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 간 여성 계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계나는 날로 취업은 힘들어지고, 여성이 가지는 압박이 배로 크고, 아등바등 살아봐도 미래가 불투명한 이곳 한국이 싫어서, 누군가는 그 대안으로 호주를 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희원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홀리워킹데이>는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호주의 워킹 홀리데이를 가서, 그곳의 노동을 체험하며 써내려간 기록이다. 다큐멘터리 속 20대처럼 영어와 스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청년들의 수는 상당하다. 목적을 가지고 온 듯 보이지만, 막상 생활을 해보면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그곳에서 고생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한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희원 감독이 영화의 말미, 굳이 젊은이에게, 특히 여성에게 더 혹독한 한국이 아닌 그곳이 어디든 더 살기 좋은 다른 곳을 택할 수 있다는 시선을 둔다는 것이었다.
▲ 포기가 일반화된 사회
돌이켜보면 한국인에게 ‘한국이 싫다’고 말하는 게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자수성가 신화가 존재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열심히 하면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으니,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미덕이던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달라졌다. 젊은이들은 이제 절대적으로 이곳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떨친다. 최근엔 청년들이 나서 ‘최저 시급 1만 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 달 100만 원 수입도 못 올리는 아르바이트가 더는 용돈 벌이가 아닌 생계인 곳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열심히 일하는 것의 신화가 깨진 자리, 노력이 무용지물이 된 사회에서 그 공허함을 가득 채운 것은 아마 ‘무력감’일 것이다. ‘해봐도 안 됐더라’고 말하는 대신, 지금의 청년세대들은 시도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비단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자발적’으로 사회 구조상 아르바이트를 택해야 하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 사포세대(인간관계까지 포기) 같은 용어가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말로 굳혀진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벌써 ‘프리터족(free arbeiter)’이 사회문제로 대두한 지 오래다. 돈이 생길 때까지만 아르바이트로 일한 사람들은, 또 쉽게 다른 곳을 찾아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기술이나 경험이 없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해지고 사회적 분위기도 침체되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현대인의 얼굴
프리터족이 대두되면서 아예 그들의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이 기획되었다. 아오이 유우가 주연한 <백만 엔 걸 스즈코>는 아르바이트로만 생활하면서 백만 엔이 모이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여자의 이야기다. 식당, 복숭아 과수원, 꽃집, 슈퍼마켓 같은 곳을 전전하는 그녀에게는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른 과거가 있었고, 그래서 각 지역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백만 엔은 그런 그녀가 ‘안정’을 위해 선택한 작은 목표였다.
▲<백만 엔 걸 스즈코> 중
그녀의 특이한 사연을 걷어내고 보더라도, 프리터족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에는 일반적인 젊은 층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은 목적을 잃은 서른두 살의 백수 이치코(안도 사쿠라)의 현실을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멀쩡하게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취직을 못 한 그녀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게 일이다. 보잘것없고 무기력한 청춘의 모습의 표본이라고 할까. 만화책을 보거나, 조카와 게임을 하고, 집에서 그녀를 한심해 하는 동생과 싸우던 지지부진한 날들이 연속되던 어느 날, 그녀는 돌연 독립을 선언한다. 물론 대책은 없다. 생활비를 마련하려는 방편으로 그녀는 ‘백 엔’ 짜리 물건을 파는 편의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점장은 우울증에 걸려 있고, 본사 직원은 업무량에 치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옆의 동료는 말이 많아 사람을 귀찮게 하고, 노숙자는 이곳에서 폐기되는 도시락을 훔쳐 먹으며 살아간다. 역시 자신처럼 패배자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링 위에서 펼치는 자기와의 싸움
하루하루 이들을 대하며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던 그녀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녀가 복싱선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렇다고 연애나 남자로 인해 갑자기 이치코가 자신의 삶을 깨닫고 행복한 커플이 되는 드라마 같은 일은 없다. 무기력한 자신과 달리 열정적으로 연습에 매달리고 시합을 준비하는 카노는 이성적으로 그녀가 반한 남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인생의 자극제가 되기도 해주는 대상이다. 이치코는 카노가 시합에서 패배한 순간, 삶의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충격을 받는다. 비록 시합에서 졌지만, 열심히 한 이후 상대에게 축하를 보내고, 자신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면서다. 이치코는 그를 통해 어떤 하나의 것에 매달리고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로소 발견한다. 결국 그녀는 카노와 이별하고, 자신 역시 복싱을 연습해 링에 오른다. <백엔의 사랑>의 사랑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가치도 바로 이 링 위에서 드러난다. 근 10분간 벌어지는 권투 시합 장면. 이치코는 죽을 힘을 다해 승리하는 것이 아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결국 링 위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이 어떤 승리의 장면보다도 환호를 자아낸다. 그건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가치 있다고 느끼고 열심히 살지 않았던 무기력한 청춘 이치코가,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경기를 하고, 승리하지 못함으로써 가지는 흔치 않은 희열의 순간이다. 비록 경기에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이치코가 자신의 인생에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찬란한 승리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산발을 한 이치코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바로 주연배우인 안도 사쿠라의 명연기가 빛을 발휘한 지점이다. 집에서만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이치코를 연기하기 위해 급격하게 체중을 늘린 그녀는, 복싱하는 이치코의 모습을 위해 다시 살을 빼고 근육을 단련했다. 2주간의 짧은 촬영 기간에 체중조절을 하는가 하면, 링 위에서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복싱 트레이닝까지 받았다. 말 그대로 이치코는 혹독한 시간들을 견뎌 만든 캐릭터다. 안도 사쿠라는 이 영화로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키네마준보> 베스트10의 여우주연상, 일본영화비평가대상 여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 Cinephilo : 열심히 지는 법을 배우다 -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 '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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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philo : 열심히 지는 법을 배우다 -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
이화정
2016-09-15
열심히 지는 법을 배우다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 간 여성 계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계나는 날로 취업은 힘들어지고, 여성이 가지는 압박이 배로 크고, 아등바등 살아봐도 미래가 불투명한 이곳 한국이 싫어서, 누군가는 그 대안으로 호주를 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희원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홀리워킹데이>는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호주의 워킹 홀리데이를 가서, 그곳의 노동을 체험하며 써내려간 기록이다. 다큐멘터리 속 20대처럼 영어와 스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청년들의 수는 상당하다. 목적을 가지고 온 듯 보이지만, 막상 생활을 해보면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그곳에서 고생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한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희원 감독이 영화의 말미, 굳이 젊은이에게, 특히 여성에게 더 혹독한 한국이 아닌 그곳이 어디든 더 살기 좋은 다른 곳을 택할 수 있다는 시선을 둔다는 것이었다.
▲ 포기가 일반화된 사회
돌이켜보면 한국인에게 ‘한국이 싫다’고 말하는 게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자수성가 신화가 존재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열심히 하면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으니,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미덕이던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달라졌다. 젊은이들은 이제 절대적으로 이곳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떨친다. 최근엔 청년들이 나서 ‘최저 시급 1만 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 달 100만 원 수입도 못 올리는 아르바이트가 더는 용돈 벌이가 아닌 생계인 곳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열심히 일하는 것의 신화가 깨진 자리, 노력이 무용지물이 된 사회에서 그 공허함을 가득 채운 것은 아마 ‘무력감’일 것이다. ‘해봐도 안 됐더라’고 말하는 대신, 지금의 청년세대들은 시도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비단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자발적’으로 사회 구조상 아르바이트를 택해야 하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 사포세대(인간관계까지 포기) 같은 용어가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말로 굳혀진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벌써 ‘프리터족(free arbeiter)’이 사회문제로 대두한 지 오래다. 돈이 생길 때까지만 아르바이트로 일한 사람들은, 또 쉽게 다른 곳을 찾아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기술이나 경험이 없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해지고 사회적 분위기도 침체되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현대인의 얼굴
프리터족이 대두되면서 아예 그들의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이 기획되었다. 아오이 유우가 주연한 <백만 엔 걸 스즈코>는 아르바이트로만 생활하면서 백만 엔이 모이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여자의 이야기다. 식당, 복숭아 과수원, 꽃집, 슈퍼마켓 같은 곳을 전전하는 그녀에게는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른 과거가 있었고, 그래서 각 지역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백만 엔은 그런 그녀가 ‘안정’을 위해 선택한 작은 목표였다.
▲<백만 엔 걸 스즈코> 중
그녀의 특이한 사연을 걷어내고 보더라도, 프리터족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에는 일반적인 젊은 층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은 목적을 잃은 서른두 살의 백수 이치코(안도 사쿠라)의 현실을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멀쩡하게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취직을 못 한 그녀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게 일이다. 보잘것없고 무기력한 청춘의 모습의 표본이라고 할까. 만화책을 보거나, 조카와 게임을 하고, 집에서 그녀를 한심해 하는 동생과 싸우던 지지부진한 날들이 연속되던 어느 날, 그녀는 돌연 독립을 선언한다. 물론 대책은 없다. 생활비를 마련하려는 방편으로 그녀는 ‘백 엔’ 짜리 물건을 파는 편의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점장은 우울증에 걸려 있고, 본사 직원은 업무량에 치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옆의 동료는 말이 많아 사람을 귀찮게 하고, 노숙자는 이곳에서 폐기되는 도시락을 훔쳐 먹으며 살아간다. 역시 자신처럼 패배자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링 위에서 펼치는 자기와의 싸움
하루하루 이들을 대하며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던 그녀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녀가 복싱선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렇다고 연애나 남자로 인해 갑자기 이치코가 자신의 삶을 깨닫고 행복한 커플이 되는 드라마 같은 일은 없다. 무기력한 자신과 달리 열정적으로 연습에 매달리고 시합을 준비하는 카노는 이성적으로 그녀가 반한 남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인생의 자극제가 되기도 해주는 대상이다. 이치코는 카노가 시합에서 패배한 순간, 삶의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충격을 받는다. 비록 시합에서 졌지만, 열심히 한 이후 상대에게 축하를 보내고, 자신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면서다. 이치코는 그를 통해 어떤 하나의 것에 매달리고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로소 발견한다. 결국 그녀는 카노와 이별하고, 자신 역시 복싱을 연습해 링에 오른다. <백엔의 사랑>의 사랑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가치도 바로 이 링 위에서 드러난다. 근 10분간 벌어지는 권투 시합 장면. 이치코는 죽을 힘을 다해 승리하는 것이 아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결국 링 위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이 어떤 승리의 장면보다도 환호를 자아낸다. 그건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가치 있다고 느끼고 열심히 살지 않았던 무기력한 청춘 이치코가,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경기를 하고, 승리하지 못함으로써 가지는 흔치 않은 희열의 순간이다. 비록 경기에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이치코가 자신의 인생에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찬란한 승리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산발을 한 이치코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바로 주연배우인 안도 사쿠라의 명연기가 빛을 발휘한 지점이다. 집에서만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이치코를 연기하기 위해 급격하게 체중을 늘린 그녀는, 복싱하는 이치코의 모습을 위해 다시 살을 빼고 근육을 단련했다. 2주간의 짧은 촬영 기간에 체중조절을 하는가 하면, 링 위에서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복싱 트레이닝까지 받았다. 말 그대로 이치코는 혹독한 시간들을 견뎌 만든 캐릭터다. 안도 사쿠라는 이 영화로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키네마준보> 베스트10의 여우주연상, 일본영화비평가대상 여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 Cinephilo : 열심히 지는 법을 배우다 -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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