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단서와 특이점은 곧 발견된다. 마룻바닥을 까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정신질환자들의 특이성은 곧 ‘협동조합 180’이 일과 활동 전반을 재편하고 하나의 사업체로서의 면모를 갖게 만든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가진 역량에 따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결국 활력과 생명 에너지를 북돋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누구든 1인 1표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민주적 질서가 자리잡은 협동조합은 정신질환자들의 자율성을 더욱 배가시키는... ...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아킬레우스(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트로이아 전쟁1)의 최고 영웅은 단연 아킬레우스입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운명의 길이 놓여 있었지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조국에서 왕 노릇하며 곱게 늙어갈 것이지만, 전쟁에 참여하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는 거였어요. 선택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누가 일찍 죽는 전쟁의 길로 가겠습니까?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선택에 덧붙는 다른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을 피하면 장수를 누리지만 죽고 나면 곧 잊히는 반면, 전쟁에 참여하면 단명하지만 죽은 후에 불멸의 명성이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멸의 존재로 남는 길로 들어선 겁니다.
1) 트로이아 전쟁 : 기원전 13-12세기 경에 일어났다는 트로이아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전설적인 전쟁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죽음에 대한 투쟁의 총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재를 지속시키려고 합니다. ‘존재는 소멸에 대한 투쟁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죽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을까? 평화로운 일상으로 오래 사는 것, 나쁘지는 않지만 결국 죽겠지? 오래 살든, 단명하든 어차피 죽는다면,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 더 좋겠군! 멋지게 싸우다 아름답게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기억하고 노래할 거야.’ 그래서 그는 죽음이 일렁이는 전쟁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빛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었고, 마침내 불멸의 명성을 남겼지요. 성공한 겁니다. 지금 저도 그를 생각하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여러분은 제가 쓴 글을 읽으면서 아킬레우스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하니까요.
물론, 아킬레우스가 진짜로 살아 있는 건 아닙니다. 저승 세계에 있다고요? 그런데 그가 거기서 자신을 기억하며 이야기하는 우리를 보고 흐뭇해할까요?
“죽음에 대해서 나에게 그럴듯하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왕 노릇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승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고 팔고 싶으니까!”(『오뒷세이아』11권 488-491행)라고 말할 겁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내 모습 이대로 살아 숨 쉬는 게 진짜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영원함? 감각에 의존 말고 이성만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런데 정말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는 걸까요?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을까요?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년 ~ 475년. 그리스의 철학자)보다 한 세대쯤 후에 태어난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0년~ 450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니 늙고 죽을 일도 없겠지요.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는 겁니다. 그의 믿음대로라면 우리에게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능할까요?
그는 감각에 의존하는 판단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오로지 이성에 따라,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는 겁니다. 그래야 감각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있는 것은 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없는 것은 없다.” 하나마나 한 소리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매우 진지하고 단호한 파르메니데스의 표정이 느껴집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잖아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바로 이 말을 통해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생성소멸의 여지를 깨끗이 없애버리고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듭니다.
단풍? 운동?... 있는 건 늘 있고 없는 건 늘 없는데
빨갛게 물들어가는 초록 잎의 단풍
먼저 생성부터 볼까요.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것은 ‘없던 것’이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없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없던 것’을 지워야 합니다. 결국 ‘있는 것’만 남게 되지요. 그러면 ‘없던 것’이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니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뭔가가 생겨나는 일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반대로 소멸은 ‘있던 것’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없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있던 것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어야만 합니다. 묘하지요?
변화는 어떨까요? 초록색 잎에 빨간 단풍이 드는 것, 분명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일어나려면, 잎에 있던 초록색이 없어지고 없던 빨강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있던 것이 없는 것이 되고, 없던 것이 있는 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단풍이 드는 변화는 있을 수가 없지요.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도(기원전 490년~430년) 스승의 주장을 거들지요. 운동도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운동이란 여기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저쪽으로 가 있는 거잖아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으니, 이 문장에서 없다는 표현을 모두 지우면, 그 어떤 것도 운동할 수 없고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그 자리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제논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 뒤에서 출발한다면, 절대로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려면, 거북이가 있는 곳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때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보다는 조금 더 나아갑니다. 다시 아킬레우스가 거북이 있는 곳에 이르면, 거북이는 또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서 가겠지요.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힐 수는 있지만,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는 거예요.
존재는 단 하나, 여럿처럼 보여도 연결된
영원
생성소멸도 변화도, 운동도 없다는 주장에 덧붙여, 그들의 마지막 결론은 엄청납니다. 수많은 사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존재는 단 하나고 쭉 연결되어 통째라는 거예요. 여럿이 있으려면, 여럿사이에 공간이나 경계선이 있어야겠지요? 그것들이 없다면 없는 것은 없다는 원칙에 따라 지워지니까, 여럿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쭉 연결될 겁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있는 것이니 모든 개체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한 덩어리가 되겠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사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가을이면 불타는 단풍이 산을 물들이고,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쯤이야 쉽게 추월할 수 있다고요? 그건 그저 우리 눈에, 감각에 포착되는 현상일 뿐, 진실이 아니랍니다.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감각을 꼭 닫고 오로지 이성으로만, 논리로만 생각해야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요.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말하는 겁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있는 모든 것은 하나고 움직이지 않으며 변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논리적으로는 하나의 존재에 굳게 참여하며 영원불멸하는 존재를 향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늙어 죽을까봐, 사라져 없어질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모두 허상에 대한 두려움이니까요. 눈을 감고 이성적으로 통찰한다면, 여러분은 모두 영원한 존재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여우는 아마도 파르메니데스의 후예인가 봅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진짜 있는 건’(l’essentiel)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4.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믿음'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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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믿음
-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
김헌
2020-12-18
작은 단서와 특이점은 곧 발견된다. 마룻바닥을 까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정신질환자들의 특이성은 곧 ‘협동조합 180’이 일과 활동 전반을 재편하고 하나의 사업체로서의 면모를 갖게 만든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가진 역량에 따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결국 활력과 생명 에너지를 북돋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누구든 1인 1표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민주적 질서가 자리잡은 협동조합은 정신질환자들의 자율성을 더욱 배가시키는... ...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아킬레우스(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트로이아 전쟁1)의 최고 영웅은 단연 아킬레우스입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운명의 길이 놓여 있었지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조국에서 왕 노릇하며 곱게 늙어갈 것이지만, 전쟁에 참여하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는 거였어요. 선택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누가 일찍 죽는 전쟁의 길로 가겠습니까?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선택에 덧붙는 다른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을 피하면 장수를 누리지만 죽고 나면 곧 잊히는 반면, 전쟁에 참여하면 단명하지만 죽은 후에 불멸의 명성이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멸의 존재로 남는 길로 들어선 겁니다.
1) 트로이아 전쟁 : 기원전 13-12세기 경에 일어났다는 트로이아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전설적인 전쟁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죽음에 대한 투쟁의 총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재를 지속시키려고 합니다. ‘존재는 소멸에 대한 투쟁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죽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을까? 평화로운 일상으로 오래 사는 것, 나쁘지는 않지만 결국 죽겠지? 오래 살든, 단명하든 어차피 죽는다면,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 더 좋겠군! 멋지게 싸우다 아름답게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기억하고 노래할 거야.’ 그래서 그는 죽음이 일렁이는 전쟁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빛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었고, 마침내 불멸의 명성을 남겼지요. 성공한 겁니다. 지금 저도 그를 생각하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여러분은 제가 쓴 글을 읽으면서 아킬레우스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하니까요.
물론, 아킬레우스가 진짜로 살아 있는 건 아닙니다. 저승 세계에 있다고요? 그런데 그가 거기서 자신을 기억하며 이야기하는 우리를 보고 흐뭇해할까요?
“죽음에 대해서 나에게 그럴듯하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왕 노릇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승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고 팔고 싶으니까!”(『오뒷세이아』11권 488-491행)라고 말할 겁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내 모습 이대로 살아 숨 쉬는 게 진짜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영원함? 감각에 의존 말고 이성만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런데 정말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는 걸까요?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을까요?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년 ~ 475년. 그리스의 철학자)보다 한 세대쯤 후에 태어난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0년~ 450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니 늙고 죽을 일도 없겠지요.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는 겁니다. 그의 믿음대로라면 우리에게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능할까요?
그는 감각에 의존하는 판단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오로지 이성에 따라,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는 겁니다. 그래야 감각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있는 것은 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없는 것은 없다.” 하나마나 한 소리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매우 진지하고 단호한 파르메니데스의 표정이 느껴집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잖아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바로 이 말을 통해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생성소멸의 여지를 깨끗이 없애버리고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듭니다.
단풍? 운동?... 있는 건 늘 있고 없는 건 늘 없는데
빨갛게 물들어가는 초록 잎의 단풍
먼저 생성부터 볼까요.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것은 ‘없던 것’이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없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없던 것’을 지워야 합니다. 결국 ‘있는 것’만 남게 되지요. 그러면 ‘없던 것’이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니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뭔가가 생겨나는 일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반대로 소멸은 ‘있던 것’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없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있던 것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어야만 합니다. 묘하지요?
변화는 어떨까요? 초록색 잎에 빨간 단풍이 드는 것, 분명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일어나려면, 잎에 있던 초록색이 없어지고 없던 빨강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있던 것이 없는 것이 되고, 없던 것이 있는 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단풍이 드는 변화는 있을 수가 없지요.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도(기원전 490년~430년) 스승의 주장을 거들지요. 운동도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운동이란 여기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저쪽으로 가 있는 거잖아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으니, 이 문장에서 없다는 표현을 모두 지우면, 그 어떤 것도 운동할 수 없고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그 자리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제논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 뒤에서 출발한다면, 절대로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려면, 거북이가 있는 곳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때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보다는 조금 더 나아갑니다. 다시 아킬레우스가 거북이 있는 곳에 이르면, 거북이는 또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서 가겠지요.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힐 수는 있지만,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는 거예요.
존재는 단 하나, 여럿처럼 보여도 연결된
영원
생성소멸도 변화도, 운동도 없다는 주장에 덧붙여, 그들의 마지막 결론은 엄청납니다. 수많은 사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존재는 단 하나고 쭉 연결되어 통째라는 거예요. 여럿이 있으려면, 여럿사이에 공간이나 경계선이 있어야겠지요? 그것들이 없다면 없는 것은 없다는 원칙에 따라 지워지니까, 여럿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쭉 연결될 겁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있는 것이니 모든 개체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한 덩어리가 되겠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사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가을이면 불타는 단풍이 산을 물들이고,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쯤이야 쉽게 추월할 수 있다고요? 그건 그저 우리 눈에, 감각에 포착되는 현상일 뿐, 진실이 아니랍니다.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감각을 꼭 닫고 오로지 이성으로만, 논리로만 생각해야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요.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말하는 겁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있는 모든 것은 하나고 움직이지 않으며 변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논리적으로는 하나의 존재에 굳게 참여하며 영원불멸하는 존재를 향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늙어 죽을까봐, 사라져 없어질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모두 허상에 대한 두려움이니까요. 눈을 감고 이성적으로 통찰한다면, 여러분은 모두 영원한 존재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여우는 아마도 파르메니데스의 후예인가 봅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진짜 있는 건’(l’essentiel)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4.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믿음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3. “모든 것은 변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4.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믿음'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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