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우리 삶 곳곳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세계적 기업의 CEO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TV 속 연예인이 삶의 지침서로 철학책을 추천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문학이 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걸까?’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현대인에게 인문학은 고상한 자들이 즐기는 취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하는 걸까요? 인문은 우리가 먹고 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인문학을 사랑한 정신의학 전문의, 한덕현 교수와 대담을 나눠보았습니다.
한덕현 교수
중앙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임 과몰입 청소년을 치료하는 소아청소년 정신의학 전문의이자 국내 스포츠 정신의학 분야를 개척한 스포츠 정신의학 전문의.
저서로는 <집중력의 배신>, <불안한 것이 당연합니다>,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등이 있다.
관계의 파편화를 겪는 현대인들
Q. 최근 국민들의 마음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우울증 환자의 수도 매해 늘고 있다는데요.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정신의학 전문의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현 시대의 문제점은 어떤 것인가요?
(출처 : 국민건강보험공단)
최근 은둔형 외톨이나 우울증, 그리고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 같아요. 실제로 대가족이 핵가족화되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들어도 괜찮은 상황이 조성된 점도 문제인 것 같아요. SNS나 메신저가 발달하면서 온라인 상호작용은 훨씬 더 많아졌지만, 사실 만나서 얘기하는 거랑은 다르죠. 대화할 때 반응하는 표정, 끄덕이는 행동과 같은 감정적 표현들이 '직관'이라는 요소인데 온라인에서는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대화의 양은 늘었지만 대화의 질은 점점 낮아지는 거예요.
실제로 제가 게임 과몰입 청소년을 만날 때 가족 관계와 같은 배경을 살펴봐요. 부모님들은 게임 때문에 아이가 자기통제력을 잃게 됐다고 하는데 인과관계를 달리 봐야 해요. 현 사회에서는 맞벌이나 핵가족화로 부모가 아이한테 큰 관심을 주지 못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경우에 아이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 정체성이라든지 주체성이 약해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게임 과몰입에 빠지기도 하는 거죠.
Q. 교수님께선 <집중력의 배신>이라는 책에서는 중독질환의 해결책으로 인문학을 언급하셨더라고요.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까요? 제가 인문학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유는 중독질환의 특징 때문이에요. 중독질환을 앓는 사람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못 하고, 빠른 보상을 원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을 계속해야 하고, 약물에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특성이 있거든요. 근데 인문학은 호흡이 길잖아요. 보상받기까지의 과정이 길고 스토리텔링이라는 굉장히 훌륭한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스토리텔링은 엄청난 멀티태스킹을 요구하거든요. 아주 간단한 행동만 하는 중독과 굉장히 큰 차이가 있는 거죠. 무엇보다 인문 활동은 능동적인 활동이에요. 내 이야기를 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이런 능동적인 특성은 수행 능력과 관련된 뇌 기능을 이끌어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중독질환 환자에게 인문 활동을 제안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Q. 어떤 형태의 인문 활동이 중독질환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뭘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읽고 쓰고 보고 느끼고 이런 것들이 다 해당되는 거죠. 특히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게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건 꿈이 있고 희망을 갖고 있다는 거잖아요.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은 꿈과 희망보다는 현재의 쾌락과 현실 도피를 위해 술이나 마약을 하는 거거든요.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제시하는 건 인문학이 가진 좋은 능력인 것 같아요. 인간은 창조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을 자꾸 자극해주는 거죠.
인문의 효과, 과학으로 증명하다
Q. 많은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만, 그 효과가 숫자로 증명된 건 아니잖아요. 과학을 통해 인문 활동의 효과를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요? 네 실제로 인문학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인문 활동을 할 때 뇌를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인문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게 한 뒤에 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들을 보면 주의력이 많이 떨어져 있잖아요. 이 아이들은 책을 잘 안 읽어요. 책을 읽을 땐 가장 윗줄을 먼저 읽고 이 내용을 기억하면서 두 번째 줄을 읽고 이해하고, 두 개 줄의 핵심 내용을 기억하면서 세 번째 줄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겪어야 재밌는 건데, 이 아이들은 이전에 읽었던 내용을 잊어버리고 글자만 읽고 있으니까 ‘에이 재미없다’하고 책을 덮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문장 읽는 법을 알려주고 훈련한 뒤에 적외선 촬영으로 뇌의 변화를 관찰하는 거예요. 수행 능력에 관여하는 전두엽의 혈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측정해서 인문학의 효과를 확인하는 거죠.
Q. 왜 인문학의 효과를 검증하려는 건가요? 인문학의 가치를 이해하기 쉽게 알리고 싶었어요. 노벨상 중에 가장 인정받는 상이 노벨 문학상이잖아요. 그만큼 사람들이 인문학을 대단하고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는데, 실제로 뭐가 좋은지 마음으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알려주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인문학에 접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대학의 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수의 인문학과가 통폐합됐잖아요. 사실 대학의 입장에서 가장 창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대학’이라 하면 말 그대로 학문의 최고봉인데 학문의 경제학적 가치에 대해 의심이 드니까 다른 가치는 인정하지 않고 통폐합시키는 게 안타깝죠. 인문학과 전공이 그대로 남아있는 대학이 서울에 몇 개나 있겠어요. 인문 활동의 가치에 대해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다면 사람들이 좀 더 인문학에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이 되는 인문학
Q. 사람들에게 인문학의 가치를 꼭 알리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인문 활동이 본능의 배출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추우면 따뜻해져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하고 본능을 거스르는 건 너무 힘들어요. 근데 인간의 본능 중에 제일 큰 건 쾌락이거든요. 이 쾌락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버리면 난리가 나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억누르고 있는데 너무 누르면 또 터져버려요. 압력밥솥 뚜껑 열기 전에 터지지 말라고 김을 빼는 것처럼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쾌락을 자연스럽게 분출해주는 게 인문이라고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소설가들의 책을 보면 자기의 인생이 녹아 있잖아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그 안에서 헤세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아요.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 있는 영역을 전의식이라고 하는데 전의식의 이야기를 소설에 많이 써놓은 거죠. 학생 때도 헤세의 책을 읽었지만 정신과를 전공하고 교수가 되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까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새롭더라고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방어 기전 중에 Displacement(치환)라는 게 있어요. 내가 실제 인물한테 가졌던 감정을 소설 속 인물한테 대신 내보낼 수 있거든요. 우리가 책을 읽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건 내가 현실에서 느낀 불만을 소설 속 주인공이 대신 보복해준다거나 분출해주니까 이건 눈물 나게 건강한 거죠. 감정의 치환이 되니까요.
Q. ‘터져버리기 전에 김을 빼준다’라는 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적 역할을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한다는 건 사회적 비용을 아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인문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우리를 윤택하게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서 이럴 바에 일주일 동안 일 안 하고 어디 놀러 갔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잖아요.근데 이 사람이 그냥 인문 활동을 하면서 평상시에 자연스럽게 감정을 분출할 수 있으면 경제적인 효과는 엄청 나겠죠.
Q. 앞으로 미래세대를 위해 인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필독서라는 게 있고, 필독서를 읽었나 안 읽었나 시험을 본다는 거예요. <콩쥐 팥쥐>를 예로 들면, ‘팥쥐가 콩쥐 언니냐 동생이냐’ 이런 걸 물어보는 거죠. 근데 시간이 더 들더라도 조금 더 주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있으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해요. “콩쥐와 팥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떤 사람은 “팥쥐가 더 불쌍해”라고 얘기해도 논리가 맞으면 점수를 줄 수 있는, 주관적인 판단에 대한 권위와 주관성을 인정을 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인문학을 접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
시대가 묻고 인문이 답하다 ➄ 한덕현 교수
2024-08-19
인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우리 삶 곳곳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세계적 기업의 CEO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TV 속 연예인이 삶의 지침서로 철학책을 추천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문학이 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걸까?’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현대인에게 인문학은 고상한 자들이 즐기는 취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하는 걸까요? 인문은 우리가 먹고 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인문학을 사랑한 정신의학 전문의, 한덕현 교수와 대담을 나눠보았습니다.
한덕현 교수
중앙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임 과몰입 청소년을 치료하는 소아청소년 정신의학 전문의이자 국내 스포츠 정신의학 분야를 개척한 스포츠 정신의학 전문의.
저서로는 <집중력의 배신>, <불안한 것이 당연합니다>,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등이 있다.
관계의 파편화를 겪는 현대인들
Q. 최근 국민들의 마음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우울증 환자의 수도 매해 늘고 있다는데요.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정신의학 전문의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현 시대의 문제점은 어떤 것인가요?
(출처 : 국민건강보험공단)
최근 은둔형 외톨이나 우울증, 그리고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 같아요. 실제로 대가족이 핵가족화되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들어도 괜찮은 상황이 조성된 점도 문제인 것 같아요. SNS나 메신저가 발달하면서 온라인 상호작용은 훨씬 더 많아졌지만, 사실 만나서 얘기하는 거랑은 다르죠. 대화할 때 반응하는 표정, 끄덕이는 행동과 같은 감정적 표현들이 '직관'이라는 요소인데 온라인에서는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대화의 양은 늘었지만 대화의 질은 점점 낮아지는 거예요.
실제로 제가 게임 과몰입 청소년을 만날 때 가족 관계와 같은 배경을 살펴봐요. 부모님들은 게임 때문에 아이가 자기통제력을 잃게 됐다고 하는데 인과관계를 달리 봐야 해요. 현 사회에서는 맞벌이나 핵가족화로 부모가 아이한테 큰 관심을 주지 못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경우에 아이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 정체성이라든지 주체성이 약해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게임 과몰입에 빠지기도 하는 거죠.
Q. 교수님께선 <집중력의 배신>이라는 책에서는 중독질환의 해결책으로 인문학을 언급하셨더라고요.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까요?
제가 인문학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유는 중독질환의 특징 때문이에요. 중독질환을 앓는 사람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못 하고, 빠른 보상을 원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을 계속해야 하고, 약물에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특성이 있거든요. 근데 인문학은 호흡이 길잖아요. 보상받기까지의 과정이 길고 스토리텔링이라는 굉장히 훌륭한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스토리텔링은 엄청난 멀티태스킹을 요구하거든요. 아주 간단한 행동만 하는 중독과 굉장히 큰 차이가 있는 거죠. 무엇보다 인문 활동은 능동적인 활동이에요. 내 이야기를 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이런 능동적인 특성은 수행 능력과 관련된 뇌 기능을 이끌어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중독질환 환자에게 인문 활동을 제안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Q. 어떤 형태의 인문 활동이 중독질환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뭘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읽고 쓰고 보고 느끼고 이런 것들이 다 해당되는 거죠. 특히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게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건 꿈이 있고 희망을 갖고 있다는 거잖아요.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은 꿈과 희망보다는 현재의 쾌락과 현실 도피를 위해 술이나 마약을 하는 거거든요.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제시하는 건 인문학이 가진 좋은 능력인 것 같아요. 인간은 창조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을 자꾸 자극해주는 거죠.
인문의 효과, 과학으로 증명하다
Q. 많은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만, 그 효과가 숫자로 증명된 건 아니잖아요. 과학을 통해 인문 활동의 효과를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요?
네 실제로 인문학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인문 활동을 할 때 뇌를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인문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게 한 뒤에 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들을 보면 주의력이 많이 떨어져 있잖아요. 이 아이들은 책을 잘 안 읽어요. 책을 읽을 땐 가장 윗줄을 먼저 읽고 이 내용을 기억하면서 두 번째 줄을 읽고 이해하고, 두 개 줄의 핵심 내용을 기억하면서 세 번째 줄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겪어야 재밌는 건데, 이 아이들은 이전에 읽었던 내용을 잊어버리고 글자만 읽고 있으니까 ‘에이 재미없다’하고 책을 덮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문장 읽는 법을 알려주고 훈련한 뒤에 적외선 촬영으로 뇌의 변화를 관찰하는 거예요. 수행 능력에 관여하는 전두엽의 혈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측정해서 인문학의 효과를 확인하는 거죠.
Q. 왜 인문학의 효과를 검증하려는 건가요?
인문학의 가치를 이해하기 쉽게 알리고 싶었어요. 노벨상 중에 가장 인정받는 상이 노벨 문학상이잖아요. 그만큼 사람들이 인문학을 대단하고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는데, 실제로 뭐가 좋은지 마음으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알려주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인문학에 접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대학의 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수의 인문학과가 통폐합됐잖아요. 사실 대학의 입장에서 가장 창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대학’이라 하면 말 그대로 학문의 최고봉인데 학문의 경제학적 가치에 대해 의심이 드니까 다른 가치는 인정하지 않고 통폐합시키는 게 안타깝죠. 인문학과 전공이 그대로 남아있는 대학이 서울에 몇 개나 있겠어요. 인문 활동의 가치에 대해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다면 사람들이 좀 더 인문학에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이 되는 인문학
Q. 사람들에게 인문학의 가치를 꼭 알리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인문 활동이 본능의 배출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추우면 따뜻해져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하고 본능을 거스르는 건 너무 힘들어요. 근데 인간의 본능 중에 제일 큰 건 쾌락이거든요. 이 쾌락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버리면 난리가 나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억누르고 있는데 너무 누르면 또 터져버려요. 압력밥솥 뚜껑 열기 전에 터지지 말라고 김을 빼는 것처럼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쾌락을 자연스럽게 분출해주는 게 인문이라고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소설가들의 책을 보면 자기의 인생이 녹아 있잖아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그 안에서 헤세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아요.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 있는 영역을 전의식이라고 하는데 전의식의 이야기를 소설에 많이 써놓은 거죠. 학생 때도 헤세의 책을 읽었지만 정신과를 전공하고 교수가 되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까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새롭더라고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방어 기전 중에 Displacement(치환)라는 게 있어요. 내가 실제 인물한테 가졌던 감정을 소설 속 인물한테 대신 내보낼 수 있거든요. 우리가 책을 읽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건 내가 현실에서 느낀 불만을 소설 속 주인공이 대신 보복해준다거나 분출해주니까 이건 눈물 나게 건강한 거죠. 감정의 치환이 되니까요.
Q. ‘터져버리기 전에 김을 빼준다’라는 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적 역할을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한다는 건 사회적 비용을 아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인문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우리를 윤택하게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서 이럴 바에 일주일 동안 일 안 하고 어디 놀러 갔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잖아요. 근데 이 사람이 그냥 인문 활동을 하면서 평상시에 자연스럽게 감정을 분출할 수 있으면 경제적인 효과는 엄청 나겠죠.
Q. 앞으로 미래세대를 위해 인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필독서라는 게 있고, 필독서를 읽었나 안 읽었나 시험을 본다는 거예요. <콩쥐 팥쥐>를 예로 들면, ‘팥쥐가 콩쥐 언니냐 동생이냐’ 이런 걸 물어보는 거죠. 근데 시간이 더 들더라도 조금 더 주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있으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해요. “콩쥐와 팥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떤 사람은 “팥쥐가 더 불쌍해”라고 얘기해도 논리가 맞으면 점수를 줄 수 있는, 주관적인 판단에 대한 권위와 주관성을 인정을 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인터뷰 · 정리 / 박선우 작가
'시대가 묻고 인문이 답하다' 기획 인터뷰
➀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방법 - 최인철 교수
➁ 새로운 시대의 탄생 - 최동호 시인
➂ 인공지능 시대를 위한 새로운 문화 - 이중원 교수
➃ 인간과 인공지능의 건강한 관계 - 김재인 교수
➄ 인문학을 접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 - 한덕현 교수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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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공지능의 건강한 관계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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