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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자유로서의 자살은 가능한가

- 오늘, 키워드 인문학 -

허희

2023-01-27

리드문

 

그는 산재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용초도 근해」의 결말이 용수가 포로수용소 시절 재판에서 성갑에게 과도한 처벌을 건의한 일로 자책하다가 죽음을 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해도, 자살에 이르는 과정과 시점에 우리는 더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죽음을......



박영준의 「용초도 근해」(1953)에 나타난 이데올로기 저항에 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과연 자유의 실천일 수 있을까? 그러한 물음에 한 편의 소설로 접근해보고 싶다. 한국전쟁 휴전기 즈음에 쓰인 박영준의 「용초도 근해」라는 단편이다.1) 최근 작품은 아니지만 현재적 의의가 여전하다. 이 작품은 치열한 전투 현장을 남한의 입장에서만 묘사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시‧공간적으로 간극이 있는 포로수용소와 피난지에서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점에서 박영준의 소설은 “성긴 체험의 기록”이 아니라 같은 해 조연현이 피력한 좋은 문학의 요체인 “숙성된 경험의 형상화”를 지향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2) 「용초도 근해」는 전투병이 아닌 귀환병을 다룸으로써 전화(戰禍)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살아남는다는 것(survive)’의 당위를 넘어 ‘산다는 것(live)’에 관한 질문을 환기하는 흔치 않은 사례의 일부이기에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전쟁

전쟁


 

주인공은 ‘용수’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포로로 붙잡혀 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포로 교환 협정에 따라 남한으로 돌아가게 된다. 용수는 판문점을 넘어 국군의 군악대가 연주하는 환영 음악에 감격하기도 하지만, 북한에 두고 온 애인 ‘혜민’을 향한 그리움과 포로수용소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된 ‘성갑’에게 자신이 6개월 영창 처벌을 주장한 과거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포로수용소에서 반미구국투쟁위원회 지도원으로 활동하던 ‘성주’도 같이 귀환길에 오르는데, 그는 북한의 공작원으로 남한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그러나 성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향하기로 결정한다. 귀환병들은 용초도에 집결한 뒤 각자의 고향으로 보내지기로 되어있었다. 용초도로 가는 배 안에서 용수는 줄곧 혜민이 나오는 꿈을 꾼다. 한편으로 그는 성갑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계속 괴로워한다. 용초도가 눈앞에 보인 순간 용수는 끝까지 피하고 싶었던 성갑과 마주친다. 성갑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용수는 심리적 압박감에 괴로워하다 바다에 투신한다. 이것이 「용초도 근해」의 줄거리이다. 이를 둘러싼 기존 논의 두 가지를 아래에 옮긴다.

 

①  박영준의 「용초도 근해」는 주인공이 철저히 개인적인 죄책감 때문에 그것을 속죄하려는 행위로 자살을 감행하게 된다. 주인공 최용수의 죽음은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동료 김성갑을 북괴군들보다 더 가혹하게 벌주려 한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기인된 것이다. (중략) 「용초도 근해」와 『광장』은 매우 유사성이 많은데 그것은 두 작품 다 주인공이 일정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배 위에서 자살을 해버린다는 것, 그리고 이 주인공들이 여인들 때문에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 한국전쟁 포로로서 휴전과 함께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 등이 될 것이다.3)


②  박영준의 「용초도 근해」는 ‘양심의 문제’라는 독특한 주제를 다룬 작품인데, 자세히 살피면 이 또한 맹목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와 소박한 휴머니즘이 만들어낸 것임이 확연하다. (중략)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대한민국이 주는 옷’으로 갈아입는 행위 아래에는 남‧북의 화해 불가능한 절대의 대립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받아들이는 맹목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맹목적 이데올로기가 전면 개입,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터에 소설적 탐구가 가능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결론은 명백한 것. 갈 길이 이미 분명한 마당에 전후좌우를 살펴가면서 그 이면을 헤쳐보려는 태도가 설자리란 있을 수 없다. (중략) 자살에 이르는 주인공의 번민은 인간의 고귀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물론 값진 것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과장되어 주인공의 의식과 행위를 전적으로 지배함으로써 다른 것들과의 관계가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는 것이 문제이다.4)

 

인용문 ①은 화소의 유사성을 거론하면서 「용초도 근해」를 『광장』의 예고 지표로 본다. 『광장』이 1960년에 특이하게 돌출된 작품이 아니라, 1950년대 중반에 출현한 「용초도 근해」나 「요한 시집」과 같은 포로문학의 후사로서 계승되었다는 것은 동의할 만한 지적이다.5) 다만 이 소설의 주인공 ‘용수’가 “철저히 개인적인 죄책감 때문에 그것을 속죄하려는 행위로 자살을 감행”했다는 관점에는 이견이 있다. 소설에는 이렇게 서술된다. 

 

“용수도 도중에서 다른 전우들처럼 미리 죽어버리기를 바라기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죽을 것만 같았다. 살아나갈 것 같은 자신이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몸은 눈에 보이는 듯이 약해져 가고 괴뢰군들의 학대는 날로 심해 가고 그러니 살아서는 무엇하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삼년동안 죽지를 않고 살아 왔다.”


-박영준, 「용초도 근해」, 1953, 129~130쪽 -



죽음

죽음



그는 산재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용초도 근해」의 결말이 용수가 포로수용소 시절 재판에서 성갑에게 과도한 처벌을 건의한 일로 자책하다가 죽음을 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해도, 자살에 이르는 과정과 시점에 우리는 더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죽음을 죄책감과 속죄로만 국한한다면 그것이 왜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용초도 바다 앞에서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성갑에 대한 죄책감이 그토록 심원한 것이었다면, 용수의 자살(시도)은 진작 포로수용소 내에서 행해졌어야 마땅하다. 용수의 투신은 죄책감에 기인한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가 삶과의 절연을 결행하는 것은 연인 혜민의 꿈을 꾸고 전우들의 비참한 죽음을 떠올린 이후이다.

 

“용수는 꿈에서나마 혜민을 만난 것이 즐거웠다. 진정으로 사랑함이 없이는 절대로 낼 수 없는 그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즐거웠다. (중략) 그저 주검뿐이었다.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그 주검의 관념이 아직까지도 용수의 몸에서 떨어지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꿈에서 밖에 볼 수 없는 그러나 얼마든지 실제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 박영준, 「용초도 근해」, 1953, 139~140쪽 -


사랑과 죽음은 연속적인 상으로 그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비극적 사실은 용수가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는 혜민과의 만남은 꿈―가사(假死)상태에서만 가능하고, 그가 공포를 느끼는 포로수용소에서의 기억은 현실―실제 상태에서 재현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죽음을 현실과 같은 기쁨으로 인식하는 용수에게 있어서 자살은 의아하기보다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가 용초도 접안을 코앞에 두고 자살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용수는 그만 눈을 감았다. 자기도 갈매기에 못지않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배가 고프면 배고프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몸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는 말도 할 수 있다. 그리운 것을 그립다고도 말할 수 있다.”


- 박영준, 「용초도 근해」, 1953, 142쪽 -


그가 염두에 두는 자유는 신체와 표현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용수가 갈망하는 자유는 지금 여기에 없다. 그가 만끽했던 진정한 자유는 영영 되찾을 수 없는 혜민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명시적으로는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혜민과 만나면서 용수는 어떤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저기 용초도는 자유민주주의 남한의 땅이나 용수에게 이 같은 자유는 의심스러운 무엇이다. 자기가 열망하며 향하고 있는 곳이 실은 ‘소극적인 자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기에 그렇다.6) 



자유

자유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새로운 유대―파시즘으로 자신을 다시 속박시킨다고 논증한다.7) 그러나 「용초도 근해」의 용수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져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로 귀속하는 도피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자살은 ‘적극적인 자유’를 위한 기투(Entwurf, projection, 企投)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은 종교주의자에게는 악으로 단죄되고, 현실주의자에게는 무책임으로 비난받지만, 자유주의자에게는 자기 삶의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죽음으로써 용수는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살아 있는 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데올로기는 의식과 관련 없는 재현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인간의 경험에 개입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임을 설파한다. 그의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자기 바깥을 알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알튀세르의 입론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주체가 된다.8)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는 언제나 수동적 주체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지젝을 비롯한 여러 이론가가 알튀세르의 주체―출구 없는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1962년에 쓴 「피콜로 극장: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의 한 각주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투쟁의 소음과 분노가 희미하거나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경합과 투쟁의 장소이다.(ideology is always in essence the site of a competition and a struggle in which the sound and fury of humanity's political and social struggles is faintly or sharply echoed.)”9)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용수의 자살을 자포자기라고 쉽게 폄하할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왔고, 마침내 ‘자유죽음’10)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용초도 근해」에 “맹목적 이데올로기가 전면 개입,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터에 소설적 탐구가 가능할 수 없다”는 인용문 ②의 분석도 반박된다. 필자의 언급대로 용수의 자살이 다른 것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배제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이 소설에 대한 비판의 논거이기는커녕 옹호의 논거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의식과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전쟁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집단적 의식이 아니라, 전쟁을 다르게 인지하는 개인적 감각을 일깨운 『광장』의 성취를 선취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의를 고취하기 위해 펴낸 『전선문학』에 실린 「용초도 근해」는 책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균열을 일으킨다.


반복하건대 이 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과연 자유의 실천일 수 있을지를 「용초도 근해」를 경유하여 타진한 과정의 기록이다. 이때 가장 잘못된 이해는 자살을 선악의 구도로만 재단하는 데 있다. (소극적 혹은 적극적) 자유의 프레임에서 본다면 이는 자발적 행위 유무를 논해야 하는 사안으로 변모한다. “인간이 자신에게 목숨을 던져버리겠어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비록 기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이제 거치적거릴 게 없다. 짐? 불과 몇 미터만 더 지고 가면 된다. 던져버리는 순간, 기분 좋게 취한 황홀함을 느낀다. 물론 술을 마신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만족감이다. 이게 도피일까?”11) 아니면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수행하는 최후의 저항일까?


 

 

1) 박영준의 「용초도 근해」는 1953년 11월 『전선문학』에 게재되었다. 이하 본문에 작품 구절을 인용할 때는 각주를 생략하고 1954년 국방부정훈부에서 발간한 『전시 한국문학선―소설편』의 쪽수만 표기한다.(맞춤법 및 띄어쓰기는 현재 규정에 따라 바꾸어 옮김)

2) 조연현, 「한국전쟁과 한국문학」, 『전선문학』, 1953, 18~21쪽.

3) 박신헌, 「한국 전후소설의 속죄의식 연구」, 『어문학』 64집, 1998, 284~285쪽.

4) 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문학동네, 2000, 357~359쪽.

5) 「용초도 근해」를 『광장』의 전사로 파악하는 입장으로는 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일지사, 1981) 및 조남현, 「광장, 똑바로 다시 보기」(『문학사상』, 1992.8)가 있다.

6) 이 시기 ‘자유’의 다층적인 의미를 탐구한 시로는 김수영이 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1953)가 있다.

7) 에리히 프롬이 언급하는 ‘그’를 ‘용수’로 바꾸어 읽어보자. “그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의 통일성은 적어도 그에게는 깨진 상태이고, 그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기준점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히고, 결국은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원칙을 의심하게 된다. 무력감과 회의는 둘 다 삶을 마비시키고, 인간은 살기 위해―소극적인 자유―로부터 달아나려고 애쓴다. (중략)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김석희 옮김,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012, 264~266쪽.

8) 루이 알튀세르, 김동수 옮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출판사, 1994, 120~121쪽 참조.

9) Louis Althusser, trans. Ben.Brewster, 「The 'Piccolo Teatro': Bertolazzi and Brecht」, 『For Marx』, The Penguin Press, 1969, p.149.

10) 장 아메리, 김희상 옮김, 『자유죽음』, 위즈덤하우스, 2022.

11) 장 아메리, 위의 책, 231쪽.





[오늘, 키워드 인문학] 적극적 자유로서의 자살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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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

문학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계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에 관련된 글을 쓰고, TV와 라디오 등에 출연해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다. 비평집 『시차의 영도』와 산문집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을 냈다. 계간 문예지 <아시아>,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기획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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