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분야의 가장 큰 고민은 언제나 비이용자를 어떻게 이용자로 전환할 것인가였습니다. 독서문화 진흥 정책에서도 늘 목표로 언급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대개 단일 프로그램 수준으로 운영되다 보니 확산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한계를 보며, 이제는 단순히 책의 내용 연구가 아니라 사람을 관찰하고 독자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좋은 책만 있으면 독자가 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정보는 다양한 미디어에서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독자가 되려면 좋은 공간·좋은 경험·좋은 책이라는 세 요소가 결합 되어야만 합니다. 그 안에서야 비로소 책을 통해 시민이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습니다.
힙독클럽, 시대정신이 요구한 ‘느슨한 연대’
‘어떻게 젊은 세대가 책을 꾸준히 읽도록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바탕으로 여러 데이터를 살펴보다가 20~30대는 여전히 책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독서 동아리 방식은 관계의 밀도가 너무 높아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세대는 혼자 읽는 것은 외롭지만, 지나치게 강한 소속감에도 부담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느슨한 연대’라는 개념을 주목했습니다. 목적이 있을 때만 모였다가 흩어지고, 자유롭게 드나드는 구조가 지금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습니다. 혼자 읽기 어려운 벽돌책●이나, 작가의 의도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 바로 힙독클럽●●입니다.
소속감을 느끼되 과도한 의무감은 없는 구조, 이것이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새로운 독서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 벽돌책 - 벽돌처럼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500쪽 이상의 분량을 가진 책을 가리킨다.
야외도서관은 ‘좋은 공간·좋은 경험·좋은 책’이 결합 되어야 독서가 가능하다는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시민들은 밀폐된 공간보다 탁 트인 자연과 교감하는 자리를 원했습니다. 매일 아침 꽉 막힌 대중교통과 아파트·직장의 밀폐된 공간을 오가는 도시인들에게 잠시라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는 경험은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광장으로 끌어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도서관에는 60대 이상, 특히 은퇴 남성 어르신들이 많이 오십니다. 산업화 시대의 주역들이지만 은퇴 후 머무를 공간을 찾지 못해 도서관에 오고, 여전히 조용한 공부방으로 인식하다 보니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부모의 책 읽어주는 모습에 불편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갈등을 피하기보다, 세대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밖으로 확장했습니다. 세대·젠더·문화적 갈등을 줄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으며 소통하는 민주적 공론장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했던 자리, 공공인문학의 실험이 되다
서울광장에 조성된 야외도서관은 특히 어린이 공간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독서 경험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은 가족과 세대가 어울리는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야외에서 운영되자 도서관은 자연스럽게 플랫폼으로 기능했습니다. 시민이 모이는 현장이 보이니 여러 기관에서 협력 제안을 했고, 칠레 대사관과는 문학 축제를, 아일랜드와는 해외작가 초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세계와 연결되는 문화교류의 장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시민의 숨겨진 욕구를 관찰해 읽어낸 결과였습니다. 직접 요구하지 않았지만 경험해 보니 ‘이런 게 필요했구나’라는 반응을 얻었고, 도서관은 이제 좋은 공간과 경험을 제공하며 시민이 인식하지 못했던 욕망까지 끌어내는 공공인문학의 실험 무대가 되었습니다.
야외도서관은 처음부터 세 단계 전략으로 설계했습니다. 첫째, ‘호기심’을 끌어내는 것. 지나가는 시민들이 ‘이게 뭐지?’ 하며 멈춰서 사진을 찍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둘째, ‘경험’의 플랫폼으로 만드는 것. 주말마다 바뀌는 대사관 프로그램, 해외 가수와 공연, 천문대 별자리 체험 등 다양한 문화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셋째, ‘몰입’. 결국 책에 깊이 빠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처음엔 컬러풀한 공간에 반응했지만, 재방문하면서 점점 책을 통한 몰입과 성찰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이 있는 서울광장’은 환대의 공간, ‘광화문 책마당’은 낭만의 공간, ‘맑은 냇가’는 몰입의 공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물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자리에서 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아이는 “엄마, 이게 행복이에요”라고 속삭였습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시민의 욕구가 호기심에서 경험, 그리고 책 읽기의 행복으로 전환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공부방을 넘어, 자율과 신뢰의 장으로
시민들의 인식 변화는 문화적 성숙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사서들이 우려했던 책 분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민들은 책을 소중히 다뤘고, 쓰레기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놀이 공간 앞에서 자연스럽게 줄을 서고, 차례를 양보했습니다. 부모는 책을 빌려 읽고 다시 제자리에 두며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아이들은 문화 시민으로 성장하고, 도서관은 자율과 신뢰의 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서관이 ‘조용히 공부만 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공공인문학의 실험과 혁신의 현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야외도서관은 전국적으로 100곳 이상 확산 되며 새로운 도서관 모델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민이 스스로 공간을 지키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사회적 신뢰의 회복 그 자체였습니다.
공익성이 만든 신뢰, 협력으로 확장되는 플랫폼
서울도서관은 시민을 이용자가 아니라 공공인문학의 동반자로 세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료실 한가운데서 ‘방구석 토크’를 열었습니다. 사서들은 소음 문제를 걱정했지만, 과감히 돌파했습니다. 지금은 작가와 시민이 대화하고 때로는 음악 공연까지 열리는, 일상과 책이 만나는 새로운 접점이 되었습니다. 대사관과 협력해 각 나라의 문학과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시민은 도서관을 통해 책·문화·경험이 확장되는 플랫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장점은 순수한 공익성입니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 간 협력이 투명하고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도서관은 형식적인 틀을 깨기 위해 ‘야한 책멍’, ‘언제까지 사진만 찍을래? 책 읽을 사람 다 모여!’ 같은 도발적이고 유쾌한 문구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관(官)도 시민의 눈높이에서 새롭게 기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였습니다.
체험에서 실천으로
시민과 함께 만드는 신뢰의 장
서울도서관 오지은 관장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단 복제, 배포 및 공유 금지
욕구를 읽고, 기대를 넘는 경험을 건네다 저희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마다 시민들의 욕구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기대치보다 더 높은 경험을 제공하려 노력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매년 설문조사를 실시해 개선할 부분을 도출하고, 불편 요소를 줄여갑니다. 과거에는 실내에서 서비스를 제공할 때 시민들의 불평과 요구가 많았지만, 야외로 나가 더 큰 공간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자 시민들의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불만보다 수용과 공감이 많습니다. 특히 야외도서관은 기상 상황에 따라 하루 전, 혹은 당일에 운영 취소를 공지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도, 시민들은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함께 감수하겠다’며 이해해주십니다. 비가 오면 빈백을 직접 옮기며 도와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도서관과 시민 사이의 관계적 신뢰가 깊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책 읽는 시민이 답이다
도서관, 민주적 공동체의 공론장으로
공간의 경계를 넘어, 모두에게 열린 균형의 플랫폼
저는 도서관을 바라볼 때 늘 세 가지 인식의 벽을 느낍니다. 국민들은 도서관을 여전히 독서실, 공부방으로 인식합니다. 또 사회 전반에서도 도서관이 가진 진짜 가능성을 다 보지 못하는 벽이 있습니다. 도서관은 모든 주제를 다루고, 모든 세대가 오며, 전국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균형 잡힌 공공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커피전문점이나 은행은 지역에 따라 편중이 있지만, 도서관은 도심과 농촌, 인구 소멸 지역까지 고르게 분포해 있습니다. 주말·야간에도 문을 열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 특성을 살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리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의제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공공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기후위기, 고독사, 디지털 격차, 교육 문제처럼 다양한 시대적 지역 사회 도서관에서 시민과 함께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곧 포용성과 다양성, 형평성을 실현하는 인문정신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 공공인문학은 시작된다
AI 시대에는 지식 검색이나 자료 정리가 자동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이 물리적 공간으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우리 지역과 사회의 문제를 토론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도서관은 단순한 문화시설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생활 속 실천으로 연결하고, 고독과 자살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함께 예방하며,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세대 격차를 줄이고, 교육·과학기술 의제까지 함께 논의하는 범사회적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도서관은 시민들의 다양한 체험과 교류를 기반으로, 커뮤니티 플랫폼이자 민주주의 플랫폼, 그리고 공공의 공론장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민들이 도서관을 단순 건물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인문정신을 실천하는 핵심 기반으로 납득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진정보도서관장 역임 (재임 시 전국도서관평가 대통령상 3회 수상, IFLA 녹색도서관상, IFLA 마케팅상 수상) 서울도서관 제3대 관장 취임 한국공공도서관협의회 회장 (현재)
주요 활동 및 저서
서울도서관에서 책 읽는 서울광장, 광화문 책마당, 힙독클럽 등 혁신적인 독서 공간 및 프로그램 운영 저서 『책 읽는 시민이 답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책과 사람이 모일 때, 공공인문학의 길이 열린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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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이 모일 때, 공공인문학의 길이 열린다
느슨한 연대에서 시작해 신뢰로 확장되는 공공인문학
오지은
2025-09-30
공공인문학의 시작
느슨한 연대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대중 독서 문화
서울도서관 오지은 관장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단 복제, 배포 및 공유 금지
비이용자를 독자로 바꾸는 관찰의 힘
도서관 분야의 가장 큰 고민은 언제나 비이용자를 어떻게 이용자로 전환할 것인가였습니다. 독서문화 진흥 정책에서도 늘 목표로 언급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대개 단일 프로그램 수준으로 운영되다 보니 확산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한계를 보며, 이제는 단순히 책의 내용 연구가 아니라 사람을 관찰하고 독자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좋은 책만 있으면 독자가 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정보는 다양한 미디어에서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독자가 되려면 좋은 공간·좋은 경험·좋은 책이라는 세 요소가 결합 되어야만 합니다. 그 안에서야 비로소 책을 통해 시민이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습니다.
힙독클럽, 시대정신이 요구한 ‘느슨한 연대’
‘어떻게 젊은 세대가 책을 꾸준히 읽도록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바탕으로 여러 데이터를 살펴보다가 20~30대는 여전히 책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독서 동아리 방식은 관계의 밀도가 너무 높아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세대는 혼자 읽는 것은 외롭지만, 지나치게 강한 소속감에도 부담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느슨한 연대’라는 개념을 주목했습니다. 목적이 있을 때만 모였다가 흩어지고, 자유롭게 드나드는 구조가 지금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습니다. 혼자 읽기 어려운 벽돌책●이나, 작가의 의도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 바로 힙독클럽●●입니다.
소속감을 느끼되 과도한 의무감은 없는 구조, 이것이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새로운 독서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 벽돌책 - 벽돌처럼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500쪽 이상의 분량을 가진 책을 가리킨다.
●● 힙독클럽 - 서울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중심으로 활동하는 독서 커뮤니티(https://seouloutdoorlibrary.kr/user/hipdok/recruit/hipdokRecruitIntro.do)
도서관이 광장으로 나올 때
공동의 공간에서 시민과 함께 만든 공론장
책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 공존의 시작
야외도서관은 ‘좋은 공간·좋은 경험·좋은 책’이 결합 되어야 독서가 가능하다는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시민들은 밀폐된 공간보다 탁 트인 자연과 교감하는 자리를 원했습니다. 매일 아침 꽉 막힌 대중교통과 아파트·직장의 밀폐된 공간을 오가는 도시인들에게 잠시라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는 경험은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광장으로 끌어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도서관에는 60대 이상, 특히 은퇴 남성 어르신들이 많이 오십니다. 산업화 시대의 주역들이지만 은퇴 후 머무를 공간을 찾지 못해 도서관에 오고, 여전히 조용한 공부방으로 인식하다 보니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부모의 책 읽어주는 모습에 불편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갈등을 피하기보다, 세대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밖으로 확장했습니다. 세대·젠더·문화적 갈등을 줄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으며 소통하는 민주적 공론장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했던 자리, 공공인문학의 실험이 되다
서울광장에 조성된 야외도서관은 특히 어린이 공간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독서 경험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은 가족과 세대가 어울리는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야외에서 운영되자 도서관은 자연스럽게 플랫폼으로 기능했습니다. 시민이 모이는 현장이 보이니 여러 기관에서 협력 제안을 했고, 칠레 대사관과는 문학 축제를, 아일랜드와는 해외작가 초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세계와 연결되는 문화교류의 장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시민의 숨겨진 욕구를 관찰해 읽어낸 결과였습니다. 직접 요구하지 않았지만 경험해 보니 ‘이런 게 필요했구나’라는 반응을 얻었고, 도서관은 이제 좋은 공간과 경험을 제공하며 시민이 인식하지 못했던 욕망까지 끌어내는 공공인문학의 실험 무대가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도서관 / https://seouloutdoorlibrary.kr/user/square/about.do)
신뢰로 이어진 시민의 자리
이용자를 넘어 동반자로 함께하다
서울도서관 오지은 관장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단 복제, 배포 및 공유 금지
호기심으로 시작해, 경험으로 머물고, 몰입으로 완성되는 여정
야외도서관은 처음부터 세 단계 전략으로 설계했습니다. 첫째, ‘호기심’을 끌어내는 것. 지나가는 시민들이 ‘이게 뭐지?’ 하며 멈춰서 사진을 찍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둘째, ‘경험’의 플랫폼으로 만드는 것. 주말마다 바뀌는 대사관 프로그램, 해외 가수와 공연, 천문대 별자리 체험 등 다양한 문화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셋째, ‘몰입’. 결국 책에 깊이 빠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처음엔 컬러풀한 공간에 반응했지만, 재방문하면서 점점 책을 통한 몰입과 성찰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이 있는 서울광장’은 환대의 공간, ‘광화문 책마당’은 낭만의 공간, ‘맑은 냇가’는 몰입의 공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물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자리에서 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아이는 “엄마, 이게 행복이에요”라고 속삭였습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시민의 욕구가 호기심에서 경험, 그리고 책 읽기의 행복으로 전환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공부방을 넘어, 자율과 신뢰의 장으로
시민들의 인식 변화는 문화적 성숙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사서들이 우려했던 책 분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민들은 책을 소중히 다뤘고, 쓰레기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놀이 공간 앞에서 자연스럽게 줄을 서고, 차례를 양보했습니다. 부모는 책을 빌려 읽고 다시 제자리에 두며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아이들은 문화 시민으로 성장하고, 도서관은 자율과 신뢰의 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서관이 ‘조용히 공부만 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공공인문학의 실험과 혁신의 현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야외도서관은 전국적으로 100곳 이상 확산 되며 새로운 도서관 모델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민이 스스로 공간을 지키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사회적 신뢰의 회복 그 자체였습니다.
공익성이 만든 신뢰, 협력으로 확장되는 플랫폼
서울도서관은 시민을 이용자가 아니라 공공인문학의 동반자로 세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료실 한가운데서 ‘방구석 토크’를 열었습니다. 사서들은 소음 문제를 걱정했지만, 과감히 돌파했습니다. 지금은 작가와 시민이 대화하고 때로는 음악 공연까지 열리는, 일상과 책이 만나는 새로운 접점이 되었습니다. 대사관과 협력해 각 나라의 문학과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시민은 도서관을 통해 책·문화·경험이 확장되는 플랫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장점은 순수한 공익성입니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 간 협력이 투명하고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도서관은 형식적인 틀을 깨기 위해 ‘야한 책멍’, ‘언제까지 사진만 찍을래? 책 읽을 사람 다 모여!’ 같은 도발적이고 유쾌한 문구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관(官)도 시민의 눈높이에서 새롭게 기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였습니다.
체험에서 실천으로
시민과 함께 만드는 신뢰의 장
서울도서관 오지은 관장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단 복제, 배포 및 공유 금지
욕구를 읽고, 기대를 넘는 경험을 건네다
저희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마다 시민들의 욕구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기대치보다 더 높은 경험을 제공하려 노력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매년 설문조사를 실시해 개선할 부분을 도출하고, 불편 요소를 줄여갑니다. 과거에는 실내에서 서비스를 제공할 때 시민들의 불평과 요구가 많았지만, 야외로 나가 더 큰 공간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자 시민들의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불만보다 수용과 공감이 많습니다. 특히 야외도서관은 기상 상황에 따라 하루 전, 혹은 당일에 운영 취소를 공지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도, 시민들은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함께 감수하겠다’며 이해해주십니다. 비가 오면 빈백을 직접 옮기며 도와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도서관과 시민 사이의 관계적 신뢰가 깊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책 읽는 시민이 답이다
도서관, 민주적 공동체의 공론장으로
공간의 경계를 넘어, 모두에게 열린 균형의 플랫폼
저는 도서관을 바라볼 때 늘 세 가지 인식의 벽을 느낍니다. 국민들은 도서관을 여전히 독서실, 공부방으로 인식합니다. 또 사회 전반에서도 도서관이 가진 진짜 가능성을 다 보지 못하는 벽이 있습니다. 도서관은 모든 주제를 다루고, 모든 세대가 오며, 전국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균형 잡힌 공공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커피전문점이나 은행은 지역에 따라 편중이 있지만, 도서관은 도심과 농촌, 인구 소멸 지역까지 고르게 분포해 있습니다. 주말·야간에도 문을 열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 특성을 살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리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의제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공공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기후위기, 고독사, 디지털 격차, 교육 문제처럼 다양한 시대적 지역 사회 도서관에서 시민과 함께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곧 포용성과 다양성, 형평성을 실현하는 인문정신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 공공인문학은 시작된다
AI 시대에는 지식 검색이나 자료 정리가 자동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이 물리적 공간으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우리 지역과 사회의 문제를 토론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도서관은 단순한 문화시설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생활 속 실천으로 연결하고, 고독과 자살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함께 예방하며,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세대 격차를 줄이고, 교육·과학기술 의제까지 함께 논의하는 범사회적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도서관은 시민들의 다양한 체험과 교류를 기반으로, 커뮤니티 플랫폼이자 민주주의 플랫폼, 그리고 공공의 공론장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민들이 도서관을 단순 건물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인문정신을 실천하는 핵심 기반으로 납득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요 이력
광진정보도서관장 역임 (재임 시 전국도서관평가 대통령상 3회 수상, IFLA 녹색도서관상, IFLA 마케팅상 수상)
서울도서관 제3대 관장 취임
한국공공도서관협의회 회장 (현재)
서울도서관에서 책 읽는 서울광장, 광화문 책마당, 힙독클럽 등 혁신적인 독서 공간 및 프로그램 운영
저서 『책 읽는 시민이 답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책과 사람이 모일 때, 공공인문학의 길이 열린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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