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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AI

- 오늘, 키워드 인문학 -

박금산

2022-12-27

리드문

 

인생은 다큐이고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살짝 연출을 가하면 ‘감동적인 허구 실화’가 탄생하는 것이 다큐필름의 세계라서 연출을 하고 싶은 예술가 기질이 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하는 순간 다큐가 아닌 것이 다큐의 세계이다. 인생을 연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연출의 의도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


 

장편소설 <AI가 쓴 소설> (출처: 알라딘)

장편소설 「AI가 쓴 소설」 (출처: 알라딘)



장편소설 <AI가 쓴 소설>을 출간한 이후 나는 AI독자, 강인공지능, 약인공지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AI독자를 생각한다는 표현은 소설을 완성하고 출간을 앞둔 시점에서 작가의 말을 쓰다가 얻었다. “소설 쓰기의 능력이 모자라 울어본 사람이라서 나는 AI 작가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소설을 읽는 AI독자를 생각한다.”라고 작가의 말이 끝난다. 실제로 울어본 경험이 많다. 소설이 너무 안 써져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소설 쓰는 AI의 학습교관이 되어 급여를 받는다. 출판사 대표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출판사에 가서 계약을 한 후 대표가 요구하는 읽기 노동을 수행한다. 읽은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고 품평하고 더 나은 소설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늘어놓는다. 그러면 어딘가에서 수정된 소설이 나타난다. 주인공 소설가는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소설 쓰는 AI의 학습교관이 되었으며 재계약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 돈을 벌려면 골방에 들어가 얼마나 팔릴지 알 수 없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망설인다.


<AI가 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데에 8년여가 걸렸다. 시작할 때는 SF였고 출간하고 나니 현실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창작 도구 AI가 꽤 있다. 미술의 미드저니(midjourney) 같은 것, 글쓰기의 GPT3 같은 것. <AI가 쓴 소설>의 상황은 현실 자체는 아니지만 곧 실현될 예정인 것 같다. ‘AI가 소설을 쓰게 되면 인간 소설가는 무엇을 하게 될까, 나의 직업인 소설가는 설 자리를 빼앗기는 것일까, 언제쯤 현실이 될까…….’ 집필은 이런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변화 앞에서 ‘변화만이 유일하게 지속된다’는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긍정하고 사색하는 태도를 가지면 변화 앞에서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나는 AI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서사물의 시놉시스를 만들기도 한다. ‘아직 인간이 낫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인간의 손을 거치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변화된 결론에 다다른다.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인공지능을 약인공지능이라 부르고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을 강인공지능이라 부른다. 지구상에 아직 강인공지능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에 출연하는 허구 인공지능이 강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인공지능



인공지능은 완벽해야 하고, 완벽하지 못하면 평가절하하는 것이 인공지능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라고 <AI가 쓴 소설> 속의 한 인물이 말한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기계는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 기계를 대하는 인간의 편견이다. 인간의 계산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전자계산기가 등장했고 전자계산기는 완벽하게 계산해내는 기계로 우리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인공지능에 이르면 강력하고 무결한, 오류 없고 자아까지 갖춘 초인공지능, 슈퍼인공지능을 상정해 놓고 인간들은 스스로 위협을 느낀다.


강인공지능은 언제 나타날까?


약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인간의 활동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은 협업의 주체라는 것이 합리적인 긍정이다.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인간 주체를 연민하면서 변화가 인간의 삶을 비극으로 떨어뜨린다는 주장은 일방적이다. 한순간이라도 변화의 도정 위에 있지 않았던 역사가 우리 인간에게 있었는가?

 

나는 요즘 이끼에 발을 들여놓았다. 발을 들여놓았다는 표현은 은유이다. 발을 들여놓고 이끼 낀 길 위를 걷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이끼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감탄할 준비를 한다. 발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끼는 키가 작고 발에 잘 밟힌다. 높은 나무 위에서 사는 이끼는 올려다보며 경탄한다.


이끼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재미있다.


어느 여름날 커피를 사러 가다가 정원사들이 베어내고 자른 밑동을 눈여겨보았다. 연구실에 옮겨 놓고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면 운치 있을 것 같았다. 정원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분들은 정말 친절하셨다.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를 물었고 내가 거짓 없이 마음의 결을 보여드렸더니 혼자 옮길 수 없을 거라면서 나를 포함해서 4인이 달라붙어 차에 실었다. 나무 밑동은 무겁고 거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끼에 관심이 없었다.


나무 밑동을 연구실 중앙에 앉히고 주변을 정리했다. 무심한 내 눈에 줄기 껍데기에 끼었다가 말라 죽은 이끼 자국이 들어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렸다. 색깔이 푸르게 올라왔다. 와……. 이렇게 많은 이끼라니! 죽지 않고 살았다니! 이끼님, 살아 있어서 고마워요.

 


영화 <녹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녹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다른 얘기 하나. 지난 여름,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은성호 주연)을 찍고 편집하느라 11년 인생을 갈아 넣은 정관조 감독과 대화 나누던 중에 “끝을 알 수 없어서 다큐멘터리가 매력적이잖아. 끝에 성호와 건기가 즉석에서 협연하는 서사가 만들어질 거라고 예상도 못했어. 그런 이야기가 찾아온 게 감독인 너에게는 행운이었을 것 같아. 영화 정말 좋더라.”라고 내가 말했더니 정 감독이 “다큐멘터리는 끝을 알 수 없어서 매력적이라는 그 말 적어놓고 써먹어야겠는걸.” 하고 내 말에 동의하던 반응이 떠올랐다. 끝을 알 수 없기에 그 감독께서는 자폐스펙트럼 음악가 은성호의 인생을 11년이나 따라다녔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이므로 여기에서 줄인다.


인생은 다큐이고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살짝 연출을 가하면 ‘감동적인 허구 실화’가 탄생하는 것이 다큐필름의 세계라서 연출을 하고 싶은 예술가 기질이 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하는 순간 다큐가 아닌 것이 다큐의 세계이다. 인생을 연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연출의 의도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 누구를 원망할 것인지 정해져 있다. 사람을 속이고 기만해서 연출에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사람의 거짓말과 기만에 질리게 되면 거짓말하지 않는 기계에 의존하게 된다.


이끼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끼가 가진 생명력의 풍성함에 안도했다. 책을 찾아 읽어보니 이끼는 사막에서도 번식하고 잎 안에 물주머니가 있어서 물 없이 7개월을 버티기도 한다고 한다. 이끼에게 물을 주면서 1개월, 2개월, 시간이 흘렀다. 7월에 시작해서 4개월이 지났다. 이끼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바깥의 이끼로 향했다.


세상에는 이끼가 없는 곳이 없었다. 내 눈에 단순한 몇 가지 규칙이 발견되었다. 이끼는 세계 어디에나 있으며 절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이끼 사진을 찍으면 반드시 무언가가 함께 찍혔다. 이끼는 평화로운 곳에서만 번식했다. 먼저 터를 잡으면 다른 생명이 이끼 위에서 싹을 틔웠다. 이끼는 콘크리트 벽이든 핵 사고가 있었던 곳이든 양분과 물이 있으면 어디에서나 자리를 잡았다. 이끼는 관다발이 없어서 줄기로 설 수가 없어서 키가 작고, 푸른색으로 뭉쳐 보인 군락을 확대하자 개개의 이끼가 여러 갈래로 나뉜 잎을 드러냈을 때 나는 이끼의 잎이 별 모양인 것을 보고 경탄했다.



책 <이끼와 함께> (출처: 알라딘)

책 <이끼와 함께> (출처: 알라딘)


 

로빈 월 키머러의 책 <이끼와 함께>는 이끼를 숲으로 확대하고 생명의 우주로 더 확장하는 관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식물생태학자이다. 나무의사 우종영은 표지의 추천사에서 “과학자의 정신과 원주민의 통찰력으로 연구하며 바라본다”라고 썼다. 과학자의 정신과 원주민의 통찰력이라니!


하나는 감성의 영역이고 하나는 기계의 영역인 것 같다. 원주민의 통찰력이란 내게 감성이 기반인 신성의 영역이고, 과학자의 정신이란 내게 관찰이 기반인 미지의 영역이다. 나는 <이끼와 함께>를 하루에 반 페이지 정도만 읽는다. 진도가 나가는 것이 아까워 못 살겠다. 어떤 날은 문장 하나로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한 문장에 들어 있는 정보를 검색하면서 이끼의 세계에 접근하고 감동한다.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도 이토록 풍성하게 살 수 있다니! 방금 전 “(이끼의) 잎마다 미스터리들이 있다. 지구상에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생명체들이 존재하며 억겁의 세월 동안 정교한 상호관계가 진화했다. 당신은 이제 그 소우주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히 걷게 될 것이다.”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AI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 AI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끼를 떠올리게 될 줄은 내가 이끼에게 물을 주면서 함께 살게 될 것임을 예견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끼와 AI는 거리가 아주 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연결을 지으면 아주 생경하면서도 적절한 발견에 이를 수 있다. 이끼를 검색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스마트폰의 SNS앱과 구글과 윈도10의 알고리즘이 내게 수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끼에게 물을 주면서 ‘이것은 내가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끼가 물을 끌어당긴다’라고 생각한 것을 변용한다면 ‘알고리즘이 나에게 정보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보를 잡아 당긴다’가 될 것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부터 광고 공격을 당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우리가 스스로 검색한 단어가 알고리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도록 만들었음을 모른 척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검색어를 스스로 검열한다. 검색어를 검열한 경험이 없는 독자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자신이 검색어를 검열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 확신한다. 나는 수면제 광고가 도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잠에 관련된 정보를 최소한으로만 검색한다.


나는 서두에서 장편소설 <AI가 쓴 소설>을 출간한 이후 AI독자, 강인공지능, 약인공지능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아를 갖는 것이 강인공지능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약인공지능이다. 약함과 강함을 구별하는 기준이 자아를 가졌느냐 아니냐이다. 기계 스스로 자아를 만들어 가질 것인지, 기계에게 인간이 자아를 인공적으로 복사하여 부착할 것인지, 나는 기술적인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직 강인공지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이다.


내가 내 소설을 읽히고 싶은 AI독자는 아마도 약인공지능, 강인공지능 모두인 것 같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쓸 때 약인공지능은 인간의 터치를 거쳐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 강인공지능은 스스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강’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 인간 작가가 쓰는 소설이란 AI로 하여금 ‘인간이란 이렇구나’를 학습할 수 있는 소설이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에서 아직 ‘인간이란 이렇구나’를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이끼

이끼



단국대학교 캠퍼스 계단에서 이끼를 발견한 이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사진 설명 캡션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의 이끼. 단국대학교 인문관 계단. 툰드라의 겨울 땅을 덮는 녹색 이끼를 생각함. 이끼에 눈을 주면 늘 함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AI를 생각하면 늘 인간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 날은 단국대학교 북페스티발 행사로 <AI가 쓴 소설> 저자 강연이 있었다.


한 독자께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셨다. AI 소설창작기계의 학습교관으로 초빙을 받는다면 인간작가로서 참여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 소설가가 재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갈등하는 상황에 나를 넣었다. 재계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AI 창작기계의 학습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이 인간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동료 인간 작가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왜냐면 저는 좋은 소설을 원하고, 좋은 소설을 쓰도록 AI를 안내한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니까요. 나쁜 소설을 쓰도록 유도하는 안내자의 반대편에 서고 싶네요.” 시행착오가 많을 것이다. 나는 AI에게 얼마나 친화적인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동의 2000년 영화 를 보았다. 영화를 보다가 스마트폰 카메라를 화면에 댔다. 이끼가 나왔기 때문이다. 원시림 분위기가 느껴지는 숲이었고 나뭇가지에 이끼가 많았다. SNS에 사진을 올리고 캡션을 붙였다. “오늘의 이끼. 영화 A.I.에서 데이빗과 모니카가 헤어지는 숲. 훌륭한 영화에서 이끼에 눈이 갔다.” 이후의 캡션 내용은 생략한다.


내가 어느 정도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근거가 될 것 같다. 나는 “데이빗과 모니카가 헤어지는 숲”이라 적었다. 데이빗은 인공지능 로봇이고 모니카는 데이빗이 엄마라고 부르는 인간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 설명 글에서 숲 시퀀스는 모니카가 데이빗을 유기하는 혹은 버리는 장면, 데이빗이 가족으로부터 버림당하는 장면으로 기술된다. 나는 ‘헤어지는’이라고 기술했다. 언어는 정신 자체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헤어지는’이 더 나에게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려면 AI가 어떠해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인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인간만 생각하거나 AI만 생각할 수는 없는 시대가 현실이다. 인간은 무언가와 늘 함께 존재한다. AI 없이는 어떤 사고도 할 수 없어진 것이 우리 현실의 한 측면인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AI는 이끼처럼 세계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나 있고 이끼처럼 혼자가 아니다. 무언가와 함께 있다. 이끼는 원시로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고 AI는 손 안의 스마트폰에서부터 사물 인터넷과 엘리베이터와 대중교통 등의 일상에서 전쟁터의 무기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함께 있다. AI는 혼자가 아니다. 이끼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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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사진
박금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영준이다.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범』으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 그리고 『AI가 쓴 소설』, 연작소설 『바디페인팅』,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소설의 순간들』 등이 있다. 오영수문학상(2016)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소설 창작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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