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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살아보는 여행의 묘미

둘러보는 여행에서 살아보는 여행으로

정여울

2018-04-30

잠시 잠깐 둘러보는 여행과 한 달쯤 살아보는 여행의 결정적인 차이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즐거움을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익숙한 장소, 길들어버린 일상 속에서는 미처 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여행. 

 

 

 

여백으로 채워지는 자유로운 하루

패키지여행의 아쉬움은 ‘어디에 간다’는 목적지는 중요히 여기되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점이다. 마치 파리 여행은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만 가보면 만사형통이라는 듯, 유명한 장소만 그야말로 ‘찍고 돌아오는’ 식의 여행 패턴은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 중 하나인 ‘현지인처럼 살아보기’의 즐거움을 빼앗는다. 인증사진도 좋고 여러 나라를 도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천천히 장소의 깊이를 느끼면서 여행하면 더욱 좋겠다. 명소만 관광하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기 식 여행이 아닌,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여행의 즐거움을 내게 처음 가르쳐준 곳은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에서 보낸 6주 동안 나는 그동안 내 여행이 얼마나 속도 중심, 목적지 중심, 효율성 중심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한 베를린 유학생이 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와 있는 동안 비워놓은 방에 들어갔다. 가구와 집기가 다 갖추어져 있고, 널따란 마당도 쓸 수 있고, 한국에서 이민 온 주인아주머니가 빨래도 해주는 정겨운 하숙집이었다. 6주 동안 60만 원이라는 저렴한 주거비용도 놀라웠다. 방이 꽤 컸고, 간단한 요리도 해먹을 수 있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다락방 구조였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첫날부터 베를린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커다란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빽빽한 스케줄에 맞춰 유명한 관광지만 바쁘게 다니는 단체여행이 아니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때로는 하염없이 걸으며, 배고프면 눈에 띄는 식당에서 식사하고, 목마르면 노천카페에 앉아 느릿느릿 커피를 마시는, 그야말로 내 맘대로 나의 하루를 요모조모 조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여행. 게다가 베를린의 물가가 파리나 런던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싸게 느껴져서 그야말로 웬만한 버킷 리스트는 다 ‘클리어’할 수 있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한달쯤살아보는여행의묘미1

 

 

내한공연 당시에서는 푯값이 너무 비싸 망설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도 부담 없이 볼 수 있었고, 아예 한 달짜리 ‘베를린 박물관 투어 티켓’을 끊어 런던, 파리와는 또 다른 특색의 훌륭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베를린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부지런히 다니기도 했다. 예전에는 ‘가고 싶긴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안 되겠다’고 포기했던 장소들에 가서 하염없이 오래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브레히트의 묘지를 물어물어 찾아가 한참 동안 무덤 속의 브레히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 곁에 헤겔의 묘지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꺅 하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히틀러의 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반제(Wannsee)를 산책하며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잔혹한 나치즘의 흔적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페르가몬 뮤지엄 안에 있는 제우스 대재단에서 ‘1000년 전의 지구’로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 넋을 잃은 채 몇 시간을 앉아 있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은 바삐 움직이는 단체여행에서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느리고 한적한 여백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현지인처럼 살아보기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을 발견하면, 그곳에 몇 번이고 다시 가곤 했다. 단골 식당도 생겼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식당 주인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한 번 가보고 ‘다음에 또 와야지’ 결심했지만 다시는 찾아가지 못한 식당과 달리, 베를린에서는 몇몇 식당을 마치 현지인처럼 단골이 되어 살뜰히 찾아다녔다. 그리고 다른 여행에 비하면 턱없이 긴 6주 동안의 체류 기간도 짧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베를린에 깊이 정이 들어버렸다. 한곳에 머무르니 주말마다 다른 도시로 떠날 때도 작은 배낭 하나만 달랑 들고 떠나면 충분했다. 베를린에서 가까운 드레스덴, 빈 등으로 잠깐씩 나들이하듯 다녀오는 여행도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동반하지 않았기에 더욱 몸도 마음도 가볍게 다녀올 수 있었다. 그야말로 ‘여행 속의 또 다른 여행’, 베이스캠프가 있기에 더욱 안심되는 그런 여행이었다. 

 

 

한달쯤살아보는여행의묘미2

 

 

베를린은 물가가 안정되어 있어서 생활비가 서울에서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베를린 사람들은 이사를 자주 하지 않는다고 한다. 10년 전의 월세가 지금의 월세와 거의 비슷하고, 세입자에게 주어지는 불이익 같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도 그냥 저렴한 월세를 살지 굳이 집을 사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이 전혀 발달하지 않기 때문에 호텔업이나 대기업에 투자하는 거대 자본가들만 빼면 보통 사람들은 그냥 오래오래 한 집에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집값과 월세가 안정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다. 게다가 맥주와 치즈 같은 것이 워낙 싸고 맛있어서 독일 음식이 맛없다는 편견도 사라졌다.  

 

 

한달쯤살아보는여행의묘미3

 

 

오래 머물러야만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

6주 동안이나 한 도시에서 사는 경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런던, 파리, 피렌체, 빈에서도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보다 오래 머물렀던 경험이 있다. 그야말로 볼 것, 들을 것, 가보고 싶은 장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런던의 월레스 컬렉션, 파리의 구스타브 모로 박물관,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 빈의 악기박물관은 패키지여행에서는 절대 가지 않는 ‘작은 박물관의 은밀한 매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장소들이었다. 대영박물관이나 우피치 미술관처럼 ‘그곳에 간다면 꼭 들러야 할 곳’도 매력적이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러야 비로소 여유를 내어 찾아갈 수 있는 작은 박물관들은 마음속에 더 오래, 잔잔하고도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여행의 추억이 희미해지는 순간마다 ‘아, 그 작품은 정말 아름다웠지, 다시 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감동의 순간들을 환기해준다.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제주도에 그렇게 많이 다녀왔지만, 제주도에서 한 달 사는 동안 천천히 바라보고 걸어본 거리와 숲길들은 이틀 사흘씩 잠깐 머물다 오는 쪽잠 같은 여행에 비할 바 없는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새별오름의 장엄한 갈대숲길, 세화해변의 고요하면서도 아늑한 바다 풍경, 곶자왈 곳곳 곧게 뻗은 나무들은 삶이 힘겨울 때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마음속의 작은 안식처가 되어 어두워지는 마음을 환히 밝혀준다. 잠시 잠깐 둘러보는 여행과 한 달쯤 살아보는 여행의 결정적인 차이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즐거움을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익숙한 장소, 길들어버린 일상 속에서는 미처 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여행. 그런 삶의 여백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좀 더 자주, 뜻밖의 선물처럼 반짝이는 축복으로 주어지기를 바란다.

 

photo ⓒ Sebastian Schuty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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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여울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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