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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형식을 공유하지 못하는 외계인과 소통이 가능할까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한기호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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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자와 소통할 수 없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사자는 ‘우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계인은 어떨까? 외계인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외계 우주선의 출몰, 정체가 궁금했던 지구인들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2016, 도니 빌뇌브 감독)를 관통하는 주제는 아마 이런 말들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그리고 그 미래에 얼마나 큰 아픔이 있을지 알면서도 그 아픔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의 기억이 헛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미래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에 필자도 깊게 공감했던 영화다. 



아카데미시상식 8개부문 노미네이트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색상 골든글로브 2개부문 노미네이트 올해 최고의 영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SF 컨택트 2월 2일 대개봉 에이미 아담스 제레미 레너 포레스트 휘태커 컨택트 2월 2일 대개봉 그들이 온 이유를 밝혀야 한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SF 컨택트 2월 2일 대개봉

영화 <컨택트>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런데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생각거리가 담겨 있다.

 

느닷없이 낯선 외계인을 만나게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과연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상황에서 시작한다. 지구의 곳곳에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 우주선 12척. 사람들은 놀라움과 공포에 휩싸이고, 각국 정부에서는 전문가들을 차출하여 외계인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팀을 꾸린다. 루이스(배우 에이미 아담스)와 이안(배우 제레미 레너)은 그렇게 차출된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이다.

 

 

영화 컨택트의 등장인물인 루이스와 이안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컨택트>의 등장인물인 루이스와 이안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외국인과는 보디랭귀지로 소통 가능하지만

그런데 외계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다행히 우리는 이 궁금증을 풀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록 외계인은 아니지만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알고 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좋겠지만 서로의 말을 전혀 모르더라도 손짓, 발짓을 동원하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기본적인 소통은 가능해진다.


실제로 필자도 그런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 때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영어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영어 점수도 형편없었던 필자가 영어만 사용할 줄 아는 영국인과 며칠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 영국인은 청각 장애인이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영국 사람들도 그의 발음을 쉽게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꽤 훌륭하게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 비결은 다들 짐작하겠지만 손과 발, 표정, 제스처를 이용한 행동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눴던 소통의 원리는 우리가 다 알고 있고 이미 겪어온 일이다. 갓 태어났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말문이 트이자마자 몇 년도 되지 않아 능숙한 수다쟁이로 변모한다. 여기에는 단순한 몇 가지 장치의 도움만 있으면 된다.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엄마”라고 하거나 손으로 젖병을 들어 보이면서 “맘마”라고 소리를 냄으로써 언어 습득의 첫 단계인 사물의 이름을 배우기 시작하며 한 단계씩 수준을 높여나간다. 지시적 행동과 발화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필수적인 두 요소이다. 

 

 

낯선 언어의 번역은 불확정적일 수밖에

그런데 분석 철학의 역사에서 획을 그은 철학자 W.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은 낯선 언어의 번역이 불확정적임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사유 실험을 제안한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낯선 지역의 원주민을 만난 자리에 토끼 한 마리가 뛰어 지나갈 때, 그 모습을 가리키며 그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외친다면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쉽게 ‘토끼’라고 결론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토끼의 한 장면’을 의미하는지, ‘토끼다움’을 의미하는지, ‘토끼 이데아의 현시’를 의미하는지, ‘토끼 부분들의 총체’를 의미하는지, 심지어 ‘토끼의 귀’나 ‘토끼의 털’을 의미하는지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문제에 부딪혔을 때 또다시 그중 무엇이 맞는 번역인지 확정 짓기 위해 더 세부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 그런다 한들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들은 결국 지시적 행동과 그에 수반하는 언어적 표현뿐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지시적 행위가 가리킬 수 있는 의미는 무수히 많을 수 있기에 의미의 확정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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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철학 교수 윌러드 밴 오먼 콰인(1908~2000)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콰인은 이러한 사유 실험을 통해 경험적 상황과 낯선 언어 표현을 하나의 의미로 묶어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지적하며, 번역은 두 의미 영역의 총체가 만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9절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저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형식(forms of life)을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쯤에서 철학의 수렁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라본다면 어떤가? 우리는 정말 외국어를 번역하지 못하고 새로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물론 가끔 그런 일이 있기는 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캥거루에 대한 일화가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캥거루’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동물의 이름이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사실을 암시해준다. 결국 우리는 ‘캥거루’가 원래 어떤 뜻인지 알게 되지 않았는가!

 

 

소통의 비결은 ‘같은 신체 구조’와 ‘삶의 형식 공유’

만일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이 액면 그대로 적용된다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언어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뜻밖에도 잘 소통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형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에서 나온다. 비록 미국의 문화가 있고 한국의 문화가 있고, 원주민의 문화가 따로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모두 보편적인 인간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동일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진화의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영화 컨택트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촉수를 가진 외계 생물체인 ‘칠발이(heptapod)’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컨택트>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촉수를 가진 외계 생물체인 ‘칠발이(heptapod)’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외계인과도 그러면 딱 좋으련만…… 아뿔싸! 그들에게 손가락이 없다면? 눈이 없다면? 소리를 낼 입이 없다면? 신체적인 조건이 다르고, 각 신체 부위를 사용하는 방식과 의미가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언뜻 보면 머리 잘린 오징어처럼 생긴 ‘칠발이(heptapod, 일곱 개의 촉수를 가지고 있음)’들은 우리와 닮은 점이 거의 없다. 일단 눈, 코, 입, 귀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얼굴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가끔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일정한 규칙을 가진 것 같지도 않다. 복잡한 무늬로 이뤄진 환형 문자를 통해 소통을 하지만, 일정한 규칙이 없는 일종의 상형문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신체 구조의 문제는 아니다. 아니, 보다 적절히 말하자면 신체 구조의 차이는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형식의 차이를 만들고, 결국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번역은 단어와 단어의 교환이 아니라 문화의 만남이고, 내가 저들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언어가 통하고 규칙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삶의 형식이 일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II xi, 223쪽

 

 

외계인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자와 소통할 수 없는 것은 단순한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사자와 우리는 삶의 형식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사자는 ‘우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계인은 어떨까? 외계인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분명 그들은 우리와 다른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사자보다 더 기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렵긴 하지만 결국 소통에 성공하게 된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을 말했다. 그리고 ‘삶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신체 조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을 가리키는 행위,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발화, 그리고 그 양자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은 분명 신체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학습되고 번역되는 자연 언어(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비슷한 암시를 한다. 외계인의 등장에 동원된 인물에는 언어학자인 루이스뿐만 아니라 물리학자 이안도 있었다. 2진법을 사용하는 물리학자가 외계인과의 소통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실제로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물리학자가 동원된 역사가 존재한다. 

 

 

외계인과 소통 위해 우주선에 실린 디스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1977년에 발사한 무인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에는 12인치짜리 금속 재질의 디스크가 실려 있다. 그 디스크 안에는 어쩌면 만날지도 모를 외계인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천체물리학자인 칼 세이건이 기획한 이 메시지에는 지구상의 다양한 모습을 찍은 사진과 음향, 세계 각국의 인사말, 음악 등이 포함되어 있다. 메시지에는 자연 언어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또 상당한 양의 비언어적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디스크를 작동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텐데, 외계인이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킬 수 있을까? 작동법을 매뉴얼로 적어서 보내주고 싶지만 그들의 언어를 우리는 모르는데? 게다가 그들이 어떤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칼 세이건은 디스크 표면에 디스크 작동법을 그림과 2진법을 이용한 수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다. 거기엔 어떤 자연언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저 1호(좌)와 2호(우) 모습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보이저 1호(좌)와 2호(우) 모습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보이저 1, 2호에 실린 디스크 ‘Golden Disk' 앞, 뒷모습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보이저 1, 2호에 실린 디스크 ‘Golden Disk' 앞, 뒷모습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언어로 소통한다. 그런데 소통의 토대가 되는 삶의 형식은 상당 부분 우리의 신체적 조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통의 기본 조건이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것이고, 삶의 형식이 신체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외계인과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인간과 너무나 다른 외계인과 삶의 형식을 공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칼 세이건은 그런 믿음으로 디스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우주에 퍼져 있는 지성, 또는 합리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영화와 드라마(웹툰, 만화 등 포함)는 내 일도 아닌데 마치 내 일처럼 함께 웃고 울고 한숨쉬고 기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을 가진 대중문화콘텐츠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대리만족을 통해 잠시 재밌고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도록 하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일까.  평소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영화(드라마) 속에 숨겨져 있어 미처 눈치채기 힘들었던 세상과 인생에 관한 질문, 이들을 낳은 시대적 상황,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해당 작품을 흥미롭게 살펴본 철학자들을 통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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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한기호

성균관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선생님들의 모임인 ‘지혜사랑’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어린이 철학책을 펴냈다. 그동안 어린이 잡지 《위즈키즈》에 철학 만화 〈열두 살의 철학자〉를, 《초등독서평설》에 철학 동화 〈바름이와 조은이의 철학 속 세상〉을 연재했으며, 지은 책으로 『얘들아, 철학 하자!』, 『아홉 살의 논리 여행』, 『초등 철학교과서(마음과심리편)』 등이 있으며 함께 펴낸 책으로 『중학생 토론학교 과학과 기술』, 『과학기술 글쓰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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