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고, 믿더라도 독실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문화에 관계 없이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것은 다만 명절을 즐기려는 의미만은 아니다. 구원, 희생, 인류애라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파이널 커튼
12월 달력
12월. 끝이다. 잠시 뒤면 ‘다사다난했던...’이라는 상투적 표현과 함께 한 해 동안 벌어진 두드러진 사건, 사고를 되짚는 이야기가 방송사 뉴스마다 반복될 것이다. 1월에 품었던 꿈, 봄의 희망과 여름의 정열, 가을의 결실과 그에 따르는 희비, 일하는 사람과 공부하는 사람이 긴 노력 끝에 마침내 맞이하는 휴식. 이제는 모두 끝날 때가 되었다. 울든 웃든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또 한 해가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끝은 그 어떤 끝이든 쓸쓸함과 아쉬움으로 온다. 하지만 이제는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할 때, 정리할 시간, 못 이룬 꿈은 접고 새로운 꿈을 꾸려 애쓸 때라고 여길 때,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보듬게 된다. 바로 기적이다.
12월 25일, 그리고 10일
바루흐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나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에게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처럼 보이는 현상은 단지 보기 드문, 우리가 아직 그 원리를 모르는 현상일 뿐이다. 가령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면, 사실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거나, 우리가 아직 모르는 자연법칙의 우연한 작용에 따라 살아났을 따름이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흐 같은 신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기적은 곧 일상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환경의 별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생명이 나타나고, 인간과 그 지적인 성취물까지 나올 확률은 끝없이 0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늘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도 그런 관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둘 다 반박하기 어렵고, 받아들일 만한 관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보통 기적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의미의 기적을, 그 존재를 믿고 싶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희망의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을 때, 현실의 무게가 수천 톤의 쇳덩어리처럼 짓누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기적을 갈구한다.
12월에는 그런 기적에 어울리는 날짜가 두 개 있다. 먼저 12월 25일. 신이 인간이 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 그 신=인간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류는 죄의 멍에에서 벗어난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고, 믿더라도 독실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문화에 관계 없이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것은 다만 명절을 즐기려는 의미만은 아니다. 구원, 희생, 인류애라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우리 모두 이를 축하하고 서로를 좀 더 사랑으로 대하자는 뜻이 깃들어 있다. 1914년 말,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도 그런 뜻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말자, 독일군도 영국군도 서로 담배를 나누고 축구를 즐기며 화목하게 보내자는 합의가 온 전선에 걸쳐 자발적으로 맺어졌고, 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날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서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갖고 있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이 제1조부터 제30조까지의 내용은 수백 년 전 프랑스대혁명의 <인권선언>에서, 나아가 그리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정신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것이 서구적 가치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비서구권의 비판도 있다. 선언은 선언일 따름이며, 크리스마스의 기적 뒤에 또 참혹한 학살이 이어졌듯 세계인권선언이 나온 1948년 이래 얼마나 많은 인권유린이 빚어졌는가, 이 선언에 과연 그런 유린을 막을 힘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종족과 성별과 신분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피와 박해와 착취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수 천 년을 지나서, 비로소 전 인류가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합의했다는 사실, 그것을 기적이라고, 꺼지지 않는 희망이라고 볼 수 없을까?
이것도 기적이 아닐까?
영화 <신의 아그네스> (출처: 네이버 영화)
마지막으로 모두가 동의하기는 힘들 ‘기적’을 말하고자 한다. 1979년에 희곡으로, 1985년에 영화로 나온 <신의 아그네스>. 수녀원에서 한 젊은 수녀가 아기를 낳고, 그 아기는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 사건을 두고 조사를 맡은 리빙스턴 박사는 철저히 합리적으로 사건을 분석하려 한다. 반면 미리엄 수녀원장은 신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사건을 캐내는 과정에서 아그네스 수녀가 참혹한 학대와 불운의 나날을 보내고 수녀원에 들어왔음이 밝혀진다. 또한 법규를 어기고 아기를 낳고 죽였음에도(아마도), 더없이 맑고 순수한 신앙심에 차 있음도 밝혀진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 아그네스를 임신시킨 자는 신이 아니라 동네 청년인 것으로 추정되고, 아그네스는 정신질환에 따른 무죄를 선고받고, 치료를 받던 중 죽는다. 그런데 내내 합리적으로만 사건을 보려 애쓰던 리빙스턴이, 마지막으로 관객을 향해 말한다. “이게 기적이 아닐까요?”
한 여성이 인간성을 말려 죽일 만한 고통을 겪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는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도덕률과 법률을 어겼다고 해도, 어떻단 말인가?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 삶의 본질적 의미는 그런 것들을 넘어선 데 있지 않을까? 사회의 죄악에 수난을 당하고 스스로도 죄악이라 부를 만한 일을 했지만, 진실된 사랑과 믿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면, 바로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닐까?
그런 기적은 소용이 없다, 심지어 위험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나가는 2022년을 붙잡을 수 없다. 다만 즐겁게 지내려 했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일도, 그 죽어감에 대해 다른 젊은이들이 ‘내 알 바 아냐’라고 말하는 일도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운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지도, 슐라이에르마흐의 말처럼 일상을 감사하며 상규를 지키는 삶을 사는 데 그쳐야 할지도 모른다.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그러나 우리가 천지간에 태어나 살아가는 데는 뭔가 의미가, 누군가의 선의가 있으리라고 믿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뭔가를 믿고 사랑할 때,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여기는 것도. 그런 철저히 주관적인 믿음만이 필멸자에게 영원을 꿈꾸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몰락 가운데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만이, 그 죽어가는 것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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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기적
- 열두 달로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 -
함규진
2022-12-28
오늘날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고, 믿더라도 독실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문화에 관계 없이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것은 다만 명절을 즐기려는 의미만은 아니다. 구원, 희생, 인류애라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파이널 커튼
12월 달력
12월. 끝이다. 잠시 뒤면 ‘다사다난했던...’이라는 상투적 표현과 함께 한 해 동안 벌어진 두드러진 사건, 사고를 되짚는 이야기가 방송사 뉴스마다 반복될 것이다. 1월에 품었던 꿈, 봄의 희망과 여름의 정열, 가을의 결실과 그에 따르는 희비, 일하는 사람과 공부하는 사람이 긴 노력 끝에 마침내 맞이하는 휴식. 이제는 모두 끝날 때가 되었다. 울든 웃든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또 한 해가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끝은 그 어떤 끝이든 쓸쓸함과 아쉬움으로 온다. 하지만 이제는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할 때, 정리할 시간, 못 이룬 꿈은 접고 새로운 꿈을 꾸려 애쓸 때라고 여길 때,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보듬게 된다. 바로 기적이다.
12월 25일, 그리고 10일
바루흐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나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에게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처럼 보이는 현상은 단지 보기 드문, 우리가 아직 그 원리를 모르는 현상일 뿐이다. 가령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면, 사실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거나, 우리가 아직 모르는 자연법칙의 우연한 작용에 따라 살아났을 따름이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흐 같은 신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기적은 곧 일상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환경의 별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생명이 나타나고, 인간과 그 지적인 성취물까지 나올 확률은 끝없이 0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늘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도 그런 관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둘 다 반박하기 어렵고, 받아들일 만한 관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보통 기적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의미의 기적을, 그 존재를 믿고 싶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희망의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을 때, 현실의 무게가 수천 톤의 쇳덩어리처럼 짓누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기적을 갈구한다.
12월에는 그런 기적에 어울리는 날짜가 두 개 있다. 먼저 12월 25일. 신이 인간이 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 그 신=인간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류는 죄의 멍에에서 벗어난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고, 믿더라도 독실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문화에 관계 없이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것은 다만 명절을 즐기려는 의미만은 아니다. 구원, 희생, 인류애라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우리 모두 이를 축하하고 서로를 좀 더 사랑으로 대하자는 뜻이 깃들어 있다. 1914년 말,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도 그런 뜻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말자, 독일군도 영국군도 서로 담배를 나누고 축구를 즐기며 화목하게 보내자는 합의가 온 전선에 걸쳐 자발적으로 맺어졌고, 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날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서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갖고 있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이 제1조부터 제30조까지의 내용은 수백 년 전 프랑스대혁명의 <인권선언>에서, 나아가 그리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정신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것이 서구적 가치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비서구권의 비판도 있다. 선언은 선언일 따름이며, 크리스마스의 기적 뒤에 또 참혹한 학살이 이어졌듯 세계인권선언이 나온 1948년 이래 얼마나 많은 인권유린이 빚어졌는가, 이 선언에 과연 그런 유린을 막을 힘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종족과 성별과 신분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피와 박해와 착취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수 천 년을 지나서, 비로소 전 인류가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합의했다는 사실, 그것을 기적이라고, 꺼지지 않는 희망이라고 볼 수 없을까?
이것도 기적이 아닐까?
영화 <신의 아그네스> (출처: 네이버 영화)
마지막으로 모두가 동의하기는 힘들 ‘기적’을 말하고자 한다. 1979년에 희곡으로, 1985년에 영화로 나온 <신의 아그네스>. 수녀원에서 한 젊은 수녀가 아기를 낳고, 그 아기는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 사건을 두고 조사를 맡은 리빙스턴 박사는 철저히 합리적으로 사건을 분석하려 한다. 반면 미리엄 수녀원장은 신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사건을 캐내는 과정에서 아그네스 수녀가 참혹한 학대와 불운의 나날을 보내고 수녀원에 들어왔음이 밝혀진다. 또한 법규를 어기고 아기를 낳고 죽였음에도(아마도), 더없이 맑고 순수한 신앙심에 차 있음도 밝혀진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 아그네스를 임신시킨 자는 신이 아니라 동네 청년인 것으로 추정되고, 아그네스는 정신질환에 따른 무죄를 선고받고, 치료를 받던 중 죽는다. 그런데 내내 합리적으로만 사건을 보려 애쓰던 리빙스턴이, 마지막으로 관객을 향해 말한다. “이게 기적이 아닐까요?”
한 여성이 인간성을 말려 죽일 만한 고통을 겪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는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도덕률과 법률을 어겼다고 해도, 어떻단 말인가?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 삶의 본질적 의미는 그런 것들을 넘어선 데 있지 않을까? 사회의 죄악에 수난을 당하고 스스로도 죄악이라 부를 만한 일을 했지만, 진실된 사랑과 믿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면, 바로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닐까?
그런 기적은 소용이 없다, 심지어 위험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나가는 2022년을 붙잡을 수 없다. 다만 즐겁게 지내려 했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일도, 그 죽어감에 대해 다른 젊은이들이 ‘내 알 바 아냐’라고 말하는 일도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운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지도, 슐라이에르마흐의 말처럼 일상을 감사하며 상규를 지키는 삶을 사는 데 그쳐야 할지도 모른다.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그러나 우리가 천지간에 태어나 살아가는 데는 뭔가 의미가, 누군가의 선의가 있으리라고 믿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뭔가를 믿고 사랑할 때,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여기는 것도. 그런 철저히 주관적인 믿음만이 필멸자에게 영원을 꿈꾸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몰락 가운데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만이, 그 죽어가는 것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아주 조그맣고 약한 사람이
너의 사랑이
이렇게 모든 걸(내 삶을 모두)
바꾼 걸(세상을 모두)
사랑이 고마운 줄
몰랐었던 내가
끝나면 그만인 줄
알았던 내가
너 원했던 그 모습 그대로
날마다 나를 고쳐 가
내 사랑은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아
시간을 멈춰
네게 돌아가
추억의 책은
너의 페이지를 열어
난 그 안에 있어
- EXO, 「12월의 기적」 중에서 -
12. 12월 : 기적
- 지난 글: 11. 11월 : 교육과 시험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12월 : 기적'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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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AI
박금산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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