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실을 곧이곧대로 적겠다는 소신이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물론 국가의 정사(正史)에서는 도의와 명분을 지키다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이를 부도덕한 이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다.
승자는 진실이 담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진실은 이미 상자를 나와 날개를 달고 퍼져나간 뒤였다.
역사에 관한 격언들과 의미의 복합성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명제 가운데는 위인이 남긴 격언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그러한 것을 꼽아보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등을 들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은 단재 신채호가 한 말이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근거가 없다.1) 정확한 출처를 알고 싶었던 역사 전공자와 애호가 다수가 신채호의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런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이 말은 출처가 불명하고 뜻도 명확하지 않지만, 사용법은 일정하다. 대개 우리 민족이 이민족으로부터 겪은 수난사와 더불어 등장한다. “민족의 원한을 잊지 말자”라는 비장하고 무서운 메시지인데, 그런 면에서 신채호가 거론된 건 단순 오류가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역사에 만약은 없다”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같은 말은 일부 곡해하여 엉뚱하게 사용하는 문제가 있을 뿐, 역사학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표현이다. 곡해하는 이가 종종 있는 것은 이 말들이 복합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역사 이야기가 담긴 보따리를 풀어놓을 때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즐겨 사용하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며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겠다면서도 실제로는 바로 그 ‘승자의 기록’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이 가운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것은 ‘역사 인과론’과 직결되므로 다음 8회 칼럼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 칼럼에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문제를 다루어보겠다.
역사적 진실의 탐구와 구명을 위한 ‘방법론적 회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시초에 대해서는 대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Those who tell the stories rule society.”라는 말이나 로마의 속담을 든다. 하지만 이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근대 이후, 특히 현대의 일로, 근대 회의주의(懷疑主義)의 정신과 관련이 있다. 3회 칼럼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에서 소개했듯이, 중세까지는 정치나 종교의 위세를 업은 기록들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기 쉽지 않았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근대정신의 태동과 사료비판 방법의 발달로 비로소 기록들을 회의하고 재검토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양 근대철학의 선구자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제기한 ‘회의’는 진리 탐구를 위한 방법론적 회의다. 비록 데카르트 본인은 중세까지의 역사학의 실상에 넌덜머리를 내고 역사학을 매도했지만, 근대 역사학은 그의 ‘방법론적 회의’에 많은 은총을 입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을 종종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의 탐구와 구명을 위한 방법론적 회의의 일환이다.
‘방법론적 회의’를 제기한 데카르트(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동양에서는 당나라의 역사가 유지기(661~721)의 『사통(史通)』2)과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1681~1764)의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역사를 읽고 성패를 헤아린다)」라는 논설에서 결과의 좋고 나쁨을 두고 그에 부합하는 원인을 찾는 역사서술법을 지적한 것이 유사한 맥락이다. 특히 성호 이익은 “역사란 이미 성패가
결정된 후에 쓰여지기 때문에 그 성패에 따라 아름답게 꾸미기도 하고 나쁘게 깎아내리기도 하여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만든다. 또한 선한 쪽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많이 숨기고, 악한 쪽으로부터는 그 좋은 부분을 반드시 없애버린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에 대한 판별이나 선악에 따르는 응보가 마치 징험(徵驗, 징조를 경험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그러므로) 천년이 지난 뒤에 어떻게 참으로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2) 유지기 『사통(史通)』, “아름다운 자에 대해 그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니, 비록 악함이 있더라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 악한 자에 대해 그가 악하기 때문에 악하게 여기는 것이니, 비록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통계적으로는 사실과 가깝다. 승자의 선행을 열거하며 찬양하고 패자의 잘못을 드러내어 꾸짖는 역사서술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이 말은 과거의 역사서술이 민중의 역할을 배제한 것을 비판하는 말이라는 데서 큰 의의가 있다. 즉 과거의 역사 기록은 대개 ‘권력자의 역사’ 하나의 관점이었지만, 실제 역사의 다수는 권력자가 아니라 민중인 바 역사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민중의 시각을 비롯한 다양한 관점의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성호 이익의 논설도 그런 입장의 지적이며, 현대에 이르러 역사 기록에서 소외된 계층의 집단기억을 재생시키고자 하는 노력,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표방하는 역사학이 태동한 것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시각이 바탕이 된 면이 있다.
패자와 소외된 계층의 집단기억까지 없애기는 어려워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가능한 것은 승자 또는 권력자가 기록을 독점하여 패자 또는 소외된 계층의 역할을 기록에서 배제하였더라도 그들의 집단기억까지 말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승자 또는 권력자가 패자 또는 소외된 계층의 집단기억까지 말살했을 것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역사학의 전통, 특히 동양 역사학의 유학적 전통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상상이다.
전근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실을 곧이곧대로 적겠다는 소신이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물론 국가의 정사(正史)에서는 도의와 명분을 지키다 역적으로 몰려 사사(賜死, 임금이 사약을 내려 죽도록 하는 일)된 이를 부도덕한 이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다. 승자는 진실이 담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진실은 이미 상자를 나와 날개를 달고 퍼져나간 뒤였다. 가령 『세조실록』에서는 사육신이 국문(鞫問,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에 의해 죄인을 심문하던 일) 과정에서 곤장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줄줄이 자복(自服.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함)한 것으로 서술하였지만, 생육신 남효온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들의 당당한 기개를 후세에 남겼다.
사실 『세조실록』의 사육신 공초(供草, 조선 시대 범죄자를 심문한 내용을 담은 문서) 기록은 「육신전」이 전하지 않더라도 『세조실록』의 행간만 꼼꼼히 살펴보아도 자체 모순이 드러나는 뻔한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그런데 거짓말의 혐의를 찾을 수 없는데도 무턱대고 역사 기록이 거짓이라 단정하고 정반대로 해석하는 역사 평설이나 저서들이 적지 않다.
가령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비운의 정복 군주로 묘사한다든가, 폐위된 광해군을 성군(聖君)으로 칭송하는 평설이나 저서들이 그러하다. 그런 발상의 출발점은 역시 의자왕과 광해군이 패자이기 때문인데, 나름 그럴듯한 구색도 갖추고 있다. 가령 의자왕의 상징처럼 연상되는 ‘삼천궁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들거나, 광해군이 중립 외교를 하고 및 대동법을 시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그런 근거는 사실 허수아비 치기나 허상에 불과하다.
의자왕과 광해군, 칭송을 위한 억지 해석
의자왕을 비운의 정복 군주라고 칭송하는 평설이나 저서에서는 의자왕이 재위 초반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부각한다. 그러면서 의자왕 재위 후반기의 실정(失政, 정치를 잘못하는 것)에 대한 기록은 승자인 신라의 역사가 또는 신라를 추앙한 후대의 역사가가 의자왕을 의도적으로 폄훼할 목적으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함께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점이다. 즉 의자왕은 당나라에 잡혀가서 죽었고 정황상 ‘삼천궁녀’도 존재할 수 없는바, 의자왕에 대한 역사 왜곡이 가해진 것이 확인되므로, 재위 후반기의 실정 기록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낙화암(타사암) 설화는 의자왕을 폄훼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미화한 것이었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왕성(사비성, 충남 부여, 백제 말기의 왕성)을 몰래 빠져나와 웅진(사비 이전의 백제 수도, 충남 공주)으로 도피하였다가 웅진성의 사령관에게 체포되어 나당연합군에게 바쳐지는 굴욕을 겪었는데, 타사암 설화에서는 의자왕과 후궁들이 “차라리 자진할망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라고 결단하여 함께 투신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궁녀의 수가 ‘삼천’이라는 것도 승자인 신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삼천궁녀’는 후대 문인들의 작품이다. 원전(原典)인 『백제고기』3) 에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삼천’이 존재하지 않았고, 투신이 실제와 다른 뜬소문이라는 것도 『삼국유사』에서 이미 논증한 바 있었다. 그런데 후대의 문인들은 문학적 상상력을 버리기 아깝고 안타깝게 희생된 영혼이 많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지, 『삼국유사』의 논증은 무시하고 설화 내용만 인용했고 마침내 궁녀의 수를 ‘삼천’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삼천궁녀’라는 단어를 통해 의자왕의 성(性) 문란을 상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삼천궁녀’ 문제는 조선 시대 문인들과 현대 호사가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일 뿐 승자인 신라 또는 신라를 추앙하는 역사가가 조작한 것이 아니었다.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자부터 고려ㆍ조선 시대의 사가들을 거쳐 근현대의 역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주로 지적한 건 삼천궁녀가 아니라 백제 지배층의 내분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또 누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다. 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고구려의 승려 도현(道顯)이 지은 『일본세기(日本世記)』에서도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라고 평가했고, 이 평가가 역시 백제에 우호적이었던 왜국이 지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대로 인용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
3) 『백제고기』는 전하지 않는 사서이며, 타사암 설화와 관련한 문장이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다.
4) 『일본세기(日本世記)』는 백제ㆍ고구려 멸망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승려 도현이 덴지 천황의 요청에 따라 다이안지(大安寺)라는 절에서 편찬한 역사서이다. 현존하지 않고 『일본서기』에 인용된 각주 3번으로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라는 표현과 이어지는 문장이 그중에 하나이다.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책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광해군에 관해서는 학계 연구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았고, 근자에는 역사 평설가나 작가들의 호평과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으로, 그가 성군이며 그에 대한 나쁜 기록은 누명일 것이라 여기는 이가 매우 많다. 물론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과 재위 전반기에 겪은 일들과 당시의 내외 정세를 상기하면 그를 무작정 비난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해군을 성군으로 여긴다든가 역사 기록에 보이는 그의 용렬함을 무작정 거짓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성호 이익의 지적처럼 폐위된 왕이므로 잘한 일보다 용렬함이나 패륜적인 언행을 많이 부각하여 서술한 것일 뿐, 없는 사실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5)
5) 광해군을 성군으로 칭송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오항녕 교수의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을 추천할 만하다.
진실 찾기를 위한 의심과 회의는 필요하지만
전통적으로 역사학은 원인 탐구와 교훈 전달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승자나 성공한 자에 대해서는 승리나 성공의 원인을, 패자에 대해서는 실패의 원인을 찾아서 부각했고 그 반대되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앞서 소개한 성호 이익의 지적이 바로 이것이다). 사료 비판에 익숙한 역사학자들은 그런 면을 인지하고 역사 기록을 의심하고 회의한다. 즉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회의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을 역사 토론에서 불리한 기록이 등장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역사무용론을 설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은 오늘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연원이 있다. 그러면 이 말을 계속 써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한 회의, 즉 데카르트식의 방법론적 회의라면 써도 무방하지만, 무작정 뒤집어보는 발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빛과 그림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빛과 그림자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03-10
전근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실을 곧이곧대로 적겠다는 소신이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물론 국가의 정사(正史)에서는 도의와 명분을 지키다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이를 부도덕한 이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다.
승자는 진실이 담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진실은 이미 상자를 나와 날개를 달고 퍼져나간 뒤였다.
역사에 관한 격언들과 의미의 복합성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명제 가운데는 위인이 남긴 격언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그러한 것을 꼽아보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등을 들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은 단재 신채호가 한 말이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근거가 없다.1) 정확한 출처를 알고 싶었던 역사 전공자와 애호가 다수가 신채호의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런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이 말은 출처가 불명하고 뜻도 명확하지 않지만, 사용법은 일정하다. 대개 우리 민족이 이민족으로부터 겪은 수난사와 더불어 등장한다. “민족의 원한을 잊지 말자”라는 비장하고 무서운 메시지인데, 그런 면에서 신채호가 거론된 건 단순 오류가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 신채호의 말이라고 확산된 것은 MBC <무한도전> 방송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뉴스톱 팩트체크의 “[가짜명언 팩트체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무한도전이 퍼뜨린 가짜 신채호 명언”에서 잘 정리한 바 있다.
신채호 선생(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에 반해 “역사에 만약은 없다”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같은 말은 일부 곡해하여 엉뚱하게 사용하는 문제가 있을 뿐, 역사학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표현이다. 곡해하는 이가 종종 있는 것은 이 말들이 복합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역사 이야기가 담긴 보따리를 풀어놓을 때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즐겨 사용하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며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겠다면서도 실제로는 바로 그 ‘승자의 기록’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이 가운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것은 ‘역사 인과론’과 직결되므로 다음 8회 칼럼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 칼럼에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문제를 다루어보겠다.
역사적 진실의 탐구와 구명을 위한 ‘방법론적 회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시초에 대해서는 대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Those who tell the stories rule society.”라는 말이나 로마의 속담을 든다. 하지만 이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근대 이후, 특히 현대의 일로, 근대 회의주의(懷疑主義)의 정신과 관련이 있다. 3회 칼럼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에서 소개했듯이, 중세까지는 정치나 종교의 위세를 업은 기록들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기 쉽지 않았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근대정신의 태동과 사료비판 방법의 발달로 비로소 기록들을 회의하고 재검토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양 근대철학의 선구자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제기한 ‘회의’는 진리 탐구를 위한 방법론적 회의다. 비록 데카르트 본인은 중세까지의 역사학의 실상에 넌덜머리를 내고 역사학을 매도했지만, 근대 역사학은 그의 ‘방법론적 회의’에 많은 은총을 입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을 종종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의 탐구와 구명을 위한 방법론적 회의의 일환이다.
‘방법론적 회의’를 제기한 데카르트(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동양에서는 당나라의 역사가 유지기(661~721)의 『사통(史通)』2)과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1681~1764)의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역사를 읽고 성패를 헤아린다)」라는 논설에서 결과의 좋고 나쁨을 두고 그에 부합하는 원인을 찾는 역사서술법을 지적한 것이 유사한 맥락이다. 특히 성호 이익은 “역사란 이미 성패가 결정된 후에 쓰여지기 때문에 그 성패에 따라 아름답게 꾸미기도 하고 나쁘게 깎아내리기도 하여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만든다. 또한 선한 쪽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많이 숨기고, 악한 쪽으로부터는 그 좋은 부분을 반드시 없애버린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에 대한 판별이나 선악에 따르는 응보가 마치 징험(徵驗, 징조를 경험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그러므로) 천년이 지난 뒤에 어떻게 참으로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2) 유지기 『사통(史通)』, “아름다운 자에 대해 그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니, 비록 악함이 있더라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 악한 자에 대해 그가 악하기 때문에 악하게 여기는 것이니, 비록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통계적으로는 사실과 가깝다. 승자의 선행을 열거하며 찬양하고 패자의 잘못을 드러내어 꾸짖는 역사서술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이 말은 과거의 역사서술이 민중의 역할을 배제한 것을 비판하는 말이라는 데서 큰 의의가 있다. 즉 과거의 역사 기록은 대개 ‘권력자의 역사’ 하나의 관점이었지만, 실제 역사의 다수는 권력자가 아니라 민중인 바 역사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민중의 시각을 비롯한 다양한 관점의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성호 이익의 논설도 그런 입장의 지적이며, 현대에 이르러 역사 기록에서 소외된 계층의 집단기억을 재생시키고자 하는 노력,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표방하는 역사학이 태동한 것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시각이 바탕이 된 면이 있다.
패자와 소외된 계층의 집단기억까지 없애기는 어려워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가능한 것은 승자 또는 권력자가 기록을 독점하여 패자 또는 소외된 계층의 역할을 기록에서 배제하였더라도 그들의 집단기억까지 말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승자 또는 권력자가 패자 또는 소외된 계층의 집단기억까지 말살했을 것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역사학의 전통, 특히 동양 역사학의 유학적 전통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상상이다.
전근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실을 곧이곧대로 적겠다는 소신이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물론 국가의 정사(正史)에서는 도의와 명분을 지키다 역적으로 몰려 사사(賜死, 임금이 사약을 내려 죽도록 하는 일)된 이를 부도덕한 이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다. 승자는 진실이 담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진실은 이미 상자를 나와 날개를 달고 퍼져나간 뒤였다. 가령 『세조실록』에서는 사육신이 국문(鞫問,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에 의해 죄인을 심문하던 일) 과정에서 곤장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줄줄이 자복(自服.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함)한 것으로 서술하였지만, 생육신 남효온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들의 당당한 기개를 후세에 남겼다.
사실 『세조실록』의 사육신 공초(供草, 조선 시대 범죄자를 심문한 내용을 담은 문서) 기록은 「육신전」이 전하지 않더라도 『세조실록』의 행간만 꼼꼼히 살펴보아도 자체 모순이 드러나는 뻔한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그런데 거짓말의 혐의를 찾을 수 없는데도 무턱대고 역사 기록이 거짓이라 단정하고 정반대로 해석하는 역사 평설이나 저서들이 적지 않다.
가령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비운의 정복 군주로 묘사한다든가, 폐위된 광해군을 성군(聖君)으로 칭송하는 평설이나 저서들이 그러하다. 그런 발상의 출발점은 역시 의자왕과 광해군이 패자이기 때문인데, 나름 그럴듯한 구색도 갖추고 있다. 가령 의자왕의 상징처럼 연상되는 ‘삼천궁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들거나, 광해군이 중립 외교를 하고 및 대동법을 시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그런 근거는 사실 허수아비 치기나 허상에 불과하다.
의자왕과 광해군, 칭송을 위한 억지 해석
의자왕을 비운의 정복 군주라고 칭송하는 평설이나 저서에서는 의자왕이 재위 초반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부각한다. 그러면서 의자왕 재위 후반기의 실정(失政, 정치를 잘못하는 것)에 대한 기록은 승자인 신라의 역사가 또는 신라를 추앙한 후대의 역사가가 의자왕을 의도적으로 폄훼할 목적으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함께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점이다. 즉 의자왕은 당나라에 잡혀가서 죽었고 정황상 ‘삼천궁녀’도 존재할 수 없는바, 의자왕에 대한 역사 왜곡이 가해진 것이 확인되므로, 재위 후반기의 실정 기록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낙화암(타사암) 설화는 의자왕을 폄훼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미화한 것이었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왕성(사비성, 충남 부여, 백제 말기의 왕성)을 몰래 빠져나와 웅진(사비 이전의 백제 수도, 충남 공주)으로 도피하였다가 웅진성의 사령관에게 체포되어 나당연합군에게 바쳐지는 굴욕을 겪었는데, 타사암 설화에서는 의자왕과 후궁들이 “차라리 자진할망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라고 결단하여 함께 투신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궁녀의 수가 ‘삼천’이라는 것도 승자인 신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삼천궁녀’는 후대 문인들의 작품이다. 원전(原典)인 『백제고기』3) 에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삼천’이 존재하지 않았고, 투신이 실제와 다른 뜬소문이라는 것도 『삼국유사』에서 이미 논증한 바 있었다. 그런데 후대의 문인들은 문학적 상상력을 버리기 아깝고 안타깝게 희생된 영혼이 많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지, 『삼국유사』의 논증은 무시하고 설화 내용만 인용했고 마침내 궁녀의 수를 ‘삼천’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삼천궁녀’라는 단어를 통해 의자왕의 성(性) 문란을 상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삼천궁녀’ 문제는 조선 시대 문인들과 현대 호사가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일 뿐 승자인 신라 또는 신라를 추앙하는 역사가가 조작한 것이 아니었다.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자부터 고려ㆍ조선 시대의 사가들을 거쳐 근현대의 역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주로 지적한 건 삼천궁녀가 아니라 백제 지배층의 내분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또 누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다. 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고구려의 승려 도현(道顯)이 지은 『일본세기(日本世記)』에서도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라고 평가했고, 이 평가가 역시 백제에 우호적이었던 왜국이 지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대로 인용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
3) 『백제고기』는 전하지 않는 사서이며, 타사암 설화와 관련한 문장이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다.
4) 『일본세기(日本世記)』는 백제ㆍ고구려 멸망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승려 도현이 덴지 천황의 요청에 따라 다이안지(大安寺)라는 절에서 편찬한 역사서이다. 현존하지 않고 『일본서기』에 인용된 각주 3번으로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라는 표현과 이어지는 문장이 그중에 하나이다.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책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광해군에 관해서는 학계 연구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았고, 근자에는 역사 평설가나 작가들의 호평과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으로, 그가 성군이며 그에 대한 나쁜 기록은 누명일 것이라 여기는 이가 매우 많다. 물론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과 재위 전반기에 겪은 일들과 당시의 내외 정세를 상기하면 그를 무작정 비난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해군을 성군으로 여긴다든가 역사 기록에 보이는 그의 용렬함을 무작정 거짓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성호 이익의 지적처럼 폐위된 왕이므로 잘한 일보다 용렬함이나 패륜적인 언행을 많이 부각하여 서술한 것일 뿐, 없는 사실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5)
5) 광해군을 성군으로 칭송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오항녕 교수의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을 추천할 만하다.
진실 찾기를 위한 의심과 회의는 필요하지만
전통적으로 역사학은 원인 탐구와 교훈 전달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승자나 성공한 자에 대해서는 승리나 성공의 원인을, 패자에 대해서는 실패의 원인을 찾아서 부각했고 그 반대되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앞서 소개한 성호 이익의 지적이 바로 이것이다). 사료 비판에 익숙한 역사학자들은 그런 면을 인지하고 역사 기록을 의심하고 회의한다. 즉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회의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을 역사 토론에서 불리한 기록이 등장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역사무용론을 설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은 오늘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연원이 있다. 그러면 이 말을 계속 써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한 회의, 즉 데카르트식의 방법론적 회의라면 써도 무방하지만, 무작정 뒤집어보는 발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7.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빛과 그림자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6. ‘민족주의’와 ‘국뽕’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빛과 그림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0)
바꾸기 쉽지 않은 현실 속 탈출구, 청년 세대의 ‘회귀...
이상연
7. “없는 것도 있는 것만큼 있다.”
김헌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