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자연 상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신화가 지배하는 신들의 세계이다. 신화 이야기를 보면 그곳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신들에 의해 구조화된 권력체제이다. 아마도 그렇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력감이 표현된 것일 거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영역으로......
나는 코언 형제의 영화들을 장면 하나하나 잘라 보고, 비평하거나 감탄하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제법 훈훈하고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나이를 더 먹고 아침저녁으로 회사에 다니지 않는 때가 오면 커다란 스크린을 장만하여 친구와 느긋하게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다. 이를테면, ‘오, <파고>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총을 빼든 채 엔진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눈 덮인 숲속을 조심조심 가는데, 어찌 임산부가 나무 분쇄기에 사람 다리를 집어넣는 모습을 보고도 떨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동 감독인 동생 이선 코언은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했다던데, 영화에 그 흔적은 어디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는 절대 영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느 한 영역이나 사람에 꽂히면 꽤 열심히 연구하는 편이다. 물론 그렇게 된 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내 성격이 상당히 큰 이유이지만. 그래서인가, 그 소망을 말하니, ‘그렇게 정 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휴가 내서 혼자 그렇게 해’라며, 내 소망에 동감해 주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더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예이츠의 시 한 구절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대사도 적고, 음악도, 심지어 소음도 없다. 제목처럼 영화 내내 ‘- 없다(no)’가 전체를 지배한다. 조용한 바람 소리 아래 살인자 쉬거의 산소통 무기가 격발음을 터뜨릴 때면 마치 내 목숨도 끊어지는 것 같다. 더구나 텍사스 서부의 황량한 풍경은 이런 황폐함을 배가시킨다. 감독 조엘 코언의 말대로 로케이션도 그 자체로 캐릭터다. 끝을 알 수 없는 갈색 사막,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가장 기괴하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곳에서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불안은 사막 위로 한없이 퍼진다. 세상이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각성하는데 너무 절묘하여 소름 끼치게 묵시록적인 공간이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것은 부질없다. 모든 것이 그저 역사에 휩쓸려 가고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노인 보안관 벨의 역사-사고실험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시작부터 “왕년 보안관의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라고 역사가적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역사는 좀 특이하다. 열네 살 소녀를 죽인 살인마, 딱히 동기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들에 대해 말한다. 보안관의 처지에서야 처리할 사건일 뿐이지만, 어쩐지 동기 없는 살인마를 잡는 것이 더 나은 세상과는 먼일처럼 보인다. 자신도 그저 살인과 사형, 죽고 죽이는 일만 하고 있을 뿐이다. 말씀이 시작되자마자 종말이 왔달까.
영화 말미 아저씨 앨리스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벨의 멜랑콜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왜 보안관을 그만두냐는 질문에 그가 대답한다. “힘이 달려서요(I feel overmatched).” 멜랑콜리는 우울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몽상의 시선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나이 들어 힘이 다 빠지면 하느님이 돌봐 주실 거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이더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혹은 미리 폐허에 다다른 사람 같다. 사막의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들리는 벨의 목소리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물론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막은 아직은 폐허가 아니다. 마치 그는 폐허가 되기 직전에 어떤 구원의 계기를 찾으려는 듯 앞을 바라본다.
철학자 벤야민은 시간을 자연의 시간과 역사의 시간으로 나눈다. 자연의 시간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무상성의 시간이다. 역사의 시간은 이 무상성의 자연 시간을 생성의 시간으로 바꾸고자 하는 이념의 시간이다. 아마도 노인 보안관 벨이 바라보는 시간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무상한 시간, 자연의 시간일 것이다. 어떤 미래 희망도 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운명의 시간. 시계는 무릇 항상 틀리게 가고 있다는 듯하다. 역사가란 이 무상의 시간 앞에서 우울의 시선을 던지는 멜랑콜리커(melancholieker)이다. 하지만 멜랑콜리커의 시선은 무상성을 응시하는 폐허의 시선 뒤에서 새로운 역사를 길어낼 여지를 찾는 시선이기도 하다. 즉 몰락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알레고리커의 시선이기도 하다.
영화 <블러드 심플>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기괴한 헤어스타일의 무자비한 살인마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는 잔인한 자연의 시간과도 같다. 그를 만나면 모두 소멸하고 만다. 그가 다 쓰러져 가는 주유소로 들어가 자기 게임에 들어오지 않으면 종말이라는 듯이, 동전 내기를 하며 늙은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진정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친다. 이 인상적인 악역 자체가 이미 낯설고 종말론적이다. 그는 코언 형제의 다른 영화 <블러드 심플>의 간사하고 위압적인 사립 탐정 로렌 비서와도 다르다. 이 냉혈한은 순수한 폭력 그 자체이다. 아마도 기괴한 헤어스타일은 쉬거가 인간이라기보다, 폭력 그 자체임을 상징하는 장치일 것이다. 물론 이 폭력은 미국이라는 폭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언 형제가 노리는 것은 단지 악으로서 폭력을 넘는 알레고리이다. 그는 우리가 들어와 있는 세계 그 자체와도 같다.
도망자 모스와 살인마 쉬거와 ‘노인’ 보안관 벨은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다. 또한 모스와 모스의 아내, 그리고 또 다른 킬러인 카슨도 이들의 도망과 추적에 열중하다가 비명도 없이 사라진다. 음악 대신 발걸음 소리와 전화벨 소리 사이에서 추적은 우리를 긴장감에 빠지게 한다. 그러다 영화의 중심인물이 갑자기 죽어서 사라져버리는 것은 묵시록에 합당한 결말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폭력에 갑자기 휩쓸려 가는 것.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원작자 코맥 매카시의 관점은 코언 형제의 영화를 통해서 더욱 명백해진다.
모스는 어떤 기대와 욕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살인마 쉬거에 쫓기며 도망을 치고 있다. 아마도 역사의 희망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마 쉬거의 폭력 앞에서 곧잘 소멸해 버리고, 더는 일어설 수 없는 폐허가 되어 버린다. 아마도 벨의 한 측면은 모스이지만, 다른 한 측면은 쉬거일 것이다. 한쪽은 역사의 시간, 다른 한쪽은 자연의 시간. 역사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에 침식당하고 곧잘 몰락한다. 역사는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역사가 벨이 멜랑콜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헐벗은 자연 상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신화가 지배하는 신들의 세계이다. 신화 이야기를 보면 그곳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신들에 의해 구조화된 권력체제이다. 아마도 그렇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력감이 표현된 것일 거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영역으로 자연을 바꾸는 문명화 작업을 한다. 계속 이 과정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가장 진보적이고 탈신화화한 현재 상태, 즉 ‘근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근대에는 다른 굴종이 기다린다. 풍요로운 사회에 사는 것 같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화의 모스처럼 계속 도망 다닌다. 심지어 인간이 극복해 사라졌다고 여겼던 신들이 상품이나 유행의 이름으로 다시 도래한다. 예전에는 신전에서 숭배하지만, 지금은 시장에서 숭배한다. 영화에서 모스가 품고 다니는 ‘돈가방’처럼. 결국 근대는 합리적으로 구성된 신화의 세계인 셈이다. 벤야민은 이를 ‘재신화화’라고 부른다. 겉보기에는 변화된 것 같지만 굴종 상태라는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로또나 투기 같은 대박의 세계로 이제 자본주의도 탈문명화된 것 같다. 자연 상태에서는 세계를 신화로 이해하면서 스스로 굴종을 자초하지만, 이제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수고 없이 돈과 쾌락만 향유하려 든다. 모조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노인 보안관 벨이 바라보는 ‘풍요로운 폐허’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바로 그 폐허에서 자연을 넘어선 역사의 시간을 바라본다. 저렇게 사라져버리는 역사의 시간이 ‘비극의 시간’이라면, 그가 내세우는 시간은 ‘비애극의 시간’이다. 비극은 영웅이 죽으면 끝나는 극이지만, 비애극은 <햄릿>처럼 영웅이 죽어도, 그 개인의 죽음을 넘어 공동체가 다른 운명을 찾아가게 한다. 정해진 종결은 없고, 강물은 쉴 줄 모르고 흐른다(<독일 비애극의 원천>). 모스도 모스 아내도 모두 사라져버린 영화 마지막, 노인 보안관 벨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을 타고 좁은 오솔길을 가는데 나를 그냥 앞질러 가시더라는 것이다. 담요를 두른 채 머리를 숙였는데, 가만히 보니 횃불을 들고 계셨다. 그게 마치 달빛 같았다. 역사가로서의 벨은 이렇게 해석한다. 아버지는 먼저 서둘러 가셔서 어둡고 추운 곳에 불을 밝히고 서 계시리라. 아들인 벨이 도착하면 맞으시려고. 코언 형제는 완전히 몰락한 폐허를 보여주고, 다시 그 폐허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자연의 시간 앞에서 역사의 시간을 꿈틀거리게 한다. 성공할지, 아니면 다시 또 실패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미종결의 시간이다.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폐허를 넘어 새로운 시간으로
회사원, 철학자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 학교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배우고 사회에 나와 회사에 다니고 있으나, 삶의 어느 순간 철학을 접하고 불현듯 읽고 쓰는 다른 삶이 포개졌다. 미셸 푸코 등 현대 정치 철학을 동력 삼아 철학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폐허를 넘어 새로운 시간으로'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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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폐허를 넘어 새로운 시간으로
-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강민혁
2022-12-13
헐벗은 자연 상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신화가 지배하는 신들의 세계이다. 신화 이야기를 보면 그곳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신들에 의해 구조화된 권력체제이다. 아마도 그렇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력감이 표현된 것일 거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영역으로......
나는 코언 형제의 영화들을 장면 하나하나 잘라 보고, 비평하거나 감탄하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제법 훈훈하고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나이를 더 먹고 아침저녁으로 회사에 다니지 않는 때가 오면 커다란 스크린을 장만하여 친구와 느긋하게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다. 이를테면, ‘오, <파고>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총을 빼든 채 엔진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눈 덮인 숲속을 조심조심 가는데, 어찌 임산부가 나무 분쇄기에 사람 다리를 집어넣는 모습을 보고도 떨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동 감독인 동생 이선 코언은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했다던데, 영화에 그 흔적은 어디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는 절대 영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느 한 영역이나 사람에 꽂히면 꽤 열심히 연구하는 편이다. 물론 그렇게 된 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내 성격이 상당히 큰 이유이지만. 그래서인가, 그 소망을 말하니, ‘그렇게 정 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휴가 내서 혼자 그렇게 해’라며, 내 소망에 동감해 주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더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예이츠의 시 한 구절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대사도 적고, 음악도, 심지어 소음도 없다. 제목처럼 영화 내내 ‘- 없다(no)’가 전체를 지배한다. 조용한 바람 소리 아래 살인자 쉬거의 산소통 무기가 격발음을 터뜨릴 때면 마치 내 목숨도 끊어지는 것 같다. 더구나 텍사스 서부의 황량한 풍경은 이런 황폐함을 배가시킨다. 감독 조엘 코언의 말대로 로케이션도 그 자체로 캐릭터다. 끝을 알 수 없는 갈색 사막,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가장 기괴하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곳에서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불안은 사막 위로 한없이 퍼진다. 세상이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각성하는데 너무 절묘하여 소름 끼치게 묵시록적인 공간이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것은 부질없다. 모든 것이 그저 역사에 휩쓸려 가고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노인 보안관 벨의 역사-사고실험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시작부터 “왕년 보안관의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라고 역사가적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역사는 좀 특이하다. 열네 살 소녀를 죽인 살인마, 딱히 동기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들에 대해 말한다. 보안관의 처지에서야 처리할 사건일 뿐이지만, 어쩐지 동기 없는 살인마를 잡는 것이 더 나은 세상과는 먼일처럼 보인다. 자신도 그저 살인과 사형, 죽고 죽이는 일만 하고 있을 뿐이다. 말씀이 시작되자마자 종말이 왔달까.
영화 말미 아저씨 앨리스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벨의 멜랑콜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왜 보안관을 그만두냐는 질문에 그가 대답한다. “힘이 달려서요(I feel overmatched).” 멜랑콜리는 우울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몽상의 시선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나이 들어 힘이 다 빠지면 하느님이 돌봐 주실 거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이더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혹은 미리 폐허에 다다른 사람 같다. 사막의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들리는 벨의 목소리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물론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막은 아직은 폐허가 아니다. 마치 그는 폐허가 되기 직전에 어떤 구원의 계기를 찾으려는 듯 앞을 바라본다.
철학자 벤야민은 시간을 자연의 시간과 역사의 시간으로 나눈다. 자연의 시간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무상성의 시간이다. 역사의 시간은 이 무상성의 자연 시간을 생성의 시간으로 바꾸고자 하는 이념의 시간이다. 아마도 노인 보안관 벨이 바라보는 시간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무상한 시간, 자연의 시간일 것이다. 어떤 미래 희망도 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운명의 시간. 시계는 무릇 항상 틀리게 가고 있다는 듯하다. 역사가란 이 무상의 시간 앞에서 우울의 시선을 던지는 멜랑콜리커(melancholieker)이다. 하지만 멜랑콜리커의 시선은 무상성을 응시하는 폐허의 시선 뒤에서 새로운 역사를 길어낼 여지를 찾는 시선이기도 하다. 즉 몰락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알레고리커의 시선이기도 하다.
영화 <블러드 심플>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기괴한 헤어스타일의 무자비한 살인마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는 잔인한 자연의 시간과도 같다. 그를 만나면 모두 소멸하고 만다. 그가 다 쓰러져 가는 주유소로 들어가 자기 게임에 들어오지 않으면 종말이라는 듯이, 동전 내기를 하며 늙은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진정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친다. 이 인상적인 악역 자체가 이미 낯설고 종말론적이다. 그는 코언 형제의 다른 영화 <블러드 심플>의 간사하고 위압적인 사립 탐정 로렌 비서와도 다르다. 이 냉혈한은 순수한 폭력 그 자체이다. 아마도 기괴한 헤어스타일은 쉬거가 인간이라기보다, 폭력 그 자체임을 상징하는 장치일 것이다. 물론 이 폭력은 미국이라는 폭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언 형제가 노리는 것은 단지 악으로서 폭력을 넘는 알레고리이다. 그는 우리가 들어와 있는 세계 그 자체와도 같다.
도망자 모스와 살인마 쉬거와 ‘노인’ 보안관 벨은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다. 또한 모스와 모스의 아내, 그리고 또 다른 킬러인 카슨도 이들의 도망과 추적에 열중하다가 비명도 없이 사라진다. 음악 대신 발걸음 소리와 전화벨 소리 사이에서 추적은 우리를 긴장감에 빠지게 한다. 그러다 영화의 중심인물이 갑자기 죽어서 사라져버리는 것은 묵시록에 합당한 결말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폭력에 갑자기 휩쓸려 가는 것.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원작자 코맥 매카시의 관점은 코언 형제의 영화를 통해서 더욱 명백해진다.
모스는 어떤 기대와 욕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살인마 쉬거에 쫓기며 도망을 치고 있다. 아마도 역사의 희망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마 쉬거의 폭력 앞에서 곧잘 소멸해 버리고, 더는 일어설 수 없는 폐허가 되어 버린다. 아마도 벨의 한 측면은 모스이지만, 다른 한 측면은 쉬거일 것이다. 한쪽은 역사의 시간, 다른 한쪽은 자연의 시간. 역사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에 침식당하고 곧잘 몰락한다. 역사는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역사가 벨이 멜랑콜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헐벗은 자연 상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신화가 지배하는 신들의 세계이다. 신화 이야기를 보면 그곳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신들에 의해 구조화된 권력체제이다. 아마도 그렇게 여기는 것 자체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력감이 표현된 것일 거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영역으로 자연을 바꾸는 문명화 작업을 한다. 계속 이 과정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가장 진보적이고 탈신화화한 현재 상태, 즉 ‘근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근대에는 다른 굴종이 기다린다. 풍요로운 사회에 사는 것 같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화의 모스처럼 계속 도망 다닌다. 심지어 인간이 극복해 사라졌다고 여겼던 신들이 상품이나 유행의 이름으로 다시 도래한다. 예전에는 신전에서 숭배하지만, 지금은 시장에서 숭배한다. 영화에서 모스가 품고 다니는 ‘돈가방’처럼. 결국 근대는 합리적으로 구성된 신화의 세계인 셈이다. 벤야민은 이를 ‘재신화화’라고 부른다. 겉보기에는 변화된 것 같지만 굴종 상태라는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로또나 투기 같은 대박의 세계로 이제 자본주의도 탈문명화된 것 같다. 자연 상태에서는 세계를 신화로 이해하면서 스스로 굴종을 자초하지만, 이제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수고 없이 돈과 쾌락만 향유하려 든다. 모조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노인 보안관 벨이 바라보는 ‘풍요로운 폐허’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바로 그 폐허에서 자연을 넘어선 역사의 시간을 바라본다. 저렇게 사라져버리는 역사의 시간이 ‘비극의 시간’이라면, 그가 내세우는 시간은 ‘비애극의 시간’이다. 비극은 영웅이 죽으면 끝나는 극이지만, 비애극은 <햄릿>처럼 영웅이 죽어도, 그 개인의 죽음을 넘어 공동체가 다른 운명을 찾아가게 한다. 정해진 종결은 없고, 강물은 쉴 줄 모르고 흐른다(<독일 비애극의 원천>). 모스도 모스 아내도 모두 사라져버린 영화 마지막, 노인 보안관 벨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을 타고 좁은 오솔길을 가는데 나를 그냥 앞질러 가시더라는 것이다. 담요를 두른 채 머리를 숙였는데, 가만히 보니 횃불을 들고 계셨다. 그게 마치 달빛 같았다. 역사가로서의 벨은 이렇게 해석한다. 아버지는 먼저 서둘러 가셔서 어둡고 추운 곳에 불을 밝히고 서 계시리라. 아들인 벨이 도착하면 맞으시려고. 코언 형제는 완전히 몰락한 폐허를 보여주고, 다시 그 폐허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자연의 시간 앞에서 역사의 시간을 꿈틀거리게 한다. 성공할지, 아니면 다시 또 실패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미종결의 시간이다.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폐허를 넘어 새로운 시간으로
- 지난 글: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록키 호러 픽쳐 쇼,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윤리적인.
회사원, 철학자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 학교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배우고 사회에 나와 회사에 다니고 있으나, 삶의 어느 순간 철학을 접하고 불현듯 읽고 쓰는 다른 삶이 포개졌다. 미셸 푸코 등 현대 정치 철학을 동력 삼아 철학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폐허를 넘어 새로운 시간으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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