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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놀이로서의 연극

어린 시절을 산동네에서 보냈다. 유년 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길거리나 학교 운동장, 산자락을 뛰놀며 다양한 놀이를 한 것이다.

박병성

2017-09-19

모방놀이로서의 연극

 

놀이를 통한 사회화


어린 시절을 산동네에서 보냈다. 유년 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길거리나 학교 운동장, 산자락을 뛰놀며 다양한 놀이를 한 것이다. 딱히 해야 할 것이 없었으므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친구를 모았고 매일매일 같은 놀이를 조금씩 다르게 했다. 술래잡기나 다방구, 각 지역마다 다르게 불렀던 잼도리 등은 다른 동네 아이들도 하는 놀이였지만, ‘맞으면 뛰기’라는 놀이는 산동네였기에 가능한 우리 동네만의 놀이였다. 이 놀이는 이름 그대로 축구공으로 사람을 맞춰서 마지막에 맞은 사람이 비탈길을 굴러가는 공을 가져오는 놀이였다. 가파른 비탈이다 보니 아래 방향으로 힘껏 찬 공을 피하지 못한 아이는 속절없이 굴러가는 공을 찾으러 위태롭게 뛰어 내려가야 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직접적인 이름이나 단순한 규칙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지 않은 놀이였을 것이다. 놀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규칙이 추가되면서 재미를 더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놀이의 규칙을 따르며 경쟁하고,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기도 하며, 때로는 새로운 놀이를 만든다. 문화 자체를 놀이로 보는 하위징아의 생각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놀이의 규칙 속에서 타인과 경쟁하고 협력하며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가는 작은 사회를 경험한다.

 

거울


놀이의 중요한 요소인 ‘모방’은 타자를 이해하는 동시의 자기 내면의 표현이기도 하다.


놀이에서는 경쟁, 모방, 표현, 운명 등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많은 놀이들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과정이고, 내가 아닌 동물이나 타인을 흉내 내면서 타자를 이해하며, 그러한 흉내 내기는 역설적으로 자신 내면의 표현이기도 하다. 복불복 게임처럼 많은 게임에서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속에 내맡기고 결과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게임의 속성은 전쟁과 교육, 사회, 예술, 종교 등 문화로 확장된다. 이중 연극과 가장 관련된 놀이의 특성은 모방일 것이다. 연극의 기원을 제의나 놀이에서 찾기도 하는데, 언어로 소통하기 이전의 인간은 두려운 자연을 숭배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자연을 모방했다. 그것은 자연과의 소통이자 제의였다. 자연을 모방하는 연극적 행위는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


연극 놀이의 핵심 원리, 모방


기원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연극은 기본적으로 역할놀이 과정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썼다. 가면은 소리를 확장시키는 메가폰 같은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관객들에게 캐릭터를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을 모방하는 행위이지만, 연극에 따라 역할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는 차이가 난다. 스타니슬랍스키로 상징되는 사실적인 연극에서는 배우가 캐릭터로 완전히 동화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배우는 외적인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외적 행동은 자연스럽게 표출된다고 보았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유사한 개인적 경험에서 정서를 되살리는 정서 환기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주의 연극에서 배우는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정성을 통해 ‘대상되기’가 이루어진다.

 

(왼쪽) 러시아의 연극연출가이자 배우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 (오른쪽)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 Bundesarchiv

(왼쪽) 러시아의 연극연출가이자 배우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 (오른쪽)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 Bundesarchiv


그러나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의 입장은 다르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말 그대로의 역할놀이에 더 가깝다. 브레히트는 연극의 목적을 비판적 인식과 각성, 그를 통한 사회적 참여로 생각했다. 그는 연극의 성과가 극장의 안이 아닌 밖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브레히트는 끊임없이 관객들이 연극을 보는 동안 비판적인 사고를 유지하길 요구했고, 그것이 극장 밖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어지길 원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극이 감정이입을 통한 감정의 정화가 최종 목적이라면, 브레히트의 연극은 비판적 사고를 통한 사회적인 실천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서사극에서는 관객들이 감정 이입하지 않도록 연기하라고 지시한다. 배역을 연기하되 그 인물이 되기보다는 정확한 정보 전달자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브레히트는 이것을 ‘교통사고의 목격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서사극의 배우는 마치 교통사고의 목격자처럼 연기해야 하는 것으로, 사고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를 객관적으로 표현해서 관객들이 사고의 책임을 판단할 수 있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공연되는 서사극에서 감정 이입을 배제하고 연기하는 작품은 거의 보지 못했다. 현실의 서사극에서도 감정이입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서사극의 이론을 정립한 브레히트의 개념에서는 배우와 캐릭터가 분리된 연기술이 요구됐다.


놀이성이 강화된 현대연극


서사극은 놀이성이 강화된 연극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놀이의 본질적인 속성에서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연극이다. 현대의 연극은 점점 놀이성이 강화되면서 놀이의 본질(재미)적인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현대의 연극은 관객들이 제4의 벽을 통해 엿보는 방식의 사실주의 연극보다는 새로운 연극적인 형식과 약속이 이루어지는 공연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놀이성이 강한 현대적인 연극은 ‘퍼포먼스’적인 성격을 띤다. 완료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행위의 과정 속에 참여하면서 즐기는 형태의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에서 공연된 <하얀 토끼, 빨간 토끼> 한 장면1 © Niall Walker-CC BY 2.0


영국에서 공연된 <하얀 토끼, 빨간 토끼> 한 장면2 © Niall Walker-CC BY 2.0
영국에서 공연된 <하얀 토끼, 빨간 토끼> © Niall Walker-CC BY 2.0


올해 서울국제연극제(SPAF)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인 즉흥극 <하얀 토끼, 빨간 토끼> 역시 퍼포먼스의 성격이 짙은 공연이다. 국내 다양한 층위의 연기파 배우 손숙, 이호재, 예수정, 하성광, 김소희 손상규 등이 참여하는 이 작품은 대본을 보지 못한 배우가 현장에서 받은 대본을 보며 매일 1인 즉흥극을 꾸미게 된다. 리허설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우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관객밖에 없다. 관객들은 현장에서 받은 대본을 연극적 약속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는지 지켜보며 때로는 참여하고 즐기게 된다. 극의 내용보다도 과정이 즐거움을 주는 일종의 놀이인 셈이다.
이처럼 현대 연극은 놀이성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 사실주의 연극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면서 동시에 전통 연극이 지닌 원초적인 놀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의 연극은 정해진 서사나 대본보다 놀이성이 강한 형태의 공연을 선보여왔다. 현대 연극의 형식은 관객을 감정 이입 상태로 끌어들였던 방식에서 벗어나 과정의 놀이성을 극대화하여 퍼포먼스 형식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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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병성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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