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찰나와 영원의 예술이다. 사진 이미지는 영원으로 포착된 찰나이자 찰나로 수렴된 영원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힘을 지닌 이미지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나의 이미지는 배후에 수많은 이미지를 거느리고 배후의 이미지들은 전경화된 하나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투사한다. 이미지를 포착한 자만이 이미지를 사유하는 게 아니다. 이미지 역시 포착한 자를 사유한다. 사진 이미지를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렸다면 사진 이미지 역시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서른일곱 살의 건강한 사내 박민우는 새의 이미지에 매혹된 흔한 사진 애호가일 뿐이다. 경찰특공대인 친구의 부탁을 받아 진압 작전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용산의 남일당 건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역사가 용산참사로 기록한 바로 그 현장에서 박민우는 망루를 점거한 철거민과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떠밀리듯 투입된 특공대원들이 불에 타는 광경을 본다. 그가 목격한 건 “허구를 현실로 만들고 현실을 허구로 만든, 그리하여 카메라의 무게와 죄의 무게를 순식간에 등가로 만들어버린 불길”이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이들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마침내 그의 기억이 되었다. 그 기억이 박민우의 사적이고 은밀한 경험으로 남은 까닭은 경찰이 카메라에 저장된 이미지를 삭제해버려서가 아니다. 그가 새의 감각으로 자신이 목격한 것들과 하나가 된 까닭이다. 그가 말하는 새의 감각이란 어머니의 배 속에서 형성된 감각을 뜻한다. “양수의 아늑한 촉감 속에서, 어머니의 움직임이 빚는 율동에 싸여 먼 우주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 몸의 소리를” 들으면서 형성된 순수한 감각. 그가 바라 마지않던 이 감각을 비참하고 끔찍한 순간에 체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이미지,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그가 포착한 이미지는 배후의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서 전방 입소 반대 시위 도중 분신한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이미지를 만난다. 불길 속의 불길. 불길은 영원히 불길하다. 이전의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관심조차 없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죄의 무게로 엄습한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죽은 기억들이 그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순간, 그 역시 불길 속에서 타오른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조우하는 장소는 이처럼 그의 내면이다. 마침내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남일당 건물에 올라 새처럼 자신을 허공에 던져버린다. 그가 새의 감각으로 느낀 건 불길 속에서 죽어가던 이들의 고통일 것이므로. 그는 알았을 것이다. 불타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신 그는 자신이 겪은 일만이 아니라 겪지 못한 일마저 기억으로 남겼다. 새의 시선으로.
손홍규/소설가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 지성사), 『그 남자의 가출』(창비)이 있고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 중앙),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이슬람 정육점』(문학과 지성사), 『서울』(창비), 『파르티잔 극장』(문학동네), 산문집 『다정한 편견』(교유서가),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교유서가)이 있다. 노근리 평화문학상, 백신애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채만식 문학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ㅣ실존적 수치를 감당하는 인간의 품격에 대하여
인간의 기억은 편리하게 각색된다. 인간이 기억으로 남겨두는 것과 망각해버리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이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대체로 뼈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최선인 경우가 있다. 인간은 어떤 믿음을 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를 결정할 때 스스로도 다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계산해서 결정한다. A라는 믿음이 포함된 믿음체계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 A라는 믿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으면 A라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진실을 덮어버리는 데 뛰어난 전문가’인 인간에게 진실에 직면할 것을 주문한다.
주인공 박민우를 만난 정신과 의사의 서술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손목 관절 통증으로부터 시작되어 근육마비에까지 이른 박민우의 상태는 정형외과 영역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카메라에 새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믿는 박민우는 카메라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남일당에 갔다가 자청해서 채증요원이 되는 바람에 용산참사를 직접 현장에서 겪게 되었다. 그러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박민우는 첫 만남에서 이미 정신과 의사에게 “카메라의 무게가 곧 죄의 무게라고 제가 말한다면 선생님의 상상이 완성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박민우는 과거의 분신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나오는 증언자에게 빙의되기도 한다. 그는 그 사건을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남자에 빙의될 정도로 참사의 기억을 내팽개치지 않고 견딘 것이다. 결국 박민우는 새처럼 남일당에서 몸을 던진다. 42층에서 뛰어내린 그는 마치 새가 날았던 것처럼 깨끗한 시신으로, 분신했던 김세진이 신고 싶어 했던 운동화를 신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카메라
박민우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기 전에 이미 카메라에 새의 영혼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새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박민우에게 카메라는 빌려주는 물건이 아니라 생명체였다. 카메라를 빌려주기만 할 수는 없어서 자청해서 채증요원이 되었는데 결국은 참사로 인해 카메라를 빼앗기고 카메라에 담긴 기억을 상실했다. 그는 “카메라를 잃어버렸어, 그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나도 잃어버린 거지”라고 말한다. 기억을 상실당한 박민우는 새의 시선에서의 기억을 잃은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박민우에게 남일당의 불길은 “허구를 현실로 만들고 현실을 허구로 만든, 그리하여 카메라의 무게와 죄의 무게를 순식간에 등가로 만들어버린 불길”이었다. 박민우가 의사와의 대화를 계기로 확인한 희망은 진실이라는 불길을 견디는 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새와 관련해서 의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 몸을 태워 세상을 떠난 젊은 생명을 날개가 달린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시키고 있다’는 해석을 박민우에게 들려주었던 것이다.
진실을 견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민우의 일상적 자아는 진실을 견디기 힘들어하지만, 순수하고 깊은 자아는 진실을 견디고자 한다. 박민우는 순수하고 깊은 자아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난 그를 느낀다. 왜냐하면 나의 나니까. 왜 그가 나타나는 걸까? 나의 나라고 해서 꼭 나타나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를 그리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그를 그리워할까? 그가 새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은 나를 새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새의 시선이 몸에 닿는 것을 느낀다. …… 그가 반가우면서도 두렵다. 왜 두려운가? 새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이다. 새의 시선은 사물과 풍경을 꿰뚫는다. 그 투명한 시선이 나를 환히 드러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정찬 『새의 시선』 중에서 -
나의 나인 ‘그’는 새의 영혼을 가진 순수하고 깊은 자아이다. 새의 투명한 시선은 나를 드러내 두렵게 만든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내 안의 누군가가 만든 상상의 장소”는 이 순수하고 깊은 자아가 만든 상상의 장소, 즉 양심일 것이다. 바로 박민우가 견뎌야 했고 정신과 의사가 두려워하게 된 새의 시선을 의식하는 영역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양심에 해당하는 단어는 “syneidēsis”로 ‘의식’이나 ‘견고한 지식’을 의미했다. 이 개념이 라틴어로는 “conscientia”로 번역되었는데 conscientia는 ‘함께 앎’이라는 뜻이다. 이는 ‘자기 안에 자기 태도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다’, ‘불의와 잘못에 자기가 관련되어 있음을 스스로 안다’는 의미로 연결된다.
일상의 우리는 죄책을 죄책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어려워한다. 그런데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죄책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죄책을 피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가진다면 이는 한계상황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하지 않는 태도이다. 야스퍼스 철학에서는 한계상황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실존이 될 수 없다. 실존은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그 존재방식을 스스로 선택해가는 인간 고유의 특징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야스퍼스 철학에서는 짊어져야 할 죄책을 외면하지 않고 짊어져야만 실존일 수 있다.
“나는 가능실존으로서의 내가 마음 쓰는 나의 순수한 영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오히려 나를 이끌어주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가장 내밀한 감정에서 죄책적인 것을 발견하는 나의 구체적인 양심에로 되돌려진다.”
-야스퍼스, 『철학Ⅱ:실존조명』 중에서 -
어떤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일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수치심을 이길 수 없어 괴로워한다. 야스퍼스는 “일반적인 것 안에 자기를 해소시키고 더 이상 자기로서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은 수치감을 상실하고 있는 데 반하여 자기를 가능실존으로서의 자신과 연결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존재 안에 해소될 수 없는 수치감의 뿌리가 남아 있다.”(『철학Ⅱ:실존조명』)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즉 현존에 그치는 사람들(소설에서 말하는 일상적 자아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지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가능실존으로 사는 사람들(소설에서 말하는 순수하고 깊은 자아를 느끼는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낀다.
실존이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
가능실존이라는 말은 야스퍼스가 고유하게 사용하고 있는 개념으로 ‘실존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야스퍼스에게 인간은 현존이면서 가능실존인데 어떤 인간은 현존에 그치면서 가능실존의 측면을 제거하거나 외면하면서 산다. 현존은 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당장의 의식주의 현실적 여건을 충족시키는 것에 주목하고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존재방식이다. 그러나 실존이 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사람, 즉 가능실존으로서의 측면을 제거하고는 다시 말해 현존에 그치는 자기 자신으로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적 수치심은 사회적, 객관적 공동존재의 영역 안에서 개인이 실존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때에 나타난다.”고 한다. 실존적 수치와 죄책을 짊어지는 방식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길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길을 견디는 존재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지요”라고 말하는 박민우는 실존적 수치심을 느끼고 선택해 견디는 사람이다.
현실의 우리는 시간이 가면 기억도 어디론가 흘러가기를 희망하고, 박민우의 여동생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쓰며 산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기억은 적당히 내려 놓고 잊으며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세상살이라 말하는 현실에서 작가는 우리가 보기 힘든 진실을 드러낸다. 새의 시선을 견디고 의식하며 사는 삶과 새의 시선이 두려워 포기하는 삶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단독 저서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공동저서로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상담인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공동번역서로 『철학 2: 실존조명』, 『50인의 철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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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새의 시선>
- 소설×인문 -
박은미
2022-10-27
소설 <새의 시선> 책 표지/정찬/문학과지성사 (출처: 알라딘)
사진은 찰나와 영원의 예술이다. 사진 이미지는 영원으로 포착된 찰나이자 찰나로 수렴된 영원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힘을 지닌 이미지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나의 이미지는 배후에 수많은 이미지를 거느리고 배후의 이미지들은 전경화된 하나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투사한다. 이미지를 포착한 자만이 이미지를 사유하는 게 아니다. 이미지 역시 포착한 자를 사유한다. 사진 이미지를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렸다면 사진 이미지 역시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서른일곱 살의 건강한 사내 박민우는 새의 이미지에 매혹된 흔한 사진 애호가일 뿐이다. 경찰특공대인 친구의 부탁을 받아 진압 작전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용산의 남일당 건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역사가 용산참사로 기록한 바로 그 현장에서 박민우는 망루를 점거한 철거민과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떠밀리듯 투입된 특공대원들이 불에 타는 광경을 본다. 그가 목격한 건 “허구를 현실로 만들고 현실을 허구로 만든, 그리하여 카메라의 무게와 죄의 무게를 순식간에 등가로 만들어버린 불길”이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이들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마침내 그의 기억이 되었다. 그 기억이 박민우의 사적이고 은밀한 경험으로 남은 까닭은 경찰이 카메라에 저장된 이미지를 삭제해버려서가 아니다. 그가 새의 감각으로 자신이 목격한 것들과 하나가 된 까닭이다. 그가 말하는 새의 감각이란 어머니의 배 속에서 형성된 감각을 뜻한다. “양수의 아늑한 촉감 속에서, 어머니의 움직임이 빚는 율동에 싸여 먼 우주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 몸의 소리를” 들으면서 형성된 순수한 감각. 그가 바라 마지않던 이 감각을 비참하고 끔찍한 순간에 체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이미지,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그가 포착한 이미지는 배후의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서 전방 입소 반대 시위 도중 분신한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이미지를 만난다. 불길 속의 불길. 불길은 영원히 불길하다. 이전의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관심조차 없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죄의 무게로 엄습한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죽은 기억들이 그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순간, 그 역시 불길 속에서 타오른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조우하는 장소는 이처럼 그의 내면이다. 마침내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남일당 건물에 올라 새처럼 자신을 허공에 던져버린다. 그가 새의 감각으로 느낀 건 불길 속에서 죽어가던 이들의 고통일 것이므로. 그는 알았을 것이다. 불타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신 그는 자신이 겪은 일만이 아니라 겪지 못한 일마저 기억으로 남겼다. 새의 시선으로.
손홍규/소설가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 지성사), 『그 남자의 가출』(창비)이 있고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 중앙),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이슬람 정육점』(문학과 지성사), 『서울』(창비), 『파르티잔 극장』(문학동네), 산문집 『다정한 편견』(교유서가),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교유서가)이 있다. 노근리 평화문학상, 백신애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채만식 문학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ㅣ실존적 수치를 감당하는 인간의 품격에 대하여
인간의 기억은 편리하게 각색된다. 인간이 기억으로 남겨두는 것과 망각해버리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이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대체로 뼈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최선인 경우가 있다. 인간은 어떤 믿음을 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를 결정할 때 스스로도 다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계산해서 결정한다. A라는 믿음이 포함된 믿음체계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 A라는 믿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으면 A라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진실을 덮어버리는 데 뛰어난 전문가’인 인간에게 진실에 직면할 것을 주문한다.
주인공 박민우를 만난 정신과 의사의 서술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손목 관절 통증으로부터 시작되어 근육마비에까지 이른 박민우의 상태는 정형외과 영역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카메라에 새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믿는 박민우는 카메라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남일당에 갔다가 자청해서 채증요원이 되는 바람에 용산참사를 직접 현장에서 겪게 되었다. 그러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박민우는 첫 만남에서 이미 정신과 의사에게 “카메라의 무게가 곧 죄의 무게라고 제가 말한다면 선생님의 상상이 완성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박민우는 과거의 분신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나오는 증언자에게 빙의되기도 한다. 그는 그 사건을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남자에 빙의될 정도로 참사의 기억을 내팽개치지 않고 견딘 것이다. 결국 박민우는 새처럼 남일당에서 몸을 던진다. 42층에서 뛰어내린 그는 마치 새가 날았던 것처럼 깨끗한 시신으로, 분신했던 김세진이 신고 싶어 했던 운동화를 신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카메라
박민우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기 전에 이미 카메라에 새의 영혼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새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박민우에게 카메라는 빌려주는 물건이 아니라 생명체였다. 카메라를 빌려주기만 할 수는 없어서 자청해서 채증요원이 되었는데 결국은 참사로 인해 카메라를 빼앗기고 카메라에 담긴 기억을 상실했다. 그는 “카메라를 잃어버렸어, 그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나도 잃어버린 거지”라고 말한다. 기억을 상실당한 박민우는 새의 시선에서의 기억을 잃은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박민우에게 남일당의 불길은 “허구를 현실로 만들고 현실을 허구로 만든, 그리하여 카메라의 무게와 죄의 무게를 순식간에 등가로 만들어버린 불길”이었다. 박민우가 의사와의 대화를 계기로 확인한 희망은 진실이라는 불길을 견디는 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새와 관련해서 의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 몸을 태워 세상을 떠난 젊은 생명을 날개가 달린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시키고 있다’는 해석을 박민우에게 들려주었던 것이다.
진실을 견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민우의 일상적 자아는 진실을 견디기 힘들어하지만, 순수하고 깊은 자아는 진실을 견디고자 한다. 박민우는 순수하고 깊은 자아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난 그를 느낀다. 왜냐하면 나의 나니까. 왜 그가 나타나는 걸까? 나의 나라고 해서 꼭 나타나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를 그리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그를 그리워할까? 그가 새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은 나를 새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새의 시선이 몸에 닿는 것을 느낀다. …… 그가 반가우면서도 두렵다. 왜 두려운가? 새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이다. 새의 시선은 사물과 풍경을 꿰뚫는다. 그 투명한 시선이 나를 환히 드러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정찬 『새의 시선』 중에서 -
나의 나인 ‘그’는 새의 영혼을 가진 순수하고 깊은 자아이다. 새의 투명한 시선은 나를 드러내 두렵게 만든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내 안의 누군가가 만든 상상의 장소”는 이 순수하고 깊은 자아가 만든 상상의 장소, 즉 양심일 것이다. 바로 박민우가 견뎌야 했고 정신과 의사가 두려워하게 된 새의 시선을 의식하는 영역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양심에 해당하는 단어는 “syneidēsis”로 ‘의식’이나 ‘견고한 지식’을 의미했다. 이 개념이 라틴어로는 “conscientia”로 번역되었는데 conscientia는 ‘함께 앎’이라는 뜻이다. 이는 ‘자기 안에 자기 태도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다’, ‘불의와 잘못에 자기가 관련되어 있음을 스스로 안다’는 의미로 연결된다.
일상의 우리는 죄책을 죄책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어려워한다. 그런데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죄책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죄책을 피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가진다면 이는 한계상황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하지 않는 태도이다. 야스퍼스 철학에서는 한계상황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실존이 될 수 없다. 실존은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그 존재방식을 스스로 선택해가는 인간 고유의 특징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야스퍼스 철학에서는 짊어져야 할 죄책을 외면하지 않고 짊어져야만 실존일 수 있다.
“나는 가능실존으로서의 내가 마음 쓰는 나의 순수한 영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오히려 나를 이끌어주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가장 내밀한 감정에서 죄책적인 것을 발견하는 나의 구체적인 양심에로 되돌려진다.”
-야스퍼스, 『철학Ⅱ:실존조명』 중에서 -
어떤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일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수치심을 이길 수 없어 괴로워한다. 야스퍼스는 “일반적인 것 안에 자기를 해소시키고 더 이상 자기로서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은 수치감을 상실하고 있는 데 반하여 자기를 가능실존으로서의 자신과 연결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존재 안에 해소될 수 없는 수치감의 뿌리가 남아 있다.”(『철학Ⅱ:실존조명』)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즉 현존에 그치는 사람들(소설에서 말하는 일상적 자아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지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가능실존으로 사는 사람들(소설에서 말하는 순수하고 깊은 자아를 느끼는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낀다.
실존이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
가능실존이라는 말은 야스퍼스가 고유하게 사용하고 있는 개념으로 ‘실존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야스퍼스에게 인간은 현존이면서 가능실존인데 어떤 인간은 현존에 그치면서 가능실존의 측면을 제거하거나 외면하면서 산다. 현존은 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당장의 의식주의 현실적 여건을 충족시키는 것에 주목하고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존재방식이다. 그러나 실존이 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사람, 즉 가능실존으로서의 측면을 제거하고는 다시 말해 현존에 그치는 자기 자신으로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적 수치심은 사회적, 객관적 공동존재의 영역 안에서 개인이 실존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때에 나타난다.”고 한다. 실존적 수치와 죄책을 짊어지는 방식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길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길을 견디는 존재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지요”라고 말하는 박민우는 실존적 수치심을 느끼고 선택해 견디는 사람이다.
현실의 우리는 시간이 가면 기억도 어디론가 흘러가기를 희망하고, 박민우의 여동생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쓰며 산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기억은 적당히 내려 놓고 잊으며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세상살이라 말하는 현실에서 작가는 우리가 보기 힘든 진실을 드러낸다. 새의 시선을 견디고 의식하며 사는 삶과 새의 시선이 두려워 포기하는 삶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소설 x 인문] 정찬 <새의 시선>
- 지난 글: [소설 x 인문] 김애란 <가리는 손>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단독 저서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공동저서로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상담인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공동번역서로 『철학 2: 실존조명』, 『50인의 철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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