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생활자로 무르익는 중이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아는 곳 하나 없지만, 여행자처럼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가위를 맞아 부모님과 걸었던 다산 문화의 거리. 올해로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고향 남양주로 돌아온 지 200년째라고 한다. 꿈에 그리던 마재마을에서 마지막을 보낸 정약용의 마음을 담았다.
ㅣ다산이 사랑한 열수(洌水), 한강
▲ 다산생태공원(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56-35번지 일원) ⓒ 김세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강(斗江)에서 태어난 다산은 한강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고 닦았다. 유배지였던 강진에서 돌아왔어도 자신의 호를 '열수옹(洌水翁), 열초(洌樵)'로 만들 정도로 한강에 푹 빠졌던 그. 어쩌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한강'과 조선시대에 실학을 받아들였던 '다산의 인생'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 다산학의 계보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 ⓒ 김세희
명분을 중요시했던 사회에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는 농민의 참상(哀絶陽)을 보았으니 관리였던 그의 마음도 오죽했을까. 게다가 한강을 통해 전국 각지의 물건과 사람들이 오갔기에, 실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인 '실학'의 미래는 자연스럽게 다산의 삶이었을 듯하다. "자신을 다스려라, 공무에 봉사하라, 백성을 사랑하라."는 철학을 <목민심서>에 담을 만큼.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정치, 행정, 형률, 경제, 기술, 군사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도모했던 그의 열정은 2018년에도 여전했다.
ㅣ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딸을 향한 다산의 마음 ⓒ 김세희
어릴 적부터 들었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놀랐던 순간. 교과서에서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던 때였다. 아직도 생생한 건, 공교롭게도 선생님이 나에게 그 글을 읽은 감흥 물어보아, 부모님의 잔소리가 총집합된 것 같다고 말해서 웃음바다를 만들었던 일. 하지만 시험공부를 하면서 다시금 만난 다산의 가르침은 부모님의 절절함이 묻어나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라면, 시선이 멈출 수밖에 없는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 매화와 새에 시가 곁들여진 그림인 매조도인데, 8살 때 본 딸을 21살이 될 때까지 보지 못하고 시집을 보내는 아버지의 애틋함이 담겼다.
포롱포롱 날아온 새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꽃향기 짙으니
그래서 찾아왔겠지
여기 머물고 깃들어
네 집안을 즐겁게 하려무나
이제 꽃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열릴거야
▲ 아들을 위한 다산의 마음 ⓒ 김세희
사실 딸에게 전한 진심은 '하피첩(霞帔帖)'에서 유래된 일화다. 강진으로 유배를 간 지 7년째, 정약용의 부인 홍씨는 결혼 30년을 맞아 남편을 그리며 시를 쓰고, 시집올 때 입은 붉은 비단치마를 보냈다. 다산은 그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잘라서, 학연과 학유 두 아들에게 정성 어린 바람을 전한다. 물론 딸에게도 기별했던 것.
ㅣ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길
▲ 정약용의 발자취가 있는 실학박물관(좌)과 다산문화관(우) ⓒ 김세희
서양의 문물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 지리학은 크게 융성했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여러 나라를 독자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체제의 개혁을 논하는 '경세치용', 상업과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 실증적인 학문인 '실사구시' 모두 원류는 하나. 오늘도 탁상공론에 그치는 잘못된 관행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교훈이 살아 있었다.
▲ 다산 문화의 거리에 마련된 공원 ⓒ 김세희
다산에게 강진 생활은 고통이었지만, 5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는 아픔에서 피어났다.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고, 저술작업을 함께하며 세상의 변화를 이끈 다산 정약용. 그의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이 온 것 같아 순간 숙연해졌다.
▲ 다산의 생가 여유당. 홍수에 유실된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 김세희
다산은 정조가 서거한 이후 "코끼리(與)가 겨울 살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고, 원숭이(猶)가 주변을 살피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의 여유당을 떠나 유배를 산다. 언제 돌아갈까 가슴을 졸이며 항상 잊지 않았던 여유당에 깃든 목소리, '세상이 두려운 사람은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이후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는 <여유당집>을 만들고 쇠약해진 심신을 달래며 말년을 보내게 된다. 세상을 바꾸고자 거침없이 외쳤지만,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했던 다산 정약용. 남양주 생활인으로 적잖이 부끄럽고, 뿌듯했던 날이었다.
김세희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여행 콘텐츠 에디터로서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발빠르게 노마드의 삶을 걷고 있다.
낯선 이가 우리의 인문 기억에 놀러오는 일은 생각만 해도 설레고 두근거린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함께 응원하는 온기를 뼈 마디마디에 불어넣고 싶다.
어떤 바람도 어떤 파도도 잔잔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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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고향에 머물다
남양주 다산 유적지
인문쟁이 김세희
2018-10-04
남양주 생활자로 무르익는 중이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아는 곳 하나 없지만, 여행자처럼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가위를 맞아 부모님과 걸었던 다산 문화의 거리. 올해로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고향 남양주로 돌아온 지 200년째라고 한다. 꿈에 그리던 마재마을에서 마지막을 보낸 정약용의 마음을 담았다.
ㅣ다산이 사랑한 열수(洌水), 한강
▲ 다산생태공원(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56-35번지 일원) ⓒ 김세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강(斗江)에서 태어난 다산은 한강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고 닦았다. 유배지였던 강진에서 돌아왔어도 자신의 호를 '열수옹(洌水翁), 열초(洌樵)'로 만들 정도로 한강에 푹 빠졌던 그. 어쩌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한강'과 조선시대에 실학을 받아들였던 '다산의 인생'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 다산학의 계보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 ⓒ 김세희
명분을 중요시했던 사회에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는 농민의 참상(哀絶陽)을 보았으니 관리였던 그의 마음도 오죽했을까. 게다가 한강을 통해 전국 각지의 물건과 사람들이 오갔기에, 실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인 '실학'의 미래는 자연스럽게 다산의 삶이었을 듯하다. "자신을 다스려라, 공무에 봉사하라, 백성을 사랑하라."는 철학을 <목민심서>에 담을 만큼.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정치, 행정, 형률, 경제, 기술, 군사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도모했던 그의 열정은 2018년에도 여전했다.
ㅣ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딸을 향한 다산의 마음 ⓒ 김세희
어릴 적부터 들었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놀랐던 순간. 교과서에서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던 때였다. 아직도 생생한 건, 공교롭게도 선생님이 나에게 그 글을 읽은 감흥 물어보아, 부모님의 잔소리가 총집합된 것 같다고 말해서 웃음바다를 만들었던 일. 하지만 시험공부를 하면서 다시금 만난 다산의 가르침은 부모님의 절절함이 묻어나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라면, 시선이 멈출 수밖에 없는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 매화와 새에 시가 곁들여진 그림인 매조도인데, 8살 때 본 딸을 21살이 될 때까지 보지 못하고 시집을 보내는 아버지의 애틋함이 담겼다.
포롱포롱 날아온 새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꽃향기 짙으니
그래서 찾아왔겠지
여기 머물고 깃들어
네 집안을 즐겁게 하려무나
이제 꽃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열릴거야
▲ 아들을 위한 다산의 마음 ⓒ 김세희
사실 딸에게 전한 진심은 '하피첩(霞帔帖)'에서 유래된 일화다. 강진으로 유배를 간 지 7년째, 정약용의 부인 홍씨는 결혼 30년을 맞아 남편을 그리며 시를 쓰고, 시집올 때 입은 붉은 비단치마를 보냈다. 다산은 그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잘라서, 학연과 학유 두 아들에게 정성 어린 바람을 전한다. 물론 딸에게도 기별했던 것.
ㅣ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길
▲ 정약용의 발자취가 있는 실학박물관(좌)과 다산문화관(우) ⓒ 김세희
서양의 문물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 지리학은 크게 융성했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여러 나라를 독자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체제의 개혁을 논하는 '경세치용', 상업과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 실증적인 학문인 '실사구시' 모두 원류는 하나. 오늘도 탁상공론에 그치는 잘못된 관행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교훈이 살아 있었다.
▲ 다산 문화의 거리에 마련된 공원 ⓒ 김세희
다산에게 강진 생활은 고통이었지만, 5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는 아픔에서 피어났다.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고, 저술작업을 함께하며 세상의 변화를 이끈 다산 정약용. 그의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이 온 것 같아 순간 숙연해졌다.
▲ 다산의 생가 여유당. 홍수에 유실된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 김세희
다산은 정조가 서거한 이후 "코끼리(與)가 겨울 살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고, 원숭이(猶)가 주변을 살피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의 여유당을 떠나 유배를 산다. 언제 돌아갈까 가슴을 졸이며 항상 잊지 않았던 여유당에 깃든 목소리, '세상이 두려운 사람은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이후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는 <여유당집>을 만들고 쇠약해진 심신을 달래며 말년을 보내게 된다. 세상을 바꾸고자 거침없이 외쳤지만,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했던 다산 정약용. 남양주 생활인으로 적잖이 부끄럽고, 뿌듯했던 날이었다.
* 다산 유적지 안내
https://www.nyj.go.kr/culture/1743?action=read&action-value=ODc0YmYxNjVhMzZjYWQ4YmI5MDBmMDUwYjljYzU4Y2Q%3D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3기, 4기, 5기]
김세희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여행 콘텐츠 에디터로서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발빠르게 노마드의 삶을 걷고 있다. 낯선 이가 우리의 인문 기억에 놀러오는 일은 생각만 해도 설레고 두근거린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함께 응원하는 온기를 뼈 마디마디에 불어넣고 싶다. 어떤 바람도 어떤 파도도 잔잔해질 수 있도록.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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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골목에 예술의 향기를 피우다
인문쟁이 이재형
세상을 밝히는 은혜의 빛
인문쟁이 양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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