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필연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너무 깊이 신봉하면 광신도나 사상의 노예가 될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는 있다. 또한 갑자기 다가올 행운 같은 우연을 희망하며 사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 상상은 때로 팍팍한 현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모호한 우연과 필연의 관계
철학과 역사학에서 말하는 ‘우연’의 의미는 모호한 데가 있다.
지난 칼럼〈9. 역사 사건의 원인을 정확히 짚을 수 있는가? : 역사 ‘인과론’(2)〉에서는 ‘우연적 원인’에 대한 역사학자 두 사람(E. H. 카와 마르크 블로크)의 견해차를 살펴보았다. 카는 교통사고의 다양한 원인들을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으로 구별한 후 ‘우연적 원인’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블로크는 그러한 분류는 자의적일 뿐이라고 하면서 ‘우연적 원인’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누구의 주장이 옳을까? 사실 이 문제는 역사학이 태동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역사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한 것이었고, 누구도 모두를 설득시킬 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었다.
대다수 역사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검토했는데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역사학도들 입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철학과 역사학에서 말하는 ‘우연’의 의미가 모호한 데 있다. 사전에서는 ‘우연’을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뜻밖에 일어나는 것”으로 풀이하면서 ‘필연(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일)’의 반대말이라 설명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근대 이전까지 2,000여 년 동안 이어진 ‘필연’과 ‘우연’ 논의에서는 양자를 대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연’을 필연 속에 종속시키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왜 그럴까? 학자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유별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연’을 ‘운명의 장난’이라 여긴 점을 상기하자. ‘운명’은 ‘필연’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동양에서도 우발적 불행에 대해 ‘팔자(八字) 소관’이라 운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할 것이다.
결정론 vs 자유의지론
이 논쟁은 서양 철학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논쟁과 관련이 있다.
역사가 필연적으로 전개되느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서양 철학의 ‘결정론(혹은 운명론)과 자유의지론’ 논쟁과 관련이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결정론’은 “모든 일이 자연법칙과 인과 관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보며, 사람의 운명 또한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보는 이론”이고 ‘자유의지론’은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나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이론”으로 ‘비결정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정론’에 대한 위 정의에서는 결정의 주체로 ‘자연법칙과 인과 관계’를 제시하였지만, 현실 세계에서 ‘결정론(혹은 운명론)’을 깊이 신뢰하는 이는 자연법칙이나 인과 관계보다는 ‘신의 섭리(혹은 운명)’를 주체로 믿는 이들이 훨씬 많다. 대표적인 예로 광신도를 들 수 있다.
길거리에서 지나는 사람을 붙들거나, 혹은 가정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하여 “도를 아십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절에 가서 성불합시다.” 하면서 포교하러 다니는 이를 마주치면 그냥 “관심 없습니다.” 하지 않고 오지랖 넓게 도리어 그를 바른길로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종종 있다. 필자도 그랬다. 그 논쟁에서 지기 전까지는.
그 ‘교인’은 필자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미래도 결정해 두었으며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열심히 설파했다. 그러자 필자는 그를 당혹스럽게 할 하나의 묘안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이미 결정해 두신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죽거나 다칠 운명인지 아닌지도 이미 결정되어 있겠네요?”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다(5층이었다).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운명을 결정해 두셨으니 죽지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 조금도 다치지 않을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뛰어내리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저 대답이 터무니없어 보이는가? 사실 전근대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시각도 저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교인’의 주장을 굳이 문제 삼자면 ‘전(前)근대적’이며 ‘종교적’이라는 것 정도이다. 서양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뒤집어 보면 스스로 돕지 않는 자는 하늘이 돕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징벌도 내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진인사이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는 뜻이다.
전근대에는 필연론이 우세, 우연조차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
최성철 저 『역사와 우연』, 역사에서의 ‘우연’의 문제에 대한 서양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오랜 논쟁을 전론(全論)한 연구 서적으로,
본 칼럼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YES24)
또한 저 교인의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란 표현은 전근대 서양 역사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말한 ‘신의 섭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최성철 박사의 저서 『역사와 우연』(2016, 도서출판 길)에 따르면, 전근대의 철학자와 역사학자의 뇌리에는 우연이 끼어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역사가 규칙적으로 순환한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ㆍ로마인들이 역사가 필연적으로 전개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우연을 소홀히 대하지 않고 깊이 검토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진정한 의미의 우연은 없고, 다만 미리 예정된 ‘필연적 우연’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서양 중세에 이르러 기독교가 서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강화되었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이며 따라서 ‘우연’도 “하느님이 미리 알고 정하신 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우연은 없고 오로지 ‘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우연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런 생각은 신의 의지보다 이성과 논리를 믿는 근대 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우연’을 ‘무지(無知)의 도피처’라고 표현함으로써 고대와 중세의 필연론에 힘을 실어 주었다. 즉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 없어서 ‘우연’이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인데, 현대 논리학의 수준에서도 논파하기가 쉽지 않은 주장이다.
18세기 역사철학의 등장 이후에도 ‘필연’이 여전히 우세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신이 창조만 하고 은퇴한 후 세상사는 이성이 관여한다고 생각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신의 섭리’를 ‘이성’으로 바꾸었을 뿐 본질적인 시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칸트(Immanuel Kant)의 경우 “모든 존재는 우연적”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말하는 ‘우연’은 원인이나 인과성이 없다는 전통적 우연의 개념이 아니라 “원인을 갖는 우연”이었다. 이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이성의 간계(奸計, 간사한 계획)’에 따른 역사의 일반적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필연론을 심화시켰다. 마르크스(Karl Marx)는 공산 사회의 성립이 필연이라고 선언했고, 이후 역사가 진보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 이를테면 E. H. 카 같은 역사학자들도 필연성을 강조했다.
현대에 이르러 부각된 ‘우연’ 의 힘
‘우연’이 비로소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임을 인정받게 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론적으로는 양자역학에서 나온 ‘불확정성의 원리’가 전통 물리학의 법칙을 무너뜨린 데 영향을 받아 역사에서의 우연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실제로는 학자들 개개인이 직접 겪은 삶의 실패 경험이 필연성에 대한 믿음을 희석시킨 면도 없지 않아 있다. 기실 수많은 사상가들이 ‘필연’을 믿었던 것은 신 혹은 보이지 않는 힘이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간다는 말)’, ‘인과응보(因果應報,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는 말)’,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을 이행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자들 스스로 연륜이 쌓이면서 인생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게 궁형(宮刑)을 당한 사마천은 자신을 불행한 삶을 산 백이ㆍ숙제와 안회에게 투영하여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묻고, 나아가 “도척이라는 악인은 사람의 고기를 날로 먹으며 천수를 누리다 죽었으니, 이 사람은 무슨 덕이 있어 이런 복을 누렸는가.” 하고 물었고(이전 칼럼〈2.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의 정의와 역사의 효용성〉), 제2차 세계대전에 54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하여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에서의 ‘우연적 원인’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하늘의 도(道)에 도전하거나 우연에 기대는 삶을 살지 않았다. 사마천은 자신이 받은 형벌이 하늘의 도와 부합하지 않음을 항변하면서도 역사 저술을 마감하기 위해 굴욕적인 삶을 감내했고, 마르크 블로크는 이후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사마천과 블로크는 우연에 의해 사필귀정,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목도했음에도 각자 나름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연을 ‘운명의 장난’으로 이해한 전근대인들의 사고를 마냥 유치하거나 광신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필연이냐 우연이냐 하는 논의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역사학 공부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인간의 운명이 정해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종교를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나 공산주의 같은 사상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로또를 살 것인가 주식을 살 것인가 혹은 비트코인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연관이 있다.
‘필연’, ‘우연’ 모두 일리, 다만 지나쳐서는
현진건 소설집 『운수 좋은 날』, ‘호사다마(好事多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들이 있다.
행운은 불행을 동반하고 불행 역시 행운을 동반한다는 말이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은 그러한 인간사를 잘 묘사했다. (이미지 출처: Yes24)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양자 각기 장단점이 있는 바, 양자 모두 소홀히 해서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신봉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사필귀정’,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일단 필연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깊이 신봉하면 광신도가 되거나 사상의 노예가 될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는 있겠다. 또한 필자는 갑자기 다가올 행운 같은 우연을 희망하며 사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그런 상상은 때로 팍팍한 현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다만 온전히 그것만 믿어 도박 같은 일에 빠지는 것은 대체로 끝이 좋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어느 교인이 언급한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스르는 것’, 즉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이 말은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양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고, 동양에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라고 했다. 스스로 돕는 이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이는 하늘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이성으로도(간혹 더디기는 하겠지만 언젠가는) 알아보는 법이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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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06-23
‘사필귀정’,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필연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너무 깊이 신봉하면 광신도나 사상의 노예가 될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는 있다. 또한 갑자기 다가올 행운 같은 우연을 희망하며 사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 상상은 때로 팍팍한 현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모호한 우연과 필연의 관계
철학과 역사학에서 말하는 ‘우연’의 의미는 모호한 데가 있다.
지난 칼럼 〈9. 역사 사건의 원인을 정확히 짚을 수 있는가? : 역사 ‘인과론’(2)〉에서는 ‘우연적 원인’에 대한 역사학자 두 사람(E. H. 카와 마르크 블로크)의 견해차를 살펴보았다. 카는 교통사고의 다양한 원인들을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으로 구별한 후 ‘우연적 원인’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블로크는 그러한 분류는 자의적일 뿐이라고 하면서 ‘우연적 원인’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누구의 주장이 옳을까? 사실 이 문제는 역사학이 태동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역사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한 것이었고, 누구도 모두를 설득시킬 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었다.
대다수 역사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검토했는데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역사학도들 입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철학과 역사학에서 말하는 ‘우연’의 의미가 모호한 데 있다. 사전에서는 ‘우연’을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뜻밖에 일어나는 것”으로 풀이하면서 ‘필연(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일)’의 반대말이라 설명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근대 이전까지 2,000여 년 동안 이어진 ‘필연’과 ‘우연’ 논의에서는 양자를 대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연’을 필연 속에 종속시키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왜 그럴까? 학자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유별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연’을 ‘운명의 장난’이라 여긴 점을 상기하자. ‘운명’은 ‘필연’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동양에서도 우발적 불행에 대해 ‘팔자(八字) 소관’이라 운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할 것이다.
결정론 vs 자유의지론
이 논쟁은 서양 철학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논쟁과 관련이 있다.
역사가 필연적으로 전개되느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서양 철학의 ‘결정론(혹은 운명론)과 자유의지론’ 논쟁과 관련이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결정론’은 “모든 일이 자연법칙과 인과 관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보며, 사람의 운명 또한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보는 이론”이고 ‘자유의지론’은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나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이론”으로 ‘비결정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정론’에 대한 위 정의에서는 결정의 주체로 ‘자연법칙과 인과 관계’를 제시하였지만, 현실 세계에서 ‘결정론(혹은 운명론)’을 깊이 신뢰하는 이는 자연법칙이나 인과 관계보다는 ‘신의 섭리(혹은 운명)’를 주체로 믿는 이들이 훨씬 많다. 대표적인 예로 광신도를 들 수 있다.
길거리에서 지나는 사람을 붙들거나, 혹은 가정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하여 “도를 아십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절에 가서 성불합시다.” 하면서 포교하러 다니는 이를 마주치면 그냥 “관심 없습니다.” 하지 않고 오지랖 넓게 도리어 그를 바른길로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종종 있다. 필자도 그랬다. 그 논쟁에서 지기 전까지는.
그 ‘교인’은 필자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미래도 결정해 두었으며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열심히 설파했다. 그러자 필자는 그를 당혹스럽게 할 하나의 묘안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이미 결정해 두신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죽거나 다칠 운명인지 아닌지도 이미 결정되어 있겠네요?”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다(5층이었다).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운명을 결정해 두셨으니 죽지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 조금도 다치지 않을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뛰어내리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저 대답이 터무니없어 보이는가? 사실 전근대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시각도 저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교인’의 주장을 굳이 문제 삼자면 ‘전(前)근대적’이며 ‘종교적’이라는 것 정도이다. 서양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뒤집어 보면 스스로 돕지 않는 자는 하늘이 돕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징벌도 내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진인사이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는 뜻이다.
전근대에는 필연론이 우세, 우연조차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
최성철 저 『역사와 우연』, 역사에서의 ‘우연’의 문제에 대한 서양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오랜 논쟁을 전론(全論)한 연구 서적으로,
본 칼럼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YES24)
또한 저 교인의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란 표현은 전근대 서양 역사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말한 ‘신의 섭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최성철 박사의 저서 『역사와 우연』(2016, 도서출판 길)에 따르면, 전근대의 철학자와 역사학자의 뇌리에는 우연이 끼어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역사가 규칙적으로 순환한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ㆍ로마인들이 역사가 필연적으로 전개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우연을 소홀히 대하지 않고 깊이 검토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진정한 의미의 우연은 없고, 다만 미리 예정된 ‘필연적 우연’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서양 중세에 이르러 기독교가 서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강화되었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이며 따라서 ‘우연’도 “하느님이 미리 알고 정하신 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우연은 없고 오로지 ‘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우연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런 생각은 신의 의지보다 이성과 논리를 믿는 근대 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우연’을 ‘무지(無知)의 도피처’라고 표현함으로써 고대와 중세의 필연론에 힘을 실어 주었다. 즉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 없어서 ‘우연’이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인데, 현대 논리학의 수준에서도 논파하기가 쉽지 않은 주장이다.
18세기 역사철학의 등장 이후에도 ‘필연’이 여전히 우세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신이 창조만 하고 은퇴한 후 세상사는 이성이 관여한다고 생각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신의 섭리’를 ‘이성’으로 바꾸었을 뿐 본질적인 시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칸트(Immanuel Kant)의 경우 “모든 존재는 우연적”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말하는 ‘우연’은 원인이나 인과성이 없다는 전통적 우연의 개념이 아니라 “원인을 갖는 우연”이었다. 이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이성의 간계(奸計, 간사한 계획)’에 따른 역사의 일반적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필연론을 심화시켰다. 마르크스(Karl Marx)는 공산 사회의 성립이 필연이라고 선언했고, 이후 역사가 진보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 이를테면 E. H. 카 같은 역사학자들도 필연성을 강조했다.
현대에 이르러 부각된 ‘우연’ 의 힘
‘우연’이 비로소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임을 인정받게 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론적으로는 양자역학에서 나온 ‘불확정성의 원리’가 전통 물리학의 법칙을 무너뜨린 데 영향을 받아 역사에서의 우연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실제로는 학자들 개개인이 직접 겪은 삶의 실패 경험이 필연성에 대한 믿음을 희석시킨 면도 없지 않아 있다. 기실 수많은 사상가들이 ‘필연’을 믿었던 것은 신 혹은 보이지 않는 힘이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간다는 말)’, ‘인과응보(因果應報,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는 말)’,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을 이행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자들 스스로 연륜이 쌓이면서 인생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게 궁형(宮刑)을 당한 사마천은 자신을 불행한 삶을 산 백이ㆍ숙제와 안회에게 투영하여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묻고, 나아가 “도척이라는 악인은 사람의 고기를 날로 먹으며 천수를 누리다 죽었으니, 이 사람은 무슨 덕이 있어 이런 복을 누렸는가.” 하고 물었고(이전 칼럼 〈2.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의 정의와 역사의 효용성〉), 제2차 세계대전에 54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하여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에서의 ‘우연적 원인’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하늘의 도(道)에 도전하거나 우연에 기대는 삶을 살지 않았다. 사마천은 자신이 받은 형벌이 하늘의 도와 부합하지 않음을 항변하면서도 역사 저술을 마감하기 위해 굴욕적인 삶을 감내했고, 마르크 블로크는 이후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사마천과 블로크는 우연에 의해 사필귀정,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목도했음에도 각자 나름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연을 ‘운명의 장난’으로 이해한 전근대인들의 사고를 마냥 유치하거나 광신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필연이냐 우연이냐 하는 논의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역사학 공부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인간의 운명이 정해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종교를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나 공산주의 같은 사상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로또를 살 것인가 주식을 살 것인가 혹은 비트코인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연관이 있다.
‘필연’, ‘우연’ 모두 일리, 다만 지나쳐서는
현진건 소설집 『운수 좋은 날』, ‘호사다마(好事多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들이 있다.
행운은 불행을 동반하고 불행 역시 행운을 동반한다는 말이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은 그러한 인간사를 잘 묘사했다. (이미지 출처: Yes24)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양자 각기 장단점이 있는 바, 양자 모두 소홀히 해서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신봉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사필귀정’,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일단 필연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깊이 신봉하면 광신도가 되거나 사상의 노예가 될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는 있겠다. 또한 필자는 갑자기 다가올 행운 같은 우연을 희망하며 사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그런 상상은 때로 팍팍한 현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다만 온전히 그것만 믿어 도박 같은 일에 빠지는 것은 대체로 끝이 좋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어느 교인이 언급한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스르는 것’, 즉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이 말은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양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고, 동양에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라고 했다. 스스로 돕는 이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이는 하늘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이성으로도(간혹 더디기는 하겠지만 언젠가는) 알아보는 법이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10.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 지난 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9. 역사 사건의 원인을 정확히 짚을 수 있는가?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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