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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말을 맙시다”는 해결책이 아니다

-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

이영미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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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본다지만, 나는 어머니를 뵈러 시댁에 자주 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 사이에 뜻하지 않게 목소리 톤이 높아질 때가 있다.

어머니가 시중에 돌아다니는 가짜 뉴스에 쉽게 혹하시는 탓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사람을 욕하는가 하면, 나쁜 근거가 차고 넘치는 사람을 오히려 가엾어할 때도 있다.

 

 

 

며느리는 휴대폰, 시어머니는 요리… 서로가 스승

“에미야, 나 이것 좀 다시 가르쳐줄래?”

 

올해로 83세가 되신 시어머니. 시골집에 가보니 꽃밭에 진분홍 작약이 한 무리 피었다. 혼자만 보기에 영 아까워 주위에 자랑하시고 싶단다.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전송하는 게 영 어려우신가 보다. 문자 보내는 방법과 똑같은데도, 자주 써보지 않아서 그렇다. 앨범에서 사진을 고른 뒤 첨부하는 법을 찬찬히 알려드렸다.

 

“어머니, 사진을 종이에 붙이려면 클립으로 끼워야 하잖아요. 요 클립 표시를 누르면 돼요.”

 

일부러 몇 번 연습까지 시켜드렸다. 이럴 때는 며느리가 아니라, 휴대폰 교육을 하는 친절한 강사처럼 굴어야 한다. 며칠 후 어머니는 작약뿐 아니라 텃밭에 자란 쑥갓이며 상추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근처 사는 친구분과 짜장면을 먹는 인증 사진도 자랑하셨다. 반복해서 잘 가르쳐 드리면 이 정도는 척척 하시는 것을.



휴대폰으로 작약을 촬영하시는 시어머니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휴대폰으로 꽃을 촬영하시는 시어머니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반대로, 때로는(아니, 자주) 어머니가 내게 자상한 요리 선생이 되신다. 이웃에서 싱싱한 머위를 잔뜩 얻었는데, 도무지 어떻게 조리해야 할지 몰랐다.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쌀가루를 넣어봐라. 국물이 걸쭉해져서 맛있단다.”

 

매번 밥상에 올리는 계란찜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꼭 카스테라를 먹는 것 같다. 중탕으로 익히면서 물이 넘치지 않도록 불을 적절히 조절하는 게 비결이란다.

 

시골에 터를 잡으신 이후 매년 담가 주시는 고추장이며 된장, 간장. 시중에서 파는 공산품과 달리 깊은 맛을 내는 그 천연 양념 없이 과연 내가 음식 맛을 낼 수 있을까.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어쩐다! 그 전에 조금씩이라도 어머니의 오래된 손맛을 전수받아야 할 텐데.

 

 

일상에선 현명한데도 가짜 뉴스에는 쉽게 혹해

남들은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본다지만, 나는 어머니를 뵈러 시댁에 자주 가는 편이다. 이만하면 꽤 격의 없이 잘 지내는 고부지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 사이에 뜻하지 않게 목소리 톤이 높아질 때가 있다. 어머니가 시중에 돌아다니는 가짜 뉴스에 쉽게 혹하시는 탓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사람을 욕하는가 하면, 나쁜 근거가 차고 넘치는 사람을 오히려 가엾어할 때도 있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설득을 하거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봤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 못지않게 대단하시건만, 어찌된 일인지 거짓 정보들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말을 계속 하다가 실망하고 지친 나머지, 이제는 가능하면 정치나 사회 이슈에 대한 대화는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일상생활에서는 현명하게 행동할 뿐 아니라 판단력도 정확하신 편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얼토당토않은 루머를 어머니는 왜 그토록 맹신하시는 걸까.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 내 또래가 많은 걸 보면, 비단 우리 집뿐만이 아닌 중년과 노년의 세대 문제로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학자 김성우와 문화연구자 엄기호가 공저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따비, 2020)를 읽으면서, 일말의 단초를 얻었다. 만약 이것이 리터러시, 즉 문해력 부족에 따른 부작용이라면 무조건 비판하거나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거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여전히 읽고 쓰는 두 사람이 멀티미디어 시대, 새로운 리터러시를 이야기하다.” (이미지 출처: YES24)

김성우 엄기호 공저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책 표지 (이미지 출처: YES24)

 

 

현재 칠팔십대의 노년층은 전쟁 후유증을 겪고 척박한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먹고사는 일에만 주력해왔다. 혜택 받은 소수를 제외하면, 교육을 받거나 체계적인 지식을 쌓을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어머니 같은 여성은 기초 교육을 받았다 해도, 사회에 진출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디지털과 미디어 세상에 편입되면서 갑자기 수많은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을 틀면 쏟아지는 뉴스 채널, 휴대폰을 통해 지인들이 전달하는 카톡 정보, 도무지 객관적인 진위를 파악할 수 없는 유튜브 동영상들.

 

이 사회가 그 세대에게 체계적으로 리터러시를 키워주거나 비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 책을 소화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로운 미디어의 거짓 정보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소통과 표현에 대한 욕망이 둑 안에 갇혀 있다가 새로운 채널로 출구를 찾은 거니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40대나 50대에게는 되게 한심해 보이는 겁니다.


-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35p

 

되짚어 떠올려보니, 지금처럼 디지털 세상이 되기 전인 90년대 후반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그때 나는 진보와 보수로 알려진 두 종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손자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우리 집으로 건너오셨던 어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신문부터 훑어보곤 하셨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영상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뉴스를 걸러 읽으셨던 것이다.

 

 

말 안 통한다고 무조건 비판하거나 침묵하기보다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하거나, 말이 안 통한다고 입을 닫는 것은 세대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다. 앞서 예로 든 시어머니의 음식과 며느리의 디지털 감성처럼, 세대가 가진 강점을 나누고 부족한 면을 도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또한 각 세대의 문화와 경험에 어울리는 주제와 언어로, 나와 주변,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배움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면 좋겠다.

 

한때 강사로 몸담았던 〈인생학교(The School of Life)〉를 통해 그 가능성을 엿본 적이 있다. 일, 돈, 사랑, 행복, 관계와 같은 현대인의 주된 관심을 주제로 수업이 열리는 작은 교실. 그 교실에서는 처음 만난 이들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었다.

 

강사가 커리큘럼에 담긴 진지한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각자 살아온 이력대로 진솔한 대답을 이어나갔다. 세 시간에 걸친 수업이 끝나고 난 뒤, 처음 경험하는 쌍방향 대화형 토론에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다. 또 누군가는 다른 수업에도 계속 참여하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세운 〈인생학교(THE SCHOOL OF LIFE)〉 서울지부 외관 (이미지 출처: Crystallized Tears)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세운 〈인생학교〉 서울지부 외관 (이미지 출처: Crystallized Tears)



그렇다 해도 수준 높은 인문학 수업을 지식의 토대가 부족한 노인이나 청소년 대상으로 실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느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가출 청소년 10여 명에게 10회에 걸친 수업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청소년 수준에 맞게 단어라든가 사례들은 조금 쉽게 손을 봤지만, 생각 보고자 던진 주제는 일반인 대상 수업 주제와 같았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낯선 주제와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첫 수업에서는 대부분 입을 꼭 다물고 있거나 웃기만 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강사들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한두 아이가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다른 아이들도 차차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료를 만들어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봤을 때는 사는 재미도 의의도 없어 보이던 아이들이 나름대로 소박하거나 멋진 꿈을 꾸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어른들은 다들 놀라고 말았다. 고작 열 번의 만남이 이렇게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구나. 아이들이 써낸 소감 가운데,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게 힘들었지만 평소 생각도 못해 본 얘기를 해주는 어른들을 많이 만나서 좋았다는 내용이 퍽 인상 깊었다.

 

 

서로 달라도 공동체 성찰하며 가까워질 시간 필요

사회의 약자나 소외된 이들에게도 ‘성찰하는 사고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는,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을 다시 펼쳐 본다. 상대적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노년층, 게임과 유튜브에 빠진 청소년,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일용 노동자, 범죄자까지 다 포함될 것이다. 그런 계층일수록 공적인 지원을 통한 평생 교육이 시급하다. 생계에 도움이 되는 실용 지식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개인의 삶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성찰과 실천으로까지 이어지는 배움의 시간이 된다면 의미가 크겠다.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올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처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공부입니다.


- 『희망의 인문학』 중에서



서로 다른 세대의 소통

서로 다른 세대의 소통



어머니 세대와 며느리 세대가 나란히 앉아 디지털 기기를 가르쳐 주고, 간장 담그는 법을 배우듯이, 공동체와 관계된 정치적 견해를 들어주고 때론 공감하면서 더 가까워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차라리 말을 맙시다.”라는 결론 대신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이 여기저기에서 돋아나는 곳이 좀 더 나은 세상인 것은 분명하니까.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은?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빈부격차, 혐오와 차별 등 우리 사회에는 갈등거리들이 지뢰밭 같이 널려있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을 높이면서도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을 방안은 무엇일까요? 파시즘처럼 ‘전체’를 강요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를 가꾸어갈 방법은 무엇일지요?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인문 석학들이 공동체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혜안을 열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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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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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사, 편집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디자인하우스 편집장, 웅진지식하우스와 펭귄클래식코리아 대표, 웅진단행본 본부 대편집자, 인생학교 서울 대표 강사 등 역임.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 이적의 『지문 사냥꾼』 등 200여 권의 책을 기획함. 전국 100여 곳의 도서관, 학교, 기업에서 강의. 문화체육관광부 인문정신문화 진흥심의회 위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웹진 <출판N> 기획위원. 지은 책으로 『마녀체력』, 『마녀엄마』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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