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엔에서 그레타 툰베리가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고, 우리는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다.”라고 한 연설이 세계 언론을 탔다. 여기서 “당신들”은 후기산업사회를 주도하면서 환경범죄를 일으키는 정재계의 인사들을 가리키고, 또 머리로는 환경을 걱정하면서 몸으로는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고 생활쓰레기를 양산하는 기성세대를 가리킨다.
그녀의 연설은 언론에서는 떠들썩했지만 세계 지도자들을 움직이지는 못한 것 같다. 트럼프는 “아주 행복한 어린 소녀”라며 조롱했고, 브라질 대통령은 “(아마존이) 세계의 허파라는 것은 잘못”이고 아마존은 “(산불로) 황폐화되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았습니다.”(KBS 2019년 9월 25일 뉴스)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European Parliament
나는 지금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북유럽을 대표하는 이 도시만 하더라도 기후붕괴의 조짐은 느끼기 어렵다. 하늘은 맑고 숨쉬기는 편하며 물은 깨끗하고 풍부하다. 이탈리아 로마도 그랬다.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가 시민의 건강을 해칠 수준일 때 로마는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었다. 트럼프의 부동산이 있는 뉴욕도 그랬다. 맨해튼의 하늘은 내가 다녀본 그 어느 도시의 하늘보다 맑았다.
기후가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정재계의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뉴욕이나 로마의 하늘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지구는 아직 살만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침에 잠을 깨는 곳은, 아직은 대기가 깨끗하고 냉난방에 부족함이 없어서 기후붕괴를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이 실감할 수 없는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뉴욕 맨해튼 트럼프 타워 옆에는 애플 스토어가 있다. 그곳의 소비자들은 아이폰 같은 애플의 첨단기기를 사면서 그것이 어째서 세계적인 환경 공해를 가져오는지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립되는 부품이 많은 첨단기기일수록 전 대륙에 걸쳐 환경파괴를 불러온다.
글로벌 생산-소비 사이클이 보편화된 산업에서는 희토류 같은 자원을 캐내는 광산과 각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다르고, 대륙을 건너다니며 조립되고 판매되며, 소비된 다음 폐기되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하고는 무관할 것 같은 아프리카에서, 뉴욕과 서울에서 버린 휴대폰 폐기물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툰베리의 노여움으로 가득한 연설은 놀라움과 환호를 자아냈지만, 우리가 그녀 연설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까. 우리는 이미 <인터스텔라>(2014년)에서, 머피의 입을 통해 툰베리와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머피는 인류의 새 거주지를 찾아 우주로 떠난 아버지 쿠퍼를 "개새끼"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을 속이고 배신했다고 원망한다. 아버지(세대)는 자식(세대)을 “호흡곤란과 굶주림 속에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렸다.
영화에서 밀은 7년 전에 멸종했고 오크라는 병충해에 시달려 재배가 어렵고, 남은 건 옥수수뿐이다. 수확량이 떨어지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인 대다수가 농사에 매달린다. 쿠퍼도 우주비행사였지만 지금은 농사꾼이다. 그 위로 모래폭풍이 수시로 몰아친다.
우주개발의 추진력은 지구의 한계를 깨닫는 데서 나온다. <인터스텔라>는 그 한계의 끝에서 우주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인류에겐 희망을 좇을 기술이 없다. 놀랍게도 인류는 달에조차 가본 적이 없다. 머피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달 착륙은 옛 소련이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미국 정부의 사기극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소련의 경쟁심리를 부추겨 우주개발에 국력을 낭비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우주로 나갈 기술이 없는 과학자들과 우주개발을 포기하고 옥수수 농사에 매달리는 인류. 그래서 미국 우주항공국은 지하에 숨어 극비리에 우주개발 연구를 계속한다. 종반부의 판타지 같은 해결책을 빼면 <인터스텔라>는 사실상, 우주를 탐사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속도보다 지구를 파괴하는 속도가 더 빠른 인류의 비극을 고발하는 영화다.
지구에 사는 인간의 수가 75억 명이 넘다보니 별의별 주장들이 다 나온다. 얼마 전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화제가 됐다. 미국의 달 탐사선이 1969년에 달에 간 적이 없다는 음모론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그 사실을 검증할 능력이 없으니, 신뢰할 만한 준거가 되는 단체나 기관의 말을 믿는 척할 수밖엔 없다.
미국보다 일찍 우주개발에 나선 나라가 옛 소련이다. 그들은 1957년에 이미 스푸트니크 호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런 러시아도 아직 달에 사람을 보내지는 못했다.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러시아 우주개발의 역사를 다룬 <우주탐사와 로켓 기술 박물관>이 있다.
▲ 러시아 '우주탐사와 로켓 기술 박물관'에 전시된 1974년 소유즈 16호의 착륙 모듈 ⓒ백민석
박물관을 둘러보다보면 어째서 옛 소련인들이 달에 갈 수 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내가 박물관에 전시된 기계장비들(영어 설명이 없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우주선의 도면을 설계하는 도구부터 부품을 측정하고 깎고 다듬는 도구들을 보고 있으면 달 탐사선이 아니라 내 고등학생 때의 실습시간이 먼저 떠오른다. 방대한 데이터를 입력해야 할 도구는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썼던 타자기보다 나아보이지 않는다. 전시품 가운데 유일하게 현대의 컴퓨터와 닮은 장치를 보면, 나 같아도 이런 장비로는 달에 사람을 보낼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그런 장비도 1970년에나 만들어졌다.
박물관을 나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들이 달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옛 소련인들에게 물어보면 알겠네.' 하지만 정말로 인류가 달에 갔다면, 그런 비슷한 장비로 달에 착륙해 돌아다니다 무사히 귀환까지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 도면을 그리거나 부품을 다듬던, 옛 소련이 우주개발에 사용하던 도구들 ⓒ백민석
▲ 옛 소련이 우주개발에 사용하던 장치, 현대의 컴퓨터 장치와 약간 닮았다. ⓒ백민석
툰베리는 유엔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뉴욕까지, 비행기가 아니라 태양광으로 움직이는 요트를 타고 갔다. 그녀는 자기 세대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현재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의 장인은 지구가 이지경이 된 건 “모든 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온갖 멋진 말들로 스스로 위무하고 합리화하면서, 신차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소고기를 먹으러 간다.
<인터스텔라>로 유행을 탄 말들이 있다. 쿠퍼의 대사인 “우리는 답을 찾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가 있다. 그리고 브랜드 박사가 읊어주는 딜런 토마스의 시도 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인류의 도전정신을 일깨우는 이 영화 속 대사들은, 유혹하듯 소곤거리는 매력 때문에 언뜻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진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기후 붕괴는 우리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로 찾아낸 '답'들의 연쇄적인 귀결이다. 증기기관과 전기와 자동차와 비행기와 원자력의 발명은 인류가 자신의 안락과 편리, 탐욕을 채우기 위해 찾아낸 문명의 답이었다. 앞서 말한 휴대폰이 가장 최근의 답이다.
인류는 딜런 토마스의 시구처럼 도래할 밤에 저항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밤은 툼베리와 머피같은 자식(세대)가 꾸짖고 있는 우리 아버지(세대)가 만들어낸 것이다. 어두운 밤은 외계의 어떤 세력이 인류를 핍박하기 위해 실어온 위기가 아니다. 우리 인류는 어두운 밤을 부정해선 안 된다.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밤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잘못임을 긍정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그 긍정의 끝에서 다시 생존을 위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툰베리의 연설에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우주를 개발하자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통념상 공상에 젖어있을 나이인 16세 소녀의 입에서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지구를 찾아 나서자는 얘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녀도 인류에겐 새 지구를 찾을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그리고 툰베리만도 못한 트럼프의 미국 정부는 오히려 우주를 방어할 군대를 창설하자고 몰아붙이고 있다).
알고 있기는 <인터스텔라>의 제작진도 알고 있었다. 영화는 블랙홀을 빠져나가 희망을 찾는다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과학자들도 블랙홀의 실체를 모르고, 쿠퍼는 우주 미아가 되어 블랙홀에 빠져 이벤트 호라이즌1, 즉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그 실체에 접근한다. 그래서 쿠퍼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터스텔라> 첫 장면에 나온다. 흥미롭게도, 딸 머피의 방 책장이다.
1.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 가장 흔한 예는 블랙홀의 바깥 경계 즉, 블랙홀 주위의 사상의 지평선이다. 외부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블랙홀의 중력에 의한 붕괴속도가 탈출하려는 빛의 속도보다 커지므로 내부로 들어온 물질이나 빛은 사건의 지평선 외부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 <인터스텔라> 첫 장면에 등장하는 책장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설명해야 할 때, 창작자들은 흔히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물건을 가져와 은유로 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제작진도 자신들도 모르는 블랙홀 너머를 영상화하기가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쿠퍼가 블랙홀로 몸을 던지고 나서 결국 도달하는 곳은 딸의 방 책장 건너편이 된다. 그가 딸과 통신을 시도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 책들이 가득 꽂히고 모래가 떨어지는 책장이다.
<인터스텔라>의 인류는 책장, 즉 책의 추상적인 세계를 통해 희망에 도달한다. 우주탐사선이나 양자컴퓨터나 타임머신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 설정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진리의 아름다운 확인이라기보다는, 현실의 과학엔 길이 없으니 추상적인 책 속을 우회하는 영화적 위무다. 인류를 구원할 기술이 현 인류에 의해서가 아닌, 먼 미래 인류의 전수에 의해 이뤄진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 수준의 암담함을 일깨운다.
▲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도달한 머피 방의 책장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인류에겐 기술도 없지만 시간도 없다.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탐사선의 이름이 인듀어런스, ‘참을성’이지만 문제는 참고 견딜 시간이다. 올해 유엔이 내놓은 지구평가보고서는 6차 대멸종을 경고하고 있다. 수십 년 안에 전체 동식물의 8분의 1이 사라질 것이고, 지금 같은 생태계는 30년밖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jtbc 2019년 5월 7일 뉴스). 10년 후에는 지구의 기후가 300만 년 전으로 역주행하게 될 것이라는 미국 대학 연구소의 예측도 있었다(한겨레신문 이근영 기자, 2018년 12월 12일).
10년 혹은 30년의 기한 안에, 자동차나 휴대폰 같은 글로벌 생산-소비 사이클 산업을 획기적으로 줄이자고 하면 어느 나라 정부가 동의할까. 당장 전 세계가 참여하는 기후 경제 시스템이 완비되고 작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 역사상 어떤 경제 시스템도 십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낸 적이 없었다. 과거 소련이나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도 십 년 만에 나라를 바꾸지 못했다.
인류가 우주에서 뭘 한다고요?
<인터스텔라>로 그려보는 인간의 미래, 그리고 우주
백민석
2019-10-28
얼마 전 유엔에서 그레타 툰베리가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고, 우리는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다.”라고 한 연설이 세계 언론을 탔다. 여기서 “당신들”은 후기산업사회를 주도하면서 환경범죄를 일으키는 정재계의 인사들을 가리키고, 또 머리로는 환경을 걱정하면서 몸으로는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고 생활쓰레기를 양산하는 기성세대를 가리킨다.
그녀의 연설은 언론에서는 떠들썩했지만 세계 지도자들을 움직이지는 못한 것 같다. 트럼프는 “아주 행복한 어린 소녀”라며 조롱했고, 브라질 대통령은 “(아마존이) 세계의 허파라는 것은 잘못”이고 아마존은 “(산불로) 황폐화되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았습니다.”(KBS 2019년 9월 25일 뉴스)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European Parliament
나는 지금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북유럽을 대표하는 이 도시만 하더라도 기후붕괴의 조짐은 느끼기 어렵다. 하늘은 맑고 숨쉬기는 편하며 물은 깨끗하고 풍부하다. 이탈리아 로마도 그랬다.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가 시민의 건강을 해칠 수준일 때 로마는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었다. 트럼프의 부동산이 있는 뉴욕도 그랬다. 맨해튼의 하늘은 내가 다녀본 그 어느 도시의 하늘보다 맑았다.
기후가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정재계의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뉴욕이나 로마의 하늘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지구는 아직 살만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침에 잠을 깨는 곳은, 아직은 대기가 깨끗하고 냉난방에 부족함이 없어서 기후붕괴를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이 실감할 수 없는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뉴욕 맨해튼 트럼프 타워 옆에는 애플 스토어가 있다. 그곳의 소비자들은 아이폰 같은 애플의 첨단기기를 사면서 그것이 어째서 세계적인 환경 공해를 가져오는지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립되는 부품이 많은 첨단기기일수록 전 대륙에 걸쳐 환경파괴를 불러온다.
글로벌 생산-소비 사이클이 보편화된 산업에서는 희토류 같은 자원을 캐내는 광산과 각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다르고, 대륙을 건너다니며 조립되고 판매되며, 소비된 다음 폐기되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하고는 무관할 것 같은 아프리카에서, 뉴욕과 서울에서 버린 휴대폰 폐기물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툰베리의 노여움으로 가득한 연설은 놀라움과 환호를 자아냈지만, 우리가 그녀 연설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까. 우리는 이미 <인터스텔라>(2014년)에서, 머피의 입을 통해 툰베리와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머피는 인류의 새 거주지를 찾아 우주로 떠난 아버지 쿠퍼를 "개새끼"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을 속이고 배신했다고 원망한다. 아버지(세대)는 자식(세대)을 “호흡곤란과 굶주림 속에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렸다.
영화에서 밀은 7년 전에 멸종했고 오크라는 병충해에 시달려 재배가 어렵고, 남은 건 옥수수뿐이다. 수확량이 떨어지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인 대다수가 농사에 매달린다. 쿠퍼도 우주비행사였지만 지금은 농사꾼이다. 그 위로 모래폭풍이 수시로 몰아친다.
우주개발의 추진력은 지구의 한계를 깨닫는 데서 나온다. <인터스텔라>는 그 한계의 끝에서 우주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인류에겐 희망을 좇을 기술이 없다. 놀랍게도 인류는 달에조차 가본 적이 없다. 머피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달 착륙은 옛 소련이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미국 정부의 사기극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소련의 경쟁심리를 부추겨 우주개발에 국력을 낭비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우주로 나갈 기술이 없는 과학자들과 우주개발을 포기하고 옥수수 농사에 매달리는 인류. 그래서 미국 우주항공국은 지하에 숨어 극비리에 우주개발 연구를 계속한다. 종반부의 판타지 같은 해결책을 빼면 <인터스텔라>는 사실상, 우주를 탐사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속도보다 지구를 파괴하는 속도가 더 빠른 인류의 비극을 고발하는 영화다.
지구에 사는 인간의 수가 75억 명이 넘다보니 별의별 주장들이 다 나온다. 얼마 전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화제가 됐다. 미국의 달 탐사선이 1969년에 달에 간 적이 없다는 음모론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그 사실을 검증할 능력이 없으니, 신뢰할 만한 준거가 되는 단체나 기관의 말을 믿는 척할 수밖엔 없다.
미국보다 일찍 우주개발에 나선 나라가 옛 소련이다. 그들은 1957년에 이미 스푸트니크 호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런 러시아도 아직 달에 사람을 보내지는 못했다.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러시아 우주개발의 역사를 다룬 <우주탐사와 로켓 기술 박물관>이 있다.
▲ 러시아 '우주탐사와 로켓 기술 박물관'에 전시된 1974년 소유즈 16호의 착륙 모듈 ⓒ백민석
박물관을 둘러보다보면 어째서 옛 소련인들이 달에 갈 수 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내가 박물관에 전시된 기계장비들(영어 설명이 없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우주선의 도면을 설계하는 도구부터 부품을 측정하고 깎고 다듬는 도구들을 보고 있으면 달 탐사선이 아니라 내 고등학생 때의 실습시간이 먼저 떠오른다. 방대한 데이터를 입력해야 할 도구는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썼던 타자기보다 나아보이지 않는다. 전시품 가운데 유일하게 현대의 컴퓨터와 닮은 장치를 보면, 나 같아도 이런 장비로는 달에 사람을 보낼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그런 장비도 1970년에나 만들어졌다.
박물관을 나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들이 달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옛 소련인들에게 물어보면 알겠네.' 하지만 정말로 인류가 달에 갔다면, 그런 비슷한 장비로 달에 착륙해 돌아다니다 무사히 귀환까지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 도면을 그리거나 부품을 다듬던, 옛 소련이 우주개발에 사용하던 도구들 ⓒ백민석
▲ 옛 소련이 우주개발에 사용하던 장치, 현대의 컴퓨터 장치와 약간 닮았다. ⓒ백민석
툰베리는 유엔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뉴욕까지, 비행기가 아니라 태양광으로 움직이는 요트를 타고 갔다. 그녀는 자기 세대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현재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의 장인은 지구가 이지경이 된 건 “모든 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온갖 멋진 말들로 스스로 위무하고 합리화하면서, 신차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소고기를 먹으러 간다.
<인터스텔라>로 유행을 탄 말들이 있다. 쿠퍼의 대사인 “우리는 답을 찾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가 있다. 그리고 브랜드 박사가 읊어주는 딜런 토마스의 시도 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인류의 도전정신을 일깨우는 이 영화 속 대사들은, 유혹하듯 소곤거리는 매력 때문에 언뜻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진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기후 붕괴는 우리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로 찾아낸 '답'들의 연쇄적인 귀결이다. 증기기관과 전기와 자동차와 비행기와 원자력의 발명은 인류가 자신의 안락과 편리, 탐욕을 채우기 위해 찾아낸 문명의 답이었다. 앞서 말한 휴대폰이 가장 최근의 답이다.
인류는 딜런 토마스의 시구처럼 도래할 밤에 저항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밤은 툼베리와 머피같은 자식(세대)가 꾸짖고 있는 우리 아버지(세대)가 만들어낸 것이다. 어두운 밤은 외계의 어떤 세력이 인류를 핍박하기 위해 실어온 위기가 아니다. 우리 인류는 어두운 밤을 부정해선 안 된다.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밤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잘못임을 긍정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그 긍정의 끝에서 다시 생존을 위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툰베리의 연설에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우주를 개발하자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통념상 공상에 젖어있을 나이인 16세 소녀의 입에서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지구를 찾아 나서자는 얘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녀도 인류에겐 새 지구를 찾을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그리고 툰베리만도 못한 트럼프의 미국 정부는 오히려 우주를 방어할 군대를 창설하자고 몰아붙이고 있다).
알고 있기는 <인터스텔라>의 제작진도 알고 있었다. 영화는 블랙홀을 빠져나가 희망을 찾는다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과학자들도 블랙홀의 실체를 모르고, 쿠퍼는 우주 미아가 되어 블랙홀에 빠져 이벤트 호라이즌1, 즉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그 실체에 접근한다. 그래서 쿠퍼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터스텔라> 첫 장면에 나온다. 흥미롭게도, 딸 머피의 방 책장이다.
1.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 가장 흔한 예는 블랙홀의 바깥 경계 즉, 블랙홀 주위의 사상의 지평선이다. 외부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블랙홀의 중력에 의한 붕괴속도가 탈출하려는 빛의 속도보다 커지므로 내부로 들어온 물질이나 빛은 사건의 지평선 외부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 <인터스텔라> 첫 장면에 등장하는 책장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설명해야 할 때, 창작자들은 흔히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물건을 가져와 은유로 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제작진도 자신들도 모르는 블랙홀 너머를 영상화하기가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쿠퍼가 블랙홀로 몸을 던지고 나서 결국 도달하는 곳은 딸의 방 책장 건너편이 된다. 그가 딸과 통신을 시도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 책들이 가득 꽂히고 모래가 떨어지는 책장이다.
<인터스텔라>의 인류는 책장, 즉 책의 추상적인 세계를 통해 희망에 도달한다. 우주탐사선이나 양자컴퓨터나 타임머신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 설정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진리의 아름다운 확인이라기보다는, 현실의 과학엔 길이 없으니 추상적인 책 속을 우회하는 영화적 위무다. 인류를 구원할 기술이 현 인류에 의해서가 아닌, 먼 미래 인류의 전수에 의해 이뤄진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 수준의 암담함을 일깨운다.
▲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도달한 머피 방의 책장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인류에겐 기술도 없지만 시간도 없다.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탐사선의 이름이 인듀어런스, ‘참을성’이지만 문제는 참고 견딜 시간이다. 올해 유엔이 내놓은 지구평가보고서는 6차 대멸종을 경고하고 있다. 수십 년 안에 전체 동식물의 8분의 1이 사라질 것이고, 지금 같은 생태계는 30년밖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jtbc 2019년 5월 7일 뉴스). 10년 후에는 지구의 기후가 300만 년 전으로 역주행하게 될 것이라는 미국 대학 연구소의 예측도 있었다(한겨레신문 이근영 기자, 2018년 12월 12일).
10년 혹은 30년의 기한 안에, 자동차나 휴대폰 같은 글로벌 생산-소비 사이클 산업을 획기적으로 줄이자고 하면 어느 나라 정부가 동의할까. 당장 전 세계가 참여하는 기후 경제 시스템이 완비되고 작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 역사상 어떤 경제 시스템도 십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낸 적이 없었다. 과거 소련이나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도 십 년 만에 나라를 바꾸지 못했다.
단편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수림』,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 『헤밍웨이』가 있다. 이미지_ⓒ백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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