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르물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인물들의 개인적 사연과 인간관계에 충분히 공감하여
건조하고 단순한 액션과 논리에만 매몰되지 않게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와 부패에 대한 분노,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
올바르면서도 호소력 있는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갑자기 세계가 주목을... "이게 머선129"
최근 한국 방송드라마의 세계적 인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첫 반응은 ‘머선129’(‘무슨 일이고?’란 뜻의 유행어)에 가까웠다. 〈킹덤〉(2019)으로 한국 좀비와 갓에 외국 시청자가 놀라워할 때 그랬고 〈오징어 게임〉(2021)의 인기로 세계 핼러윈데이에 초록 트레이닝복이 불티나게 팔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옥〉(2021), 〈지금 우리 학교는〉(2022)이 연이어 인기를 얻으며 이제 그러려니 하게 됐지만,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때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의아함은, 이들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여태껏 계속 이렇게 해왔는데 왜 새삼스럽게 주목받지?’ 쪽에 가깝다.
〈오징어 게임〉굿즈(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온라인 스토어)
늘 이렇게 해왔는데 하필 이 몇몇 작품에서 인기가 터진 것은 우연이라고 치자. 하지만 연이은 작품들이 계속 인기를 끄는 것은 단지 우연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드라마 한류가 20년 이상 지속됐고, 서구와 미국 시장에서 한국의 대중음악과 영화가 인기를 끄는 대대적 도약의 끄트머리에 방송드라마까지 그 흐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대중예술의 여러 분야 중 드라마가 가장 늦게 빛을 본 이유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대중음악의 음반과 쇼 공연, 영화 필름이 해외의 수용자를 만나는 것에 비해 드라마의 해외 진출은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외국 방송사가 한국 드라마를 구입해 송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에서 OTT인 유튜브가 싸이와 방탄소년단 등 케이팝의 미국⸱유럽의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16부작 장편 드라마를 유튜브에 선보이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넷플릭스가 케이드라마 붐을 가능하게 한 것인데, 주로 장편의 영화와 드라마 작품을 북미·유럽·아시아 등 여러 대륙, 여러 나라에 번역까지 해서 제공된다는 점이 주효했다. 넷플릭스 권역에 있는 지역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한국 드라마를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갑자기 희한하게 작품을 잘 만들어서라기보다는, 새로운 매체가 우리 드라마를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알리게 되어서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신데렐라물부터 장르물까지... 저력 쌓아온 한국 드라마
한국 드라마의 해외 진출 역사를 보면, 우리 드라마의 저력이 이런 성과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별은 내 가슴에〉(1997)가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끈 이후, 십수 년 동안 불치병 소재 혹은 신데렐라 서사를 담은 연애물 드라마가 아시아 곳곳에 꾸준히 진출했다. 일본의 중장년 여성들을 매료시킨 〈겨울연가〉 같은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이 나라들이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현대화의 정도가 못 미치는 곳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현대화의 정도에서 크게 격차가 느껴지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드라마를 보면서는 멋지다고 생각은 하지만 완전히 뼛속 깊이 공감하기 힘든 나라의 시청자들이, 미국보다는 덜 현대적이지만 자기네 나라보다는 좀 더 현대적인 우리 드라마에 매력을 느꼈다고 이야기할 만하다.
드라마 〈겨울연가〉 (이미지 출처: KBS 다시보기)
‘드라마 한류’라 불렸던 이 흐름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라마 한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하는 것은 명확해보였지만 몇 가지 우려의 지점을 노출했다. 첫째는 초기의 성공사례를 답습한 엇비슷한 드라마들이 양산되면서 아시아 시청자들도 곧 식상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재벌 후계자와 가난하지만 발랄한 여주인공, 불치병과 출생의 비밀로 점철된 드라마가 언제까지 사랑받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둘째는, 좀 더 근본적으로 이런 부류의 작품으로는 아시아 시장의 벽을 뛰어넘어 미국과 유럽 등 그 외 지역으로까지 진출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런 한계는 단지 해외 진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시청자도 식상하다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치병과 출생의 비밀에 기댄 운명적인 슬픈 사랑 이야기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뻔하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2010년대로 넘어가면서는 신데렐라 서사조차 인기를 잃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가장 잘 구사하는 김은숙 작가조차 201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영혼이 바뀌는 판타지 설정으로 신데렐라 이야기를 지속시켰던 〈시크릿 가든〉(2012)은 성공했지만 뒤이은 〈상속자들〉(2013)이 해외 시장과 달리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실적을 보였고, 3년 공백 이후에 내놓은 〈태양의 후예〉(2016)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아예 포기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미지 출처: SBS 프로그램)
한편 ‘신데렐라’, ‘불치병’, ‘출생의 비밀’의 인기가 꺾이기 시작할 무렵 〈CSI〉, 〈그레이 아나토미〉 등 ‘미드’(미국 드라마) 바람이 불면서 ‘왜 우리는 미드 같은 작품을 못 만드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전문직 소재 드라마, 범죄 추리물 등이 만들어졌지만, 연애와 가족 이야기에서 뱅뱅 돌던 한국 드라마의 오래된 관행이 바뀌는 데에는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의 메디컬 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기, 범죄 추리물은 경찰서에서 연애하기’라는 비아냥이 거셌는데, 이런 문제가 단지 창작자의 문제라고만은 치부할 수 없다. 연애 이야기를 배제한 채 미드처럼 촘촘한 논리로 짜나 가는 드라마가 공중파 방송이 요구하는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데에는 시청자의 취향 변화도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범죄 추리물로 비교적 탄탄하게 만들어진 〈부활〉(2005)은 ‘폐인’이라 불리는 마니아가 있었음에도 낮은 시청률로 끝났고, 몇몇 유명 미드의 국내 공중파 편성이 주말 심야 시간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현상은, 시청자의 취향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주인공 트라우마, 권력 훼방, 초인적 노력... 한국식 장르물의 특성
놀라운 것은, 창작자와 시청자 양쪽이 모두 변화하면서 한국식 장르물 드라마의 주요 경향이 만들어지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인데 법의학을 소재로 한 메디컬 드라마이자 범죄 추리물인 〈싸인〉(2011)에 이르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 문법을 뒤섞은 〈외과의사 봉달희〉와 비지상파(MBC 방송 케이블 채널인 MBC 드라마넷)에서 겨우 시도된 〈별순검〉의 제작연도가 2007년임을 생각하면 정말 빠른 속도의 적응이다. 〈시그널〉(2016)을 거쳐 넷플릭스의 〈킹덤〉(2019)의 히트를 만들어낸 작가 김은희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마 〈시그널〉(이미지 출처: 티빙)
이렇게 2010년대 중반을 계기로 한국 드라마의 주류 경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10년 이상 인기를 끈 신데렐라 이야기가 저물면서 연애물의 인기가 함께 하락했고, 그 자리를 범죄 추리물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한국 범죄 추리물 드라마의 특성도 자리 잡았다. 일찌감치 〈변호사들〉(2005)과 〈부활〉(2005)에서부터 시작된 그 특성이란, 가족의 죽음 등 개인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문제 해결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주인공, 권력형 비리를 소재로 한 사회비판적 내용 등으로 소박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직업적 충실함과 논리의 힘으로만 쿨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지닌 주인공이 인생 전체를 갈아 넣을 듯 사건 해결에 매달린다. 그런데 그 사건의 정점에는 정계⸱재계⸱언론계의 권력자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당한 해결을 방해한다. 그러니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직장은 물론이고 인생과 생명까지 걸어야만 한다. 미드처럼 쿨하려고 해도 도저히 쿨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상실감, 이를 상쇄할 만한 끈적한 인간관계, 상기된 얼굴로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피가 튀고 살이 떨리고, 권력자들과 맞서니 죽음까지 불사한다.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동지가 생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며, 동료들이 하나둘 희생당하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뜨거운 인물들의 이야기다.
역동적인 한국 사회, 눈 높은 시청자와 능력 있는 창작자
한국 드라마의 몇 가지 특성은 해외 수용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 장르물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인물들의 개인적 사연과 인간관계에 충분히 공감하여 건조하고 단순한 액션과 논리에만 매몰되지 않게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와 부패에 대한 분노,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 올바르면서도 호소력 있는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런 특성은, 다른 장르의 드라마에서도 나타났다. 물론 좀비나 귀신, 바이러스 등을 소재로 한 공포물이 안착하는 데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나마 OCN을 필두로 한 비지상파 채널에서 힘겹게 성과를 쌓았다. 사실 TV 기반의 드라마에서 공포물은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영화와 비지상파 등에서 쌓인 성과가 OTT로 옮아가는 순간 〈킹덤〉(2019)이나 〈오징어 게임〉(2021) 같은 세계적 히트작이 탄생했다.
한국 드라마의 이러한 특성은 가족을 비롯하여 여전히 끈끈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데다 식민지와 전쟁, 독재의 시대를 어렵사리 뚫고 나와 민주화된 사회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역사적⸱사회적 상황이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수백 년 전에 시민혁명을 끝낸 미국⸱서구 지역과, 아직도 권위주의와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는 아시아 지역의 중간 즈음에 선 절묘한 위치에서, 이들 시청자 모두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드라마 한류’ 시절의 얄팍한 성과에 매몰되어 애정물만 반복했다면 이런 성과가 가능했을까. 말 많고 까탈스러운 한국 시청자들과 이들의 요구에 부응해 변화를 감행해낸 창작자들이 지금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를 키워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대중예술평론가
1961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저서로는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한국 대중가요사』,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 『마당극 리얼리즘 민족극』, 『이강백 희곡의 세계』,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광화문 연가』, 『노래이야기주머니』,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 『민족 예술 운동의 역사와 이론』, 『서태지와 꽃다지』 등이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드라마 한류’에서 멈췄다면 ‘케이드라마’는 없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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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류’에서 멈췄다면 ‘케이드라마’는 없었다
- K컬처로 인문하기 -
이영미
2022-04-08
한국 드라마의 몇 가지 특성은 해외 수용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 장르물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인물들의 개인적 사연과 인간관계에 충분히 공감하여
건조하고 단순한 액션과 논리에만 매몰되지 않게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와 부패에 대한 분노,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
올바르면서도 호소력 있는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갑자기 세계가 주목을... "이게 머선129"
최근 한국 방송드라마의 세계적 인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첫 반응은 ‘머선129’(‘무슨 일이고?’란 뜻의 유행어)에 가까웠다. 〈킹덤〉(2019)으로 한국 좀비와 갓에 외국 시청자가 놀라워할 때 그랬고 〈오징어 게임〉(2021)의 인기로 세계 핼러윈데이에 초록 트레이닝복이 불티나게 팔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옥〉(2021), 〈지금 우리 학교는〉(2022)이 연이어 인기를 얻으며 이제 그러려니 하게 됐지만,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때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의아함은, 이들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여태껏 계속 이렇게 해왔는데 왜 새삼스럽게 주목받지?’ 쪽에 가깝다.
〈오징어 게임〉굿즈(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온라인 스토어)
늘 이렇게 해왔는데 하필 이 몇몇 작품에서 인기가 터진 것은 우연이라고 치자. 하지만 연이은 작품들이 계속 인기를 끄는 것은 단지 우연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드라마 한류가 20년 이상 지속됐고, 서구와 미국 시장에서 한국의 대중음악과 영화가 인기를 끄는 대대적 도약의 끄트머리에 방송드라마까지 그 흐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대중예술의 여러 분야 중 드라마가 가장 늦게 빛을 본 이유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대중음악의 음반과 쇼 공연, 영화 필름이 해외의 수용자를 만나는 것에 비해 드라마의 해외 진출은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외국 방송사가 한국 드라마를 구입해 송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에서 OTT인 유튜브가 싸이와 방탄소년단 등 케이팝의 미국⸱유럽의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16부작 장편 드라마를 유튜브에 선보이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넷플릭스가 케이드라마 붐을 가능하게 한 것인데, 주로 장편의 영화와 드라마 작품을 북미·유럽·아시아 등 여러 대륙, 여러 나라에 번역까지 해서 제공된다는 점이 주효했다. 넷플릭스 권역에 있는 지역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한국 드라마를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갑자기 희한하게 작품을 잘 만들어서라기보다는, 새로운 매체가 우리 드라마를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알리게 되어서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신데렐라물부터 장르물까지... 저력 쌓아온 한국 드라마
한국 드라마의 해외 진출 역사를 보면, 우리 드라마의 저력이 이런 성과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별은 내 가슴에〉(1997)가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끈 이후, 십수 년 동안 불치병 소재 혹은 신데렐라 서사를 담은 연애물 드라마가 아시아 곳곳에 꾸준히 진출했다. 일본의 중장년 여성들을 매료시킨 〈겨울연가〉 같은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이 나라들이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현대화의 정도가 못 미치는 곳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현대화의 정도에서 크게 격차가 느껴지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드라마를 보면서는 멋지다고 생각은 하지만 완전히 뼛속 깊이 공감하기 힘든 나라의 시청자들이, 미국보다는 덜 현대적이지만 자기네 나라보다는 좀 더 현대적인 우리 드라마에 매력을 느꼈다고 이야기할 만하다.
드라마 〈겨울연가〉 (이미지 출처: KBS 다시보기)
‘드라마 한류’라 불렸던 이 흐름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라마 한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하는 것은 명확해보였지만 몇 가지 우려의 지점을 노출했다. 첫째는 초기의 성공사례를 답습한 엇비슷한 드라마들이 양산되면서 아시아 시청자들도 곧 식상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재벌 후계자와 가난하지만 발랄한 여주인공, 불치병과 출생의 비밀로 점철된 드라마가 언제까지 사랑받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둘째는, 좀 더 근본적으로 이런 부류의 작품으로는 아시아 시장의 벽을 뛰어넘어 미국과 유럽 등 그 외 지역으로까지 진출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런 한계는 단지 해외 진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시청자도 식상하다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치병과 출생의 비밀에 기댄 운명적인 슬픈 사랑 이야기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뻔하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2010년대로 넘어가면서는 신데렐라 서사조차 인기를 잃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가장 잘 구사하는 김은숙 작가조차 201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영혼이 바뀌는 판타지 설정으로 신데렐라 이야기를 지속시켰던 〈시크릿 가든〉(2012)은 성공했지만 뒤이은 〈상속자들〉(2013)이 해외 시장과 달리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실적을 보였고, 3년 공백 이후에 내놓은 〈태양의 후예〉(2016)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아예 포기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미지 출처: SBS 프로그램)
한편 ‘신데렐라’, ‘불치병’, ‘출생의 비밀’의 인기가 꺾이기 시작할 무렵 〈CSI〉, 〈그레이 아나토미〉 등 ‘미드’(미국 드라마) 바람이 불면서 ‘왜 우리는 미드 같은 작품을 못 만드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전문직 소재 드라마, 범죄 추리물 등이 만들어졌지만, 연애와 가족 이야기에서 뱅뱅 돌던 한국 드라마의 오래된 관행이 바뀌는 데에는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의 메디컬 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기, 범죄 추리물은 경찰서에서 연애하기’라는 비아냥이 거셌는데, 이런 문제가 단지 창작자의 문제라고만은 치부할 수 없다. 연애 이야기를 배제한 채 미드처럼 촘촘한 논리로 짜나 가는 드라마가 공중파 방송이 요구하는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데에는 시청자의 취향 변화도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범죄 추리물로 비교적 탄탄하게 만들어진 〈부활〉(2005)은 ‘폐인’이라 불리는 마니아가 있었음에도 낮은 시청률로 끝났고, 몇몇 유명 미드의 국내 공중파 편성이 주말 심야 시간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현상은, 시청자의 취향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주인공 트라우마, 권력 훼방, 초인적 노력... 한국식 장르물의 특성
놀라운 것은, 창작자와 시청자 양쪽이 모두 변화하면서 한국식 장르물 드라마의 주요 경향이 만들어지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인데 법의학을 소재로 한 메디컬 드라마이자 범죄 추리물인 〈싸인〉(2011)에 이르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 문법을 뒤섞은 〈외과의사 봉달희〉와 비지상파(MBC 방송 케이블 채널인 MBC 드라마넷)에서 겨우 시도된 〈별순검〉의 제작연도가 2007년임을 생각하면 정말 빠른 속도의 적응이다. 〈시그널〉(2016)을 거쳐 넷플릭스의 〈킹덤〉(2019)의 히트를 만들어낸 작가 김은희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마 〈시그널〉(이미지 출처: 티빙)
이렇게 2010년대 중반을 계기로 한국 드라마의 주류 경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10년 이상 인기를 끈 신데렐라 이야기가 저물면서 연애물의 인기가 함께 하락했고, 그 자리를 범죄 추리물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한국 범죄 추리물 드라마의 특성도 자리 잡았다. 일찌감치 〈변호사들〉(2005)과 〈부활〉(2005)에서부터 시작된 그 특성이란, 가족의 죽음 등 개인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문제 해결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주인공, 권력형 비리를 소재로 한 사회비판적 내용 등으로 소박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직업적 충실함과 논리의 힘으로만 쿨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지닌 주인공이 인생 전체를 갈아 넣을 듯 사건 해결에 매달린다. 그런데 그 사건의 정점에는 정계⸱재계⸱언론계의 권력자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당한 해결을 방해한다. 그러니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직장은 물론이고 인생과 생명까지 걸어야만 한다. 미드처럼 쿨하려고 해도 도저히 쿨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상실감, 이를 상쇄할 만한 끈적한 인간관계, 상기된 얼굴로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피가 튀고 살이 떨리고, 권력자들과 맞서니 죽음까지 불사한다.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동지가 생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며, 동료들이 하나둘 희생당하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뜨거운 인물들의 이야기다.
역동적인 한국 사회, 눈 높은 시청자와 능력 있는 창작자
한국 드라마의 몇 가지 특성은 해외 수용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 장르물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인물들의 개인적 사연과 인간관계에 충분히 공감하여 건조하고 단순한 액션과 논리에만 매몰되지 않게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와 부패에 대한 분노,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 올바르면서도 호소력 있는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런 특성은, 다른 장르의 드라마에서도 나타났다. 물론 좀비나 귀신, 바이러스 등을 소재로 한 공포물이 안착하는 데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나마 OCN을 필두로 한 비지상파 채널에서 힘겹게 성과를 쌓았다. 사실 TV 기반의 드라마에서 공포물은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영화와 비지상파 등에서 쌓인 성과가 OTT로 옮아가는 순간 〈킹덤〉(2019)이나 〈오징어 게임〉(2021) 같은 세계적 히트작이 탄생했다.
한국 드라마의 이러한 특성은 가족을 비롯하여 여전히 끈끈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데다 식민지와 전쟁, 독재의 시대를 어렵사리 뚫고 나와 민주화된 사회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역사적⸱사회적 상황이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수백 년 전에 시민혁명을 끝낸 미국⸱서구 지역과, 아직도 권위주의와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는 아시아 지역의 중간 즈음에 선 절묘한 위치에서, 이들 시청자 모두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드라마 한류’ 시절의 얄팍한 성과에 매몰되어 애정물만 반복했다면 이런 성과가 가능했을까. 말 많고 까탈스러운 한국 시청자들과 이들의 요구에 부응해 변화를 감행해낸 창작자들이 지금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를 키워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K컬처로 인문하기] ‘드라마 한류’에서 멈췄다면 ‘케이드라마’는 없었다
- 지난 글: [K컬처로 인문하기] ‘가상세계’,‘실감 콘텐츠’ 시대… 그럼에도 기술보다 스토리!
대중예술평론가
1961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저서로는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한국 대중가요사』,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 『마당극 리얼리즘 민족극』, 『이강백 희곡의 세계』,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광화문 연가』, 『노래이야기주머니』,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 『민족 예술 운동의 역사와 이론』, 『서태지와 꽃다지』 등이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드라마 한류’에서 멈췄다면 ‘케이드라마’는 없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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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세계’, ‘실감 콘텐츠’ 시대… 그럼에도 기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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