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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낸다는 것에 대해 영화 ‘다가오는 것들’이 건네는 말

-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김혜숙

2022-08-23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어 한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우주의 탄생도 생명의 탄생도 우연적이고 창발적이라 한다. 어떤 의지나 인과 등 목적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다. 이러한 우연과 불확실성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 인간에게 삶은 일종의 숙명이다. 어떻게 살든 우리는 그것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고 말이다.


우리의 삶을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연속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주로 두 가지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것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다가오는 것들이 지나온 것들이 되는 것이 나이 들어감이고 그게 우리들의 삶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그런 오고 가는 우리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별로 수선스럽지 않게 우리가 의지하지 않았음에도 기어코 다가와 살아내도록 우리를 떠미는 것에 관해 말한다. 그리고 당신이라면 그들을 어떤 태도로 맞이할 것인지 질문하고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이가 있고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자기 일에도 매우 열성적이다. 이런 별 탈 없는 그녀의 일상적 삶에 한 가지 걸림이 되는 것은 이제는 늙어버린 엄마의 존재다. 밤이면 전화를 걸어 외롭다거나 살려달라는 애원으로 그들 부부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무시하라는 남편의 말에도 나탈리는 항상 엄마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돌봐준다. 40대의 나탈리가 거부하기 힘든 일이, 나탈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탈리에게는 좀 더 많은 것들이 다가온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며 살 줄 알았던 남편이 어느 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며 이별을 통보해온다. 2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면서 가꾼 가정과 추억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사랑의 결핍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는 그와의 사랑에서 무엇을 놓친 것일까? 그렇게 어느 날 아주 갑자기 남편과 이혼하게 되는 일. 그 일 또한 나탈리에게 어느 날 속수무책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외에도 나탈리에게는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다가온다. 그녀가 쓴 철학 교재와 지도서가 이제는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사는 책의 내용과 디자인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러다 결국은 그녀를 필진에서 제외한다. 옛 제자 라비앙을 비롯한 젊은이들과 사회 진보와 혁명을 주제로 토론하면서 역시 그녀는 자신에게 새로이 다가온 것을 느낀다. 이제 그녀는 더는 급진적인 경향에 동의하지 못하는, 과거에 자신이 가졌던 신념이나 주장들과는 모순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그녀에게 다가온 주변과의 갈등은 어느 쪽이 더 옳은가와 같은 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그녀가 어떤 사회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현상들일 뿐이다. 그건 그렇게 그녀에게 다가온 것일 뿐이다. 합리주의자들처럼 그것에서 어떤 인과를 찾으려 한다는 것은 부질없으며 어쩌면 삶을 단순화하면서 그 본질을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어 한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우주의 탄생도 생명의 탄생도 우연적이고 창발적이라 한다. 어떤 의지나 인과 등 목적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다. 이러한 우연과 불확실성은 현대 과학의 대표적인 테제(thesis)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삶의 맥락에서도 유효한 테제가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인 미국의 철학자 리차드 로티는 이런 우연성을 삶의 맥락으로 확장한다. 삶은 각자가 만든 다양한 메타포들의 상호교섭이며 우연적인 산물이라 말한다. 나탈리의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사라졌다. 세계도 삶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가오는 것이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리처드 로티(김동식, 이유선 옮김), 사월의책, 2020 (출처: 교보문고)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리처드 로티(김동식, 이유선 옮김), 사월의책, 2020 (출처: 교보문고)



 그래서 우리의 삶은 두렵고 허무한가? 이 영화는 쓸쓸하고 슬픈 영화일까? 우리가 나이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죽음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일들 앞에서 우리는 그저 두려워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전부일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답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남편과의 이혼, 중심에서 주변부로의 이동 그리고 엄마의 죽음 후에 나탈리는 파비앙에게 이제야 온전한 자유를 느낀다고 말한다. 이 자유는 그것이 나쁨이었든 좋음이었든 어떤 것이었든 나탈리의 삶을 규정하고 한계 지웠던 모종의 관계들로부터의 존재론적 자유일 것이다. 이제 더는 내가 다른 무엇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아도 좋은 자유, 어떤 획일적인 인과의 고리에서 벗어나 내가 나의 시간과 공간과 사유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이는 대상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고 그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이런 자유의 획득은 나탈리가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보다 전체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이라는 보다 전체적인 시선에서 엄마의 죽음, 이혼과 주변부로의 이동을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책 한 권을 들고 산에 올라 사방이 확 트인 풍경 앞에 마주 선 나탈리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나탈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서 산에서 산으로 이어진 풍경과 바람들을 바라본다. 그렇게 전체를 조망할 때, 즉 그렇게 일정한 거리에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 건 내가 하나하나의 사태 속에서 분투하고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나탈리가 전방위적으로 밀려오는 삶의 낯섦 하나하나에 맞서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않으며 중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선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이러한 전체를 조망하는 사고방식은 철학적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나탈리가 철학 교사라는 것은 큰 함의를 갖는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특히 나탈리는 스토아학자를 연상시킨다. 그녀의 말에서보다 그녀의 태도에서 말이다. 에픽테투스를 비롯한 스토아학파 학자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다가왔을 때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과 관념이다 

<편람>, 에픽테투스



하지만 행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강의실에서 나탈리가 언급한 알랭의 <행복론>에서 행복은 단순히 어떤 상태가 아닌, 행복을 향해 가는 희망의 지속에 있다고 보았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그 자체로서 충족된다… 

원하던 것을 얻으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다.

<행복론>, 알랭



 하지만 다가오는 것들의 불확실성이나 우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정한 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윤리의 테두리를 적극적으로 선택한다. 나탈리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파스칼의 <팡세> 구절을 읽는다. 그 구절은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혼자 흐느끼는 나탈리의 모습에까지 이어진다.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온전히 따르기를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치를 수 있다.

<팡세>, 파스탈



이 영화의 마무리는 원숙해진 나탈리의 모습을 그린다. 다가오는 것들을 향한 나탈리의 적극적이고 따스한 환대가 느껴진다. 딸과 사위, 아들, 그리고 손녀를 위해 크리스마스 음식을 준비하는 나탈리의 모습과 등장인물 간의 대화에서 이전보다 여유로워진 말투의 언어가 오고간다. 특히, 나탈리가 식사 중에 자다 깨어 우는 손녀에게 달려가 보듬어 안고 달래는 장면에서 더욱 그렇다. 영화 내내 지금까지 그녀를 대변한 것은 대부분 철학자들의 문장이었다. 어떤 주장이며 선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아이를 안고 어르면서 노래를 부른다. 규정하거나 단언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그저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모든 것들로의 물듦이고 화해를 의미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가장 높은 곳에서 꾀꼬리는 노래하네 

너의 마음은 웃음 짓고 

내 마음은 눈물 짓네 

나는 연인을 잃었다네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나탈리가 부르는 노래 중 일부 -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면서 니체가 초인을 내세워 우리에게 그토록 힘주어 권했던 삶에 대한 태도 하나를 돌아본다.



어떤 삶이든 다가오라 

내가 흔쾌히 맞아주마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살아낸다는 것에 대해 영화 ‘다가오는 것들’이 건네는 말

- 지난 글: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공생의 윤리를 생각하다-디스트릭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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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

서울교육대학교 어린이철학교육센터 이사
어린이 철학교육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대학과 대학원 강의, 교사 연수, 집필 번역 등을 해 왔다. 현재는 서울교육대학교 어린이철학교육센터 이사, 철학적탐구공동체연구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대한민국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함께 철학함’을 연습하고 익히는 일에 마음 쓰고 있다. 좋은 개인과 좋은 세상을 위해 ‘함께 철학함’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고차적 사고력 교육>, <미국 철학교육 프로그램 교재와 매뉴얼> 등을 번역하였고, 함께 쓴 책으로는 <토론수업레시피>, <철학수업레시피>, <생각하는 교실 철학하는 아이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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