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잡이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부유했다는 울산 장생포.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쇠퇴했던 마을이 다시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사라져가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가 있다.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조성원 협업자를 만나보자.
사라져가는 장생포의 사람과 건물을 기록하다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는 사라져가는 울산 장생포의 건물, 사람을 예술로 표현하고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조성원 협업자는 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시대와 함께 변모해가는 지역의 모습에 관심이 많아 인천 소래의 소금창고, 동대문 디지털플라자 등을 조사하고 아카이빙 작업을 해왔다. 현재 울산남구문화원이 운영하는 장생포 아트스테이 5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올해 3월 장생포로 내려와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너무 흥미로운 곳이에요. 과거에는 고래를 잡으면서 번성했고, 고래 포경이 금지되면서 쇠퇴한 현재는 그 흔적을 관광문화상품으로 이용하죠. 요즘은 저 밑에 있는 옛 세창 냉동창고를 ‘A-팩토리’라는 아트팩토리로 만들려고 하고요. 고래라는 연결고리가 있으되 역할과 문화는 계속 바뀌어가고 있는 거예요.”
장생포는 1960~70년대 고래잡이 전성기에 20여 척의 포경선과 1만여 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부유한 마을이었다. 주민 80%가 고래잡이나 고래음식점 등 고래 관련 일로 생계를 이었다. 1986년 상업포경이 금지되면서 인근 공업단지로 주민 대부분이 이주하면서 쇠퇴하여 현재는 3천 명 정도로 인구수가 급감했다. 현재 주민 대부분은 고령으로, 과거의 화려한 기억을 간직하며 장생포에서 살아가고 있다. 조용하던 마을은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면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관광객을 서서히 끌어들이며 다시 활기를 띠고 있지만 협업자는 지금의 그리고 과거의 마을을 기록하고자 다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질 건데, 그러면서 노인분들이 가진 기억, 머물렀던 장소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죠. 이게 다 사라지면 후대 사람들은 새로 생긴 건물만 보고 지나갈 뿐 이곳의 역사성이라든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거잖아요. 그래서 지역 주민과 협업해 이분들이 머물렀던 장소와 변화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해 전시하는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었어요.”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준 울산남구문화원
처음 조성원 협업자의 기획은 다채로웠다. 지역주민을 참여자로 모집하여 각자 추억의 공간을 이야기하고 이를 함께 다양한 방식의 예술 작품으로 제작해 전시회를 열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먹은 기획을 실행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타지에서 온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의 벽을 낮추는 것부터가 커다란 숙제였다.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 하시고 많이 꺼려 하셨어요. 타지 사람들이 와서 자꾸 물어보고 사진이랑 영상으로 얼굴 찍어가는 게 얼마나 불편하시겠어요.”
코로나19 사태로 대면 프로그램이 조심스러워진 것도 한몫했다. 고민 끝에 조 협업자는 프로그램 기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울산남구문화원과의 협업이 큰 힘이 되었다.
“고민 상담도 해주시고, 인터뷰할 주민분을 소개해주시기도 했어요. 또 이 생활문화시설 인문프로그램 지원사업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면 많이 알려주셨어요. 울산남구문화원이 이 지원사업에 참여한 게 이번이 두 번째라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간 운용이라든가 준비과정에 있어서 조언을 해주셨죠.”
울산남구문화원은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장생포의 유휴공간을 리모델링해 장생포 문화지원센터 문화마당 새미골, 창작스튜디오 장생포 고래로 131, 장생포 아트스테이 등 문화예술촌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조성원 협업자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프로그램 기획을 바꿔나갔다. 지역주민들을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이를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중간중간 병행한다. 인터뷰를 위해서 우선적 작업은 주민과의 친밀감 형성이었다.
“친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무의식에서부터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벽을 쌓아두고 겉만 조금 드러내는 내용일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에게 자주 인사드렸어요. 보통 장사를 많이 하세요. 그래서 그분들 가게, 식당 등을 많이 이용하면서 친해지는 거죠. 갈 때마다 도울 일 없는지 여쭙고, 요구르트 같은 걸 사다 드리기도 하고요."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노력으로 마음의 벽이 낮춰지자 주민들은 인터뷰를 허락하고, 주위 다른 주민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어떤 가게가 오래됐다, 어떤 사람이 제일 오래 살았다, 소개를 해주세요.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 장생포에 대해 가장 많이 안다고 판단되는 분을 선택해 인터뷰했어요.”
그렇게 현재까지 장생포 주민 열다섯 명 정도를 만나 작업했다. 최종 결과물에는 일곱 명 정도의 이야기가 실릴 예정이다. 장생포에서 가장 오래된 철물점인 ‘나이롱 상회’,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미용실인 ‘건하미용실’, 가장 오래된 가게인 이발소 ‘평이용원’ 등이 그가 찾아가 이야기를 수집한 장소이다.
“고래마을 특구로 지정되기 전에는 저 아래에 도로가 없고 다 집이었대요. 도로를 내면서 집을 다 허문 거예요. 어떤 할머니는 그렇게 수십 년 살아온 주거공간이 헐리고 현재 다른 집에 세를 들어 살고 계세요. 그런 걸 보면 참 안타깝고, 주민분들도 슬퍼하죠. 저 도로를 따라 양옆에 있는 건물이 제가 장생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40, 50년 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들을 볼 수 있거든요.”
결과물은 책과 영상으로 제작된다. 책에는 QR코드를 넣어 QR 코드를 찍으면 영상으로 그가 수집한 장생포의 추억의 공간들과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더 나은 작업을 꿈꾸며
조성원 협업자는 앞으로도 장생포에 대해 더 깊이 조사하고 작업을 이어나가려 한다. 이번처럼 혼자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협업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이 주변의 공장단지와 장생포의 부식집이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은 주제다.
“이렇게 역사가 깊은 부식집이 없어요. 장생포에는 마을 규모 대비 부식집이 엄청나게 많아요. 몇 달씩 배가 바다로 가서 머물 때 먹을 식량을 부식집에 미리 주문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 슈퍼는 일반 슈퍼와 다르게 커다란 냉장고와 냉동고가 있어요. 주문한 식량을 오랫동안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조 협업자는 이를 위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며 작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현대미술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간 소통’과 ‘작가의 진정성’이 작업에 표현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금방금방 끝나면 이루는 게 없어요. 2년 정도 머물면서 연속적, 지속적으로 해야 이루는 게 있거든요. 2년 정도 있어야 그 지역을 좀 안다, 거기서 예술활동 해봤다, 말할 수 있겠다 생각해요. 내년에는 이번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좀 더 진정성 있는 작업, 밑바닥에서 퍼올린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어요.”
+참여자 인터뷰
장생포에서 이발소 ‘평이용원’을 운영하고 계신 박주평님! 조성원 협업자에게 장생포와 평이용원에 얽힌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고 계신데요.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감이 어떤지, 함께 들어볼까요?
Q. 울산 장생포에서 몇 살 때부터 살아오셨나요?
열네 살 때 혼자 장생포에 왔지. 고향은 여수 율촌이고. 1969년 12월 27일에 왔어. 우리 아버지가 여수 서 대목이었어. 여수, 여천 한옥은 우리 할아버지 대부터 다 지은 그런 집이었어. 그러다 여순반란사건 때 우리 작은아버지가 연루되어서 잡혀가서 빼내온다고 재산을 다 잃었지. 작은아버지는 무기징역 받았는데 18년 살고 나오셨어. 그 당시에는 연좌제가 있어가지고 여수에서 살 길이 없었어.
내가 공부를 좀 했는데 공직으로 나갈 수도 없겠고. 장생포에 팔촌 관계인 사람이 있었어. 내보다 두 살 더 먹었는데 편지 쓰니까 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때 돈 2만 원인가 3만 원을 갖고 집 멀리, 아버지 멀리 여기까지 도망을 온 거지.
Q. 이발 기술은 어떻게 배우셨고 언제부터 평이용원을 운영하셨어요?
여기 오니까 재워주고 밥 먹여주고 이발소 일 시키고 월급을 천 원 주더라고. 그렇게 이발 기술을 배웠지. 여기서 쭉 살면서 일하다가 군대 제대하고 74년도에 면허증을 땄어. 시험 치려고 두꺼운 책을 한 권 다 외워뿌렀다고. 81년도에 이발원을 차렸으니까 한 40년 정도 된 거지. 옛날에는 저 위쪽에서 이발관을 하다가 여기로 옮겨왔지. 여기서는 4년, 혼자 하고 있는데 전에는 종업원이 다섯 명까지 있었어. 그때는 잘 됐지. 뱃사람들이 많으니까. 머리 깎아준 사람 수가 엄청나지.
Q. 장생포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라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발소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나 일화가 있으세요?
내가 국민학교를 1학년 1학기를 못 마쳤어. 형편이 안 되가 그만두고 서당에를 갔어. 나랑 국민학교 한 반에 있던 친구 중에 집이 잘살고 공부도 최고 잘하는 아가 있었어. 그 아가 해양대학교 나와가지고 선장질을 했어. 내하고 연락이 되어가 여기 와서 만났지.
Q. 조성원 선생님이 와서 선생님께 이야기도 듣고 촬영도 해가시는데요. 해보니 어떠셨나요?
저분이 몇 번 왔드라고. 큰맘 먹었지. 동네 사람이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이야기해줘도 되겠다, 그래가 한 거지. 동네가 어떻게 변했는가, 옛날엔 어쨌는가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여기서 이만큼 살았나 옛날을 되짚어보게 되고. 봉사활동으로 시장상, 도지사상, 국장상, 상도 많이 받았는데 그런 추억이 다 생각이 나지.
어느 지역든 고유 역사와 이야기가 있지만, 울산 장생포는 조금 더 특이하고 흥미로운 것 같아요.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고래'로 이어지고, 만들어진 마을이여서 그럴까요?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가는 장생포지만 조성원 협업자님의 기록으로 과거를 더 따스하게 간직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록'이라는 진정성 있는 인문 활동을 하고 계시는 협업자 님 역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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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울산남구문화원 조성원 협업자 :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
2021-03-18
고래잡이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부유했다는 울산 장생포.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쇠퇴했던 마을이 다시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사라져가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가 있다.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조성원 협업자를 만나보자.
사라져가는 장생포의 사람과 건물을 기록하다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는 사라져가는 울산 장생포의 건물, 사람을 예술로 표현하고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조성원 협업자는 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시대와 함께 변모해가는 지역의 모습에 관심이 많아 인천 소래의 소금창고, 동대문 디지털플라자 등을 조사하고 아카이빙 작업을 해왔다. 현재 울산남구문화원이 운영하는 장생포 아트스테이 5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올해 3월 장생포로 내려와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너무 흥미로운 곳이에요. 과거에는 고래를 잡으면서 번성했고, 고래 포경이 금지되면서 쇠퇴한 현재는 그 흔적을 관광문화상품으로 이용하죠. 요즘은 저 밑에 있는 옛 세창 냉동창고를 ‘A-팩토리’라는 아트팩토리로 만들려고 하고요. 고래라는 연결고리가 있으되 역할과 문화는 계속 바뀌어가고 있는 거예요.”
장생포는 1960~70년대 고래잡이 전성기에 20여 척의 포경선과 1만여 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부유한 마을이었다. 주민 80%가 고래잡이나 고래음식점 등 고래 관련 일로 생계를 이었다. 1986년 상업포경이 금지되면서 인근 공업단지로 주민 대부분이 이주하면서 쇠퇴하여 현재는 3천 명 정도로 인구수가 급감했다. 현재 주민 대부분은 고령으로, 과거의 화려한 기억을 간직하며 장생포에서 살아가고 있다. 조용하던 마을은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면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관광객을 서서히 끌어들이며 다시 활기를 띠고 있지만 협업자는 지금의 그리고 과거의 마을을 기록하고자 다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질 건데, 그러면서 노인분들이 가진 기억, 머물렀던 장소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죠. 이게 다 사라지면 후대 사람들은 새로 생긴 건물만 보고 지나갈 뿐 이곳의 역사성이라든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거잖아요. 그래서 지역 주민과 협업해 이분들이 머물렀던 장소와 변화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해 전시하는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었어요.”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준 울산남구문화원
처음 조성원 협업자의 기획은 다채로웠다. 지역주민을 참여자로 모집하여 각자 추억의 공간을 이야기하고 이를 함께 다양한 방식의 예술 작품으로 제작해 전시회를 열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먹은 기획을 실행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타지에서 온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의 벽을 낮추는 것부터가 커다란 숙제였다.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 하시고 많이 꺼려 하셨어요. 타지 사람들이 와서 자꾸 물어보고 사진이랑 영상으로 얼굴 찍어가는 게 얼마나 불편하시겠어요.”
코로나19 사태로 대면 프로그램이 조심스러워진 것도 한몫했다. 고민 끝에 조 협업자는 프로그램 기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울산남구문화원과의 협업이 큰 힘이 되었다.
“고민 상담도 해주시고, 인터뷰할 주민분을 소개해주시기도 했어요. 또 이 생활문화시설 인문프로그램 지원사업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면 많이 알려주셨어요. 울산남구문화원이 이 지원사업에 참여한 게 이번이 두 번째라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간 운용이라든가 준비과정에 있어서 조언을 해주셨죠.”
울산남구문화원은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장생포의 유휴공간을 리모델링해 장생포 문화지원센터 문화마당 새미골, 창작스튜디오 장생포 고래로 131, 장생포 아트스테이 등 문화예술촌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조성원 협업자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프로그램 기획을 바꿔나갔다. 지역주민들을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이를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중간중간 병행한다. 인터뷰를 위해서 우선적 작업은 주민과의 친밀감 형성이었다.
“친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무의식에서부터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벽을 쌓아두고 겉만 조금 드러내는 내용일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에게 자주 인사드렸어요. 보통 장사를 많이 하세요. 그래서 그분들 가게, 식당 등을 많이 이용하면서 친해지는 거죠. 갈 때마다 도울 일 없는지 여쭙고, 요구르트 같은 걸 사다 드리기도 하고요."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노력으로 마음의 벽이 낮춰지자 주민들은 인터뷰를 허락하고, 주위 다른 주민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어떤 가게가 오래됐다, 어떤 사람이 제일 오래 살았다, 소개를 해주세요.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 장생포에 대해 가장 많이 안다고 판단되는 분을 선택해 인터뷰했어요.”
그렇게 현재까지 장생포 주민 열다섯 명 정도를 만나 작업했다. 최종 결과물에는 일곱 명 정도의 이야기가 실릴 예정이다. 장생포에서 가장 오래된 철물점인 ‘나이롱 상회’,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미용실인 ‘건하미용실’, 가장 오래된 가게인 이발소 ‘평이용원’ 등이 그가 찾아가 이야기를 수집한 장소이다.
“고래마을 특구로 지정되기 전에는 저 아래에 도로가 없고 다 집이었대요. 도로를 내면서 집을 다 허문 거예요. 어떤 할머니는 그렇게 수십 년 살아온 주거공간이 헐리고 현재 다른 집에 세를 들어 살고 계세요. 그런 걸 보면 참 안타깝고, 주민분들도 슬퍼하죠. 저 도로를 따라 양옆에 있는 건물이 제가 장생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40, 50년 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들을 볼 수 있거든요.”
결과물은 책과 영상으로 제작된다. 책에는 QR코드를 넣어 QR 코드를 찍으면 영상으로 그가 수집한 장생포의 추억의 공간들과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더 나은 작업을 꿈꾸며
조성원 협업자는 앞으로도 장생포에 대해 더 깊이 조사하고 작업을 이어나가려 한다. 이번처럼 혼자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협업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이 주변의 공장단지와 장생포의 부식집이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은 주제다.
“이렇게 역사가 깊은 부식집이 없어요. 장생포에는 마을 규모 대비 부식집이 엄청나게 많아요. 몇 달씩 배가 바다로 가서 머물 때 먹을 식량을 부식집에 미리 주문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 슈퍼는 일반 슈퍼와 다르게 커다란 냉장고와 냉동고가 있어요. 주문한 식량을 오랫동안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조 협업자는 이를 위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며 작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현대미술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간 소통’과 ‘작가의 진정성’이 작업에 표현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금방금방 끝나면 이루는 게 없어요. 2년 정도 머물면서 연속적, 지속적으로 해야 이루는 게 있거든요. 2년 정도 있어야 그 지역을 좀 안다, 거기서 예술활동 해봤다, 말할 수 있겠다 생각해요. 내년에는 이번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좀 더 진정성 있는 작업, 밑바닥에서 퍼올린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어요.”
+참여자 인터뷰
장생포에서 이발소 ‘평이용원’을 운영하고 계신 박주평님! 조성원 협업자에게 장생포와 평이용원에 얽힌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고 계신데요.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감이 어떤지, 함께 들어볼까요?
Q. 울산 장생포에서 몇 살 때부터 살아오셨나요?
열네 살 때 혼자 장생포에 왔지. 고향은 여수 율촌이고. 1969년 12월 27일에 왔어. 우리 아버지가 여수 서 대목이었어. 여수, 여천 한옥은 우리 할아버지 대부터 다 지은 그런 집이었어. 그러다 여순반란사건 때 우리 작은아버지가 연루되어서 잡혀가서 빼내온다고 재산을 다 잃었지. 작은아버지는 무기징역 받았는데 18년 살고 나오셨어. 그 당시에는 연좌제가 있어가지고 여수에서 살 길이 없었어.
내가 공부를 좀 했는데 공직으로 나갈 수도 없겠고. 장생포에 팔촌 관계인 사람이 있었어. 내보다 두 살 더 먹었는데 편지 쓰니까 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때 돈 2만 원인가 3만 원을 갖고 집 멀리, 아버지 멀리 여기까지 도망을 온 거지.
Q. 이발 기술은 어떻게 배우셨고 언제부터 평이용원을 운영하셨어요?
여기 오니까 재워주고 밥 먹여주고 이발소 일 시키고 월급을 천 원 주더라고. 그렇게 이발 기술을 배웠지. 여기서 쭉 살면서 일하다가 군대 제대하고 74년도에 면허증을 땄어. 시험 치려고 두꺼운 책을 한 권 다 외워뿌렀다고. 81년도에 이발원을 차렸으니까 한 40년 정도 된 거지. 옛날에는 저 위쪽에서 이발관을 하다가 여기로 옮겨왔지. 여기서는 4년, 혼자 하고 있는데 전에는 종업원이 다섯 명까지 있었어. 그때는 잘 됐지. 뱃사람들이 많으니까. 머리 깎아준 사람 수가 엄청나지.
Q. 장생포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라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발소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나 일화가 있으세요?
내가 국민학교를 1학년 1학기를 못 마쳤어. 형편이 안 되가 그만두고 서당에를 갔어. 나랑 국민학교 한 반에 있던 친구 중에 집이 잘살고 공부도 최고 잘하는 아가 있었어. 그 아가 해양대학교 나와가지고 선장질을 했어. 내하고 연락이 되어가 여기 와서 만났지.
Q. 조성원 선생님이 와서 선생님께 이야기도 듣고 촬영도 해가시는데요. 해보니 어떠셨나요?
저분이 몇 번 왔드라고. 큰맘 먹었지. 동네 사람이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이야기해줘도 되겠다, 그래가 한 거지. 동네가 어떻게 변했는가, 옛날엔 어쨌는가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여기서 이만큼 살았나 옛날을 되짚어보게 되고. 봉사활동으로 시장상, 도지사상, 국장상, 상도 많이 받았는데 그런 추억이 다 생각이 나지.
어느 지역든 고유 역사와 이야기가 있지만, 울산 장생포는 조금 더 특이하고 흥미로운 것 같아요.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고래'로 이어지고, 만들어진 마을이여서 그럴까요?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가는 장생포지만 조성원 협업자님의 기록으로 과거를 더 따스하게 간직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록'이라는 진정성 있는 인문 활동을 하고 계시는 협업자 님 역시 응원합니다!
○ 출 처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블로그 '생활인문, 인문으로 살아가기' https://blog.naver.com/korea-humanist/222174814789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인터뷰] 울산남구문화원 조성원 협업자 : 추억의 장소 만들며 기록하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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