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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게으른 삶이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네”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강선형

2022-02-16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떤 중요한 순간들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그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지 않는가?

모든 휘몰아치는 열망들이 한풀 꺾이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순간들이 지나고 난 후에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과거 존재에게 아무리 우리가 지금 알게 된 것을 전하려고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삶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하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러한 질문들이 아마도 수많은 타임 슬립(time slip: 인과관계 혹은 개연성을 무시한 시간 이동) 설정의 영화를 낳았을 것이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금은 알게 된 행복을 과거로 가서 되찾을 수 있을까?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타임 슬립 설정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 여행 영화들은 잘 알려주지 않는, 과거 여행의 무용함에 관한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 1970~)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신의 손(È stata la mano di Dio)〉에는, 나폴리에 영화를 찍으러 온 카푸아노라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찍고 싶다는 파비에토라는 주인공 소년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파비에토라는 소년이 오래전 나폴리에서 살았던 시절의 소렌티노 감독이라면, 조언처럼 들리는 것 같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는 말들을 소년에게 마구 쏟아내는 카푸아노는 지금의 소렌티노 감독처럼 보인다. 

 

파비에토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묻는 카푸아노에게 “전부 다요!”라고 답한다. 파비에토에게 카푸아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카푸아노는 다시 파비에토에게 “넌 자유로워?” 묻고, 파비에토는 “더 살아보고 답할게요.”라고 답한다. 파비에토는 카푸아노의 질문들에 대해 ‘더 살아보고 나서만’ 답할 수 있다. 카푸아노가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를 해주더라도 말이다. 카푸아노는 파비에토에게 묻는다. “용기는 있어?” 파비에토는 다시 되묻는다. “좀 쉬운 질문은 없나요?”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좌)의 영화 〈신의 손〉 홍보 포스터(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네이버 영화)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좌)의 영화 〈신의 손〉 홍보 포스터(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네이버 영화)

 

소년의 삶을 뒤흔든 부모님의 죽음

나폴리에 살고 있는 파비에토는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들 앞에서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가족들이 있었다. 장난을 너무 좋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형, 늘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누나. 이들이 사랑스러운 것은 모두가 현명하고 조화롭고 행복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는 비밀들과 좌절들, 상처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낙천적으로 때로는 속상함을 분출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을 사랑스럽게 만든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친척들, 이웃들, 각각의 이야기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나폴리’라는 도시는 이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 시절 SSC 나폴리(이탈리아 프로축구팀)로 기적처럼 이적해온 ‘신의 손’, 마라도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숱한 위기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지나오던 파비에토에게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이 닥친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이 소식은 부모님들이 자주 하던 짓궂은 장난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파비에토는 죽은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의사는 큰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이 사건이 파비에토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은 실제로 파비에토처럼 열일곱의 나이에 가스 누출 사고로 부모님이 사망하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늘 이 사건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나폴리로 이적해온 마라도나의 경기를 보느라 집에 머물지 않아서 죽음을 비껴갈 수 있었고, 파비에토 역시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

 

 

영화 〈신의 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신의 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완전히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삶을 담은 이 영화에서, 나폴리에 영화를 찍으러 온 극중 영화감독인 카푸아노가 비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소렌티노 감독이 소년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로 보인다. 우연한 만남에서 카푸아노는 파비에토에게 수많은 말들을 쏟아놓는다.

 

“넌 고통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있어. 희망을 품으면 위로의 영화를 만드는데, 그건 함정이야.”

“고통을 잊고 재미를 생각해. 영화는 그렇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메시지가 있어야 해.”

“결국 넌 너 자신으로, 패배자로 돌아오게 될 거야.”

 

 

아이에게 가닿지 못하는 어른의 깨달음

카푸아노는 로마로 떠나겠다는 파비에토에게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지 알아? 어떻게 이 도시에서 영감을 받지 못할 수 있지?”라고 묻는다. 아마도 소렌티노 감독이 자신의 인생에서 첫 선택을 했을 때, 그러니까 영화를 하기 위해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갔던 그 때의 자신을 만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카푸아노는 정말로 들려줄 이야기가 있느냐고 소리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 카푸아노는 파비에토에게 그것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카푸아노에게 파비에토는 답한다. 이해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지만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 돌이키려 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장면, 의사가 죽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끔찍하다는 이유로 보여주지 않았던 그 장면을. 파비에토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카푸아노는 “평정심을 잃지 마, 파비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파비에토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카푸아노는 답한다. “너 스스로 알아내.” 파비에토는 스스로 알아내야만 한다. 더 살아보고 나서만 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카푸아노는 “그들은 널 혼자 두지 않았으니까”라고 덧붙이지만, 소렌티노 감독이 오랜 세월 삶을 견뎌내고 얻은 그 깨달음은 어린 파비에토에게 가닿지 못한다. 미지의 언어로 흩어질 뿐이다.

 

 

영화 〈신의 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신의 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극중 카푸아노 감독이 미지의 언어들을 남기고 물속으로 뛰어든 이후, 파비에토는 로마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로마로 가지 말라는 카푸아노의 말은 그렇게 공중으로 흩어진다. 파비에토는 스스로 선택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더 살아보고 나서야 얻게 될’ 답들을 스스로 얻어갈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형처럼, 화장실에 늘 숨어 있는 누나처럼 될 수 없기 때문에 떠나야 했던 파비에토는 낯선 도시 로마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고아로 만들어 버리고 지독한 고독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만큼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고아가 되자 그 어느 것도 시도할 수 있는 무모함을 갖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히던 소렌티노 감독처럼 말이다.

 

 

너무 늦게 찾아오는 배움, 그래서 전할 수 없는

우리 역시 카푸아노처럼 과거의 존재를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아마도 너무 많지 않을까? ‘살아보니까 삶이라는 것은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 ‘그때 그런 선택은 하지 말았어야 해.’ 등등. 그렇지만 무수한 말들이 우리의 과거 존재에게 가닿는다고 해도, 그는 왜 우리가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정말로 다른 선택을 할까? 우리 역시 파비에토처럼 결국 기차에 몸을 싣지 않을까?

 

파비에토가 꼭 지금의 소렌티노만큼 살아야만 그 말들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처럼, 우리는 꼭 지금의 우리만큼 살고 난 다음에만, 가르침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그렇게 시차를 가진 후에야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카푸아노는 마치 파비에토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로마로 떠나게 될 것을 이미 아는 것처럼 말한다. “날 보러 와. 난 항상 여기 있어. 같이 영화를 만들자.” 삶을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꼭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좌)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마르셀 프루스트(좌)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러한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배움을 사랑으로 표현한 바 있다. 사랑에 빠진 자는 늘 애인의 거짓말에 감추어진 진실을 그 진실에 무관심해진 뒤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가 사랑하기를 그칠 때, 즉 사랑에 빠질 욕망도 시간도 나이도 모두 고갈되었을 때, 오로지 그때에만 그는 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떤 중요한 순간들이 지난 다음에야 그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지 않는가? 모든 휘몰아치는 열망들이 한풀 꺾이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순간들이 지나고 난 후에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과거 존재에게 아무리 우리가 지금 알게 된 것을 전하려고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파비에토에게 전하는 카푸아노의 말들처럼 말이다.

 

 

흘려버린 시간들과 진정한 삶의 의미

그렇다면 전달되지 않는 가르침들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고전들로부터, 역사로부터, 또 옛 어른들의 지혜로부터 배우는 것들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가?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깊이 있고 지적인 사람이 하는 말은, 그것이 지닌 분명한 내용과 명확하고 객관적이고 잘 다듬어진 의미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다른 길들을 통해서 다른 진리들에 이를 수 없었다면, 우리는 지성의 진리로부터 추상적인 가능성 이외에 별로 많은 것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수한 경험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삶의 진리들이, 고전과, 역사와, 그리고 과거의 지혜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파비에토는 분명 영화감독의 말들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며, 언젠가 꼭 그가 그렇게 자신에게 말한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종국에는 배움의 길 위에 다시 서게 된다.

 

 

오래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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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가 다시 배움의 길 위에 서게 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순간들이 갖는 의미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헛되이 보내버린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 제목이 ‘되찾은 시간’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헛되이 흘려버린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는 것, 즉 우리가 종국에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수한 삶의 순간들은 흩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고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사실 우리에게 모든 배움의 순간들로 집적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난 삶의 모든 순간들은 우리는 알 수 없던 그 시간에도 배움의 단계들을 이룬다.

 

 

우리는 모두 배움의 시간을 살고 있어

파비에토는 결국 소년 시절의 소렌티노 감독처럼 로마행 기차에 오르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카푸아노가 해줬던 말들을 언젠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보낸 자신의 삶을, 어머니, 아버지, 이모, 형 그리고 누나의 삶까지 이해하게 될 정도로 시간과 경험들을 축적해갈 것이다. 카푸아노가 말했던 것처럼 나폴리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모든 것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날 보러 와. 난 항상 여기 있어. 같이 영화를 만들자.”


 

영화 〈신의 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신의 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진리는 항상 시간의 진리이다. 우리는 모두 배움의 시간을 살고 있으며, 언젠가 모든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게 될 것이다. 소렌티노가 〈신의 손〉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나폴리에서의 모든 시간들을 되찾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모든 삶들이 배움의 단계들이라는 것, 그보다 중요한 삶의 위로가 또 있을까. 프루스트와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 또는 ‘내 전 생애가 …… 하나의 천직’이라는 것 말이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영화와 드라마(웹툰, 만화 등 포함)는 내 일도 아닌데 마치 내 일처럼 함께 웃고 울고 한숨쉬고 기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을 가진 대중문화콘텐츠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대리만족을 통해 잠시 재밌고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도록 하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일까.  평소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영화(드라마) 속에 숨겨져 있어 미처 눈치채기 힘들었던 세상과 인생에 관한 질문, 이들을 낳은 시대적 상황,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해당 작품을 흥미롭게 살펴본 철학자들을 통해 알아보자.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네”

- 지난 글: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문화 다양성 시대 ‘공감적 소통’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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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 작가 사진
강선형

연구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 철학에서 시간의 종합과 영화>로 석사 학위를, <들뢰즈와 칸트: 들뢰즈 철학의 형성에서 칸트 삼비판서의 역할>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국민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원, 한국프랑스철학회 총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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