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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면 시작된다

- 감정의 자서전 -

손택수

2022-07-26

리드문

 

 

살아있는 이야기를 찾아서

 

 

‘시간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역사도 신화도 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그렇다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햇빛도 되지 못하고 달빛도 되지 못했으나 밤하늘을 찰나의 광휘로 긋고 지나가는 저 별똥별은 누가 노래해줄까요? 문학과 시는 유한한 인간이 시간 앞에서 던지는 이런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역사책이나 신화 책에는 나오지 않는 자잘한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우리는 망각되기 쉬운 삶의 장면들을 기억하고 나누면서 저마다가 살아낸 세월의 증언자가 됩니다. “완전하게 갖추어진 개인 기록은 완벽한 사회학적 차원이다.”폴란드 사회학자 츠나니에키(F.Znanieki)의 말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문학

약력이나 이력서에 들어오지 못한 노래와 이야기들 속에서 탄생하는 문학



역사와 신화 같은 거대 서사는 개인의 삶에서는 흔히 약력이나 이력서 혹은 비문 같은 공식화된 텍스트로 나타납니다. 한 개인의 삶을 추상화하고 개념화하는 이 같은 요약 나열 방식엔 구체적 삶의 심장 박동 소리가 없습니다. 약력이나 이력서에 들어오지 못한 노래와 이야기들을 경청할 때 거기서 문학이 탄생합니다. 가령, 문학은 태어난 해의 숫자보다 그의 태몽에 관심이 있고 백일잔칫상에 오른 사물 중 무얼 잡았는지에 더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습니다. 입학과 졸업 같은 공식적 기록보다 입학식 전날 밤의 기분과 첫 등굣길에 만난 아이의 코에 가락국수처럼 콧물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모습들에 대해서 더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바로 결코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념과 추상을 벗어난 자리에 삶과 시가 있다



별빛의 서사는 강한 빛으로 눈을 멀게 하는 햇빛의 추상화와 하나의 상징체계로 굳어진 달빛의 개념화를 멀리합니다. 자유나 평화 같은 추상은 구체적 개별자의 삶에 눈감기 쉽고, 국가나 사회 같은 익숙한 기성의 개념은 스스로의 경험으로 찾아 익힌 개념이 아니라서 질문하는 능력과 상상하는 자질을 배제하기 좋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말에 나의 삶이 있을까요? ‘자유’와 ‘사랑’은 경험이 녹아 있는 실감의 언어가 아닙니다. 시는 당신의 삶 속에서 자유와 사랑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말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유와 사랑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삶으로 옮겨오는 과정입니다. 시인은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합니다.


‘저는 풀냄새를 맡으면 자유의 감각이 살아나요. 풀은 잘리고 잘려도 진물로 상처를 감싸면서 다시 차오르잖아요. 결코 누구도 풀을 이길 수 없죠. 옛날에 누나가 무릎이 깨진 자리에 풀잎을 짓찧어서 약초처럼 발라준 적이 있거든요. 금방 아물어서 딱지가 앉았죠. 그런데 딱지가 나으려니까 가렵잖아요? 그래서 냇가에 가서 강물에 다리를 담그고 있으려니 물고기들이 와서 입술로 막 뜯어먹는거에요. 닥터피쉬처럼요. 아릿아릿 하면서도 얼마나 시원하던지. 상처가 나지 않게 입을 맞춰주던 감각이 제 몸에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제게 사랑의 감각은 그런 입맞춤 같은 거죠.’


개념과 추상을 걷어낸 자리에서 감각이 살아나고 사유가 꿈틀거립니다. 또한 이야기가 살아납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이 자유이고 사랑인지를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시키면서 새로 묻습니다. 시는 그러니까 우리가 문명인으로 제도화된 삶을 살기 위해 받아들인 관습이나 상식을 의심하고 반성하는 근본적인 성찰력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가 시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쓰는 언어와 그 언어를 낳은 세계를 성찰하는 힘에서 옵니다. 이것이 시를 끝없이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는 자서전과 닮았습니다. 자서전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한 응시와 성찰을 품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라고 묻고 답하면서 지난 경험을 재해석하고 통찰한 뒤에 삶을 재구성하는 양식이 자서전이라면 근본적으로 시와 자서전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백하면 시작된다

 

 

시와 자서전의 연육교라 할 성찰의 힘은 무엇보다 고백 발화에서 나옵니다. 고백을 모든 글쓰기의 심장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내가 화자가 되어 고백하고 내가 청자가 되어 그 고백을 경청하는 방식 속에서 우리는 자기 안의 글쓰기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리듬이 살아나고, 이야기는 자연스러워지며, 메시지와 이미지를 넘어선 공감의 음역이 확장됩니다. 그 어떤 작법 책에도 없는 나만의 작법이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무인도에 표류한 주인공이 고독을 달래기 위해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려주고 윌슨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윌슨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생존법을 터득하고 마침내 섬을 탈출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처럼 무인도 같은 절대적 고독 속에서 배구공 같은 사물을 의인화해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이야기 하기의 본능을 표류한 자의 생존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고백적 글쓰기는 막막한 바다 한가운데 표류한 내가 윌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일상의 시간들 속에 무화되어가는 나를 초점화 합니다.



윌슨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 등장하는 배구공 '윌슨' (출처: 위키백과)

 

 

가령, 이런 시는 어떨까요.“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김준태,「감꽃」전문) 유년시절의 평화를 상징하는 감꽃으로부터 고통스런 민족사를 암시하는 죽은 병사들 그리고 급속한 금융자본주의로의 진입을 보여주는 돈에 이르기까지 이 짧은 시는 자신의 성장기를 고백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먼훗날’의 삶을 「감꽃」이라는 제목을 통해 은근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자본을 다 경험한 뒤에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은 맑고 향기로운‘감꽃’에 있다는 메시지가 거부감 없이 스며듭니다. 


글쓰기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고백이긴 한데 현장에서의 고백 발화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시든 자서전이든 모든 글쓰기는 고백에 기초한다고 아무리 목에 힘을 줘도 내밀한 상처나 치부를 드러낼 땐 망설임이 있습니다. 하긴, 무조건 진솔한 고백만으로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경험의 재구성이라는 장치가 반드시 개입해야 합니다. 사물과 언어가 일대일로 반응한다는 소박한 재현의 관점을 넘어 사물과 언어 혹은 경험과 글쓰기 사이에 일종의 프리즘을 설정할 때 글쓰기는 비로소 분광의 찬란을 실현하게 됩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허구적 텍스트 속에서 경험에 옥죄어 있던 고백은 천 개의 혀를 가진 가객의 혀로 거듭납니다. 이때 우리는 비유와 이미지 그리고 상징이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배구공 윌슨’과 같은 영원의 도구들임을 알게 됩니다. 직접적 고백을 비유나 이미지로 치환시켜 간접적으로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뜻밖에 그동안 잊고 지낸 내면의 아이를 만나기도 합니다.


 

인형


대여섯 살 때, 한밤중에 부스스 깨어났다가 

만물이 죽은 듯한 고요 속에서 다시 잠들면 악몽이 눌러왔다 

잠든 중에 자그마한 왼손에 큰 바위가 내려친 듯한 

진동과 저림으로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타는 듯한 

왼손을 오른손이 주무르며 감싸쥐었는데 

왼손은 커다란 실타래로 부풀어오르고 

 수천 개의 바늘들이 찔러댔다 엉클어진 실뭉치가 된 왼손은 

어린 몸뚱이의 수십 배로 커졌고, 

불쑥 집채만 한 여자아이 인형으로 변했다 

거대한 인형은 산발한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동굴 같은 검은 눈알을 부라리며 

빨간 입술을 실룩거리고, 꽃무늬 원피스에, 

흰 레이스 앞치마를 펄럭이면서, 

사방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바늘들이 촘촘히 박힌 왼손을 내밀었다 

쿡쿡 찌르는 바늘을 뽑아달라고 

집채만 한 인형은 팔을 비틀어 보이며 보챘다 무

섬증에 어두운 터널 속으로 자꾸 달아났는데 

괴물 인형은 뒤쫓아 왔다 

희멀건 통로는 인형의 긴 머리칼과 치마의 

림자로 꽉 차고 흔들려서 쫓기는 다리는 허방을 디뎠다 

대여섯 살 때, 아직도 가질 않는

(습작생의 작품)


악몽 속에 나타난 괴물 인형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소외의 삶일 수도 있고, 박탈당한 유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억압과 상처 그리고 고통을 지루하게 진술하는 것보다 이 같은 이미지를 활용하여 제시할 때 상징계에 짓눌려 있던 무의식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던 내면의 내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지요. 과연, 누가 인형을 괴물로 만들어버렸을까요. 나는 왜 인형의 몸에 박은 바늘을 뽑아주지 못했을까요. 그 죄책감 때문에 허방을 딛는 삶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아직도 그 악몽이 가시질 않고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시는 그에 대한 어떤 치유의 답도 내릴 수 없습니다. 시는 정신분석가도 아니고 얼치기 심리치유사도 아니고 명상이나 값싼 힐링 상품도 아닙니다. 시는 그저 골똘하게 그 누구보다 하염없이 그 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장르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묻게 합니다. ‘대여섯 살 때, 아직도 가질 않는’ 이 악몽으로부터 어떻게 놓여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괴물 인형이 되어버린 동시대의 삶과 나를 근원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시의 가능성은 생활이다



저는 이와 같은 시들이 문학장이라는 제도에 갇혀 사는 기성시인들이 미처 가지 못한 시의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시의 결핍은 언제나 생활현장을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있습니다. 시의 미지가 있다면 바로 시가 눈감고 있는 생활시의 현장입니다. 백년 이백년이 지난 뒤에 등단이나 문학상 같은 문학제도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남는 것은 작품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가 자서전을 만난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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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담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릴 때 꿈은 농부였다. 별(辰)과 노래(曲)가 하나가 된 농(農) 자를 업으로 삼고 싶었는데 꿈이 좌절되면서 그만 시를 쓰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실향과 실패와 숱한 실연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시집 『목련전차』,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청소년시집 『나의 첫소년』, 동시집 『한눈 파는 아이』 등이 있다. 제3회 조태일문학상, 제13회 노작문학상, 제22회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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