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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입법자

- 열두 달로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 -

함규진

2022-07-28

현대에 입법자란 있을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어디를 돌아봐도 우리는 그런 위대한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

아니, 그곳에 있다면 이미 ‘위대한 아웃사이더’라는 입법자의 개념에 어긋난다.

누군가는 교사가 현대의 입법자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7월의 태양, 그 뜨거움 아래에서의 외침

7월. 여름이 한창 때에 접어든다. 각급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고, 불볕 더위와 장마 속에서 가족 단위로 휴가를 계획할 때다. 국가적으로는, 한국의 경우, 6월의 전쟁과 8월의 해방 사이에서 헌법을 처음으로 제정, 국가의 기틀을 세운 제헌절이 이달에 들어 있다(17일). 

 

그런데 7월에는 다른 나라들의 제헌절도 여럿 든다. 아르메니아(5일), 오스트레일리아, 팔라우(9일), 핀란드(17일), 우루과이(18일). 나라가 처음으로 독립을 성취한 날, 또는 정부를 수립한 날도 이달에 많다. 가장 유명한 7월 4일의 미국 독립기념일. 같은 날에 필리핀과 압하지야, 루안다도 독립했다. 또 7월 전체로 보면 이라크, 몰디브, 벨기에, 벨라루스, 캐나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니카라과, 수리남, 바베이도스, 튀니지, 라이베리아, 카보베르데, 가나, 부룬디, 말라위, 소말리아, 코모로, 키리바티, 바하마, 바누아투, 솔로몬 제도의 독립기념일이나 정부수립 기념일이 7월 달력에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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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다른 나라의 제헌절, 독립기념일, 정부수립일이 많은 7월

 

 

지금 지구상의 주권국가가 180개국 남짓인데(명목상 속령 제외), 그 가운데 28개국이 7월에 세워졌으니 7월은 ‘정치적 변혁-새로운 시작의 달’로 특별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5월 5일의 삼부회 개최부터라고 보통 보지만, 실질적으로는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되었다. 41년 뒤에는 7월 혁명도 있었다. 프랑스 말고도 라틴아메리카 독립 혁명이 대체로 7월에 일어났고, 20세기 이후로는 쿠바와 이집트가 7월에 혁명을 겪고, 새로운 체제를 세웠다. 또한 묘하게도, 중국 공산당 창건일과 홍콩 특별행정구역 설치일이 똑같은 7월 1일이다. 한껏 뜨거워지는 7월의 태양, 그 아래에서, 새로운 질서를 목청껏 외쳤던 일이 세계사에 유독 많았던 셈이다. 그것은 신화나 전통에 따라 오래 내려온 질서를 그러려니 하지 않고, 고귀한 정신과 집단 지성으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합리적, 법적 질서였다.

 

 

현명한 소수인가, 공정한 다수인가?

이처럼 새 질서를 세울 때, 소수의 현명한 사람들이 갖기 마련인 ‘고귀한 정신’과 일반 대중 모두의 ‘집단 지성’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정치철학의 고전적 주제였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민 재판으로 처형되는 걸 보았기 때문인지, 대중의 합리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법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법이란 건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환경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의 판단이 더 효율적이리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인왕’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제시했다가, 그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의 대안으로 ‘법치국가’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의견이 달랐다. 아무리 고귀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도 편견이나 격정에 사로잡혀 불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판단력은 여러 사람의 합쳐진 판단력보다 떨어진다.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을 갖고 토론을 벌여, 합의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곧 ‘중용’이며 올바른 법의 내용이 된다고 보았다. 다만 그 토론은 일방적이지도,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아야 한다. 다수결이 최선도 아니다. 특정 세력이 다른 세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이룬 입법이라면 독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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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토론을 통한 '중용'을 주장했다.

 

 

입법자, 위대한 영혼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다

하지만 그런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서로를 배려하는 토론이란 참여자들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어야 가능하다. 힘이면 전부다, 다수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중이, 진영으로 갈기갈기 나뉘어져 ‘저놈들과 무슨 대화? 무슨 타협? 저놈들은 무조건 쓸어버려야만 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어떻게 그런 토론을 거쳐 중용에 맞는 입법에 이를 수 있을까? 그래서 나온 개념이 ‘입법자’다. 대중이 아직 무지몽매할 때, 탁월한 지성과 덕성으로 올바른 법제도의 틀을 고안하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대중을 설득하는 존재다. 스파르타의 국제를 마련했다는 리쿠르고스, 아테네 정체의 틀을 세웠다는 솔론 등이 그런 입법자에 해당된다. 

 

이는 근대 서구의 사회계약론자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루소에 따르면 입법자는 새 질서를 만들려는 나라 사람의 일원이 아니고, 일원이 되어서도 안 된다. 자신이 그 속에서 살아갈 질서를 만들려 하면 아무래도 사정에 치우칠 수 있고, 고귀하고 현명한 사람이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 속에 남는다면 자연스럽게 ‘철인왕’과 같은 존재가 되어 독재자로 군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의 기질과 형편을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질서를 만들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스스로 갖지 않은 이해관계를 배려하고, 스스로 누리지 않을 권력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그런 법제도를 설득하려면 합리적 추론도 소용이 없고, 그렇다고 힘으로 강제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입법자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여야 한다. 그 영혼의 힘으로, 잘 이해는 되지 않는 그의 말을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대의 입법자? 철인왕의 독재를 우려하며

현대에 입법자란 있을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어디를 돌아봐도 우리는 그런 위대한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 아니, 그곳에 있다면 이미 ‘위대한 아웃사이더’라는 입법자의 개념에 어긋난다. 누군가는 교사가 현대의 입법자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힘쓴다. 그 스스로 학생이었으므로, 이미 학생의 입장이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학생의 생각과 희망을 이해한다. 그리고 아직 미숙한 학생들의 영혼을 스스로의 영혼의 힘으로 이끌고, 그들을 제대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소통할 줄 아는 민주 시민으로 키워낸다. 

 

한편, 유독 새 질서 창립의 기념일이 많은 7월에는 또 하나, 특별한 ‘입법자’의 날이 있다. 7월 마지막 금요일은 ‘시스템 운영자의 날’이다. 편리하고 유능한 전산 시스템이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데는 그 뒤에서 묵묵히 코딩에 코딩을 반복하는 시스템 운영자들, 프로그래머들의 노고가 있다. 그들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날도 하나쯤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스스로 시스템 운영자였던 테드 케카토스(Ted Kekatos)의 주도로 2000년도부터 지켜져 왔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갈수록 IT가 우리 생활에서 중요해지는 현실을 보면 곧 어느 국경일보다 중시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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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입법자

 

 

지금은 생활, 경제, 문화 차원이지만, 아예 법과 정치도 전산 시스템에 맡기면 어떨까? 실수에서 자유롭지 않고, 자기 이익이나 당파에 따라 편향적이기 쉬운 사법 판결, 정책 수립, 입법까지 AI에게 맡기는 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AI라면 대중지성이 아니라 철인왕의 입장일 것이다. 그 철인왕이 과연 기계적 합리성을 앞세워 인간의 소망과 행복을 무시하는 독재로 가지 않을지? 입법자의 역할을 해야 할 프로그래머들의 어깨가 더 무거워진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어느덧 사람보다 기술을 더 믿음직하게 여기게 되어버린, 그러면서도 기술에는 무지몽매할 뿐인 일반 시민들의 각성 책임 또한.

 

 

 

리드문

 

 

7월 : 입법자

- 지난 글: 6월 : 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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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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