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제도의 영역에서 시는 ‘시인’이라는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발표한 문예지에 실렸거나 시집에 실려있는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언제나 반짝거리고 있다. 시인의 직함을 갖지 못한 개인이 더 시적인 문장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사회가 그 사람을 시인으로 승인하고 그가 쓴 것을 시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의 위험성
사람의 정의
무언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맹목을 무릅쓰는 일이다. 가령 한 사람의 특성에 대해 규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〇〇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속성들을 이 문장 안에 구겨 넣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평면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납작한’ 규정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따뜻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면, ‘따뜻함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따라와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그 사람이 겨우 따뜻한 사람이기만 한가‘라는 점이다. 따뜻함은 그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단지 하나의 언어일 뿐이다. 이런 규정들은 그 존재의 풍부한 잠재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규정한다는 것은 이렇게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모험이거나 오만이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중략)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최승자의 시, 「일찍이 나는」 중에서
(출처:『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아무것도 아닌’ 나가 될 때 ‘다른’ 내가 될 수 있어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이미지 출처: YES24)
이 시에 ‘나’는 자신의 근원을 극단적으로 부정한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선언을 통해 자신의 기원을 지워버린다. 이 기이한 자기 부정은 왜 시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부모’와 같은 기원이 있는 존재이고 누군가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나’ 자신은 그 안에 갇히게 된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떠한 존재인가가 결정되면, ‘나’의 잠재성은 제한된다. 극단적으로 우울한 자기 부정처럼 보이는 이 시는, 역설적으로 그 부정을 통해 자기의 다른 잠재성을 시험한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모험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 혹은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다.
위의 시의 ‘나’의 자리에 ‘문학’이라는 말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문학에 대한 부정과 혐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문학의 다른 잠재성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문학에 대한 온갖 정의의 역사들은 그 시대 문학에 대한 관념을 말해주는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한국 문학에만 국한해서 보면 ‘문학’이라는 말은 근대 서구의 ‘Literature’라는 개념에 대한 번역어였고, 이 개념에는 서구의 문학과 장르를 둘러싼 이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의 한국에서는 시와 소설이 아닌 기행문, 편지 같은 글들도 좋은 글로 인식되었으며 문학과 비문학을 구별하지 않았다. 1980년대 노동 문학이 중요한 의제가 되었을 때 ‘노동자들의 수기와 벽보는 왜 문학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 등장했다. 이런 문제 제기에는 ‘서구 부르주아들이 주도한 시와 소설 중심의 상상적인 문학만이 문학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 제도 밖에서 반짝이는 문학적인 것들
제도와 관습상의 구별
문학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에는 ‘제도’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진리를 가리키는 관념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이름의 제도이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이다. 한 시대의 문학 제도가 문학으로 인정해 준 것들만이 문학으로 대접받는다. 어떤 문장들은 시집 안에 들어있지 않지만 무척 시적인 것일 수 있다. 어떤 이미지는 아직 문학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시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차이는 다만 제도의 차이일 뿐이다. 서점의 문학 코너와 비문학 코너는 제도와 관습상의 구별이며, 비문학의 영역에 포함된 책이 강력한 문학성을 가질 수 있다. 문학적인 것은 ‘문학’ 안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학 제도는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구별하려 하지만, (잠재적인) 문학은 그 제도 너머에서 도처에 있다.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오규원의 시, 「버스 정거장에서」 중에서
(출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2006)
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노점의 빈 의자”와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와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특정한 대상이나 문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시적인 것’의 이름이다. 이 시는 문학 제도 안에서의 정형화된 ‘작시법’이 무거워 그걸 버리려는 시인의 욕망을 드러낸다.
문학 제도의 영역에서 시는 ‘시인’이라는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발표한 문예지에 실렸거나 시집에 실려있는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언제나 반짝거리고 있다. 시인의 직함을 갖지 못한 개인이 더 시적인 문장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사회가 그 사람을 시인으로 승인하고 그가 쓴 것을 시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쓰는 것이 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최근에 등단이라는 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제도로서의 문학으로부터 ‘문학’ 그 자체의 활력을 되찾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등단이라는 제한된 절차 없이 문학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문학이 문학 제도라는 틀을 뚫고 나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매일 시를 쓰는 버스 기사의 평범하지만 다른 일주일
영화 <패터슨>의 매일 시를 쓰는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2016)에는 매일 시를 쓰는 버스 운전기사의 평범한 일주일이 등장한다. 그는 반복되는 그러나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무언가를 쓴다. 그는 등단한 적도 없고 시집을 낸 적도 없지만, 시를 쓰고 그 문장들을 가까운 사람과 나눈다. 공인된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쓴 것은 사회와 문학 제도가 ‘시’로 인정해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이 보내는 나날의 삶은 시적인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일상적 삶은 일주일 동안 거의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출근하고 똑같은 업무를 반복하고 퇴근해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과 마을을 산책하고 가까운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일이 그의 일과의 전부이며, 이것은 23번 버스의 노선이 매일 일정한 것과 같다. 일상의 순간과 사물들은 반복되지만 또한 조금씩 다르게 변주된다. 버스의 승객들과 마을의 익숙한 풍경과 일상의 사물들은 매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약간씩 다른 반복 때문에 일상의 시간은 리듬을 갖게 되며, 시 쓰기는 그 리듬에 언어를 부여한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시적 순간들의 리듬을 영화적 리듬으로 만든다.
물어뜯긴 시작 노트, 새롭게 찾아온 시적 순간
영화 <패터슨> 속 ‘패터슨’이 써놓은 시작 노트를 물어 뜯어버린 애완견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의 시작(詩作) 노트를 주말에 애완견이 물어뜯었기 때문에 제도가 인정하는 시인이 되는 길은 더욱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지금처럼 반복될 것이며 또한 변주될 것이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그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고 매 순간 다시 찾아온다. 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시적인 순간은 시작 노트를 애완견이 뜯어버린 그 장면이다. 문자의 기록으로서의 시는 사라졌지만, 패터슨은 시의 다른 시간에 진입한다. 시작 노트의 상실을 안타까워하는 아내에게 그는 “그냥 낱말일 뿐이야, 물 위에 쓴”이라고 말한다. 물 위에 쓴 낱말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종이 위의 기록, 그러니까 문학 제도에 포함될 수 있는 시는 사라졌지만, 그에게는 시적인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기록된 시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들과 미지의 시들이 다시 시적인 순간을 만든다. 도래할 시들은 특정한 시적인 대상을 향하지도 일반적인 ‘시적인 것’의 관념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연하고 임의적으로 삶에 예기치 않게 출현한다. 영화의 마지막, 일본인 시인이 선물한 텅 빈 노트가 가진 잠재성은 도래할 시의 순간을 암시한다. 도래할 시적 순간이 이제 ‘당신’ 앞에 있다.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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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아주 사소한 차이
- 문학이 아닌 모든 것 -
이광호
2021-06-02
음성으로 듣기
8분 36초 읽기문학 제도의 영역에서 시는 ‘시인’이라는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발표한 문예지에 실렸거나 시집에 실려있는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언제나 반짝거리고 있다. 시인의 직함을 갖지 못한 개인이 더 시적인 문장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사회가 그 사람을 시인으로 승인하고 그가 쓴 것을 시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의 위험성
사람의 정의
무언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맹목을 무릅쓰는 일이다. 가령 한 사람의 특성에 대해 규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〇〇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속성들을 이 문장 안에 구겨 넣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평면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납작한’ 규정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따뜻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면, ‘따뜻함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따라와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그 사람이 겨우 따뜻한 사람이기만 한가‘라는 점이다. 따뜻함은 그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단지 하나의 언어일 뿐이다. 이런 규정들은 그 존재의 풍부한 잠재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규정한다는 것은 이렇게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모험이거나 오만이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중략)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최승자의 시, 「일찍이 나는」 중에서
(출처:『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아무것도 아닌’ 나가 될 때 ‘다른’ 내가 될 수 있어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이미지 출처: YES24)
이 시에 ‘나’는 자신의 근원을 극단적으로 부정한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선언을 통해 자신의 기원을 지워버린다. 이 기이한 자기 부정은 왜 시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부모’와 같은 기원이 있는 존재이고 누군가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나’ 자신은 그 안에 갇히게 된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떠한 존재인가가 결정되면, ‘나’의 잠재성은 제한된다. 극단적으로 우울한 자기 부정처럼 보이는 이 시는, 역설적으로 그 부정을 통해 자기의 다른 잠재성을 시험한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모험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 혹은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다.
위의 시의 ‘나’의 자리에 ‘문학’이라는 말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문학에 대한 부정과 혐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문학의 다른 잠재성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문학에 대한 온갖 정의의 역사들은 그 시대 문학에 대한 관념을 말해주는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한국 문학에만 국한해서 보면 ‘문학’이라는 말은 근대 서구의 ‘Literature’라는 개념에 대한 번역어였고, 이 개념에는 서구의 문학과 장르를 둘러싼 이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의 한국에서는 시와 소설이 아닌 기행문, 편지 같은 글들도 좋은 글로 인식되었으며 문학과 비문학을 구별하지 않았다. 1980년대 노동 문학이 중요한 의제가 되었을 때 ‘노동자들의 수기와 벽보는 왜 문학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 등장했다. 이런 문제 제기에는 ‘서구 부르주아들이 주도한 시와 소설 중심의 상상적인 문학만이 문학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 제도 밖에서 반짝이는 문학적인 것들
제도와 관습상의 구별
문학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에는 ‘제도’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진리를 가리키는 관념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이름의 제도이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이다. 한 시대의 문학 제도가 문학으로 인정해 준 것들만이 문학으로 대접받는다. 어떤 문장들은 시집 안에 들어있지 않지만 무척 시적인 것일 수 있다. 어떤 이미지는 아직 문학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시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차이는 다만 제도의 차이일 뿐이다. 서점의 문학 코너와 비문학 코너는 제도와 관습상의 구별이며, 비문학의 영역에 포함된 책이 강력한 문학성을 가질 수 있다. 문학적인 것은 ‘문학’ 안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학 제도는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구별하려 하지만, (잠재적인) 문학은 그 제도 너머에서 도처에 있다.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오규원의 시, 「버스 정거장에서」 중에서
(출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2006)
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노점의 빈 의자”와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와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특정한 대상이나 문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시적인 것’의 이름이다. 이 시는 문학 제도 안에서의 정형화된 ‘작시법’이 무거워 그걸 버리려는 시인의 욕망을 드러낸다.
문학 제도의 영역에서 시는 ‘시인’이라는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발표한 문예지에 실렸거나 시집에 실려있는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언제나 반짝거리고 있다. 시인의 직함을 갖지 못한 개인이 더 시적인 문장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사회가 그 사람을 시인으로 승인하고 그가 쓴 것을 시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쓰는 것이 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최근에 등단이라는 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제도로서의 문학으로부터 ‘문학’ 그 자체의 활력을 되찾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등단이라는 제한된 절차 없이 문학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문학이 문학 제도라는 틀을 뚫고 나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매일 시를 쓰는 버스 기사의 평범하지만 다른 일주일
영화 <패터슨>의 매일 시를 쓰는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2016)에는 매일 시를 쓰는 버스 운전기사의 평범한 일주일이 등장한다. 그는 반복되는 그러나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무언가를 쓴다. 그는 등단한 적도 없고 시집을 낸 적도 없지만, 시를 쓰고 그 문장들을 가까운 사람과 나눈다. 공인된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쓴 것은 사회와 문학 제도가 ‘시’로 인정해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이 보내는 나날의 삶은 시적인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일상적 삶은 일주일 동안 거의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출근하고 똑같은 업무를 반복하고 퇴근해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과 마을을 산책하고 가까운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일이 그의 일과의 전부이며, 이것은 23번 버스의 노선이 매일 일정한 것과 같다. 일상의 순간과 사물들은 반복되지만 또한 조금씩 다르게 변주된다. 버스의 승객들과 마을의 익숙한 풍경과 일상의 사물들은 매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약간씩 다른 반복 때문에 일상의 시간은 리듬을 갖게 되며, 시 쓰기는 그 리듬에 언어를 부여한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시적 순간들의 리듬을 영화적 리듬으로 만든다.
물어뜯긴 시작 노트, 새롭게 찾아온 시적 순간
영화 <패터슨> 속 ‘패터슨’이 써놓은 시작 노트를 물어 뜯어버린 애완견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의 시작(詩作) 노트를 주말에 애완견이 물어뜯었기 때문에 제도가 인정하는 시인이 되는 길은 더욱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지금처럼 반복될 것이며 또한 변주될 것이다. 하지만 시적인 것은 그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고 매 순간 다시 찾아온다. 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시적인 순간은 시작 노트를 애완견이 뜯어버린 그 장면이다. 문자의 기록으로서의 시는 사라졌지만, 패터슨은 시의 다른 시간에 진입한다. 시작 노트의 상실을 안타까워하는 아내에게 그는 “그냥 낱말일 뿐이야, 물 위에 쓴”이라고 말한다. 물 위에 쓴 낱말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종이 위의 기록, 그러니까 문학 제도에 포함될 수 있는 시는 사라졌지만, 그에게는 시적인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기록된 시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들과 미지의 시들이 다시 시적인 순간을 만든다. 도래할 시들은 특정한 시적인 대상을 향하지도 일반적인 ‘시적인 것’의 관념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연하고 임의적으로 삶에 예기치 않게 출현한다. 영화의 마지막, 일본인 시인이 선물한 텅 빈 노트가 가진 잠재성은 도래할 시의 순간을 암시한다. 도래할 시적 순간이 이제 ‘당신’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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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아닌 모든 것] 1.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아주 사소한 차이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1.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아주 사소한 차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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