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경제학자 야노쉬 코르나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체제에 대체로 불만을 가지면서도 봉기에 나서지 않는 까닭을
‘봉기했으나 실패했을 경우, 또는 성공하더라도 겪어야만 할 고통 등의 리스크를 고려하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개인이 다만 개인으로서만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크발 마시흐나 김주열의 죽음도 단지 개인의 불행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정의는 교과서에만 나오는 단어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린다면 민중이 떨쳐 일어나는 일은 없다.
ㅣ봄은 고통스럽게 생명을 소환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어버린 땅에서 라일락이 자라도록 한다.
4월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면 으레 읊게 마련인,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의 『황무지』 의 첫 구절이다. 엘리어트는 4월이야말로 봄이며,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의 시작이라고, 그런데 생명이란 본래 잔인한 것, 욕망하고, 의심하고, 좌절하고, 고통받는 것. 어찌 보면 죽음이야말로 안식이기에, 영원히 죽어버린 땅에서 다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4월의 봄날이야말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4월, 영어 April도 ‘소생’을 의미한다. 열다(open)와 April은 모두 라틴어 aperire(열다)에서 왔다. 죽음에서 삶으로, 고요함에서 부산함으로, 고정된 것에서 역동적인 것으로 열리고, 바뀌며, 솟아오른다. 그래서인지, 역사 속의 4월에는 봉기와 저항, 해방과 혁명이 많았다. 그에 따른 탄압과 학살, 수많은 피와 눈물과 고통도 따랐다. 이 글을 본래 하나의 달에 벌어진 사건에만 국한해 써나가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4월의 사건들만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만으로도 넘치니까 말이다.
ㅣ4월의 세계사, 민중은 이렇게 일어섰고 쓰러졌다
국가는 전쟁을 불러일으켜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스스로 국민들의 피를 흘리게도 한다. 그런 쪽으로만 발달된 국가를 불량국가(rogue state)라고, 그런 국가의 정치를 폭정(tyranny)이라고 한다. 자신들을 보호하라고 만든 국가가 자신들의 적이 될 때, 민중은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러면 그들에 맞선 국가가 다시 피바람을 일으켰다.
1712년 4월 7일, 영국 식민지 시대의 뉴욕에서 27명의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백인 아홉 명이 죽자, 주 민병대가 출동해 그들을 진압했다. 21명의 흑인 노예들이 처형당했고, 6명은 잡히기 전에 자결했다.
1712년 뉴욕 노예 반란(이미지 출처: Wikipedia)
1775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독립을 외치던 식민지 군과 영국군 사이에 첫 충돌이 발생했다. 발포 지시 없이 영국군 한 명이 발포하자, 이 ‘세계를 뒤흔든 총성’은 양측의 접전으로,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1915년 4월 24일,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5월로 넘어가면서 터키군의 손에 죽어 나가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숫자는 만 단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은 19세기부터 있어 왔으나 청년 투르크당이 세운 정부에서 자행한 학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최소 80만, 최대 2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 학살’이 일어났다. 인도 독립을 주장했다고 해서 인도 의회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시크교의 성도인 암리차르에서 이에 항의하는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영국군은 그들에게 발포, 379명이 죽고 1,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4월 20일, ‘러드로우 학살’이 일어났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러드로우에서 파업을 벌이고 있던 탄광 노동자들을 록펠러 계열 업주의 뒷돈을 받은 주방위군이 무력 진압했다. 노동자 6명이 방위군의 기관총에 맞아 죽고, 노동자 캠프가 불타면서 11명의 어린이와 두 명의 여성이 숨졌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꼽힌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중,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를 돕던 독일군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공격했다. 3시간 동안의 무차별 폭격과 도망치는 사람들에 대한 기총소사로 1,654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이를 주제로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기억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게르니카(Guernica)〉(이미지 출처: Wikipedia)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일어났다. 짐승처럼 취급되고, 끝내 가스실로 끌려가고 있던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거주구역)의 유대인들은 죽기 살기로 봉기에 나섰다. 게토의 독일군은 유대인의 수가 너무 많다 싶자 화염방사기를 꺼내들었다. 7천 명 정도의 유대인이 총에 맞거나 불에 타 죽었고, 그 정도 수의 유대인이 봉기가 진압된 후 처형당했다.
1992년 4월 29일, ‘LA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지역 경찰관들이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했는데, 그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격분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습격, 약탈, 방화, 살인. 모두 58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의 대통령들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된 것을 계기로, 후투족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는 투치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1백 일 동안 1백만 명 이상이 살해되고, 2백만 명이 나라를 떠나 난민이 되었다.
1995년 4월 16일, 이크발 마시흐가 죽었다. 파키스탄 소년인 그는 네 살 때부터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열 살이 될 때까지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사슬에 묶인 채 수출용 카펫을 짜야만 했다. 기회를 보아 도망친 그는 파키스탄에 만연한 아동 노동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스웨덴에서 열리고 있던 국제노동기구 대회에 참석, 경악스러운 진실을 전했다. 그러나 1년 뒤, 파키스탄에 돌아가 있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11세였다.
아동인권 운동가 이크발 마시흐(Iqbal Masih)(이미지 출처: Wikipedia)
ㅣ한반도의 4월, 피맺힌 기억
이 모든 사건들을 잘 모르더라도, 우리 한국인들은 기억하는, 기억해야 하는 4월의 피맺힌 날들이 있다. 4월 26일, 4월 3일, 그리고 4월 19일이다.
1894년 4월 26일, 제2차 동학 농민봉기가 일어난 날이다. 전라북도 부안의 백산성에 모여든 동학도들은 정부에서 보낸 안핵사(按覈使, 조선 후기 조정에서 지방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처리하려고 파견한 관리)가 그들을 ‘비적’으로 몰며 쥐 잡듯 하려는 데 분노하고, 부패한 관리들의 타도와 외국 침략자들의 축출을 결의했다. 날이 갈수록 집회의 열기와 숫자는 더해져, 백산 전체가 동학교도와 그에 동조하는 농민들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그들은 전주성으로 진군, 정부 토벌군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이미지 출처: 월간 독립기념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1947년 초부터 빚어져온 경찰과 시민의 갈등이 마침내 대규모 무력 충돌로 불거졌다. 좌익계가 관공서와 우익계를 먼저 습격했고,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8월에 총선이 실시되고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중시하고, ‘공산당과 그 동조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하고, 처단하라. 필요하다면 제주도민 전부를 죽여도 좋다’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군대와 우익 청년단은 한라산 자락에 거주하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공비로 간주해 사살한다고 선언했고, 그 선언이 충분히 알려지기도 전에 마을을 습격하여 죽이고 또 죽였다. 마지막 국면에는 한라산에 깊숙이 숨어 있던 좌익 무장대원과 양민들에게 ‘산을 내려오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회유하고, 그 말을 믿고 내려온 사람들의 무장을 해제한 뒤 총살했다. 그나마 즉결 처분되지 않고 형무소에 갇혀 있던 ‘반란 관계자들’은 6.25가 터지자 집단학살을 당했다. 2만 5천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4.3사건: 산으로 간 주민들(이미지 출처: 제주4·3평화재단)
4.3으로 시작된 이승만 정권은 4.19로 끝났다. 부패와 민주헌정 유린, 경제난으로 국민들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때, 3.15 부정선거가 치러져서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으로 선언되자 전국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그중에는 남원 출신으로 마산에서 공부하고 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도 있었다. 4월 11일, 그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끔찍한 상태였다. 터지기 직전의 민심에 마침내 불을 질렀고,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와 폭력 진압, 4월 19일 수만 명 시위대의 경무대 앞 집결, ‘독재 타도!’의 외침과 경찰의 실탄 진압, 그리고 수없이 많은 피가 흐른 뒤에 대통령 하야로 이어지게 된다.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ㅣ삶은 계속된다, 고통을 각오하고
미국 정치학자 테드 거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민중 봉기와 혁명의 원인을 찾는다. 국민의 기대감에 비해 정부의 해결 능력이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퇴보할 때, 국민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박탈감이 국민 사이에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다면? 공유되었더라도 체제의 막강한 물리력 앞에 나서기를 주저한다면?
헝가리 경제학자 야노쉬 코르나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체제에 대체로 불만을 가지면서도 봉기에 나서지 않는 까닭을 ‘봉기했으나 실패했을 경우, 또는 성공하더라도 겪어야만 할 고통 등의 리스크를 고려하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개인이 다만 개인으로서만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크발 마시흐나 김주열의 죽음도 단지 개인의 불행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정의는 교과서에만 나오는 단어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린다면 민중이 떨쳐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수없이 많은 4월의 역사가 적어도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가르쳐준다. 물론 더 무지막지한 폭력에 짓눌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흘린 피는 분노와 원한을 계속해서 외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게끔 했다.
시민들의 저항에 권력을 내놓고 해외로 도피한 여러나라 지도자들
(왼쪽부터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부추와 머리털은 아무리 잘라도 또 자란다네.
수탉과 지도자는 아무리 목을 잘라도 또 나타나 때를 알린다네.
관리 따위를 겁내지 말자.
우리 민초들은 살아 있다네!
3세기 초, 후한 말기에, 썩어빠진 조정에 반기를 들고 곳곳에서 일어났던 민중들이 불렀다는 노래다. 그렇다. 죽은 것 같지만, 순종적인 것 같지만 국민은 반드시 일어선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렇게 부추는 새파랗게 자라고, 얼어붙은 땅에서 라일락꽃은 핀다.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4월 : 봉기, 학살, 혁명... 피맺힌 함성이 역사를 바꾼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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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봉기, 학살, 혁명... 피맺힌 함성이 역사를 바꾼다
- 열두 달로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 -
함규진
2022-04-19
헝가리 경제학자 야노쉬 코르나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체제에 대체로 불만을 가지면서도 봉기에 나서지 않는 까닭을
‘봉기했으나 실패했을 경우, 또는 성공하더라도 겪어야만 할 고통 등의 리스크를 고려하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개인이 다만 개인으로서만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크발 마시흐나 김주열의 죽음도 단지 개인의 불행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정의는 교과서에만 나오는 단어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린다면 민중이 떨쳐 일어나는 일은 없다.
ㅣ봄은 고통스럽게 생명을 소환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어버린 땅에서 라일락이 자라도록 한다.
4월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면 으레 읊게 마련인,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의 『황무지』 의 첫 구절이다. 엘리어트는 4월이야말로 봄이며,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의 시작이라고, 그런데 생명이란 본래 잔인한 것, 욕망하고, 의심하고, 좌절하고, 고통받는 것. 어찌 보면 죽음이야말로 안식이기에, 영원히 죽어버린 땅에서 다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4월의 봄날이야말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4월, 영어 April도 ‘소생’을 의미한다. 열다(open)와 April은 모두 라틴어 aperire(열다)에서 왔다. 죽음에서 삶으로, 고요함에서 부산함으로, 고정된 것에서 역동적인 것으로 열리고, 바뀌며, 솟아오른다. 그래서인지, 역사 속의 4월에는 봉기와 저항, 해방과 혁명이 많았다. 그에 따른 탄압과 학살, 수많은 피와 눈물과 고통도 따랐다. 이 글을 본래 하나의 달에 벌어진 사건에만 국한해 써나가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4월의 사건들만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만으로도 넘치니까 말이다.
ㅣ4월의 세계사, 민중은 이렇게 일어섰고 쓰러졌다
국가는 전쟁을 불러일으켜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스스로 국민들의 피를 흘리게도 한다. 그런 쪽으로만 발달된 국가를 불량국가(rogue state)라고, 그런 국가의 정치를 폭정(tyranny)이라고 한다. 자신들을 보호하라고 만든 국가가 자신들의 적이 될 때, 민중은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러면 그들에 맞선 국가가 다시 피바람을 일으켰다.
1712년 4월 7일, 영국 식민지 시대의 뉴욕에서 27명의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백인 아홉 명이 죽자, 주 민병대가 출동해 그들을 진압했다. 21명의 흑인 노예들이 처형당했고, 6명은 잡히기 전에 자결했다.
1712년 뉴욕 노예 반란(이미지 출처: Wikipedia)
1775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독립을 외치던 식민지 군과 영국군 사이에 첫 충돌이 발생했다. 발포 지시 없이 영국군 한 명이 발포하자, 이 ‘세계를 뒤흔든 총성’은 양측의 접전으로,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1915년 4월 24일,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5월로 넘어가면서 터키군의 손에 죽어 나가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숫자는 만 단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은 19세기부터 있어 왔으나 청년 투르크당이 세운 정부에서 자행한 학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최소 80만, 최대 2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 학살’이 일어났다. 인도 독립을 주장했다고 해서 인도 의회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시크교의 성도인 암리차르에서 이에 항의하는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영국군은 그들에게 발포, 379명이 죽고 1,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4월 20일, ‘러드로우 학살’이 일어났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러드로우에서 파업을 벌이고 있던 탄광 노동자들을 록펠러 계열 업주의 뒷돈을 받은 주방위군이 무력 진압했다. 노동자 6명이 방위군의 기관총에 맞아 죽고, 노동자 캠프가 불타면서 11명의 어린이와 두 명의 여성이 숨졌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꼽힌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중,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를 돕던 독일군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공격했다. 3시간 동안의 무차별 폭격과 도망치는 사람들에 대한 기총소사로 1,654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이를 주제로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기억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게르니카(Guernica)〉(이미지 출처: Wikipedia)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일어났다. 짐승처럼 취급되고, 끝내 가스실로 끌려가고 있던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거주구역)의 유대인들은 죽기 살기로 봉기에 나섰다. 게토의 독일군은 유대인의 수가 너무 많다 싶자 화염방사기를 꺼내들었다. 7천 명 정도의 유대인이 총에 맞거나 불에 타 죽었고, 그 정도 수의 유대인이 봉기가 진압된 후 처형당했다.
1992년 4월 29일, ‘LA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지역 경찰관들이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했는데, 그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격분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습격, 약탈, 방화, 살인. 모두 58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의 대통령들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된 것을 계기로, 후투족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는 투치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1백 일 동안 1백만 명 이상이 살해되고, 2백만 명이 나라를 떠나 난민이 되었다.
1995년 4월 16일, 이크발 마시흐가 죽었다. 파키스탄 소년인 그는 네 살 때부터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열 살이 될 때까지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사슬에 묶인 채 수출용 카펫을 짜야만 했다. 기회를 보아 도망친 그는 파키스탄에 만연한 아동 노동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스웨덴에서 열리고 있던 국제노동기구 대회에 참석, 경악스러운 진실을 전했다. 그러나 1년 뒤, 파키스탄에 돌아가 있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11세였다.
아동인권 운동가 이크발 마시흐(Iqbal Masih)(이미지 출처: Wikipedia)
ㅣ한반도의 4월, 피맺힌 기억
이 모든 사건들을 잘 모르더라도, 우리 한국인들은 기억하는, 기억해야 하는 4월의 피맺힌 날들이 있다. 4월 26일, 4월 3일, 그리고 4월 19일이다.
1894년 4월 26일, 제2차 동학 농민봉기가 일어난 날이다. 전라북도 부안의 백산성에 모여든 동학도들은 정부에서 보낸 안핵사(按覈使, 조선 후기 조정에서 지방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처리하려고 파견한 관리)가 그들을 ‘비적’으로 몰며 쥐 잡듯 하려는 데 분노하고, 부패한 관리들의 타도와 외국 침략자들의 축출을 결의했다. 날이 갈수록 집회의 열기와 숫자는 더해져, 백산 전체가 동학교도와 그에 동조하는 농민들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그들은 전주성으로 진군, 정부 토벌군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이미지 출처: 월간 독립기념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1947년 초부터 빚어져온 경찰과 시민의 갈등이 마침내 대규모 무력 충돌로 불거졌다. 좌익계가 관공서와 우익계를 먼저 습격했고,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8월에 총선이 실시되고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중시하고, ‘공산당과 그 동조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하고, 처단하라. 필요하다면 제주도민 전부를 죽여도 좋다’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군대와 우익 청년단은 한라산 자락에 거주하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공비로 간주해 사살한다고 선언했고, 그 선언이 충분히 알려지기도 전에 마을을 습격하여 죽이고 또 죽였다. 마지막 국면에는 한라산에 깊숙이 숨어 있던 좌익 무장대원과 양민들에게 ‘산을 내려오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회유하고, 그 말을 믿고 내려온 사람들의 무장을 해제한 뒤 총살했다. 그나마 즉결 처분되지 않고 형무소에 갇혀 있던 ‘반란 관계자들’은 6.25가 터지자 집단학살을 당했다. 2만 5천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4.3사건: 산으로 간 주민들(이미지 출처: 제주4·3평화재단)
4.3으로 시작된 이승만 정권은 4.19로 끝났다. 부패와 민주헌정 유린, 경제난으로 국민들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때, 3.15 부정선거가 치러져서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으로 선언되자 전국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그중에는 남원 출신으로 마산에서 공부하고 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도 있었다. 4월 11일, 그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끔찍한 상태였다. 터지기 직전의 민심에 마침내 불을 질렀고,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와 폭력 진압, 4월 19일 수만 명 시위대의 경무대 앞 집결, ‘독재 타도!’의 외침과 경찰의 실탄 진압, 그리고 수없이 많은 피가 흐른 뒤에 대통령 하야로 이어지게 된다.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ㅣ삶은 계속된다, 고통을 각오하고
미국 정치학자 테드 거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민중 봉기와 혁명의 원인을 찾는다. 국민의 기대감에 비해 정부의 해결 능력이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퇴보할 때, 국민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박탈감이 국민 사이에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다면? 공유되었더라도 체제의 막강한 물리력 앞에 나서기를 주저한다면?
헝가리 경제학자 야노쉬 코르나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체제에 대체로 불만을 가지면서도 봉기에 나서지 않는 까닭을 ‘봉기했으나 실패했을 경우, 또는 성공하더라도 겪어야만 할 고통 등의 리스크를 고려하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개인이 다만 개인으로서만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크발 마시흐나 김주열의 죽음도 단지 개인의 불행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정의는 교과서에만 나오는 단어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린다면 민중이 떨쳐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수없이 많은 4월의 역사가 적어도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가르쳐준다. 물론 더 무지막지한 폭력에 짓눌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흘린 피는 분노와 원한을 계속해서 외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게끔 했다.
시민들의 저항에 권력을 내놓고 해외로 도피한 여러나라 지도자들
(왼쪽부터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부추와 머리털은 아무리 잘라도 또 자란다네.
수탉과 지도자는 아무리 목을 잘라도 또 나타나 때를 알린다네.
관리 따위를 겁내지 말자.
우리 민초들은 살아 있다네!
3세기 초, 후한 말기에, 썩어빠진 조정에 반기를 들고 곳곳에서 일어났던 민중들이 불렀다는 노래다. 그렇다. 죽은 것 같지만, 순종적인 것 같지만 국민은 반드시 일어선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렇게 부추는 새파랗게 자라고, 얼어붙은 땅에서 라일락꽃은 핀다.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4월 : 봉기, 학살, 혁명... 피맺힌 함성이 역사를 바꾼다
- 지난 글: 3월 : 전쟁이 시작되는, 그래서 평화가 절실한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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