 없자 주먹으로, 후엔 공구 가방에서 망치를 가져와 망치 나무 자루 부분으로 사정없이 폭행했다. 

또다시 나가버린 엄마에 대한 분노를 걷잡을 없이 모조리 나에게 분풀이하는 았다. 울며 계속 잘못했다고 빌면서…….

후에 돌이켜보면 아직도 그때 폭행당한 일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빌어야 한단 인가. 

당신의 문제이고 식당 일로 엄마와 싸우던 당신들의 문제를 없는, 이제 살의 어린 자녀에게 풀이하느냔 거다.

처음엔 화목한  가족이었다. 공원에 놀러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며 놀다 오고 놀이공원도 가고.  문제로 다툴지언정 화목했다. 

그러다 식당 하나 차리고 엄마가 요리와 서빙, 남자 손님 말동무가 되어주고, 식당이다 보니 주류도 팔게 되고, 아빠가 마치고 식당에서 보조하면서 겪었던 부부간의 갈등……. 

이런 것들이 가족의 화목함을 야금야금 갉아 먹으며 어느새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와버린 것이다.

 

아직도 그때 폭행당한 일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빌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의 술 문제이고 식당 일로
엄마와 싸우던 당신들의 문제를
왜 죄 없는, 이제 열 살의 어린
자녀에게 화풀이하느냔 거다.

 

사정없는 폭행은 계속되다 망치의 나무 자루를 쥐고 망치의 부분으로 때리려던 순간에 멈추셨다. 

그때 그걸로 때렸다면 그때 세상 사람이 니었겠지. 이성이 돌아오셨는지 이상 폭행은 멈추 그냥 멱살 잡고 방구석으로 던지셨다. 

자꾸 울어 대는 동생……, 온몸의 통증, 밤새 잠도 제대로 던 기억이 난다.

다음 아침…… 밥은 당연히 먹을 수도 없이 통스러운 몸으로 학교에 가야 했다. 

신월동에 있는 신월초등학교(국민학교) 3학년 3반이었던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 당시 이제 가을로 접어들 때라 긴팔옷으 최대한 가리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몸에 있는 피멍을 모두 가릴 없었는지 친한 친구 명이 와서 장난치다 물었다.

지민아, 아래가 그래? 너무 파래” 어제 축구하다 넘어졌어…… ㅎㅎ”

그러더니 한 친구가 목 부분 옷을 당기고 등속을 보고 놀랬다. 난 얼른 일어나 화장실로 피했지만 뒤에서 수군거 리고 화장실에서 구슬프게 울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몸도 심했고 오른쪽 부분은 때리는 막느라 피 멍이다 못해 시커멓고 혈관도 터졌는지 붉은 혈관 자국도 길게 보이고 거의 부러진 아닌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망가진 정신적 충격, 모든 무서웠다. 특히 어른들이……. 어른만 보면 매우 움츠러들었다. 그날 오후 가고 싶진 않았지만 여동생이 걱정돼 집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술을 먹고 있었고 동생은 이불 덮고 있었다. 분명 밥도 챙겨 줬으리라. 아빠가 나에게 담임선생님에게 전화할 있다고 학교 번호를 알아 오라 했다. 한사코 된다고 했는데 아빠가 말했다.

그럼 아빠가 학교 찾아갈까? 들어 XX야.” 하길래 없이 들어줘야 했다. 그다음 학교 마치고 번호를 건네준 그날 저녁 담임선생님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듣기 창피한 말만 했던 같다. 

그다음 날은 아예 학교도 싫었다. 선생님은 다음날 회피하듯이 거북해하셨고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벌어진 일을 얘기 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었고 이미 말했듯이 어른에 대한 공포로 말할 엄두 났다. 

아니면…… 사랑하는 여동생 말고 모든 사람이 무서웠던 걸까……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 동생은 유치원에 다녔는데 오전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려오는 엄마나 아빠가 하던 일이 나의 과가 되었다. 

오후 학교 마치고 동생을 유치원에서 데리고 업어달라길래 업어서 집으로 가던 중. 근처에 사시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아휴~ 오빠가 정말 착하데. 동생도 데리러 다니고 애가 애기를 업고 다니네. 아휴 기특해”

표정은 겨우 웃는 척이었지만 속은 그저 슬퍼 울고 있을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친 아이가 애기를 챙기 는 슬픈 현실…….

거의 매일 울었던 같다. 집을 나가서 상황을 만든 엄마가 매우 밉지만 또한 보고 싶었다. 

그날 동생 데리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떤 여자분을 가까이 데리고 술과 커피잔 같은  함께 마시고 있었다. 

 여자분은 우리 모습을 보고 아빠에게 그만 먹고 애들 챙기라고 했지만 듣는 마는 척하던 아빠는 이상 듣기 싫었는지 여자분을 어서 보내버렸다. 

너무 적막하고 정적만 흐르다 갑자기 일어선 아빠. 그리고 스테인리스 밥그릇 같은 가져오고 뭔가를 더 찾더니 식당에서 가져왔던 난로용 석유를 가져왔다.

지민아…… 우리 가족 그냥 다 같이 좋은 곳으로 가자…… 이렇게 사는 거 너무 힘들잖아……. 아빤 힘들다…….” 

당시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그걸 먹으면  된다는 생각과 무서워서 펑펑 울었고 동생도  무서운 상황에 그저 같이 울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이 먹으면 아빠가 먼저 할게.”

그러더니 몸에 묻히고 마시려고 하기에 우리 남매는 마구 안된다 말렸다. 결국 울어대는 우릴 보고 포기했는 그것들을 치워버렸다.

매일 악몽 같은 날들 이 이어지던 어느 외할머니가 오셨다. 아빠 마침 매일 마시던 술도 잠시 마시던 중이 었는데 외할머니는 집안과 우리를 보고 깊게 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를 데리고 아빠에게 악을 쓰듯 말하셨다.

애를 어쩌자고 지경으로 만들었어! 일려고 했어? 봐, 어휴 세상에. 아빠란 사람이. 봐! 이게 팔뚝이야? 평생 팔도 쓰게 만들려고 했어?

사람아, 전화도 받고 하는 짓거리야 이게?”


그때 표정 속 아빠의 슬픔이 아직도
기억난다. 비록 아빠로서 큰
실수와 과오를 저질렀지만 살가울
땐 아이들에게 한없이 살갑던
분이셨다. 폭행에 대한 기억으로
미우면서도 행복했던 지난 기억에
미워할 수 없는 애증의 아빠…….


아빠는 듣고만 있다가 억울한 듯. 따져 물었지만 어떤 얘기였는진 기억이  난다. 엄마에 대한 얘기이지 않았 을까…….

외할머니는 우릴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다. 이렇게는 된다고. 하지만 아빠는 극구 반대했다. 설전과 실랑이 에 동생만 데리고 나는 아빠 곁에 남기로 타협하셨다. 내겐 더 끔찍한 상황이었다.

외할머니도 따라가고 동생하고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아빤 몹시 미웠다. 엄마는 외할머니집에 있다고 했다. 대신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해주셨다. 며칠 동생이 외할머니 손잡고 집으로 다시 왔다. 

외할머니 말로는 동생이 매일 오빠 보고 싶다고 계속 울며 보챘다고 한다. 아마도 부모님은 맞벌이로 나랑 있는 시간이 많았고 이번 일로 더욱 의지해 엄마도 마다했던 아닐까 싶다. 

견디다 못해 데려오신 것이다. 동생이 다시 함께 돼서 좋았다. ( 마지막 의지처이기도 했고……) 외할머니는 빠른 시일 내에 아이들을 어떻게 책임질 건지 빠에게 답해달라 하시고 돌아가셨다. 

아빠는 큰아빠가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표정 아빠의 슬픔 이 아직도 기억난다. 비록 아빠로서 실수와 과오를 저질렀지만 살가울 아이들에게 한없이 살갑던 분이셨다. 

폭행에 대한 기억으로 미우면서도 행복했던 지난 기억에 미워할 없는 애증의 아빠……. 이때 당시 정신적 격과 고통이 행동으로 보이고 있었다.

수업 시간 화장실 다녀온다며 복도 구석 어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제발 혼자서 이고 싶고 슬프고 두려움에 떨곤 했다. 아이에게 닥친 시련에 어떤 치유도 없이 몸과 마음에 얻은 고통을 견딘다는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복도 구석에 쪼그려있다가 찾으러 선생님에게 교무실로 불려 무슨 일인지 물으셨지만 그냥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2반에 민우라는 애가 일주일에 번씩 나와 혼자 있을 때만 되면 벽으로 거칠게 밀어 세우고 내놓으라고 괴롭힘도 당하고 있었다. 

가족의 문제, 해소할 없는 정신적 고통, 같은 학우의 괴롭힘, 이 낫질 않는 몸의 상처, 영양부족. 정서적으로 미치지 않고서 멀쩡한 게 신기할 따름이다.

지옥 같은 날들이 이어지던 큰아빠 큰엄마가 잠시 우릴 맡기 위해 오셔서 데리고 가셨다. 우리 모습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는 분. 큰아빠는 성격이 매우 엄하셨다. 

그나마 큰엄마가 자애로웠지만……. 하지만 큰아빠랑 우리 남매랑 이렇게만 있을 때는 막힐 같은 기억만 난다.

지민아, 학교에 물어보니 학습 능력도 좋고 수업 자꾸 나가고 그런다며? 큰아빠한테 나야겠지? 그렇지?”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때리실까? 뭘로 때리실까? 다행히도 큰아빠는 행동 없이 구구 단이 적혀있는 책자 하나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열심히 공부 하면 크게 후회한다. 너도 아빠처럼 목수 일하고 마시고 그러고 싶지 않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나. 큰아빠가 말했다.

조만간 시골에 거야 너희 둘. 그러니 거기서 창피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

이때 이게 소리인가 싶었다. 시골이라니……. 어째서? 왜? 후에 알게 사실인데 분은 입양을 고려하 때였다 한다. 그런 때에 우리를 맡아서 키우시기엔 더없는 부담이었으리라. 

아무리 조카들이라 한들 성인 때까 지 둘을 키우시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겠지……. 이때로 돌아가 상황에 직면했다면 아마 만세삼창했 을지도 모른다. 저주스러운 날들에서 탈출이니까.

다음 날, 큰아빠와 큰엄마가 우릴 안방에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제일 먹고 싶은 뭔지 말해봐. 지금 사줄게.”

동생을 그냥 바라보다 말했다. 짜장면 먹고 싶어요…….” 큰엄마가 말했다.

그거 말구……. 짜장면은 얼마든지 먹을 있어. 고기 사줄까? 아니면 햄버거 같은 어떠니? 애들 무척 좋아 하잖니.” (94년도라 햄버거는 저렴했지만 시골 가면 서울처럼 쉽게 사 먹긴 힘들 터)

그냥 짜장면이 제일 먹고 싶어요. ㅎㅎ”

분은 하는 없이 바람대로 짜장면과 탕수육까지 시켜주셨다. 동생은 아직 다섯 살이라 그저 오빠가 자거나 하자고 하면 마냥 따라 했다. 

가장 크게 의지를 하고 있었으니, 내가 잠시 눈에 보여 곁을 비우기라도 하면 찾고 난리였다. 동생도 상처를 받았고 믿을 오직 오빠뿐이었다.

우린 그야말로 신나게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기도 하고……. 분도 같이 드셨지만 문득문득 보이는 큰엄마 슬픈 표정이 기억난다. 

어린것들이 시골에 내려가 부모도 없이 살아갈 테니 왠지 서글프신 아닐까. 그로 부터 며칠 후 큰아빠 내외분과 우리 남매는 차를 타고 전라북도 고창군으로 내려갔다.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백토마을……. 읍내와는 한참 들어가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 

마을 안에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논과 비닐하우스, 개울, 그리고 내가 친할머니 집은 마을에서 100미터 조금 넘게 떨어 작은 옆. 

지금 생각해 보면 공기 좋고 외떨어져 있고 모든 잡념과 세상 풍파 집어던지고 농사짓고 살겠다면 아주 그만인 곳…….

겨울엔 둘러싼 산들이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마을도 그림처럼 새하얗게 물들고 여름엔 산에서 내려오는 마당 개울까지 내려와 시원하고 푸른 경관. 

을엔 붉은빛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하지만 그때 당시의 에겐, 서울에서 살아온 어린 남매에겐 그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문방구도 없고 놀이터도 코빼기도 보이 고. (학교 안에 있었지만 그땐 몰랐다) 내가 즐겨 놀던 가게 동전 오락 게임기도 없고 몹시 당황했지만 그저 없이 수만 있다면…….

할머니 마당에 도착하니 정말 반갑게 맞아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 셔서 홀로 살고 계셨다. 

내가 아주 어릴 가끔 서울로 오셔서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고 들었다. 이젠 같이 거다. 할머니가 말했다.

아휴~ 우리 강아지들 어서 오소~ 할머니 많이 보고 싶었지?”

할머니를 껴안았는데 너무너무 따뜻하고 푸근한 품이었다. 그랬다. 비로소 힘들고 슬픈 시간을 지나 온정을 베 푸시는 분의 품에 안긴 셈이다. 

그러다 잠시……. 울컥해지고 눈물을 흘리는 나, 이해할 없게도 이상 서울에 내가 살던 집, 애완견, 학교 친구들, 놀던 놀이터와 문방구, 좋아하던 같은 여자아이, 떡볶이랑 떡볶이집 푸근 한 주인아주머니. 

밉지만 보고 싶은 엄마 아빠. 이제 모든 보기 힘들 거란 생각에 크게 울적해져 물음을 뜨렸다. 내가 우니 갑자기 따라 우는 동생. 상황을 힘들게 바라보는 큰아빠 내외분. 

하지만 할머니가 우릴 안고 닥이시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구. 안다, 알어. 어린 것들이 고생 많았지……. 서울 보고 싶어도 할매랑 같이 잘살자. 에구 불쌍한 새끼들” 계속 토닥이시는 할머니. 

그렇게 몸과 마음이 다쳤던 시간이건만 갑자기 그곳들이 그리워지는 이해하기 들었다. 아픈 시간도 있었지만 분명 좋은 추억도 많았던 시간. 

아픈 병치레를 자주 병원서 나와 업어주신 아빠. 그리고 나란히 걸으며 웃어주시던 엄마. 

창백해 보이는 아이라 주변 이웃 그리고 자주 가던 분식집에서 하나 사면 하나 챙겨주시던 분들. 짧다고 하면 짧겠지만 결코 짧게 느껴졌던 힘든 사건들이 좋았던 추억과 정을 다 덮진 못하니까. 

그저 심한 폭행과 외롭고 힘든 기억이 강렬할 뿐. 참고 이곳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니까……. 

어느 날은 익은 벼를 그게 쌀을 수확하는 벼인지도 모르고 풀인지 알고 손으로 쭈욱 잡아땡기다 논밭 아저씨에게 된통 혼났다. 할머니에게 말씀드리자 웃으시며 우리가 먹는 쌀이 거기서 나온다며 토닥이셨다.

할머니 집밥은 무척 간소했지만 맛있었다. 익은 전라도 김치, 장독에서 꺼내 익은 동치미(이건 맛이 가 막혀서 밥을 이거에 세 그릇을 비웠다), 똑같이 장독서 꺼내 온 고추장에 계란과 함께 비벼 먹는 밥. 

몇 달 후 아 빠가 서울서 키우던 강아지를 데리고 할머니 집에 들르셨다. 강아지도 반갑지만 뭔가 얼굴이 한결 나아 보이는 아빠도 보기 좋았다. 

그렇게…… 할머니의 따뜻한 품속에서 두 남매는 20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 곁에서 잘 컸습니다. 

이제는 소천하셔서 사진 속에서 함께 활짝 웃고 계시는 할머니……, 아빠……. 그립네요. 

세상 모진 풍파에 달려 어렵게 살다가 마치 어릴 따뜻한 할머니 집에 왔듯이 베다니 마을의 온정 속에서 살면서 다시금 분을 떠올려 봅니다.

주여…… 부디 베다니마을의 모든 사람과 할머니, 아빠 그리고 창백했던 아이인 저에게 주님의 따뜻한 사랑 온정이 가득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

 

 

 

"

할머니를 껴안았는데 너무너무 따뜻하고 푸근한 품이었다. 그랬다.
비로소 힘들고 슬픈 시간을 지나 온정을 베푸시는 분의 품에 안긴 셈이다.

"

 

 

 


 

 

 

사업소개

한국형 클레멘트코스 <디딤돌 인문학>은 배제와 단절의 자리에 학습공동체를 세루는 참여형 인문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제 1회 팬지문학상은 팬지꽃의 꽃말 ‘나를 생각해 주세요’처럼 교정시설·노숙인시설·자활센터 등에서 상실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희망과 회복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입니다.

 

사업대상 노숙인 시설, 지역자활센터, 교정시설                              

주최·주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형클레멘트코스
  • 디딤돌인문학
  • 팬지문학상
  • 대상
  • 창백한아이
공공누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대상] 창백한 아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0)

0 / 500 Byte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