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부모를 산에 버리러 가는 이야기를 담은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19세기 일본의 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70세가 되면 ‘나라야마’라는 산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관습과 갈등하는 사람들의 비극을 그린다. 오랜 풍속에 따라 제 부모에게 지워진 운명을 실행해야 하는 아들은 매 순간 갈등한다. 어머니를 산채로 버려야 하는 의무와, 낳고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윤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실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갈등이 존재한다. 영화 속 아들처럼 때로는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죄책감으로 번지는 순간 말이다. 어찌 보면 끔찍하기까지 한 광경이 펼쳐지는, 이 비통한 이야기를 우리는 왜 들여다보는 걸까. 그 이야기는 어떻게 예술이 되는 걸까. 비극은 어떻게 우리 삶의 원형이 되는 걸까. 나는 그 비극의 원천이 바로 <오이디푸스왕>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측하기도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운명에 대한 가장 극적인 우화이자 답안으로서의 이야기로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마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과 같았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욕망과 죄의식을 씻어낼 수 있는 계기이자 매개 같았다. 운명의 사슬에 엮여 고뇌하고 고통받는 비극적 인물을 통해 사람들은 거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이입하면서 쌓아둔 감정을 해소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갈등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이해하고, 다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오이디푸스는 원치 않는 운명을 피하려 떠돌다 테베의 왕이 된 인물이다. 어려움에 빠진 테베를 구하려 신탁을 받지만, ‘자신이 선왕인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이며 결혼한 이오카스테가 어머니’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운명을 피하고자 선택한 일들이 외려 운명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게 한 사실을 오이디푸스는 깨닫는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 쉬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행운과 불행을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서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불행을 피하는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비탄에 젖은 오이디푸스는 깨닫게 된다. 바로 어떤 운명과 불행도 자신의 욕망대로 선택하여 제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운명에 대해 안다 해도 자신의 의지처럼 살 수 없고, 원치 않더라도 어떤 운명은 숙명처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관련 책(출처 : 교보문고)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출처: 2003년 희랍극 페스티벌: 오이디푸스(극단 비파))
사람들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나 공연을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자극적이고 슬픈 감정을 느끼고 싶어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해소하고. 정화(Catharsis)시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불가피하게 저지른 지난 일의 과오에 대한 죄의식을 씻고, 알 수 없이 거칠게 다가오는 운명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고자 함이다. 이와 같은 제의로서의 비극은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하다. 어떤 비극을 통해 한 해 쌓인 감정의 노폐물을 씻어내고 다가올 미래로 나설 준비를 해야 할까. 나는 새해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우리가 비극을 보는 이유에 대하여
채기성
2025-12-29
자식이 부모를 산에 버리러 가는 이야기를 담은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19세기 일본의 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70세가 되면 ‘나라야마’라는 산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관습과 갈등하는 사람들의 비극을 그린다. 오랜 풍속에 따라 제 부모에게 지워진 운명을 실행해야 하는 아들은 매 순간 갈등한다. 어머니를 산채로 버려야 하는 의무와, 낳고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윤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실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갈등이 존재한다. 영화 속 아들처럼 때로는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죄책감으로 번지는 순간 말이다. 어찌 보면 끔찍하기까지 한 광경이 펼쳐지는, 이 비통한 이야기를 우리는 왜 들여다보는 걸까. 그 이야기는 어떻게 예술이 되는 걸까. 비극은 어떻게 우리 삶의 원형이 되는 걸까. 나는 그 비극의 원천이 바로 <오이디푸스왕>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측하기도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운명에 대한 가장 극적인 우화이자 답안으로서의 이야기로 말이다.
장-앙투안-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출처: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마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과 같았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욕망과 죄의식을 씻어낼 수 있는 계기이자 매개 같았다. 운명의 사슬에 엮여 고뇌하고 고통받는 비극적 인물을 통해 사람들은 거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이입하면서 쌓아둔 감정을 해소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갈등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이해하고, 다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오이디푸스는 원치 않는 운명을 피하려 떠돌다 테베의 왕이 된 인물이다. 어려움에 빠진 테베를 구하려 신탁을 받지만, ‘자신이 선왕인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이며 결혼한 이오카스테가 어머니’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운명을 피하고자 선택한 일들이 외려 운명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게 한 사실을 오이디푸스는 깨닫는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 쉬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행운과 불행을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서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불행을 피하는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비탄에 젖은 오이디푸스는 깨닫게 된다. 바로 어떤 운명과 불행도 자신의 욕망대로 선택하여 제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운명에 대해 안다 해도 자신의 의지처럼 살 수 없고, 원치 않더라도 어떤 운명은 숙명처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관련 책(출처 : 교보문고)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출처 : 2003년 희랍극 페스티벌 : 오이디푸스(극단 비파))
사람들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나 공연을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자극적이고 슬픈 감정을 느끼고 싶어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해소하고. 정화(Catharsis)시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불가피하게 저지른 지난 일의 과오에 대한 죄의식을 씻고, 알 수 없이 거칠게 다가오는 운명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고자 함이다. 이와 같은 제의로서의 비극은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하다. 어떤 비극을 통해 한 해 쌓인 감정의 노폐물을 씻어내고 다가올 미래로 나설 준비를 해야 할까. 나는 새해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해당 글 감상 콘텐츠: https://www.daarts.or.kr/handle/11080/72087
주요이력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앙상블」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언맨드』로 세계문학상을, 『못갖춘마디』로 사계절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반음』으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그 밖의 작품으로, 소설집『우리에게 있어서 구원』, 장편소설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 『우리의 길은 여름으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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