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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학은 문학의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 문학이 아닌 모든 것 -

이광호

2022-01-18

문학이 아닌 모든 것은 문학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있지만, 또한 아무 곳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풍문과 지식들은 문학을 잘 향유하게 만들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가두고 문학을 납작하게 만든다.  문학의 적이 문학을 호명하는 제도와 교육이라는 것은 문학이 처한 불행이다.  이 연재는 문학제도 안에서 문학을 규정하고 나누는 방식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테면 문학의 정의, 장르와 문학성을 둘러싼 익숙한 개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문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문학에 다가가는 방식을 취하려 한다.  그 속에서 문학을 만나는 일이 나날의 삶을 발명하는 일에 가깝다고 느낄 수 있다면.


여전히 적대와 혐오가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치 진영과 이념 집단 혹은 젠더 문제 등을 둘러싼 적대의 감수성과 ‘너는 어느 편인가’를 묻는 전짓불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은 여전히 큰소리를 낸다. 문학은 고독한 독신의 ‘가벼움’에 가까우며,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고 견디려는 자리에 가깝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르포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르포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1948~)는 르포 작가였고 그의 소설 역시 르포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인터뷰해서 기록한 책이다. 이 소설에서 문학적인 것과 여성들의 증언은 다른 차원에 있지 않다. 문학은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서구 근대 문학에서 수입된 문학 개념은 한국에서도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1980년대 노동문학이 주창되었을 때, 노동자들의 수기는 왜 ‘문학’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질문되었다. 한 시대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증언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왜 문학 제도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가? 이런 도전적인 주장은 문학사의 전환기에 등장한다.



여성들이 살았던 ‘전혀 다른 전쟁’



1950년 한국전쟁 중 일어난 보도연맹 사건의 현장 사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50년 한국전쟁 중 일어난 보도연맹 사건의 현장 사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전쟁의 시기는 인간으로서 여성의 존재를 지워 버린다. 전쟁의 폭력이 남자들이 주도한 것이라면, 그 폭력의 그늘에 있는 것은 여성들과 어린아이, 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전쟁을 말하는 것은, 전쟁의 폭력성과 참혹함을 다른 관점과 감각으로 드러낸다. 여성들은 ‘전혀 다른 전쟁’을 살았다. 여성들은 전쟁을 둘러싼 이념과 명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신체가 경험한 감각에 대해 말한다.


가서 보니 잿더미 속에 사람들의 뼈들이 있고 그 뼈들 사이로 까맣게 탄 별 모양이 보이 는데……, 그건 거기서 불타 죽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상병들이나 포로들이었다는 의미였지. 그 일을 겪고 난 후로는 아무리 적병을 죽여도 더 이상 괴롭지 않았어. 새까맣게 탄 별 모양을 본 후로는…….


전쟁이 끝나고 나는 백발이 돼서 집으로 돌아왔어. 겨우 스물한 살에 노파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거야. 거기다 귀에 심한 부상을 당해서 한쪽 귀도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였어.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박은정 역,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이 ‘소설-증언’에는 인터뷰에 응했던 당사자들의 실명이 등장한다. ‘클라브디아 그리고리예브나 크로히나, 상사, 저격수’는 생전 처음 사람을 죽이고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죽였어”라며 충격에 빠지지만, “잿더미 속에 사람들의 뼈가 있고, 그 뼈들 사이로 까맣게 탄 별모양이 보이는” 경험을 하고는, “아무리 적병을 죽여도 더 이상 괴롭지 않았어”라고 고백한다. 이 여성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백발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 겨우 스물한 살에 노파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거야”라고 기억한다. 고통스러운 신체의 기억들은 명분과 이념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여성이 신체를 통해 감각한 세계는 그 목소리 자체로 충격을 안겨 준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첫 생리가 있던 날 총탄에 맞아 다리가 불구가 되어 버린 소녀의 목소리 같은 것 말이다.



문학은 전쟁이어도 ‘너는 누구 편?’ 묻지 않아



손가락질

손가락질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문학은 어느 진영이 옳고 그른가를 묻지 않는다. 실제로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폭력’이고 ‘악’이기 때문에, 어느 편이 정의로운가 하는 것은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것이 된다.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의 폭력성은 진영과 명분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누구 편인가’를 묻는 모든 억압적인 사상적 검증은 이미 반인간적이고 반문학적이다.



이청준(좌)의 소설 『소문의 벽』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교보문고)

이청준(좌)의 소설 『소문의 벽』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교보문고)



이념의 폭력성을 둘러싼, 널리 알려진 이미지의 하나는 이청준의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전짓불의 공포’이다. 이 소설은 6.25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짓불 앞에서 죽음으로 무릅쓰고 어떤 편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군과 인민군이 낮과 밤 사이 교대로 마을을 찾아들던 극단적인 혼란의 시기, 잠자고 있는 집 안에 들이닥친 자들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강요하는 권력의 억압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전짓불을 비추는 자들이 언제나 묻고 싶은 것은 ‘너는 어느 편인가’이다. 개인의 고유성이나 사상의 자율성 따위는 이 전짓불의 심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누구나 자신의 전짓불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전짓불은 이쪽에서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진술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욱더 공포스럽게 빛을 쏘아대게 마련이다”라는 성찰에까지 소설은 도달한다. 이 소설은 ‘전짓불의 공포’가 정직한 진술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지, ‘정직하고 자유로운 진술’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사유한다.



‘존재의 가벼움’을 허락하지 않는 체제의 무거움’



밀란 쿤테라의 장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밀란 쿤테라의 장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억압적인 체제 앞에서 개인의 언어가 가진 무력감을 보여 주는 장면은,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나온다. 아들까지 외면하고 이혼한 자유분방한 의사 토마스는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을 나누는 여자들과 함께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하려 하지만, 체코의 정치 현실은 그 가벼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실력 있는 외과의사에서 유리창 청소부로 만든 것은 주간지에 투고한 글 한 편이다. 그 글은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담고 있다. 억압적인 정치권력에 부역하면서 죄를 저지른 인간들은 그 체제의 참상과 죄상이 밝혀진 뒤에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거야!”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들이 몰랐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이고 자기가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어머니라는 것을 몰랐지만,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체코 작가동맹이 내는 주간지에 실리게 된 그 글은 너무나 많이 잘려 나가고 “그의 생각은 요점만 겨우 남게 되었고(너무 도식적이고 공격적으로), 그것은 더 이상 그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어떤 섬세한 사유도 그것이 요약되면 ‘도식적’인 것이 된다. 문학의 언어가 결코 요약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세 달 후 소련이 프라하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토마스는 불온 분자가 되어 혹독한 사상 검증을 강요받고 그 글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직면한다. 많이 잘려 나간 그 글이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드러내 주고 않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그 요구를 거절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그 글을 철회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 두려웠고 병원을 떠나야 했다. 시골 병원에서 일자리를 찾았을 때 ‘친절하고 예의바른’ ‘내무부 남자’가 찾아와 또다시 그를 사상적으로 검증하고 철회서를 쓰도록 제안한다. 그는 다시 사직서를 쓰고 경찰과 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내려가 유리창 닦는 노동자가 된다.



‘당위’대신‘자유’, 어떤 리스트도 거부하는



필연성의 무게를 거절하고 삶의 우연성을 믿는 토마스가 의사의 지위를 버리면서까지 굳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일까? 토마스는 정치적·윤리적 신념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삶의 예기치 않은 잠재성에 몸을 맡기고 싶어했지만, 체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연인 테레사의 정치적 신념과 사랑의 ‘무거움’은 그의 가벼움을 압박했다. 이를테면 그는 어떤 ‘리스트’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뒤에 그가 투고한 주간지 기자와 자신이 외면한 아들이 그를 찾아와 학대받는 정치범들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할 것을 부탁하지만, 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요구조차 거절한다. 기자는 자신 때문에 곤욕을 당한 사람이고 아들은 자신이 돌보지 못한 혈육이지만, 그는 서명하지 않는 것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죄의식과 비난조차 감당한다. 토마스의 위치에서 자신의 글을 철회하라는 권력의 요구와 탄원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는, 그 내용이 다르다 하더라고 똑같이 억압적이다. 그는 자신이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려 하며, 그래서 무언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때 찾아오는 “검은 도취감”을 느낄 수 있다. “독신의 경우에만 자기 자신답다”고 생각하는 토마스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세계를 배신하려 했다. 이 자유로운 ‘바람둥이’는 테레사와의 사랑이라는 층위에서는 그 자유와 무거움 사이의 역설을 받아들인다. 이 연인들이 함께한 생의 마지막 시절은 슬픔 때문에 행복했고 그들은 ‘같은 시간’에 죽는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프라하의 봄」에서 두 연인의 마지막 장면은 자동차 앞의 시야가 환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연인들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의 시간은 도래할 수 있었을까?



적대와 혐오가 넘치는 세상, 문학의 자리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적대와 혐오가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치 진영과 이념 집단 혹은 젠더 문제 등을 둘러싼 적대의 감수성과 ‘너는 어느 편인가’를 묻는 전짓불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은 여전히 큰소리를 낸다. 문학은 고독한 독신의 ‘가벼움’에 가까우며,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고 견디려는 자리에 가깝다. 문학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나아가 문학은 ‘문학의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학만이 유일하고 고유하며 진정한 문학성이 이미 존재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런 완강한 믿음들과 가장 먼 곳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문학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있다.



[문학이 아닌 모든 것] 8. 문학은 문학의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 지난 글: [문학이 아닌 모든 것] 7. 문학은 어떻게 정치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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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이광호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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