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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 외주화 시대의 인문

― ‘죽음’, ‘놂’이 지니는 인간다움

김월회

2025-08-26

 

인문은 ‘인간[人]의 무늬[文]’, 곧 인간다움을 가리키는 무늬이다. 이때 인간은 예로부터 ‘사람[人]들이 살아가는 시공간[間]’, 곧 사회를 뜻해왔다. 인간다움은 이처럼 사회라는 차원과 한 몸으로 엮여 있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인간다움은 어떤 사회인지에 따라 내용을 달리했다. 인간다움의 요체인 지능의 구비와 구사가 인간 신체 바깥에서는 구현되지 않았던 사회와 지금처럼 인터넷에 엄청난 양의 지식이 구비되고,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한 지능을 발휘하는 사회의 인간다움의 내용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속되는 인간다움의 외주화

“당신이 생각하는 로봇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를 바꾼 셈이지요.”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 알렉스 갈렌드 감독, 2015)>에서 AI 로봇을 창조한 네이든에게 주인공 케일럽이 한 말이다.
인간이 자신을 닮은 로봇을 창조한 것은 신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인간의 출현이라는 뜻이다. 신이 창조한 인간은 여전히 신을 닮지 못하는데 인간이 만든 로봇은 인간이 되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여기서 로봇이 인간이 되었다고 함은 로봇이 인간다움을 갖췄다는 뜻이다. 물론 적잖은 사람들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든지, 가능해도 아직은 멀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만 얘기할 수 있을까? 초지능 인공지능(ASI)이나 범용인공지능(AGI)같이 인간 역량을 넘어서는 AI의 실현이 가시권에 들었기에 하는 말만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는 AI가 이미 인간다움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기에 그러하다.
첫째는 생성형 AI가 나온 이후 AI는 이미 지능 면에서 인간의 평균적 역량 이상을 너끈히 해낸다는 점이다. 흔히 AI가 인간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비교 대상은 대개의 경우 뛰어난 사람이다. 그렇지만 평균적 사람들과 비교하면 AI의 지능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능은 인간다움의 핵이기에 AI가 꽤 인간다워졌다고 할 수 있는 근거다. 둘째는 집체적 차원에서 AI는 이미 인간 개개인의 역량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사람은 개체 단위로 존재하다가 필요에 따라 집체적으로 존재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람은 ‘직렬적’으로 역할하지는 못한다. 반면에 AI는 언제 어디서든 집체적으로 또 직렬적으로 존재하고 작동된다. 2017년에 중국 프로 바둑기사 5명이 한 팀이 되어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국을 벌였지만 (Future of Go Summit 2017), 인간은 ‘5명×9단=45단’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9단 실력을 좀 더 잘 발휘했을 따름이다. 이에 비해 AI는 처리 장치를 더하면 더할수록 실행 능력이 비례적으로, 때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물론 이러한 지적 역량만 놓고 AI가 인간다워졌다거나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곧 인간다움의 자질로 꼽혀온 자유의지나 자가 조직 능력, 감성, 창의력, 상상력 등을 AI가 갖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능은 물론이고 여타의 인간다움이 지속적으로 AI에 이전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설령 AI가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다움을 갖추지 못한다고 해도 AI는 인간다움을 학습하여 사용자에게 인간적 반응을 야기한다. 그 결과 인간은, 사람의 감정을 학습한 AI와 정서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처럼 AI를 인간으로 대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AI가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을 꽤 성공적으로 대신한다고 할 수는 있다. 인간에게만 존재하고 인간만이 구현 가능하다고 믿어져온 인간다움이 AI에게서 구현되었음이니, 인간다움이 인간의 바깥에서 구현되는 ‘인간다움의 외주화’가 한창 실현되고 있음이다.

인공지능에는 없고 인간에게는 있는 것

이러한 변화는 그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바를 중심으로 인간다움을 재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必滅)’의 존재라는 속성과 인간은 놀 줄 아는 존재라는 속성 등을 중심으로 인간다움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둘 다 AI가 절대 지닐 수 없는 인간다움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한계로 여겨졌던 필멸이라는 속성은 인간다움의 외주화 시대에는 도리어 인간다움의 핵으로 부각될 수 있다. 필멸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시작과 완성이 있는 삶을 설계하고 수행하게 된다. 죽음은 소멸이기도 하지만, 어떡하든 살아냈던 삶이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사유하고 상상하며 이를 실천함은, 그 삶이 어떻게 평가되는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 모두가 시작과 끝이 있는 자기 완결적 삶이기에 그러하다. 완결이 가능했기에 인간은 진리와 도덕 앞에 고개 숙일 수 있었고, 자신의 소멸 이후의 미래를 설계하고 이를 실존으로 품어낼 수 있었다. 이는 독자적으로 시작과 끝을 설정할 수 없는 AI로서는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인간다움이다.
사람이 놀 줄 아는 존재라는 속성도 인간다움 외주화 시대에 비중이 커져가는 인간다움이다. AI가 엄청난 학습 능력을 기반으로 인간의 감성, 상상, 창의성 등을 기계적으로 구현한다고 해도 놂의 역량만큼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무리 초지능 AI를 장착한 기계라고 해도 기계는 일함과 쉼의 사이에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e, 놀 줄 아는 인간)’라는 통찰이 일러주듯이 일함과 쉼의 사이에서 놀 줄 아는 존재이고, 그러한 놂을 통해 문명을 창출해왔다. 놂이 일함과 쉼 사이에서 진동하는 활동이기에 가능했던 현상이다.
이처럼 사람은 무언가의 사이에 존재하고 진동하며 놀 줄 안다. 심지어 현실과 비현실, 가능과 불가능, 선과 악, 옳음과 그름 같은 모순관계인 양자 사이서도 진동하며 놀 줄 안다. 이점은 AI가 결코 지닐 수 없는 속성이다. AI는 이를테면 0과 1은 인식해도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무언가의 사이에서 서성대거나 회의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양자 또는 다자 사이에서 진동하며 놂으로써 새로운 사유와 상상 등을 움터왔고 이를 실험하면서 문명을 일궈왔다. 아무리 ASI, GSI 같은 초지능, 초역량 AI가 구현되어도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인간다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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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교수
김월회

주요 이력
2003. 08 - 현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2025. 08 -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원장
2023. 11 - 현재   서울대학교 평의원회 평의원
2018. 07 - 2020. 07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무부학장 
2013. 03 - 2016. 08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부주간 

주요 연구 분야
중국문학사, 중국문학사상 
중국고대지성사, 중국고전
인문정책, 교육정책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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