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는 대가로 받는 것은 월급이 전부인가, 거기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노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게 <자기만의 방>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비전임 교원, 즉 시간강사로 일했던 7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의 내 방에서 연구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준비했다. 한 번씩 견디기 어렵게 숨이 막혀왔다. 숨이 막히면 집 앞의 호수공원을 산책했다. 저녁 무렵이면 호수의 표면에 물고기들의 뻐끔거림으로 곳곳에 반짝이는 은빛 동그라미가 출렁였다. 너희도 인공호수가 숨이 막혀서 나온 걸까. 산소를 호흡하러 올라온 물고기와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던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날들이 가늘고 길게 이어져갔다.
자기만의 방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때에 새 직장이 주어졌다. 갑작스러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집에, 친정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책을 모아 트럭으로 싣고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에 책을 옮겨주신 기사님들께 죄송하고 감사해서 이사비를 조금 더 쥐어드리고 배웅해드린 뒤, 연구실에 홀로 처음 앉아 보았다. 그제야 조금 눈물이 났다. <자기만의 방>이 있으니 충분하지 않냐고 자책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내게 꼭 필요했던 것은 <사회적인 자기만의 방>이었다.
사람은 힘들면 처음에는 저항한다. 그러나 힘든 상태가 지속되면 저항하는 것을 차차 그만둔다. 생존을 위하여 에너지를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부당하고 잘못된 현실에 부딪히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생각하는 것도 힘이다. 개인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적 현실 속에 너무 오래 놓이면 생각하는 힘조차 아끼게 된다. 노동법을 공부하는 연구자라는 사람이 정작 나의 노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몰랐다. 느끼면서도 외면했다. 자꾸 생각하면 고통스러우니까.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
‘노동’과 ‘소유’가 분리된 삶을 오래 살았다. 노동하지만 소유하지 못했다. 많은 논문을 쓰고 학술대회와 강연을 다녔지만 월 평균 수입은 최저임금이 되지 못했다. 수많은 학생을 만나 가르쳤어도 공식적인 나의 제자로 받아줄 수는 없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림자처럼 학교를 빠져나가야 했다. 수없이 밤을 새우며 연구라는 노동을 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인정받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노동을 소유하며 살고 있는가? 열심히 일하면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는가? 근로기준법 제2조는 근로자, 즉 일하는 사람을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임금(월급)을 받기 위해 일한다. 법조문 하나가 인생을 짧게 요약해주고 있어 허탈하다. 그러나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쉽지 않다. 물론 ‘반감’이 들 수는 있다. 내가 꼭 돈만 보고 직장을 택한 건 아닌데, 취업 준비를 얼마나 오래 했는데, 일이 적성에도 맞고 즐거움도 느끼는데 내가 월급만 보고 회사 다니는 건 아니지, 이런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일에서 경제적 대가는 물론이지만,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고 열심히 살아온 우리 대부분이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반감’을 느끼는 것과 ‘반박’을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금 하는 일이 좋아서 그만둘 생각이 없다면 참으로 다행이고 축하받을 일이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나는 왜 일하고 있느냐고 묻기보다는, 거꾸로 왜 일을 그만두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조금 더 서늘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일을 그만두면 생활비가 모자랄 테니까, 저축도 할 수 없으니까, 결혼 준비도, 자녀 양육도, 그 외에도 찬찬히 계획하던 그 모든 것을 해나갈 돈이 없게 될 테니까. “임금(월급)을 위해 일한다”는 단순한 명제 하나를 단호하게 반박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한다. 소득을 얻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으로 나뉜다. 바야흐로 자본소득의 시대다. 재벌이나 연예인들이 축적하는 막대한 자산 소식은 이미 익숙하더라도, 도처에서 더욱 부쩍 들려오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비트코인, 유튜버로 대박난 N잡러 성공담 등등을 듣노라면 직장인의 근로소득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몇 분짜리 영상 하나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웬만한 회사원 연봉과 비교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 하루를 버티던 의욕이 문득 급감한다. 가뜩이나 코로나19와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물가는 연일 치솟는데, 대부분의 직종에서 월급만 제자리걸음이다.
소득 양극화
자본소득의 압승은 인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3세기 동안 지금까지 자본소득의 증식은 근로소득을 항상 추월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산업화와 비약적인 기술 혁신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본소득의 도약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산업화 이전에는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의 괴리가 없었을까.
서구 사상사에서 노동이 개입되지 않은 채 발생하는 이윤을 일컫는 단어의 많은 변용이 발견된다.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여기에 ‘지대’(rente)라는 이름을 붙였고, 잘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는 ‘잉여가치’(surplus value, mehrwert)라 불렀으며, 같은 개념을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안톤 멩거(Anton Menger)는 ‘무노동수익’(arbeitsloses einkommen)이라는 용어를 썼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천 년 전 성서 속 예수조차도 마태복음에서 ‘가진 자는 더 가져서 넉넉해지고, 없는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겨 더 가난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간명한 표현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라는 주어가 강조되어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엔 사실 숨은 서술어 하나가 있다. 바로 ‘노동’이다. 충분한 부를 축적한 사람은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노동을 해야 한다.
법학에서 오늘날 노동법이라는 분야를 최초로 체계화한 독일의 법학자 휴고 진쯔하이머(Hugo Sinzheimer)는 이 현실을 ‘종속노동’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과 가족의 생존을 위하여 자신의 노동력을 거래의 대상으로 시장에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원하든 원치 않든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일하게 되므로 인격적으로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독일 법학자의 오래된 이론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거나, 진상 고객을 응대하고 있거나, 책상 앞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인 세상의 모든 직장인에게 쉽게 와닿는 설명이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고 있으며(‘경제적 종속’), 잘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 일을 하려면 상사의 지시를 거스르기 어렵다(‘인격적 종속’).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토대를 이루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노동한다는 것의 본질에 대한 이 설명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 같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사람은 노동의 대가로 무엇을 소유하는가. 지금의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는 대가로 받는 것은 월급이 전부인가, 거기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노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노동 개념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인 설명은 존 로크의 <통치론 Two Treaties of Government> 중, 제5장 “재산에 대하여”(On Property)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치론>은 1689년에 출판되었으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놓은 고전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는 중세 전반을 아우르던 종교의 영향이 점차 약화되고, 신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경제적으로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하던 근대의 태동기이다. 로크는 신 또는 군주가 아닌 개인이 어떻게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노동’을 재산권의 정당화 근거로 끌어온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신(person)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다. 자연이 제공한 것에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섞으면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통치론>, 제5장 제27절.) 이것이 바로 유명한 노동가치설이다. 노동을 통하여 재산은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논변에 대해서는 누구나 보탤 말이 있게 마련이다.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발표 직후에도 다수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노동의 형태와 방식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 나가기 때문에 여전히 농경이 우세했던 17세기 당시 로크의 노동가치설을 지금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볼 때 산업구조는 노동집약적 경제에서 점차 기술집약적 경제로 변모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조차 식상해질 만큼 인공지능과 플랫폼이 일상화되고, 아침에 눈 뜨면 실존 인물인 것마냥 보도되는 가상인간 뉴스를 접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사과를 따 먹은 사람은 나무에서 사과를 수확한 그의 노동으로 인해 사과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한다고 설명했지만, 오늘날 각종 정보통신기술과 SNS를 활용해 일하면서 내가 지금 하는 노동을 통해 거대 플랫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지금의 노동을 원점에서 돌이켜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불안정해지고, 기술혁신에, 인공지능에, 무인화 공정의 도입으로 좋은 일자리가 점점 더 줄어드는 지금 “사람은 원래 자신이 노동한 것을 소유할 수 있다”라는 선언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울림을 준다.
과거 신분사회
어쩌면 노동의 역사는 ‘노동과 소유가 분리되는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노예와 하층민이 일을 했고, 귀족이 이들의 노동을 통해 창출된 부를 소유했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로는 자본가 계급이 출현하기 시작하며 기존에 농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경작하던 토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유입되고, 비참하고 위험한 환경을 감내하며 어린 아동들조차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었다.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이 턱없이 적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거친 뒤 전쟁의 참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인권과 노동권 규범을 확립해 나아갔고 대부분의 주권국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했지만, 잠깐의 경제 고성장기를 거치는가 싶더니 사실상 1970년대 이후로는 상시적인 경제 위기다. 오일쇼크에, IMF 금융위기에, 글로벌 금융위기에, 코로나19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까지.
이 시간을 거치며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희박해지고, 노동은 외주화와 비정규직화를 거듭하며 점점 더 작고 짧게 쪼개졌으며, 일하는 데 있어서 안정성이나 권리를 요구하기가 더욱 힘겨워지고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 집권기에 노동부에 몸담았던 데이비드 와일(David Weil)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균열일터”(fissured workplace)라는 단어로 이름을 붙였다. 노동에 가해진 타격이 쪼개진 바위틈처럼 점점 더 깊게 벌어지며, 자본이 집중된 소수의 핵심 역량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더 일터에서의 상황이 어려워지고 권리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에서 벌어지는 일만 해도 소식 따라잡기 숨이 찰 지경이다. 얼마 전 SPC 제빵 공장에서 기계에 소스를 붓다가 몸이 끼어 숨진 20대 여성 근로자 참변에 모두가 분노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일이 많다고 카톡으로 하소연하고, 남자친구와 여행 계획에 들떠하던 우리 모두와 같은 일상을 살던 이웃이었다. 화물 직종 파업에 정부는 경제 논리만을 설파하며 ‘불법 파업에 엄정 대응’한다고 엄포부터 놓는다(단체행동권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며, 파업의 실제 합법성 여부는 법률에 따른 검토를 거쳐 법원에서 판단한다. 행정부가 어떻게 파업 개시 전부터 무조건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빠른 판단이 신기할 따름이다). 치솟는 물가에도 불구하고 월급은 오르질 않는데, 법정 근로시간 규제를 풀겠다고 한다. 적게 벌면서 더 많이 일하는 심란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노동에서 ‘소유’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경제는 항상 어렵다고 하고,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억울하면 근로소득에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열심히 투자해서 자본소득을 모으라고 한다. 현실이 그렇다고들 한다. 그런데 ‘현실’은 복잡미묘한 세상을 구성하는 무수한 사실들 중 하나이다. 먹고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무거운 일이다. 하지만 무거운 현실을 하나의 ‘사실’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과, 현실을 ‘진실’로서 내면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실’이 사실의 차원을 넘어 도저히 바뀌지 않는 부동의 법칙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가파른 경사면처럼 조금 더 기울어진다. 경사의 기울기가 심해지면 버틸 힘이 약한 사람들부터 차례대로 아래로 미끄러질 것이다. 더 기울이면, 더 많은 사람의 삶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될까. 일론 머스크, 얼마 전에 서울에 다녀간 빈 살만, 세계 최고 수준의 갑부들 몇 명일까?
이런 질문을 계속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를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의미가 있다. 가파른 경사면,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을 보며 누군가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군가는 다치지 않도록 그물망이라도 깔자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사면을 힘써 막아 보자고, 다 함께 맞서서 반대 방향으로 밀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기정사실화하고 각자 알아서 능력껏 살아남으라고 등 돌리는 사회를 선택한다면 경제적 실패는 개인의 탓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대가가 충분한지를 고민하는 사회, 노동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을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회를 선택하는 것은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몫이다.
노동을 통해 소유는커녕, 건강과 생명마저 빼앗기는 현실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일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미래를 개척하고, 수시로 밀어닥쳐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삶을 소유할 수 있기를 꿈꾼다. “중력의 법칙이 진실이 아니고, 중력에도 불구하고 새가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이 진실이다.” <거대한 전환>을 저술한 탁월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말이다.
교수
한동대학교 법학부 교수. 노동법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노동의 미래, 노동에서 소외된 사람들, 노동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주로 연구하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에 관심이 있다.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를 취득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시민권과 이주노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과정 교환학생으로 수학했다. 『영혼 있는 노동: 한국의 노동법과 일의 미래』(서울대 이철수 교수와 공저), 『숨을 참다: 코로나 시대 우리 일』(공저) 등의 단행본과, 「공유경제와 고용관계」, 「코로나19와 노동법의 과제」, 「4차 산업혁명과 여성의 노동」, 「기본소득에 대한 노동법적 고찰」, 「외국인의 근로권에 대한 재해석」 등의 논문을 썼다. 노동이라는 사회과학에 문학의 언어를 결합하겠다는 무모한 책을 쓰고 있다. (idalee@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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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소유
- 오늘, 키워드 인문학 -
이다혜
2022-11-30
사람은 노동의 대가로 무엇을 소유하는가.
지금의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는 대가로 받는 것은 월급이 전부인가, 거기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노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게 <자기만의 방>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비전임 교원, 즉 시간강사로 일했던 7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의 내 방에서 연구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준비했다. 한 번씩 견디기 어렵게 숨이 막혀왔다. 숨이 막히면 집 앞의 호수공원을 산책했다. 저녁 무렵이면 호수의 표면에 물고기들의 뻐끔거림으로 곳곳에 반짝이는 은빛 동그라미가 출렁였다. 너희도 인공호수가 숨이 막혀서 나온 걸까. 산소를 호흡하러 올라온 물고기와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던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날들이 가늘고 길게 이어져갔다.
자기만의 방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때에 새 직장이 주어졌다. 갑작스러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집에, 친정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책을 모아 트럭으로 싣고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에 책을 옮겨주신 기사님들께 죄송하고 감사해서 이사비를 조금 더 쥐어드리고 배웅해드린 뒤, 연구실에 홀로 처음 앉아 보았다. 그제야 조금 눈물이 났다. <자기만의 방>이 있으니 충분하지 않냐고 자책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내게 꼭 필요했던 것은 <사회적인 자기만의 방>이었다.
사람은 힘들면 처음에는 저항한다. 그러나 힘든 상태가 지속되면 저항하는 것을 차차 그만둔다. 생존을 위하여 에너지를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부당하고 잘못된 현실에 부딪히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생각하는 것도 힘이다. 개인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적 현실 속에 너무 오래 놓이면 생각하는 힘조차 아끼게 된다. 노동법을 공부하는 연구자라는 사람이 정작 나의 노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몰랐다. 느끼면서도 외면했다. 자꾸 생각하면 고통스러우니까.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
‘노동’과 ‘소유’가 분리된 삶을 오래 살았다. 노동하지만 소유하지 못했다. 많은 논문을 쓰고 학술대회와 강연을 다녔지만 월 평균 수입은 최저임금이 되지 못했다. 수많은 학생을 만나 가르쳤어도 공식적인 나의 제자로 받아줄 수는 없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림자처럼 학교를 빠져나가야 했다. 수없이 밤을 새우며 연구라는 노동을 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인정받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노동을 소유하며 살고 있는가? 열심히 일하면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는가? 근로기준법 제2조는 근로자, 즉 일하는 사람을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임금(월급)을 받기 위해 일한다. 법조문 하나가 인생을 짧게 요약해주고 있어 허탈하다. 그러나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쉽지 않다. 물론 ‘반감’이 들 수는 있다. 내가 꼭 돈만 보고 직장을 택한 건 아닌데, 취업 준비를 얼마나 오래 했는데, 일이 적성에도 맞고 즐거움도 느끼는데 내가 월급만 보고 회사 다니는 건 아니지, 이런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일에서 경제적 대가는 물론이지만,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고 열심히 살아온 우리 대부분이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반감’을 느끼는 것과 ‘반박’을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금 하는 일이 좋아서 그만둘 생각이 없다면 참으로 다행이고 축하받을 일이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나는 왜 일하고 있느냐고 묻기보다는, 거꾸로 왜 일을 그만두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조금 더 서늘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일을 그만두면 생활비가 모자랄 테니까, 저축도 할 수 없으니까, 결혼 준비도, 자녀 양육도, 그 외에도 찬찬히 계획하던 그 모든 것을 해나갈 돈이 없게 될 테니까. “임금(월급)을 위해 일한다”는 단순한 명제 하나를 단호하게 반박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한다. 소득을 얻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으로 나뉜다. 바야흐로 자본소득의 시대다. 재벌이나 연예인들이 축적하는 막대한 자산 소식은 이미 익숙하더라도, 도처에서 더욱 부쩍 들려오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비트코인, 유튜버로 대박난 N잡러 성공담 등등을 듣노라면 직장인의 근로소득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몇 분짜리 영상 하나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웬만한 회사원 연봉과 비교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 하루를 버티던 의욕이 문득 급감한다. 가뜩이나 코로나19와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물가는 연일 치솟는데, 대부분의 직종에서 월급만 제자리걸음이다.
소득 양극화
자본소득의 압승은 인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3세기 동안 지금까지 자본소득의 증식은 근로소득을 항상 추월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산업화와 비약적인 기술 혁신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본소득의 도약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산업화 이전에는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의 괴리가 없었을까.
서구 사상사에서 노동이 개입되지 않은 채 발생하는 이윤을 일컫는 단어의 많은 변용이 발견된다.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여기에 ‘지대’(rente)라는 이름을 붙였고, 잘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는 ‘잉여가치’(surplus value, mehrwert)라 불렀으며, 같은 개념을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안톤 멩거(Anton Menger)는 ‘무노동수익’(arbeitsloses einkommen)이라는 용어를 썼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천 년 전 성서 속 예수조차도 마태복음에서 ‘가진 자는 더 가져서 넉넉해지고, 없는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겨 더 가난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간명한 표현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라는 주어가 강조되어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엔 사실 숨은 서술어 하나가 있다. 바로 ‘노동’이다. 충분한 부를 축적한 사람은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노동을 해야 한다.
법학에서 오늘날 노동법이라는 분야를 최초로 체계화한 독일의 법학자 휴고 진쯔하이머(Hugo Sinzheimer)는 이 현실을 ‘종속노동’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과 가족의 생존을 위하여 자신의 노동력을 거래의 대상으로 시장에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원하든 원치 않든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일하게 되므로 인격적으로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독일 법학자의 오래된 이론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거나, 진상 고객을 응대하고 있거나, 책상 앞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인 세상의 모든 직장인에게 쉽게 와닿는 설명이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고 있으며(‘경제적 종속’), 잘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 일을 하려면 상사의 지시를 거스르기 어렵다(‘인격적 종속’).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토대를 이루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노동한다는 것의 본질에 대한 이 설명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 같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사람은 노동의 대가로 무엇을 소유하는가. 지금의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는 대가로 받는 것은 월급이 전부인가, 거기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노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노동 개념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인 설명은 존 로크의 <통치론 Two Treaties of Government> 중, 제5장 “재산에 대하여”(On Property)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치론>은 1689년에 출판되었으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놓은 고전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는 중세 전반을 아우르던 종교의 영향이 점차 약화되고, 신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경제적으로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하던 근대의 태동기이다. 로크는 신 또는 군주가 아닌 개인이 어떻게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노동’을 재산권의 정당화 근거로 끌어온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신(person)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다. 자연이 제공한 것에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섞으면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통치론>, 제5장 제27절.) 이것이 바로 유명한 노동가치설이다. 노동을 통하여 재산은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논변에 대해서는 누구나 보탤 말이 있게 마련이다.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발표 직후에도 다수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노동의 형태와 방식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 나가기 때문에 여전히 농경이 우세했던 17세기 당시 로크의 노동가치설을 지금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볼 때 산업구조는 노동집약적 경제에서 점차 기술집약적 경제로 변모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조차 식상해질 만큼 인공지능과 플랫폼이 일상화되고, 아침에 눈 뜨면 실존 인물인 것마냥 보도되는 가상인간 뉴스를 접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사과를 따 먹은 사람은 나무에서 사과를 수확한 그의 노동으로 인해 사과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한다고 설명했지만, 오늘날 각종 정보통신기술과 SNS를 활용해 일하면서 내가 지금 하는 노동을 통해 거대 플랫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지금의 노동을 원점에서 돌이켜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불안정해지고, 기술혁신에, 인공지능에, 무인화 공정의 도입으로 좋은 일자리가 점점 더 줄어드는 지금 “사람은 원래 자신이 노동한 것을 소유할 수 있다”라는 선언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울림을 준다.
과거 신분사회
어쩌면 노동의 역사는 ‘노동과 소유가 분리되는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노예와 하층민이 일을 했고, 귀족이 이들의 노동을 통해 창출된 부를 소유했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로는 자본가 계급이 출현하기 시작하며 기존에 농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경작하던 토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유입되고, 비참하고 위험한 환경을 감내하며 어린 아동들조차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었다.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이 턱없이 적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거친 뒤 전쟁의 참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인권과 노동권 규범을 확립해 나아갔고 대부분의 주권국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했지만, 잠깐의 경제 고성장기를 거치는가 싶더니 사실상 1970년대 이후로는 상시적인 경제 위기다. 오일쇼크에, IMF 금융위기에, 글로벌 금융위기에, 코로나19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까지.
이 시간을 거치며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희박해지고, 노동은 외주화와 비정규직화를 거듭하며 점점 더 작고 짧게 쪼개졌으며, 일하는 데 있어서 안정성이나 권리를 요구하기가 더욱 힘겨워지고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 집권기에 노동부에 몸담았던 데이비드 와일(David Weil)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균열일터”(fissured workplace)라는 단어로 이름을 붙였다. 노동에 가해진 타격이 쪼개진 바위틈처럼 점점 더 깊게 벌어지며, 자본이 집중된 소수의 핵심 역량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더 일터에서의 상황이 어려워지고 권리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에서 벌어지는 일만 해도 소식 따라잡기 숨이 찰 지경이다. 얼마 전 SPC 제빵 공장에서 기계에 소스를 붓다가 몸이 끼어 숨진 20대 여성 근로자 참변에 모두가 분노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일이 많다고 카톡으로 하소연하고, 남자친구와 여행 계획에 들떠하던 우리 모두와 같은 일상을 살던 이웃이었다. 화물 직종 파업에 정부는 경제 논리만을 설파하며 ‘불법 파업에 엄정 대응’한다고 엄포부터 놓는다(단체행동권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며, 파업의 실제 합법성 여부는 법률에 따른 검토를 거쳐 법원에서 판단한다. 행정부가 어떻게 파업 개시 전부터 무조건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빠른 판단이 신기할 따름이다). 치솟는 물가에도 불구하고 월급은 오르질 않는데, 법정 근로시간 규제를 풀겠다고 한다. 적게 벌면서 더 많이 일하는 심란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노동에서 ‘소유’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경제는 항상 어렵다고 하고,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억울하면 근로소득에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열심히 투자해서 자본소득을 모으라고 한다. 현실이 그렇다고들 한다. 그런데 ‘현실’은 복잡미묘한 세상을 구성하는 무수한 사실들 중 하나이다. 먹고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무거운 일이다. 하지만 무거운 현실을 하나의 ‘사실’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과, 현실을 ‘진실’로서 내면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실’이 사실의 차원을 넘어 도저히 바뀌지 않는 부동의 법칙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가파른 경사면처럼 조금 더 기울어진다. 경사의 기울기가 심해지면 버틸 힘이 약한 사람들부터 차례대로 아래로 미끄러질 것이다. 더 기울이면, 더 많은 사람의 삶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될까. 일론 머스크, 얼마 전에 서울에 다녀간 빈 살만, 세계 최고 수준의 갑부들 몇 명일까?
이런 질문을 계속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를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의미가 있다. 가파른 경사면,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을 보며 누군가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군가는 다치지 않도록 그물망이라도 깔자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사면을 힘써 막아 보자고, 다 함께 맞서서 반대 방향으로 밀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기정사실화하고 각자 알아서 능력껏 살아남으라고 등 돌리는 사회를 선택한다면 경제적 실패는 개인의 탓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대가가 충분한지를 고민하는 사회, 노동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을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회를 선택하는 것은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몫이다.
노동을 통해 소유는커녕, 건강과 생명마저 빼앗기는 현실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일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미래를 개척하고, 수시로 밀어닥쳐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삶을 소유할 수 있기를 꿈꾼다. “중력의 법칙이 진실이 아니고, 중력에도 불구하고 새가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이 진실이다.” <거대한 전환>을 저술한 탁월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말이다.
[오늘, 키워드 인문학] 노동과 소유
- 지난 글: [오늘 키워드 인문학] #나를 지켜낸다는 것 #부당한 기대에 저항하기 #나의 연속성
교수
한동대학교 법학부 교수. 노동법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노동의 미래, 노동에서 소외된 사람들, 노동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주로 연구하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에 관심이 있다.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를 취득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시민권과 이주노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과정 교환학생으로 수학했다. 『영혼 있는 노동: 한국의 노동법과 일의 미래』(서울대 이철수 교수와 공저), 『숨을 참다: 코로나 시대 우리 일』(공저) 등의 단행본과, 「공유경제와 고용관계」, 「코로나19와 노동법의 과제」, 「4차 산업혁명과 여성의 노동」, 「기본소득에 대한 노동법적 고찰」, 「외국인의 근로권에 대한 재해석」 등의 논문을 썼다. 노동이라는 사회과학에 문학의 언어를 결합하겠다는 무모한 책을 쓰고 있다. (idalee@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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