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인문학 열풍 속에서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오히려 갈증을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인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문에 현답을 들려주실 첫 번째 손님으로 고려대학교 철학과 조성택 교수를 모셨습니다.
Q. 선생님, 인문이란 무엇일까요?
A. “사람이 그리는 무늬”
‘인문’이란 말은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ánĭtas)’, 영어의 ‘휴머니티스(humanities)’에서 나온 말인데, 저는 우리말로 번역된 ‘인문’이란 말을 더 좋아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동양에서 인문이란 건 천문에 대비되는 말로 쓰였어요. 우주를 설명할 때 ‘천지인’, 즉 천문과 인문과 지리가 있다고 하죠. 그야말로 우주의 모든 것이 거기 담기는 거예요. 천문이 여러 자연현상과 우주에 관한 것, 즉 ‘하늘이 그리는 무늬’라면, 인문은 사람 ‘인(人)’에 글월 ’문(文)’인데 ‘사람이 그리는 무늬’라는 뜻인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뜻을 유추하자면 인문은 인간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우리가 그리는 무늬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문이란 말이 좋습니다. 인문을 천문에 대비되는 말로 친다면 자연과학적 세계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의 모든 것이 거기 속하겠지요. 예술, 문학은 인간이 그린 무늬가 되고 역사는 인간이 걸어온 무늬인 거겠죠. 그렇다면 그것을 ‘인문학’이라고 해서 하나의 학문으로 이야기할 때는 어떨까요? 천문이 자연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면, 인문은 인간을 알게 해주는 것이겠죠. 그것은 근본적으로 낯선 것과 마주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내가 아는 것만 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문학을 통하면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사람들과 경험하지 못했던 삶과 마주치게 됩니다.
18세기 소설을 보면 18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가 녹아 있잖아요. 그건 내가 전혀 모르던 세계예요. 그걸 마주치는 건 나의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공감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야기의 공감 능력의 확대가 인류의 폭력성을 현저하게 줄게 했다.” 그 예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입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밀리언셀러가 되었던 소설인데, 이 소설을 통해서 노예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노예 생활의 어려움에 공감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작품이 노예해방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사랑, 폭력 얘기를 통해서 스스로 많은 정화를 하고, 제어하기도 하는 공감능력을 확대해왔다는 거죠. 저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인문학은 내가 늘 익숙하게 생각하던 것, 만나던 것과 다른 걸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게 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합니다. 타인도 미래도 미지의 것인데, 인문학은 그런 미지의 것들을 가시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근본적으로 낯선 것과 마주치는 것이요.
“이문회우(以文會友)”
『논어』에 보면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로써 친구를 모은다’라는 말인데, 거기서 의미하는 ‘문(文)’이 인문인 것 같습니다. “이문회우”는 이익의 논리로 모이는 친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에서든, 학교에서든 주로 자기 이익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모이는데 이익이 아닌, 그야말로 인문을 통해서 만난다는 점에서, ‘이익’이라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 인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익이 아닌 어떤 것들, 그것이 인문의 또 다른 뜻이 아닐까요? 또 이익이 아닌 뭐가 있을까요? 바로 ‘힘’이에요. 권력. 우리는 권력으로 사람을 모으잖아요. 힘센 사람이 모이라고 하면 모여요. 그런데 권력이나 이익이 아닌 것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 그게 인문이라고 생각해요. 정리하자면, 하늘의 이치와 대비되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 이익이나 권력이 아닌 것으로써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 그것이 인문입니다.
Q. 인문학 열풍이 지속되다 보니 마치 인문학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았었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인문학이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게 사실 1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인문학 열풍은 어디서 비롯된 거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A. “교양에 대한 욕구를 넘어 공동체를 위한 인문정신으로”
1차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갖게 되는 문화적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주도해서 예산을 풀었든, 외국에서 유행한 것이든 사람들의 욕구가 없었으면 될 게 아니잖아요. 먹고사는 데만 몰두해왔다가 다시 삶을 돌아보고, 살아온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맞았던 거겠죠. 사람은 의미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라고 자문합니다. 이런 의미화의 욕구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낳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면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현재 인문학 열풍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은 40대 중반에서 1960~1970대에 이르는 분들로 이른바 대중 인문학, 사회 인문학의 주축이자 소비자들인데, 그분들이 대학 때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플라톤의 『향연』, 괴테의 『파우스트』는 들어봤고 내용도 대강 알지만 읽어본 적은 없어요. 『레미제라블』도 영화로 보고 장발장도 아는데 막상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면은 파행적으로 걸어왔던 대학 교육의 단면을 보여주는 걸지도 모릅니다. 제목도, 저자도, 내용도 대충 아는데 막상 읽어보지 않은 숱한 고전들, 그런 것을 알고 싶은 욕구가 그분들에게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인문학이 그런 내면적 욕구, 대학 때 충분히 받지 못했던 교양 교육의 충족에서 그친다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라는 건 내면화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넘쳐서 인문정신으로 나와야 하는 거라고 봐요. 인문정신은 곧 시민정신이고, 시민정신이 민주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 사회는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공동체의 주체가 되는 건데 지금 우리는 개인의 자유, 권리, 교양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는 거예요. 인문이 개인적 만족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흘러넘쳐서 타인에 대한 공감, 약자에 대한 배려, 공동체에 대한 기여, 그리고 결국 민주적인 정신으로 승화하는 게 인문정신이라고 봐요.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인문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렇게 나아가려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허리층이 될 인문활동가의 양성”
인문학에도 양극화 현상과 수도권 밀집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강연자의 대부분은 인문학 연구자나 교육자로서 학문적으로 아주 높은 수준에 있는 소수 대학교수입니다. 그리고 강연을 듣는 대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전공지식을 대중이 알아듣기 좋게 가공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실질적으로도 대학교수가 가장 좋은 강연자라고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소위 재야의 학자들, 고미숙, 강신주 선생 같은 분들이 있죠. 하지만 역시 소수입니다. 요구는 많고 공급은 제한적이다 보니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갈 수는 없어요. 그 중간을 채워줄 인문활동가 양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이 그렇지만, 층이 얇다는 말은 중간 계층이 부족하다는 의미예요. 이름을 어떻게 붙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들을 ‘인문코디네이터’ ‘인문활동가’라고 부르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박물관 큐레이터, 도서관 사서, 정년퇴임한 교수, 교사, 그리고 관료를 지냈던 분들이 중간계층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특정한 직업으로서 인문활동가가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할 역량 있는 분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분들이 인문활동가로서 우리 사회에 힘이 되고, 문화의 두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 열풍이 시민정신으로 이어지려면 그런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정책적으로 만들어줘야겠죠. 인문학 단체가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예산이 쓰이고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에서 활동가들이 나오면 대학교수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멋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올 거로 생각해요. 좀 더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는 정부가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자 한 해 약 200~300억 정도의 예산을 인문학 강좌에 썼는데, 그러다 보니 무료 강좌가 많아지면서 본의 아니게 인문학 단체들이 타격을 입었어요. 소정의 강의료는 받아야 운영이 되는데 인문학 강의는 공짜라는 인식이 생긴 거죠.
Q.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뜨거운데 대학 내 인문학은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인문학이 세계에 대한 독점적인 설명력을 잃었다”
대학 교육과 인문 교육 내용에 관한 전반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고 봐요. 저도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만, 지금까지 가르쳐왔던 철학으로 과연 21세기를 맞을 수 있을까, 심각한 위기를 느낍니다. 우리는 철학사를 가르쳐왔지, 철학을 가르쳐온 것 같지 않아요. 대학 내 철학과 교수들의 전공 영역을 보더라도 주제적인 접근으로 채용하는 게 아니라 철학사의 영역을 살피는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육도 철학하는 힘을 길러주는 방식에 관한 게 아니라 철학사적 지식을 전수하는 데 치중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과 우려가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학 안에서 인문학은 계속 죽고 있어요. 10년 뒤에 인문학 교수가 반이라도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문학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상아탑 안에 갇혀 있던 인문학이 바깥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인류의 문명사나 교육사에서 본다면 어떤 학문은 성했다가 망하고 부침과 변화를 겪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학문 내에서도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법이지요.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이 과거에 갖고 있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독점적인 설명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인문학이 학문의 기초로서 그 지위를 잃었어요. 심리학을 공부하는데 굳이 문학, 사학, 철학을 안 닦아도 잘할 수 있게끔 되어 있어요. 생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생물학, 천문학, 심리학, 정치학이 세계에 관해서 설명을 더 잘하는 거예요.
“새로운 인문학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인문학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인문학이라는 건 기존의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대비되는 분과 학문으로서 좁은 의미의 인문학이 아닌 모든 학문과 인간에 대한 종합으로서 인문학이 되겠죠.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의 성과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종합한 학문으로서 인문학이 등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학문 분과에서 만들어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함께 사유하고,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문학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라고 볼 수 있죠.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의 쇠퇴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늘 그렇듯 좋은 연구자들이 떠나지 않게 지원하고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인문학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인문학의 쇠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하버드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아주 세밀한 분야라도 일급 학자들을 유지하고 있는 게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조성택 교수
‘이문회우(以文會友)’, 문(文)으로써 친구를 모으다
2016-09-29
계속되는 인문학 열풍 속에서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오히려 갈증을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인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문에 현답을 들려주실 첫 번째 손님으로 고려대학교 철학과 조성택 교수를 모셨습니다.
Q. 선생님, 인문이란 무엇일까요?
A. “사람이 그리는 무늬”
‘인문’이란 말은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ánĭtas)’, 영어의 ‘휴머니티스(humanities)’에서 나온 말인데, 저는 우리말로 번역된 ‘인문’이란 말을 더 좋아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동양에서 인문이란 건 천문에 대비되는 말로 쓰였어요. 우주를 설명할 때 ‘천지인’, 즉 천문과 인문과 지리가 있다고 하죠. 그야말로 우주의 모든 것이 거기 담기는 거예요. 천문이 여러 자연현상과 우주에 관한 것, 즉 ‘하늘이 그리는 무늬’라면, 인문은 사람 ‘인(人)’에 글월 ’문(文)’인데 ‘사람이 그리는 무늬’라는 뜻인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뜻을 유추하자면 인문은 인간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우리가 그리는 무늬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문이란 말이 좋습니다.
인문을 천문에 대비되는 말로 친다면 자연과학적 세계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의 모든 것이 거기 속하겠지요. 예술, 문학은 인간이 그린 무늬가 되고 역사는 인간이 걸어온 무늬인 거겠죠. 그렇다면 그것을 ‘인문학’이라고 해서 하나의 학문으로 이야기할 때는 어떨까요? 천문이 자연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면, 인문은 인간을 알게 해주는 것이겠죠. 그것은 근본적으로 낯선 것과 마주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내가 아는 것만 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문학을 통하면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사람들과 경험하지 못했던 삶과 마주치게 됩니다.
18세기 소설을 보면 18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가 녹아 있잖아요. 그건 내가 전혀 모르던 세계예요. 그걸 마주치는 건 나의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공감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야기의 공감 능력의 확대가 인류의 폭력성을 현저하게 줄게 했다.”
그 예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입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밀리언셀러가 되었던 소설인데, 이 소설을 통해서 노예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노예 생활의 어려움에 공감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작품이 노예해방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사랑, 폭력 얘기를 통해서 스스로 많은 정화를 하고, 제어하기도 하는 공감능력을 확대해왔다는 거죠. 저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인문학은 내가 늘 익숙하게 생각하던 것, 만나던 것과 다른 걸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게 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합니다. 타인도 미래도 미지의 것인데, 인문학은 그런 미지의 것들을 가시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근본적으로 낯선 것과 마주치는 것이요.
“이문회우(以文會友)”
『논어』에 보면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로써 친구를 모은다’라는 말인데, 거기서 의미하는 ‘문(文)’이 인문인 것 같습니다. “이문회우”는 이익의 논리로 모이는 친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에서든, 학교에서든 주로 자기 이익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모이는데 이익이 아닌, 그야말로 인문을 통해서 만난다는 점에서, ‘이익’이라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 인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익이 아닌 어떤 것들, 그것이 인문의 또 다른 뜻이 아닐까요? 또 이익이 아닌 뭐가 있을까요? 바로 ‘힘’이에요. 권력. 우리는 권력으로 사람을 모으잖아요. 힘센 사람이 모이라고 하면 모여요. 그런데 권력이나 이익이 아닌 것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 그게 인문이라고 생각해요. 정리하자면, 하늘의 이치와 대비되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 이익이나 권력이 아닌 것으로써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 그것이 인문입니다.
Q. 인문학 열풍이 지속되다 보니 마치 인문학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았었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인문학이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게 사실 1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인문학 열풍은 어디서 비롯된 거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A. “교양에 대한 욕구를 넘어 공동체를 위한 인문정신으로”
1차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갖게 되는 문화적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주도해서 예산을 풀었든, 외국에서 유행한 것이든 사람들의 욕구가 없었으면 될 게 아니잖아요. 먹고사는 데만 몰두해왔다가 다시 삶을 돌아보고, 살아온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맞았던 거겠죠. 사람은 의미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라고 자문합니다. 이런 의미화의 욕구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낳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면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현재 인문학 열풍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은 40대 중반에서 1960~1970대에 이르는 분들로 이른바 대중 인문학, 사회 인문학의 주축이자 소비자들인데, 그분들이 대학 때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플라톤의 『향연』, 괴테의 『파우스트』는 들어봤고 내용도 대강 알지만 읽어본 적은 없어요. 『레미제라블』도 영화로 보고 장발장도 아는데 막상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면은 파행적으로 걸어왔던 대학 교육의 단면을 보여주는 걸지도 모릅니다. 제목도, 저자도, 내용도 대충 아는데 막상 읽어보지 않은 숱한 고전들, 그런 것을 알고 싶은 욕구가 그분들에게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인문학이 그런 내면적 욕구, 대학 때 충분히 받지 못했던 교양 교육의 충족에서 그친다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라는 건 내면화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넘쳐서 인문정신으로 나와야 하는 거라고 봐요. 인문정신은 곧 시민정신이고, 시민정신이 민주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 사회는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공동체의 주체가 되는 건데 지금 우리는 개인의 자유, 권리, 교양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는 거예요. 인문이 개인적 만족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흘러넘쳐서 타인에 대한 공감, 약자에 대한 배려, 공동체에 대한 기여, 그리고 결국 민주적인 정신으로 승화하는 게 인문정신이라고 봐요.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인문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렇게 나아가려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허리층이 될 인문활동가의 양성”
인문학에도 양극화 현상과 수도권 밀집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강연자의 대부분은 인문학 연구자나 교육자로서 학문적으로 아주 높은 수준에 있는 소수 대학교수입니다. 그리고 강연을 듣는 대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전공지식을 대중이 알아듣기 좋게 가공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실질적으로도 대학교수가 가장 좋은 강연자라고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소위 재야의 학자들, 고미숙, 강신주 선생 같은 분들이 있죠. 하지만 역시 소수입니다. 요구는 많고 공급은 제한적이다 보니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갈 수는 없어요. 그 중간을 채워줄 인문활동가 양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이 그렇지만, 층이 얇다는 말은 중간 계층이 부족하다는 의미예요. 이름을 어떻게 붙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들을 ‘인문코디네이터’ ‘인문활동가’라고 부르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박물관 큐레이터, 도서관 사서, 정년퇴임한 교수, 교사, 그리고 관료를 지냈던 분들이 중간계층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특정한 직업으로서 인문활동가가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할 역량 있는 분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분들이 인문활동가로서 우리 사회에 힘이 되고, 문화의 두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 열풍이 시민정신으로 이어지려면 그런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정책적으로 만들어줘야겠죠. 인문학 단체가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예산이 쓰이고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에서 활동가들이 나오면 대학교수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멋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올 거로 생각해요. 좀 더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는 정부가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자 한 해 약 200~300억 정도의 예산을 인문학 강좌에 썼는데, 그러다 보니 무료 강좌가 많아지면서 본의 아니게 인문학 단체들이 타격을 입었어요. 소정의 강의료는 받아야 운영이 되는데 인문학 강의는 공짜라는 인식이 생긴 거죠.
Q.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뜨거운데 대학 내 인문학은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인문학이 세계에 대한 독점적인 설명력을 잃었다”
대학 교육과 인문 교육 내용에 관한 전반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고 봐요. 저도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만, 지금까지 가르쳐왔던 철학으로 과연 21세기를 맞을 수 있을까, 심각한 위기를 느낍니다. 우리는 철학사를 가르쳐왔지, 철학을 가르쳐온 것 같지 않아요. 대학 내 철학과 교수들의 전공 영역을 보더라도 주제적인 접근으로 채용하는 게 아니라 철학사의 영역을 살피는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육도 철학하는 힘을 길러주는 방식에 관한 게 아니라 철학사적 지식을 전수하는 데 치중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과 우려가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학 안에서 인문학은 계속 죽고 있어요. 10년 뒤에 인문학 교수가 반이라도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문학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상아탑 안에 갇혀 있던 인문학이 바깥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인류의 문명사나 교육사에서 본다면 어떤 학문은 성했다가 망하고 부침과 변화를 겪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학문 내에서도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법이지요.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이 과거에 갖고 있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독점적인 설명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인문학이 학문의 기초로서 그 지위를 잃었어요. 심리학을 공부하는데 굳이 문학, 사학, 철학을 안 닦아도 잘할 수 있게끔 되어 있어요. 생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생물학, 천문학, 심리학, 정치학이 세계에 관해서 설명을 더 잘하는 거예요.
“새로운 인문학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인문학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인문학이라는 건 기존의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대비되는 분과 학문으로서 좁은 의미의 인문학이 아닌 모든 학문과 인간에 대한 종합으로서 인문학이 되겠죠.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의 성과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종합한 학문으로서 인문학이 등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학문 분과에서 만들어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함께 사유하고,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문학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라고 볼 수 있죠.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의 쇠퇴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늘 그렇듯 좋은 연구자들이 떠나지 않게 지원하고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인문학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인문학의 쇠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하버드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아주 세밀한 분야라도 일급 학자들을 유지하고 있는 게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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