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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멸하는 언어들을 위한 진혼곡

- 철학자, 드라마(영화)에 빠지다 -

양세욱

2021-12-22

자연 생태계에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지만, 언어 생태계에서는 최초의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지구 생태계의 대멸종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언어 생태계의 대멸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많은 언어가 있는 것은 낭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도대체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언어의 사멸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독일 출신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itin Heidegger, 1889~1976)가 「휴머니즘 서간」(1949)에서 한 이 말만큼 언어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 널리 인용되는 표현은 드물다.

 

언어는 망치 같은 도구도, 숫자 같은 기호도 아니다. 인간은 언어로 지은 집에 살고 언어는 존재가 깃드는 거처이므로, 언어 없는 인간 존재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 역은 어떨까? 인간 없는 언어는 가능할까? 언어 없는 인간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인간 없는 언어는 불가능하다.

 

인간 없는 언어들, 죽었거나 죽어가는 언어들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다. 언어 생태계의 급변속에서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미주를 중심으로 도처에서 ‘언어 죽음’은 일상화되고, ‘언어 다양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좌)와 『이정표2』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교보문고)

마르틴 하이데거(좌)와 『이정표2』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교보문고)

 

 

사멸하는 언어를 찾아서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2017년. 국내 개봉은 2019년)는 멕시코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토착 언어인 시크릴어를 쓰는 마지막 생존자들을 그린 영화이다. 멕시코 감독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Ernesto Contreras, 1969~)는 대자연을 담은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사멸하는 언어에 대한 깊은 언어철학 내지 생태언어학의 통찰을 이 영화에 담고 있다.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산이시드로 산악지대에는 밀림 속 ‘만물의 공용어’로 불리는 시크릴어를 구사하는 노인 세 명이 생존하고 있다. 어린 시절 절친이었으나 삼각관계 때문에 갈등을 겪은 뒤로 말을 섞지 않은 지 50년이 넘는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 그리고 마을의 최고령 할머니 하신타가 이들이다. 젊은 언어학자 마르틴이 사멸되어가는 시크릴어를 기록하고 보존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마을을 방문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사우로와 하신타의 적극적인 협조에도 현장 조사는 순탄치 않다. 에바리스토의 거부 때문이다. 방문 첫날 하신타마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뜨는데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 에바리스토의 손녀 루비아와 연인 관계가 된 마르틴은 마지막 두 생존자를 화해시키기 위해 애쓴다. 루비아의 조언대로 선물한 최신 텔레비전을 계기로 간신히 둘의 화해가 성사되고 녹음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지만,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둘의 관계는 다시 파탄을 맞는다. 그리고 과거가 전모를 드러낸다.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두 친구가 절교에 이르게 된 삼각관계는 마을의 최고 미녀 마리아를 둘러싼 삼각관계가 아니라 에바리스토를 차지하기 위한 이사우로와 마리아 사이의 삼각관계였다. 에바리스토는 양성애자였고, 두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다 이사우로를 버리고 마리아와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50년이 넘도록 이사우로를 멀리했던 것이다. 에바리스토만이 시크릴어와 스페인어의 이중 언어 사용자이고, 이사우로는 시크릴어만, 마리아는 스페인어만 구사할 수 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둘의 갈등은 에바리스토가 이사우로를 집에 가둔 채 불을 지르는 파국에 이른다. 죽은 뒤 시크릴족의 영혼이 머무는 동굴로 들어간 이사우로는 동굴로 찾아온 에바리스토의 이름을 부르고, 분신과도 같은 의자를 늘 들고 다니던 에바리스토는 의자를 내려놓고 동굴로 따라 들어간다. 혼자서 삶을 이어가는 일은 친구를 위해서도 시크릴어를 위해서도 의미가 없다. 언어가 정말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실제 말을 건네고 말을 들어줄 두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지막 사용자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면서 새와 인간이 소통하는 밀림 속 언어인 시크릴어는 사멸하고, 영화도 대단원에 이른다.

 

 

언어 생태계의 위기

산이시드로에서 벌어진 일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한 종의 언어가 평균 1~2주 사이에 사멸하고 있다. 세계 언어들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에스놀로그(Ethnologue, 2021)에 따르면, 7,139개 언어들 사이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사용자 1억 명이 넘는 8개 언어를 쓰는 인구가 전체의 40%이지만, 사용자 1만 명 이하인 3,924개 언어를 쓰는 인구는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전체 언어의 0.1%를 40%가, 전체 언어의 55%를 0.1%가 사용하는 극심한 양극화이다. 이런 양극화 속에서 많은 언어들이 사멸 위험에 직면해있다. 이번 세기 안에 언어 절반 이상이 사라지리라는 예측도 있다.

 

자연 생태계에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지만, 언어 생태계에서는 최초의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지구 생태계의 대멸종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언어 생태계의 대멸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많은 언어가 있는 것은 낭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도대체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언어의 사멸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깊은 상실감을 부르지만, 언어 사멸은 단순한 상실감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David Crystal, 1941~)은 『언어의 죽음』(권루시안 옮김, 이론과실천, 2005)에서 “인류의 성공에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언어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고 말한다. 자연 생태계에 ‘유전자 풀’을 갖추기 위한 종 다양성이 필요하듯이, 언어 생태계에도 ‘사고의 교배 수정’을 위한 언어 다양성이 필요하다. 아메리카언어학회는 1994년 아래 내용을 포함한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언어 세계에서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은 … 인간의 언어 구조가 인간의 지적 성과를 상당한 수준까지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생물계의 유전적 다양성 손실보다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언어와 사고의 연관성

언어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표지이기도 하다. 세계를 인식하는 데 언어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내세운 상징적인 인물은 미국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그의 제자 벤자민 워프이다. 워프가 말한 “우리는 우리의 자연 언어가 그려 놓은 선에 따라 자연을 분할한다(We dissect nature along lines laid down by our native language.).”라는 말은 ‘사피어-워프 가설’의 강령과도 같다.

 

‘사피어-워프 가설’의 강력한 형태를 언어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필터와 같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언어결정론은 주류 언어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고는 언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둘의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더 미묘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의 약한 형태는 언어상대론이라고 불린다. 이 주장에 따르면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둘은 연관성이 있어서 언어가 달라지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진다.

 

 

‘사피어-워프’ 가설의 에드워드 사피어(좌)와 벤자민 워프(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사피어-워프’ 가설의 에드워드 사피어(좌)와 벤자민 워프(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언어와 사고가 어느 정도까지 관련성이 있는지는 여전한 논쟁거리이다. 민족의 언어가 민족의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훔볼트주의에서 출발하여 사피어-워프 가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을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주장하는 언어학자들이 대세였지만, 보편 문법을 제안한 촘스키부터는 상대적 자율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언어 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의 저자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1954~)는 우리는 모국어가 아니라 ‘생각어(mentalese)’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애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둘의 연관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고는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둘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언어의 사멸은 이처럼 다양성과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언어의 사멸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언어는 역사의 저장고이다”, “언어는 인류의 지식 총량에 기여한다”, “언어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등의 논지로 상세하게 답변한 바 있다.

 

 

언어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시크릴어가 최후 생존자 셋만 남게 된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멕시코는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세계 최대 국가이다. 1519년 코르테스(Don Hernándo Cortés de Monroy. 1485-1547. 스페인 출신의 식민지 탐험가 및 정복자)의 정복과 300년간의 스페인 지배는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90%를 차지하는 멕시코 인구의 97%가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삼게 된 단초를 마련하였다.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 출신의 탐험가 코르테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 출신의 탐험가 코르테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멕시코는 영어를 모국어로 삼은 세계 최대 국가 미국과도 3,200km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브리튼제도의 소수 언어로 출발한 영어는 이미 역사에 출현했던 모든 언어(들)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과 인구를 확보한 언어이다. 영화에서는 마을 주민과 미국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영어 표현을 가르치는 지역 라디오 방송이 등장한다. 가장 유력한 시크릴어 계승자인 루비아조차 시크릴어를 익혀 보라는 마르틴의 제안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빨리 미국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 세기부터 진행된 영어의 지구적 확산은 언어 생태계의 급변을 초래한 강력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고, 시크릴어도 예외가 아님을 영화는 암시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언어를 사용해온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 돌 하나씩을 쌓아 올린 기념비”(랄프 왈도 에머슨,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저마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모셔져 있는 하나의 사원(올리버 웬델 홈즈, 미국의 의학자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저승으로 건너 간 시크릴족은 동굴에 머물다가 신입 영혼이 생기면 동굴 밖으로 나와 이들을 맞는다. 언어를 존재가 깃드는 사원(templum)에 비유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동굴은 시크릴어와 시크릴족이 머무는 집이자 사원인 셈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사멸한 언어가 머물 집도 사원도 없다. 도서관이나 기록 창고에 박제된 형태로 보관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운이 좋다면 말이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영화와 드라마(웹툰, 만화 등 포함)는 내 일도 아닌데 마치 내 일처럼 함께 웃고 울고 한숨쉬고 기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을 가진 대중문화콘텐츠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대리만족을 통해 잠시 재밌고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도록 하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일까.  평소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영화(드라마) 속에 숨겨져 있어 미처 눈치채기 힘들었던 세상과 인생에 관한 질문, 이들을 낳은 시대적 상황,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해당 작품을 흥미롭게 살펴본 철학자들을 통해 알아보자.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사멸하는 언어들을 위한 진혼곡

- 지난 글: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운동처럼 게으를수록 문제가 생기는 뉴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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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욱

교수
서울대와 북경대에서 수학하고, 인제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표로’ 삼아 중국과 언어와 문화의 여러 주제들에 대해 읽고 쓴다. 제1회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저작 당선작인 『짜장면뎐: 시대를 풍미한 검은 중독의 문화사』를 썼고, 『일곱 시선으로 들여다본 <기생충>의 미학』, 『韓国·朝鮮の美を読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근대 번역과 동아시아』, 『라면이 없었더라면』, 『중국어의 비밀』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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