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가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론을 지을만한 사료를 찾을 수 없고, 논리적으로 풀어낼 정황증거도 불충분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십자드라이버를 손에 쥔 피의자에게 일자드라이버를 바꿔 쥐게 한 <공공의 적> 형사반장처럼 해야 할까?
ㅣ십자드라이버로 어떻게 집을 터냐
▲영화 공공의 적 1편 속 한 장면(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난 2002년 개봉한 영화 <공공의 적>(1편)에서 주인공 강철중(설경구) 형사는 반장(강신일)에게 실적이 부진하다는 잔소리를 듣고 폭력과 금품갈취를 일삼던 산수(이문식)를 잡아온다. 조서 작성 중에 강철중은 동료 형사에게 빈집털이범 사건으로 반장이 골치 아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수에게 “폭력 및 상습적인 금품갈취, 공무집행방해로 2년 썩을래? 아니면 절도로 6개월 썩을래?” 하면서 회유한다. 산수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여 십자드라이버를 손에 들고 피의자 사진을 찍던 중 반장이 들어와 “십자드라이버로 어떻게 집을 터냐?”고 한다.
강철중은 들켰다는 표정을 짓고, 산수는 반장이 강철중의 겁박성 회유가 있었던 것을 밝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다. 하지만 반장은 산수의 기대와 달리 캐비닛에서 일자드라이버를 꺼내 쥐어주며 “이걸로 해” 한다. 대다수 관객의 폭소를 불러일으켰던 장면인데, 그 밑바탕에는 범죄수사와 사법절차 상 증거의 중요성 및 신빙성 문제가 깔려 있다. 영화에서는 재미를 위해 짓궂게 묘사했고 관객들도 웃어넘겼지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만인의 공분을 살만한 사안이다.
ㅣ사료(史料)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
역사학 및 역사서술도 증거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조작되거나 작위적으로 해석된 것이 아닌지 깊이 검토한다는 점에서 범죄수사 및 사법절차와 닮은 점이 많다. 수사담당자와 사법담당자가 증거보전과 진위여부 구명에 심혈을 기울이듯이, 역사가도 증거를 찾고 다루는 것에 심혈을 기울인다. 강철중 형사의 사건조작과 형사반장의 증거 바꿔치기처럼, 서양 중세에는 정치·종교적 목적으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寄進狀)’1)을 비롯한 수많은 문서의 위조가 행해졌고, 현대에도 개인의 잘못된 욕망으로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2), ‘귀함별황자총통(龜艦別黃字銃筒) 사건’3)등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역사학적 검토로 위조임을 밝혀냈다.
1) 콘스탄티누스 기진장 :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나병을 치료해준 교황에게 감사의 표시로 로마 서부에 대한 통치권을 교황에게 양도했다는 문서. 후대에 위작임이 밝혀짐
2)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 :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구석기 유물을 위조하여 몰래 묻어놓고 발굴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구석기 시작 연대를 계속 앞당겨 신의 손이라고 칭송받았다가 나중에 들통 난 사건
3) 귀함별황자총통 사건 : 해군 대령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 공모하여 별황자총통 모조품을 바다에 빠뜨렸다가 발굴한 뒤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서 사용된 총통이라 주장한 사건. 처음에는 주장이 인정되어 국보 제274호로 제정되었으나 추후 조작임이 밝혀져 국보에서 삭제됨
역사가가 역사서술을 할 때 증거로 삼는 것은 ‘사료(史料)’라고 부르는데, 범죄수사에서 증거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듯이, 역사학에서도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No document, No history).”는 말을 불문율로 삼고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사료’를 “역사를 연구하거나 편찬하는 데 있어서 재료가 되는 문헌이나 유물”로 설명한다. 단순하게 ‘역사재료’로 풀이한 것인데, ‘료(料)’에는 ‘재료’ 뿐 아니라 ‘헤아리다’라는 뜻도 있다. ‘사료’라는 말은 서양근대의 역사학이 동양에 도입되면서 샘물이나 강의 기원이라는 어원을 가진 독일어 ‘크벨레(Die Quelle)’ 및 영어 ‘소스(source)’를 한자로 바꾼 근대용어이다. 어원상으로는 ‘원천’이라는 단어가 적합한데도 ‘재료’와 ‘헤아리다’는 뜻을 함께 가진 ‘료’를 써서 ‘사료’로 표현한 것이 흥미로운데, ‘역사(히스토리)’의 어원이 ‘탐구’ 또는 ‘구명’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절묘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한편, ‘다큐먼트(document)’도 ‘사료’로 번역하는데, 이는 문자사료라는 의미가 강하다.
ㅣ1차 사료라고 반드시 진실에 부합하진 않아
역사학에서 ‘사료’는 문자사료와 비(非)문자사료로 분류하기도 하고, 1차사료와 2차사료로 분류하기도 한다. 문자사료는 역사서, 연보, 연대기, 회고록, 전기, 일기, 편지, 특허장, 조약문, 임명장, 판결문, 계약서 같은 것이고, 비문자사료는 유물ㆍ유적, 회화, 조각, 공예품, 화폐, 지도 같은 것이다. 이 가운데 역사서 등은 자체로 완성된 역사서술의 결과이지만,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사료가 된다.
1차사료는 당대에 제작된 저작물이나 유물 등이고, 2차사료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양면성을 지닌 경우도 있다. 가령 후대 역사서는 2차사료이지만 인용된 당대 외교문서 같은 것은 1차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1차사료가 2차사료보다 반드시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작성자가 해당 사건의 이해당사자인 경우에는 작성자의 입장이 짙게 반영되어 진실과 멀어지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사료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작업을 범죄수사 및 사법절차에서 증거의 신빙성 여부를 검증하는 것만큼 중시하는데, 이를 ‘사료비판’이라고 한다. 사료비판은 종교의 세속지배를 탈피하고자 하는 서양 근대정신이 태동하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전의 역사서술에서도 초보적인 사료비판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세까지는 역사학이 ‘신학의 시녀’ 처지라 본격적인 사료비판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본격적인 사료비판의 선구자로 꼽는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렌초 발라(1407~1457)인데, 앞서 소개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 위조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17세기 과학혁명과 19세기 언어학의 발전으로 사료비판 방법이 크게 발전하였고, 나아가 근대역사학의 성립 토대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서양보다 더 일찍 역사서술이 시작되었지만, ‘술이부작(述而不作)’4)전통의 영향, 과학혁명의 부재 등으로 근대적 사료비판이 자생하기 어려웠던 면이 있다.
4) 술이부작(述而不作) : “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 『논어』 술이편에 등장하는 말로 동양에서는 ‘춘추필법(春秋筆法)’과 함께 역사서술의 기본자세로 삼았다.
사료비판은 방식 면에서는 사료의 보존상태, 저자ㆍ작자의 실존여부나 대필여부를 검토하여 사료의 진위를 밝히는 외적비판과 외적비판을 거친 사료를 가지고 다시 사료에 담긴 내용의 진실여부나 신뢰성을 밝히는 내적비판으로 나뉜다. 쉽게 설명하면, 외적비판은 사료의 위작여부와 전승과정에서의 변개유무 등을 밝히는 것이고, 내적비판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것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가 하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내적비판은 외적비판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한 이후에 이루어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외적비판으로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여 내적비판을 통해 다시 사료의 진위를 논박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례로 <환단고기> 진위논쟁을 들 수 있는데, 학계에서는 외적·내적 비판을 통해 위서(僞書)임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각에서는 사료비판 결과에 동의하지 않고 진서(眞書)로 여겨 논란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사료비판은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범죄수사와 사법절차처럼 미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범죄자가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듯이 욕망에 사로잡혀 사료를 조작하는 이의 수법 또한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에 임하는 역사가는 범죄자와 한판 승부에 임하는 수사담당자나 사법담당자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앞서 소개했듯이, 증거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고,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증거와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와 역사연구에 착수하기 때문에 수사와 사료비판이 어려운 면도 있다. 기소장이나 역사서술의 논지를 보면 증거와 사료를 바탕으로 수사 또는 연구가 시작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과정은 역순으로 심증으로 시작하여 증거 또는 사료를 찾아내거나, 정황 증거를 토대로 추론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역사가가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론을 지을만한 사료를 찾을 수 없고, 논리적으로 풀어낼 정황증거도 불충분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십자드라이버를 손에 쥔 피의자에게 일자드라이버를 바꿔 쥐게 한 <공공의 적> 형사반장처럼 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에 모든 독자가 동의할 것이다. 다만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증거불충분의 경우에는 피의자의 이익으로 삼는 사법정신과 달리 역사학에서는 다양한 해석의 길이 열려 있다. 물론 기본적인 요건이 있다. 고의적인 사료누락이나 말살로 자신의 견해를 확정지으려 들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해석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3.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3.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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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0-11-09
역사가가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론을 지을만한 사료를 찾을 수 없고, 논리적으로 풀어낼 정황증거도 불충분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십자드라이버를 손에 쥔 피의자에게 일자드라이버를 바꿔 쥐게 한 <공공의 적> 형사반장처럼 해야 할까?
ㅣ십자드라이버로 어떻게 집을 터냐
▲영화 공공의 적 1편 속 한 장면(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난 2002년 개봉한 영화 <공공의 적>(1편)에서 주인공 강철중(설경구) 형사는 반장(강신일)에게 실적이 부진하다는 잔소리를 듣고 폭력과 금품갈취를 일삼던 산수(이문식)를 잡아온다. 조서 작성 중에 강철중은 동료 형사에게 빈집털이범 사건으로 반장이 골치 아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수에게 “폭력 및 상습적인 금품갈취, 공무집행방해로 2년 썩을래? 아니면 절도로 6개월 썩을래?” 하면서 회유한다. 산수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여 십자드라이버를 손에 들고 피의자 사진을 찍던 중 반장이 들어와 “십자드라이버로 어떻게 집을 터냐?”고 한다.
강철중은 들켰다는 표정을 짓고, 산수는 반장이 강철중의 겁박성 회유가 있었던 것을 밝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다. 하지만 반장은 산수의 기대와 달리 캐비닛에서 일자드라이버를 꺼내 쥐어주며 “이걸로 해” 한다. 대다수 관객의 폭소를 불러일으켰던 장면인데, 그 밑바탕에는 범죄수사와 사법절차 상 증거의 중요성 및 신빙성 문제가 깔려 있다. 영화에서는 재미를 위해 짓궂게 묘사했고 관객들도 웃어넘겼지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만인의 공분을 살만한 사안이다.
ㅣ사료(史料)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
역사학 및 역사서술도 증거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조작되거나 작위적으로 해석된 것이 아닌지 깊이 검토한다는 점에서 범죄수사 및 사법절차와 닮은 점이 많다. 수사담당자와 사법담당자가 증거보전과 진위여부 구명에 심혈을 기울이듯이, 역사가도 증거를 찾고 다루는 것에 심혈을 기울인다. 강철중 형사의 사건조작과 형사반장의 증거 바꿔치기처럼, 서양 중세에는 정치·종교적 목적으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寄進狀)’1) 을 비롯한 수많은 문서의 위조가 행해졌고, 현대에도 개인의 잘못된 욕망으로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2) , ‘귀함별황자총통(龜艦別黃字銃筒) 사건’3) 등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역사학적 검토로 위조임을 밝혀냈다.
1) 콘스탄티누스 기진장 :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나병을 치료해준 교황에게 감사의 표시로 로마 서부에 대한 통치권을 교황에게 양도했다는 문서. 후대에 위작임이 밝혀짐
2)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 :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구석기 유물을 위조하여 몰래 묻어놓고 발굴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구석기 시작 연대를 계속 앞당겨 신의 손이라고 칭송받았다가 나중에 들통 난 사건
3) 귀함별황자총통 사건 : 해군 대령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 공모하여 별황자총통 모조품을 바다에 빠뜨렸다가 발굴한 뒤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서 사용된 총통이라 주장한 사건. 처음에는 주장이 인정되어 국보 제274호로 제정되었으나 추후 조작임이 밝혀져 국보에서 삭제됨
역사가가 역사서술을 할 때 증거로 삼는 것은 ‘사료(史料)’라고 부르는데, 범죄수사에서 증거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듯이, 역사학에서도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No document, No history).”는 말을 불문율로 삼고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사료’를 “역사를 연구하거나 편찬하는 데 있어서 재료가 되는 문헌이나 유물”로 설명한다. 단순하게 ‘역사재료’로 풀이한 것인데, ‘료(料)’에는 ‘재료’ 뿐 아니라 ‘헤아리다’라는 뜻도 있다. ‘사료’라는 말은 서양근대의 역사학이 동양에 도입되면서 샘물이나 강의 기원이라는 어원을 가진 독일어 ‘크벨레(Die Quelle)’ 및 영어 ‘소스(source)’를 한자로 바꾼 근대용어이다. 어원상으로는 ‘원천’이라는 단어가 적합한데도 ‘재료’와 ‘헤아리다’는 뜻을 함께 가진 ‘료’를 써서 ‘사료’로 표현한 것이 흥미로운데, ‘역사(히스토리)’의 어원이 ‘탐구’ 또는 ‘구명’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절묘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한편, ‘다큐먼트(document)’도 ‘사료’로 번역하는데, 이는 문자사료라는 의미가 강하다.
ㅣ1차 사료라고 반드시 진실에 부합하진 않아
역사학에서 ‘사료’는 문자사료와 비(非)문자사료로 분류하기도 하고, 1차사료와 2차사료로 분류하기도 한다. 문자사료는 역사서, 연보, 연대기, 회고록, 전기, 일기, 편지, 특허장, 조약문, 임명장, 판결문, 계약서 같은 것이고, 비문자사료는 유물ㆍ유적, 회화, 조각, 공예품, 화폐, 지도 같은 것이다. 이 가운데 역사서 등은 자체로 완성된 역사서술의 결과이지만,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사료가 된다.
1차사료는 당대에 제작된 저작물이나 유물 등이고, 2차사료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양면성을 지닌 경우도 있다. 가령 후대 역사서는 2차사료이지만 인용된 당대 외교문서 같은 것은 1차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1차사료가 2차사료보다 반드시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작성자가 해당 사건의 이해당사자인 경우에는 작성자의 입장이 짙게 반영되어 진실과 멀어지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사료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작업을 범죄수사 및 사법절차에서 증거의 신빙성 여부를 검증하는 것만큼 중시하는데, 이를 ‘사료비판’이라고 한다. 사료비판은 종교의 세속지배를 탈피하고자 하는 서양 근대정신이 태동하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전의 역사서술에서도 초보적인 사료비판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세까지는 역사학이 ‘신학의 시녀’ 처지라 본격적인 사료비판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본격적인 사료비판의 선구자로 꼽는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렌초 발라(1407~1457)인데, 앞서 소개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 위조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17세기 과학혁명과 19세기 언어학의 발전으로 사료비판 방법이 크게 발전하였고, 나아가 근대역사학의 성립 토대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서양보다 더 일찍 역사서술이 시작되었지만, ‘술이부작(述而不作)’4) 전통의 영향, 과학혁명의 부재 등으로 근대적 사료비판이 자생하기 어려웠던 면이 있다.
4) 술이부작(述而不作) : “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 『논어』 술이편에 등장하는 말로 동양에서는 ‘춘추필법(春秋筆法)’과 함께 역사서술의 기본자세로 삼았다.
사료비판은 방식 면에서는 사료의 보존상태, 저자ㆍ작자의 실존여부나 대필여부를 검토하여 사료의 진위를 밝히는 외적비판과 외적비판을 거친 사료를 가지고 다시 사료에 담긴 내용의 진실여부나 신뢰성을 밝히는 내적비판으로 나뉜다. 쉽게 설명하면, 외적비판은 사료의 위작여부와 전승과정에서의 변개유무 등을 밝히는 것이고, 내적비판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것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가 하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내적비판은 외적비판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한 이후에 이루어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외적비판으로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여 내적비판을 통해 다시 사료의 진위를 논박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례로 <환단고기> 진위논쟁을 들 수 있는데, 학계에서는 외적·내적 비판을 통해 위서(僞書)임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각에서는 사료비판 결과에 동의하지 않고 진서(眞書)로 여겨 논란이 끝나지 않고 있다.
ㅣ진실에 부합하는 사료가 없을 때 역사가는?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이미지 출처 : 서해문집)
이처럼 사료비판은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범죄수사와 사법절차처럼 미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범죄자가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듯이 욕망에 사로잡혀 사료를 조작하는 이의 수법 또한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에 임하는 역사가는 범죄자와 한판 승부에 임하는 수사담당자나 사법담당자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앞서 소개했듯이, 증거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고,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증거와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와 역사연구에 착수하기 때문에 수사와 사료비판이 어려운 면도 있다. 기소장이나 역사서술의 논지를 보면 증거와 사료를 바탕으로 수사 또는 연구가 시작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과정은 역순으로 심증으로 시작하여 증거 또는 사료를 찾아내거나, 정황 증거를 토대로 추론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역사가가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론을 지을만한 사료를 찾을 수 없고, 논리적으로 풀어낼 정황증거도 불충분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십자드라이버를 손에 쥔 피의자에게 일자드라이버를 바꿔 쥐게 한 <공공의 적> 형사반장처럼 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에 모든 독자가 동의할 것이다. 다만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증거불충분의 경우에는 피의자의 이익으로 삼는 사법정신과 달리 역사학에서는 다양한 해석의 길이 열려 있다. 물론 기본적인 요건이 있다. 고의적인 사료누락이나 말살로 자신의 견해를 확정지으려 들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해석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3.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2.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의 정의와 역사의 효용성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3.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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