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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자연을 닮은 우리네 어머니의 30년 기록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할머니

최훈

20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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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도라지 팔아 산 공책에 담긴 평범한 하루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 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의 지혜와 연륜도 쌓여 간다는 것. 언제부턴가 지혜와 연륜이 새로운 전문지식과 기술에 밀려나는 세태가 됐지만,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평범한 지혜는 아직까지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하루의 일상을 기록해온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 또한 그렇다. 삶을, 자연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아흔일곱 번째 가을을 맞고 있는 양양 송천마을의 이옥남 할머니는 지난 1987년부터 30여 년간 일기를 써왔다. 1922년 양양군 서면 갈천리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배워야 할 어린 시절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여성들이 학교 다니기 쉽지 않은 때였고, 이옥남 할머니 역시 "여자가 글을 배우면 시집가 편지질로 부모 마음에 못만 박는다."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글씨를 쓰고 있는 이옥남 할머니

 

"글씨가 쓰고 싶은데 뭐이 있어야 쓰지요, 부엌에서 불때민(불 때면서) 재 긁어 놓고 '가'자 써보고 '나'자 써보고 이렇게 배웠어요."

 

오빠가 한글을 배울 때 어깨너머로 보고 부엌 아궁이 앞에서 재 위에 '가나다…'를 써가며 한글을 익혔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지금 살고 있는 송천리 떡 마을로 시집을 왔다. 시부모를 모시고 남의 집 김매주고 품팔이하며 살아야 했던 할머니는 시부모,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글자를 아는 체도 못 했다. 그러다가 남편과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글자를 써 볼 수 있게 됐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세월이 다 지나가고 남편이 저세상 가고 나 혼자 지내다 적적해서 글씨나 좀 나아질까 하고 도라지 까서 판 돈으로 공책을 사서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일복을 타고나서 일을 할 때가 행복하고, 일을 해야 정신이 나는데 나이 많아 숨차고 일이 줄어드니 일기라고 쓸 것도 없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나서야 산나물을 장에 내다 판 돈으로 공책을 사 글씨 연습을 했고, 환갑을 훌쩍 넘긴 1987년에서야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투둑새 소리, 매미소리에 맴(마음)이 설레고 매미가 빨리 짐(김)매라고 '맴맴맴맴' 어찌나 허리를 빨리 잘도 놀리는지 '재주도 좋다’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입으로도 그렇게 재빨리 못하겠는데 허리로 재빠르게 '꼬불랑 꼬불랑’하며 소리를 내는지. 매미야 나도 너처럼 예쁜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연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할머니의 글들은 일기라기보다는 시가 됐다.

 

좌) 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이옥남 할머니, 우) 돋보기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이옥남 할머니

 

 

ㅣ하루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고

 

"전에는 뻐꾸기 울기 전에 깨모를 부어야 기름이 잘 난다고 했는데 이제는 날씨가 바뀌어서 뻐꾸기가 울고도 한참 더 있다가 깨모를 붓는다고 한다. 콩도 전에는 소만에 심었는데 지금은 하지가 다 되어서 심고, 모든 것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늙은이가 필십이나 넘겨 먹어 젊은사람한테 '사시요 사시요’하니 부끄럽다. 그래도 애써 가꾼 생각하고 운전운전 다닌다. 강낭콩이 잘 열어서 다 먹게된 것이 날마다 비만 오니 자꾸 싹이 나싸서 보기가 딱해서 할 수 없이 내자신을 욕하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팔러 다닌다."

 

일기에는 새소리, 매미 소리나 자라나는 콩 같은 시골의 자연과 마을 주민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풍경화처럼 그려졌다. 자연 속에 살며 자연을 닮아버린 할머니의 마음씨는 일기장 곳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장

 

어느 해에는 강원도 삼척에 큰불이 났다는 소식을 TV로 접하고 "읍에서는 불난리 만난 사람들에게 줄 옷을 구하고 있더라"며 장롱을 열고 옷을 꺼냈다. "내가 필요 없는 걸 주면 그것도 죄여. 내가 아까워하는 걸 줘야지"라며 며느리가 선물해 준 남방, 아직 한 번밖에 입지 않은 외투, 예쁜 치마, 그리고 편지를 써서 털신 속에 넣고 보따리에 곱게 쌌다.

 

"화재 본 분들께 뭐라고 말씀 드려야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텔레비 보고 너무 맘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내 맘 같아서는 돈이라도 좀 부쳐드리고 싶은데 매사가 부족하니 맘대로 되지 않네요. 그러나 대단치 않은 의복이라도 보내니 우선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에 자연만큼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는 자식들. 떨어져 살며 늘 궁금하고 늘 그리운 마음이 꾸밈새 없이 솔직하다.

 

"'돈복이 전화 받아라'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뛰어가 받았다. 할 말도 많건만 왠지 전화기만 들면 말문이 막혀 버리니 하고픈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끝나고 만다. 타관 객지에 있는 돈복이는 고향이 그립겠지만 엄마는 자식들이 늘 그립다. 언제나 늘 곁에 두고 보고 싶건만, 그 원수놈의 돈이 무엇인지 생활에 쫓기다 보니 늘 그립고 보고 싶다. 서산에 해는 지고 어둠이 깔리는구나."

 

할머니의 일기에는 이처럼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걸어온, 또 걷고 있는 솔직하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할머니의 일기와 살아가는 이야기는 손자인 탁동철 교사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평생 공부한다."라는 사례를 들기 위해 학생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할머니의 일기 가운데 151편을 추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발간하게 되었다. 책이 발간되자 송천리 이웃 주민들은 얼마 전 마을회관에서 작은 출판기념회를 열어 할머니를 축하했다.

 

손자인 탁동철 교사는 "짐승이나 작은 벌레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 곡식을 가꾸고 거두는 모습, 이웃에 대한 정성이 내가 찾고 싶고, 우리 아이들한테 찾아 주고 싶은 삶"이라고 말한다.

 

자연과 생명을 귀하게 대하고 자식과 이웃을 정성스럽게 맞이하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하루하루의 기록.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속 '추천의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당신의 그 하루가, 우리에겐 백 년의 지혜입니다."

 

도서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이옥남
  • 인생
  • 양양
  • 송천마을
  • 일기
  • 아흔일곱번의봄여름가을겨울
  • 이야기
필자 최훈
최훈

1992년부터 강원도민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 등을 거쳐 현재는 강원도 양양에서 취재를 담당하고 있다. 설악산과 동해바다 등 천혜의 자연조건을 접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살려 야생동물과 연어 등 환경과 관련된 보도에 관심을 갖고 취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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