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된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ㆍ약육강식 정당화 논리에 수긍한 이는 모두 친일파거나 친일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친일파보다 민족운동가들의 사상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안중근,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의 사상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년~1929년)가 받아들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개화파거나 민족운동가들의 친일변절 이유와 믿는 구석
역사연구자들은 대체로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대화를 하면 스피드 시대에 걸맞지 않게 서론이 길고 결론을 내는 과정도 매우 복잡하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역사연구자 대다수는 역사상 인물이나 현실의 정치인을 평가할 때 장점과 단점을 장황하게 말한 뒤 종합적인 평가를 한다. 가령 “그 사람 이런 점은 좋은데 이런 점은 나쁘다.”고 하는 식인데, 대중의 입맛에는 부합하지 못하는 설명이다. 다수의 대중은 “매국노와 애국자가 있을 뿐이고 그 중간은 없는 것”(김남주 시 <어머님께> 중에서)이라고 한 저항시인 김남주(1946년~1994년)의 부르짖음처럼 선악을 화끈하게 결정지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친일파와 민족운동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그와 같은 도식적인 분류에 익숙하여, 친일파의 삶은 모든 것을 반역을 위한 술수로, 민족운동가의 삶은 모든 것을 애국을 위한 결단으로 설명하는 역사평설이 인기를 끌기도 한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에는 그런 도식에 빠져 있었는데, 훗날 친일파들의 행적을 공부하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친일파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처음에는 개화나 혁명에 앞장섰고, 친일파로의 변절과정도 제 딴에는 가식 없이 구국의 심정으로 결단(?)한 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소속 간부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초대 회장 송병준은 김옥균을 암살하러 갔다가 오히려 김옥균에 감화되어 잠시나마 개화파를 자처했던 인물이고, 2대 회장 이용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고, 윤시병, 유학주 등은 독립협회 출신이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초대 회장 송병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물론 그 ‘구국의 심정’은 뻔뻔한 변명일 뿐이고, 매국과 친일의 결과로 다른 이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는 중에서도 그들은 보신(保身)과 출세를 누렸으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숙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이 주저 없이 변절하고 이후에도 뻔뻔한 자세를 고수할 수 있게 한 동력, 즉 믿는 구석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의 그릇된 시각에서 비롯된 그릇된 ‘역사학 이론’과 ‘사회학 이론’이었다. 지난 칼럼 <일제식민사학과 그 영향>에서 소개한‘동양평화론’과 ‘식민사관’이 대표적인데, 그 외에도 인간사회에서도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이 작용한다는 생각, 이른바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이 크게 작용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우리 근대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나아가 그것이 현대 우리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진화론’이 약육강식 정당화로 변질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19세기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에 입각하여,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려는 견해로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그 후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사회진화론은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 논리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주로 극복해야 할 사상으로 언급된다.
위키백과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표제 설명인데, 여타 백과사전의 설명도 대동소이하다. 틀린 부분이 있다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엄밀히 말해 이러한 설명은 오해의 소지가 조금 있다. 적지 않은 수의 사회학자들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년~1903년)의 견해에 대해 다윈의 생물학 이론을 사회학에 엉터리로 적용한 것이라고 폄하하면서, 스펜서가 우승열패ㆍ약육강식을 정당화하여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스펜서의 견해는 인간사회 또는 사회간 불평등을 관찰한 결과일 뿐 그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그것을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고, 그러한 시각은 스펜서 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유럽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1)
1) 11회 칼럼 ‘역사의 과학성을 강조한 실증주의 역사학’에서 소개한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의 시각을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스펜서의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고, 한국근대사 및 한국사학사 개설서 등에서 위키백과의 설명처럼 개략적으로 소개된 것이 대다수였다. 근자에 번역가 이상률에 의해 『개인 대 국가』(이책, 2014)와 『국가 의무의 한계』(이른비, 2021)가 번역 출간되었는데, 두 책의 역자 해설이 스펜서의 시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좌)의 대표 저서 『사회진화론: The Man Versus the State』 표지(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이처럼 스펜서가 사용한 ‘사회진화’는 당초에는 우승열패ㆍ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정당화하는 견해로 둔갑했고, 그 변형된 ‘사회진화론’이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친일파들의 친일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일진회 2대 회장 이용구가 일본인 통감 소네 아라스께(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 통감으로 활동), 순종 황제, 총리 이완용 3인을 각 수신인으로 보낸 세 통의 <병합청원서>(1909년)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용구는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친일매국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용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일 때 손병희 휘하의 우익장(右翼將)으로 손천민과 함께 청주에서 궐기한 인물인데, 체포 후 옥고와 조선정부의 요시찰을 겪으면서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외세에 의존했다. 러일전쟁(1904년-1905년) 당시 이용구는 일종의 선견지명(?)으로 다른 사람과 달리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일본군에게 정치ㆍ군사적인 측면에서 적극 협력했고, 나아가 일진회 회장이 되어 병합을 청원했다.2)
2) 이러한 이용구의 행적과 세 통의 <병합청원서> 전문(全文)은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출간한 『친일논설선집』(1987, 실천문학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디 세계1등 일본과 같은 줄 서는 복을...” 간청한 친일파들
‘일진회 이용구 등 1백만인’의 이름으로 소네 통감에게 보낸 이름으로 보낸 <병합청원서>에서 이용구는 먼저 ‘동양평화’를 운운한 뒤 “(조선과 일본은) 종족의 근본이 같고, 언어는 근원이 같으며,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풍속에, 종교는 취지가 같고 같은 학예(學藝)를 숭상했습니다. 하물며 지리의 근접이란 순치(脣齒, 입술과 이)의 관계와도 같아서 정치적 경제적인 이해가 일치 불가분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런 뒤 순종 황제에게 보낸 <병합청원서>에서는 마침내 조선을 ‘죽은 시체’에 비유하면서 “일본은 이미 먼저 세계 1등국의 줄에 들어섰다.”고 강조한 뒤 “일본 천황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와, 우리 2000만 동포를 화육하시어 동등한 백성으로 하옵실 것은 필연이옵니다.” 라고 한 뒤 “다만 엎드려 빌며 말하노니, 백성들이 세계 일등국과 같은 줄에 서는 복을 이에 누리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병합’ 문서에 빨리 도장을 찍을 것을 강요했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2대 회장 이용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결과적으로 이용구의 ‘줄서기’는 최소한 ‘합방’에 이르는 과정까지는 적확했다. 비약하면 이왕 망한 나라, 즉 ‘죽은 시체’의 장례식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떡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 따라 그는 부귀영화를 누렸으되 죽음에 이르러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용구는 죽음에 이르러 일진회 고문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1864-1935. 일본의 정치운동가이자 기업인)와 회원인 윤정식(1906년 일진회 평의장 역임)에게 “아아 우리는 속았어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진정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랐다. 그는 반성하지 않은 채 죽었고, 죽은 뒤에는 일본천황으로부터 훈1등 서보장이 추서되었다. “아아 우리는 속았어요.”라는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했던 병합청원을 후회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에게는 떡고물이 작다는 소리로 들린다.3)
3) 이용구가 순진하여 일제의 책략에 속아서 병합을 청원했다는 해석이 있다. 사실 이 병합청원서는 이용구가 자력으로 쓴 것이 아니라 ‘정계의 흑막(黑幕)’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던 스기야마에 의해 상당부분 작성된 채로 이용구에게 건네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타당한 해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당당하게 자기 이름으로 제출한 것은 그 역시 ‘동양평화’, ‘일선동조’, ‘우승열패ㆍ약육강식’의 논리에 적극 동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에 필요한 실력양성 위해 친일했다는 이광수의 논리
이용구의 이러한 궤변과 당당함(?)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문인 이광수에게서도 발견된다. 이광수가 1922년 <민족 개조론(民族改造論)>을 쓸 당시부터 친일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수양동우회’ 투옥(1937년)되었을 때 석방되는 대가로 친일을 약속하고 변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투옥 반년 만인 1938년에 석방되었음), 어떻든 그가 대표적 악질 친일파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친일파 가운데 필자가 이광수를 대표적 악질 친일파로 꼽는 까닭은 해방 후 그가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론하기 위해 쓴 『나의 고백』(1948년)에서 늘어놓은 궤변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 글에서 “이왕 면할 수 없는 처지일진대, 이 불행을 우리 편이 이익이 되도록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인 친일을 하면 ‘내선차별’을 제거하고 나아가 독립을 할 수 있는 실력양성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친일을 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은 뒤, 병자호란 때 홍제원 목욕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지나간 일은 모두 덮는 ‘망각법’을 결의하는 것이 현명한 조처라고 주장했다.
“병자호란에 서울 사대부집 처녀들 수백 명이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갔었다. 이후에 화친이 성립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그들의 정조가 문제되었다. 이에 인조대왕은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여자들은 홍제원에서 모조리 목욕을 하고서 서울로 들어오라.”는 영을 내렸다. 이것으로 정조 문제를 일척하고(물리치고)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수백의 아내와 딸들이 누명을 벗고 다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 것이었다. 만일 그러하지 않고 정말 깨끗한 자와 더럽혀진 자를 가리고, 더럽혀진 자 중에서도 억지로 더럽혀진 자, 마음이 동한 자를 가리기로 하였으면, 어떠한 결과를 생(生)하였을까.
오늘날 친일파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사십년 일정 밑에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 하면 그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 일정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 신민 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협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중략)
민족 대의로 말하면, 지난 삼 년간의 친일파에 대한 설주필주(舌誅筆誅)의 통고도 이미 삼년 징역의 통고만은 할 것이요, 또한 반민법의 제정으로 민족대의의 지향을 명시하였으니, 이제 더 추궁함이 없이 망각법을 결의하여 민족 대화를 회복하고 민족 일심일체의 신기력을 진작함이 현명한 조처가 아닐까?”
친일 문인 이광수(좌)가 자신의 친일 행각을 변론하기 위해 쓴 『나의 고백』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평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울분이 치미는 터무니없는 궤변임은 물론이고, 설령 다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제 더 추궁함이 없이 망각법을 결의하여 민족 대화를 회복하고 민족 일심일체의 신기력을 진작함이 현명한 조처”라는 소리는 친일파인 이광수 제 입으로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의할 것은 앞서 소개했듯이 이광수가 친일의 이유로 실력양성을 운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년)은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을 정당화한 식민지배 논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사실 민족개조론은 도산 안창호의 ‘무실(務實)ㆍ역행(力行)ㆍ민족개조’ 사상을 본뜬 것인데,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달랐다. 안창호가 부르짖은 무실ㆍ역행은 독립을 갈구하는 목소리였지만, 이광수가 부르짖은 무실ㆍ역행은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서 독립을 갈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므로 독립을 꿈꾸지 말라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배 술책에 기생하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같은 사회진화론 영향 받았지만 달랐던 민족운동가들
그러면 이러한 변형된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ㆍ약육강식 정당화 논리에 수긍한 이는 모두 친일파거나 친일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친일파보다 민족운동가들의 사상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안중근,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의 사상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년~1929년)가 받아들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이 가운데 안중근과 박은식의 사상은 일제강점이 실행된 1910년 이전까지 주장된 것인 반면, 안창호와 신채호의 사상은 이후로도 10여 년 동안 지속되고 진행된 점이 눈에 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안창호는 그러한 생각에서 무실ㆍ역행ㆍ실력양성을 설파했는데, 신채호의 경우에는 다소 특이한 면이 있다.
4) 이에 대해서는 한양대학교 박찬승 교수의 논문 「한말 신채호의 역사관과 역사학 -청말 양계초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문화』9,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1988) 및 「한말ㆍ일제시기 사회진화론의 성격과 영향」 『역사비평』32, 역사문제연구소(1996)을 추천할 만하다.
같은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던 민족 운동가 신채호, 안창호, 안중근(왼쪽부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Wikimedia)
신채호는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깊이 연구하면서 그것이 열강의 식민지배 논리로 악용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민중의 직접혁명과 세계 식민지 민중과의 연대 필요성을 설파했고 나아가 말년에는 아나키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민족이 약소ㆍ열등한 민족이 아니라 원래는 강대ㆍ우등한 민족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원래는 강대하고 우등한 민족이라면 어쩌다가 약소ㆍ열등한 민족이 되어 나라를 빼앗겼는지 설명할 의무가 생긴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그 원흉으로 7세기의 신라사람 김유신ㆍ김춘추와 12세기의 고려사람 김부식을 지목했다. 사실 나라를 빼앗긴 주된 원인은 가까운 시기, 즉 조선후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의 악정(惡政)에 있었지만 패배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신채호는 원인을 먼 시기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춘추와 김유신에게는 민족의 배반자라는 낙인을 찍었고, 그들이 이룩한 삼국통일은 부정하거나 그 의의를 폄하하였다. 또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을 민족정신과 기록을 분멸(焚滅, 불태워 없앤)한 원흉으로 지목하였으며, 김부식에 의해 묘청의 난이 진압된 것을 민족정기가 궤멸된 안타까운 사건, 즉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5)
5) 신채호의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는 15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관건은 순응했느냐 저항했느냐 여부!!
이처럼 우승열패ㆍ약육강식에 따른 열강의 약소국 침탈은 당시에는 친일파들 뿐 아니라 민족운동가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차이는 우리가 약자이므로 일제에 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느냐, 아니면 우리가 원래는 열등하고 약소한 민족이 아니라고 설파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신채호의 말과 글을 따라 ‘대륙을 누빈’(실제로는 대륙을 누볐다고 상상된) 고구려의 역사만을 사랑하고, 국체(國體)를 보전하기 위해 솔선수범한 7세기 신라인들의 노고는 폄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이는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의 당면과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6)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고토회복’과 ‘남벌’을 부르짖기까지 하는데, 현실성이 없을 뿐 아니라 국익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6)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고 백제만 통합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시각이 있다. 이 시각에서는 고구려ㆍ백제 멸망 이후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한 남북국시대이므로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옳지 못하다는 지적을 한다. 신채호로부터 비롯되어 현재 학계에서도 동의하는 연구자가 극소수 있는 시각인데, 학계에서는 소수견해인 반면 대중들에게는 적지 않은 공감을 받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연구자와 그에 경도된 사람들이 크게 간과한 것이 있다. 이 견해대로라면(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고 백제만 통합했다면) 고구려의 역사ㆍ문화는 신라를 통해서는 계승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고구려의 역사ㆍ문화는 어디로 갔는가? 온전히 발해로만 계승되었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역사ㆍ문화가 발해를 통해 우리에게 계승된 점들을 소상히 밝힐 의무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논리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발해사의 기록이 너무도 적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ㆍ문화는 발해 뿐 아니라 7세기 이후 300년 신라사를 통해서도 계승되었던 바, 엄밀히 말하면 발해를 통해 계승된 것보다 신라를 통해 계승된 것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삼국통일’과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삼국통일을 부정하거나 신라의 역사를 폄훼하는 것은 허깨비에 홀려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본 인문360° 사이트에 「신라의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대처가 당의 한반도 장악 욕심 좌절시켜」라는 육군사관학교 이상훈 교수의 칼럼이 게재되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임시 정부 창설 이듬해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 시정부 신년 축하식을 마치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현재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처지이기는 해도 신채호가 살았던 암울한 시대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또한 약육강식ㆍ우승열패의 현실은 현대에도 엄연히 작동하고 있지만, 이상으로나마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법제적인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다수는 평등을 천명하고 나아가 제대로 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법안을 계속하여 보강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탈북자나 ‘아프카니스탄 협력자’ 등에 혐오를 드러내고 그 수용을 결사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하는데, 약육강식ㆍ우승열패의 논리에 고통받은 선조들의 역사를 망각하는 그릇된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족운동가들이 공부한 사회진화론이 아니라 친일파들이 빠져든 사회진화론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할 것이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사회 진화론’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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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진화론’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09-17
변형된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ㆍ약육강식 정당화 논리에 수긍한 이는 모두 친일파거나 친일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친일파보다 민족운동가들의 사상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안중근,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의 사상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년~1929년)가 받아들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개화파거나 민족운동가들의 친일변절 이유와 믿는 구석
역사연구자들은 대체로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대화를 하면 스피드 시대에 걸맞지 않게 서론이 길고 결론을 내는 과정도 매우 복잡하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역사연구자 대다수는 역사상 인물이나 현실의 정치인을 평가할 때 장점과 단점을 장황하게 말한 뒤 종합적인 평가를 한다. 가령 “그 사람 이런 점은 좋은데 이런 점은 나쁘다.”고 하는 식인데, 대중의 입맛에는 부합하지 못하는 설명이다. 다수의 대중은 “매국노와 애국자가 있을 뿐이고 그 중간은 없는 것”(김남주 시 <어머님께> 중에서)이라고 한 저항시인 김남주(1946년~1994년)의 부르짖음처럼 선악을 화끈하게 결정지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친일파와 민족운동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그와 같은 도식적인 분류에 익숙하여, 친일파의 삶은 모든 것을 반역을 위한 술수로, 민족운동가의 삶은 모든 것을 애국을 위한 결단으로 설명하는 역사평설이 인기를 끌기도 한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에는 그런 도식에 빠져 있었는데, 훗날 친일파들의 행적을 공부하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친일파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처음에는 개화나 혁명에 앞장섰고, 친일파로의 변절과정도 제 딴에는 가식 없이 구국의 심정으로 결단(?)한 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소속 간부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초대 회장 송병준은 김옥균을 암살하러 갔다가 오히려 김옥균에 감화되어 잠시나마 개화파를 자처했던 인물이고, 2대 회장 이용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고, 윤시병, 유학주 등은 독립협회 출신이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초대 회장 송병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물론 그 ‘구국의 심정’은 뻔뻔한 변명일 뿐이고, 매국과 친일의 결과로 다른 이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는 중에서도 그들은 보신(保身)과 출세를 누렸으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숙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이 주저 없이 변절하고 이후에도 뻔뻔한 자세를 고수할 수 있게 한 동력, 즉 믿는 구석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의 그릇된 시각에서 비롯된 그릇된 ‘역사학 이론’과 ‘사회학 이론’이었다. 지난 칼럼 <일제식민사학과 그 영향>에서 소개한 ‘동양평화론’과 ‘식민사관’이 대표적인데, 그 외에도 인간사회에서도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이 작용한다는 생각, 이른바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이 크게 작용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우리 근대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나아가 그것이 현대 우리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진화론’이 약육강식 정당화로 변질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19세기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에 입각하여,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려는 견해로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그 후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사회진화론은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 논리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주로 극복해야 할 사상으로 언급된다.
위키백과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표제 설명인데, 여타 백과사전의 설명도 대동소이하다. 틀린 부분이 있다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엄밀히 말해 이러한 설명은 오해의 소지가 조금 있다. 적지 않은 수의 사회학자들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년~1903년)의 견해에 대해 다윈의 생물학 이론을 사회학에 엉터리로 적용한 것이라고 폄하하면서, 스펜서가 우승열패ㆍ약육강식을 정당화하여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스펜서의 견해는 인간사회 또는 사회간 불평등을 관찰한 결과일 뿐 그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그것을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고, 그러한 시각은 스펜서 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유럽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1)
1) 11회 칼럼 ‘역사의 과학성을 강조한 실증주의 역사학’에서 소개한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의 시각을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스펜서의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고, 한국근대사 및 한국사학사 개설서 등에서 위키백과의 설명처럼 개략적으로 소개된 것이 대다수였다. 근자에 번역가 이상률에 의해 『개인 대 국가』(이책, 2014)와 『국가 의무의 한계』(이른비, 2021)가 번역 출간되었는데, 두 책의 역자 해설이 스펜서의 시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좌)의 대표 저서 『사회진화론: The Man Versus the State』 표지(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이처럼 스펜서가 사용한 ‘사회진화’는 당초에는 우승열패ㆍ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정당화하는 견해로 둔갑했고, 그 변형된 ‘사회진화론’이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친일파들의 친일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일진회 2대 회장 이용구가 일본인 통감 소네 아라스께(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 통감으로 활동), 순종 황제, 총리 이완용 3인을 각 수신인으로 보낸 세 통의 <병합청원서>(1909년)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용구는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친일매국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용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일 때 손병희 휘하의 우익장(右翼將)으로 손천민과 함께 청주에서 궐기한 인물인데, 체포 후 옥고와 조선정부의 요시찰을 겪으면서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외세에 의존했다. 러일전쟁(1904년-1905년) 당시 이용구는 일종의 선견지명(?)으로 다른 사람과 달리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일본군에게 정치ㆍ군사적인 측면에서 적극 협력했고, 나아가 일진회 회장이 되어 병합을 청원했다.2)
2) 이러한 이용구의 행적과 세 통의 <병합청원서> 전문(全文)은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출간한 『친일논설선집』(1987, 실천문학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디 세계1등 일본과 같은 줄 서는 복을...” 간청한 친일파들
‘일진회 이용구 등 1백만인’의 이름으로 소네 통감에게 보낸 이름으로 보낸 <병합청원서>에서 이용구는 먼저 ‘동양평화’를 운운한 뒤 “(조선과 일본은) 종족의 근본이 같고, 언어는 근원이 같으며,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풍속에, 종교는 취지가 같고 같은 학예(學藝)를 숭상했습니다. 하물며 지리의 근접이란 순치(脣齒, 입술과 이)의 관계와도 같아서 정치적 경제적인 이해가 일치 불가분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런 뒤 순종 황제에게 보낸 <병합청원서>에서는 마침내 조선을 ‘죽은 시체’에 비유하면서 “일본은 이미 먼저 세계 1등국의 줄에 들어섰다.”고 강조한 뒤 “일본 천황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와, 우리 2000만 동포를 화육하시어 동등한 백성으로 하옵실 것은 필연이옵니다.” 라고 한 뒤 “다만 엎드려 빌며 말하노니, 백성들이 세계 일등국과 같은 줄에 서는 복을 이에 누리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병합’ 문서에 빨리 도장을 찍을 것을 강요했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2대 회장 이용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결과적으로 이용구의 ‘줄서기’는 최소한 ‘합방’에 이르는 과정까지는 적확했다. 비약하면 이왕 망한 나라, 즉 ‘죽은 시체’의 장례식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떡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 따라 그는 부귀영화를 누렸으되 죽음에 이르러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용구는 죽음에 이르러 일진회 고문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1864-1935. 일본의 정치운동가이자 기업인)와 회원인 윤정식(1906년 일진회 평의장 역임)에게 “아아 우리는 속았어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진정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랐다. 그는 반성하지 않은 채 죽었고, 죽은 뒤에는 일본천황으로부터 훈1등 서보장이 추서되었다. “아아 우리는 속았어요.”라는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했던 병합청원을 후회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에게는 떡고물이 작다는 소리로 들린다.3)
3) 이용구가 순진하여 일제의 책략에 속아서 병합을 청원했다는 해석이 있다. 사실 이 병합청원서는 이용구가 자력으로 쓴 것이 아니라 ‘정계의 흑막(黑幕)’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던 스기야마에 의해 상당부분 작성된 채로 이용구에게 건네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타당한 해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당당하게 자기 이름으로 제출한 것은 그 역시 ‘동양평화’, ‘일선동조’, ‘우승열패ㆍ약육강식’의 논리에 적극 동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에 필요한 실력양성 위해 친일했다는 이광수의 논리
이용구의 이러한 궤변과 당당함(?)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문인 이광수에게서도 발견된다. 이광수가 1922년 <민족 개조론(民族改造論)>을 쓸 당시부터 친일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수양동우회’ 투옥(1937년)되었을 때 석방되는 대가로 친일을 약속하고 변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투옥 반년 만인 1938년에 석방되었음), 어떻든 그가 대표적 악질 친일파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친일파 가운데 필자가 이광수를 대표적 악질 친일파로 꼽는 까닭은 해방 후 그가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론하기 위해 쓴 『나의 고백』(1948년)에서 늘어놓은 궤변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 글에서 “이왕 면할 수 없는 처지일진대, 이 불행을 우리 편이 이익이 되도록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인 친일을 하면 ‘내선차별’을 제거하고 나아가 독립을 할 수 있는 실력양성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친일을 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은 뒤, 병자호란 때 홍제원 목욕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지나간 일은 모두 덮는 ‘망각법’을 결의하는 것이 현명한 조처라고 주장했다.
“병자호란에 서울 사대부집 처녀들 수백 명이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갔었다. 이후에 화친이 성립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그들의 정조가 문제되었다. 이에 인조대왕은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여자들은 홍제원에서 모조리 목욕을 하고서 서울로 들어오라.”는 영을 내렸다. 이것으로 정조 문제를 일척하고(물리치고)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수백의 아내와 딸들이 누명을 벗고 다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 것이었다. 만일 그러하지 않고 정말 깨끗한 자와 더럽혀진 자를 가리고, 더럽혀진 자 중에서도 억지로 더럽혀진 자, 마음이 동한 자를 가리기로 하였으면, 어떠한 결과를 생(生)하였을까.
오늘날 친일파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사십년 일정 밑에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 하면 그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 일정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 신민 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협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중략)
민족 대의로 말하면, 지난 삼 년간의 친일파에 대한 설주필주(舌誅筆誅)의 통고도 이미 삼년 징역의 통고만은 할 것이요, 또한 반민법의 제정으로 민족대의의 지향을 명시하였으니, 이제 더 추궁함이 없이 망각법을 결의하여 민족 대화를 회복하고 민족 일심일체의 신기력을 진작함이 현명한 조처가 아닐까?”
친일 문인 이광수(좌)가 자신의 친일 행각을 변론하기 위해 쓴 『나의 고백』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평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울분이 치미는 터무니없는 궤변임은 물론이고, 설령 다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제 더 추궁함이 없이 망각법을 결의하여 민족 대화를 회복하고 민족 일심일체의 신기력을 진작함이 현명한 조처”라는 소리는 친일파인 이광수 제 입으로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의할 것은 앞서 소개했듯이 이광수가 친일의 이유로 실력양성을 운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년)은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을 정당화한 식민지배 논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사실 민족개조론은 도산 안창호의 ‘무실(務實)ㆍ역행(力行)ㆍ민족개조’ 사상을 본뜬 것인데,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달랐다. 안창호가 부르짖은 무실ㆍ역행은 독립을 갈구하는 목소리였지만, 이광수가 부르짖은 무실ㆍ역행은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서 독립을 갈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므로 독립을 꿈꾸지 말라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배 술책에 기생하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같은 사회진화론 영향 받았지만 달랐던 민족운동가들
그러면 이러한 변형된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ㆍ약육강식 정당화 논리에 수긍한 이는 모두 친일파거나 친일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친일파보다 민족운동가들의 사상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안중근,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의 사상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년~1929년)가 받아들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이 가운데 안중근과 박은식의 사상은 일제강점이 실행된 1910년 이전까지 주장된 것인 반면, 안창호와 신채호의 사상은 이후로도 10여 년 동안 지속되고 진행된 점이 눈에 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안창호는 그러한 생각에서 무실ㆍ역행ㆍ실력양성을 설파했는데, 신채호의 경우에는 다소 특이한 면이 있다.
4) 이에 대해서는 한양대학교 박찬승 교수의 논문 「한말 신채호의 역사관과 역사학 -청말 양계초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문화』9,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1988) 및 「한말ㆍ일제시기 사회진화론의 성격과 영향」 『역사비평』32, 역사문제연구소(1996)을 추천할 만하다.
같은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던 민족 운동가
신채호, 안창호, 안중근(왼쪽부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Wikimedia)
신채호는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깊이 연구하면서 그것이 열강의 식민지배 논리로 악용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민중의 직접혁명과 세계 식민지 민중과의 연대 필요성을 설파했고 나아가 말년에는 아나키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민족이 약소ㆍ열등한 민족이 아니라 원래는 강대ㆍ우등한 민족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원래는 강대하고 우등한 민족이라면 어쩌다가 약소ㆍ열등한 민족이 되어 나라를 빼앗겼는지 설명할 의무가 생긴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그 원흉으로 7세기의 신라사람 김유신ㆍ김춘추와 12세기의 고려사람 김부식을 지목했다. 사실 나라를 빼앗긴 주된 원인은 가까운 시기, 즉 조선후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의 악정(惡政)에 있었지만 패배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신채호는 원인을 먼 시기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춘추와 김유신에게는 민족의 배반자라는 낙인을 찍었고, 그들이 이룩한 삼국통일은 부정하거나 그 의의를 폄하하였다. 또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을 민족정신과 기록을 분멸(焚滅, 불태워 없앤)한 원흉으로 지목하였으며, 김부식에 의해 묘청의 난이 진압된 것을 민족정기가 궤멸된 안타까운 사건, 즉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5)
5) 신채호의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는 15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관건은 순응했느냐 저항했느냐 여부!!
이처럼 우승열패ㆍ약육강식에 따른 열강의 약소국 침탈은 당시에는 친일파들 뿐 아니라 민족운동가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차이는 우리가 약자이므로 일제에 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느냐, 아니면 우리가 원래는 열등하고 약소한 민족이 아니라고 설파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신채호의 말과 글을 따라 ‘대륙을 누빈’(실제로는 대륙을 누볐다고 상상된) 고구려의 역사만을 사랑하고, 국체(國體)를 보전하기 위해 솔선수범한 7세기 신라인들의 노고는 폄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이는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의 당면과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6)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고토회복’과 ‘남벌’을 부르짖기까지 하는데, 현실성이 없을 뿐 아니라 국익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6)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고 백제만 통합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시각이 있다. 이 시각에서는 고구려ㆍ백제 멸망 이후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한 남북국시대이므로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옳지 못하다는 지적을 한다. 신채호로부터 비롯되어 현재 학계에서도 동의하는 연구자가 극소수 있는 시각인데, 학계에서는 소수견해인 반면 대중들에게는 적지 않은 공감을 받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연구자와 그에 경도된 사람들이 크게 간과한 것이 있다. 이 견해대로라면(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고 백제만 통합했다면) 고구려의 역사ㆍ문화는 신라를 통해서는 계승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고구려의 역사ㆍ문화는 어디로 갔는가? 온전히 발해로만 계승되었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역사ㆍ문화가 발해를 통해 우리에게 계승된 점들을 소상히 밝힐 의무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논리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발해사의 기록이 너무도 적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ㆍ문화는 발해 뿐 아니라 7세기 이후 300년 신라사를 통해서도 계승되었던 바, 엄밀히 말하면 발해를 통해 계승된 것보다 신라를 통해 계승된 것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삼국통일’과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삼국통일을 부정하거나 신라의 역사를 폄훼하는 것은 허깨비에 홀려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본 인문360° 사이트에 「신라의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대처가 당의 한반도 장악 욕심 좌절시켜」라는 육군사관학교 이상훈 교수의 칼럼이 게재되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임시 정부 창설 이듬해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 시정부 신년 축하식을 마치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현재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처지이기는 해도 신채호가 살았던 암울한 시대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또한 약육강식ㆍ우승열패의 현실은 현대에도 엄연히 작동하고 있지만, 이상으로나마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법제적인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다수는 평등을 천명하고 나아가 제대로 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법안을 계속하여 보강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탈북자나 ‘아프카니스탄 협력자’ 등에 혐오를 드러내고 그 수용을 결사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하는데, 약육강식ㆍ우승열패의 논리에 고통받은 선조들의 역사를 망각하는 그릇된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족운동가들이 공부한 사회진화론이 아니라 친일파들이 빠져든 사회진화론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할 것이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사회 진화론’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
- 지난 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영향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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