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전지전능한 악마 따위가 어디 있는가, 철학자들은 저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구나, 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다. 이 논증이 갖는 현실적인 힘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가 딱 거기에 맞춤... ...
철학의 시작은 글이 아니라 말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이미지 출처 : 이제이북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철학은 글로 한다. 한 철학자가 쓴 글을 읽고 동의를 하거나 반박을 하는 또 다른 글을 쓰고, 그런 식으로 철학은 진행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이 시작된 시기에는 철학은 글로 하지 않았다. 말로 했다.
철학의 역사를 볼 때 소크라테스는 글이라는 매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파이드로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글로 쓰이면, 모든 이야기는 전혀 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똑같이 아무 데나 돌아다니며, 누구에게는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모른다네.”(플라톤, <파이드로스>,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275쪽)
말은 글로 바뀌는 순간 그 말이 나오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말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 대화로 철학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말마따나 실제 대화에서는 질문이나 반박이 생생하게 가능하지만, 글에서는 “누구에게는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모른다." 녹음기가 없던 시절이니 어떻게든 글로 쓰긴 해야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쓴 플라톤은 스승의 뜻을 잘 받들어 대화의 형태로 기록했다.
철학의 역사 자체가 이러하니 철학을 꼭 책으로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현대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한 SNS가 나왔으니 그게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지 모른다. 철학이 전달되는 매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야 한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이나 연극도 철학을 전달하는 훌륭한 매체이다. 그것들은 철학을 토론하고 배우는 보조 매체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철학일 수 있다.
스토리와 재미 갖춘 ‘사고실험’, SF영화에 자주 등장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철학을 공부할 때 ‘사고 실험’을 이용하라고 권한다. 사고 실험은 가상적인 상황을 실험의 형태로 제시한 것이다. 꼭 철학에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이용된다. 얼른 떠올릴 수 있는 예로 갈릴레이의 자유 낙하 실험이 있다. 흔히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사고 실험을 통해 두 공이 똑같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직접적인 실험이나 관찰을 하지 않는 철학의 특성상 사고 실험은 철학에서 특히 애용된다.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등 철학의 전 분야에서 특정 이론을 주장할 때나, 다른 이론을 반박할 때 이용된다. 스토리가 있고 퍼즐 형태로 된 경우가 많기에 사고 실험은 그 자체로 흥미가 있다.
바로 이러한 특성, 곧 스토리가 있고 재미가 있다는 점 때문에 영화에서도 즐겨 사용된다. 특히 철학의 사고 실험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상황을 설정할 때가 많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들어야 주장과 반박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 실험은 SF영화에서 많이 쓰이고, 이른바 B급 영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데카르트 인물 사진(이미지 출처 : flickr)
유명한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 사고 실험을 보자. 데카르트는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절대 의심이 되지 않는 확실한 지식을 찾으려고 일부러 의심해 보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했다. 우리는 2 더하기 3은 5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2 더하기 3은 4인데 전지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나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2 더하기 3을 계산할 때마다 속이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악마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여기까지가 철학 개론 시간에 흔히 배우는 철학 논증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악마 따위가 어디 있는가, 철학자들은 저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구나, 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다. 이 논증이 갖는 현실적인 힘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철학적 회의론이 등장하는 영화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매트릭스>가 딱 거기에 맞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절대 B급 영화는 아니다. 그리고 1편이 1999년에 만들어졌고 그 후 3편까지 나왔지만 지금도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나라는 인간이 태어나 지금까지 사는 세상이 사실은 인공 지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매트릭스라는 것을 영화는 실감 나게 보여 준다. 내가 전지전능한 악마에 의해 속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인공 지능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거짓일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논증을 배울 때는, “어떤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보다.” 정도로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인공 지능이 만든 가상의 것이라는 스토리는 훨씬 더 실감이 난다.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통해 ‘철학적 회의론’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가 현대에 ‘통 속의 뇌’라는 형태로 재탄생 되었다는 것도 덤으로 배우게 될 테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는 통 속의 뇌, 통 속에 뇌가 연결된 슈퍼컴퓨터가 나의 기억을 만들어 낸다는 사고 실험인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없는 것이고 우리가 경험한다고 생각한다고 믿는 것은 실은 슈퍼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경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지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이나 통 속의 뇌 사고 실험을 배울 때 당연히 그것을 비판해 보거나 비교해 보는 연습도 해야 한다. 현실이 없다면 악마에게 속을 수도 없고, 통 속의 뇌도 ‘현실이 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이게 기본적인 반박이다. 매트릭스에서는 그런 반박을 더 쉽게 형상화할 수 있다. 내가 있기에 나아가 매트릭스라는 가상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철학 선생은 물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악마 또는 통 속의 뇌와 매트릭스의 차이는 뭘까? 이런 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훌륭한 철학적 성찰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가 준 빨간 약을 먹고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은 거대 인공 지능이 지배하는 매트릭스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모피어스를 비롯해서 매트릭스 밖에서 활동하는 소수는 매트릭스 밖의 세상이 진짜 세상(철학 용어로 ‘실재’)이고 매트릭스 안의 세상은 조작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회의론은 전면적인 회의론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은 제외한 부분적인 회의론이다. 이것을 데카르트 식으로 말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악마에게 속고 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은 악마로부터 속고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상의 현실 밖에 실제 사람이 있게 되기에 회의론에 반박하기가 쉽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제기한 회의론은 전면적인 회의론이다. 이것을 영화로 만든다면 모피어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매트릭스 안에 살아야 한다. 여기서는 위와 같은 형식의 회의론 반박은 가능하지 않다. 모두가 속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실험’이 없다면 철학은 심각한 빈곤에...
▲사고실험 이미지(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철학적 사유의 날개를 펼쳐 스스로 또 다른 형태의 회의론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도 아니고, 데카르트가 본디 제시된 형태처럼 모든 사람도 아니고, 나 혼자만 인공 지능에 속는 것이다. 나만 매트릭스에 갇혀 있는 것이다. 통 속의 뇌로 말해 보면, 나 혼자만 몸뚱어리가 없고 통 속의 뇌로만 존재한다. 사실 이래도 데카르트가 말하려고 하는 회의론은 충분히 전달된다.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인생은 전부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것이다. 얼마든지 그렇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모두 사실이 아니고, 이것이 바로 회의론자가 주장하려고 하는 바이다. 이 세상은 결국 나의 지식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이것만 가지고도 회의론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
어떤 철학자는 사고 실험을 ‘철학자의 무기고’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철학자는 “철학은 사고 실험 없이는 심지어 과학보다 더 많은 심각한 빈곤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고 실험이 철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크다. 물론 철학자들 내에서도 사고 실험에 대한 비판이 있다. 사고 실험이 상상하는 가상의 상황이 우리와 너무 멀리 있는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실험이 요구하는 조건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실험이 의존하는 직관이 신뢰성이 없어서 증거의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철학에서 사고 실험이 하는 역할을 여기서 토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사고 실험은 우리에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해 준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전지전능한 악마 이야기 없이 철학의 회의론을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가 그 이야기를 영상화해서 보여 준다면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사고 실험이 그리는 가상의 상황이 우리와 너무 먼 세계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을 영화나 드라마가 보여 준다.
강원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철학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불편하면 따져봐>,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위험한 철학책>, <논리는 나의 힘>, <변호사 논증법>, <동물을 위한 윤리학>, <동물윤리대논쟁> 등의 책을 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매트릭스>,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 사고실험을 영화로!!'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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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 사고실험을 영화로!!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최훈
20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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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1초 읽기그러나 전지전능한 악마 따위가 어디 있는가, 철학자들은 저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구나, 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다. 이 논증이 갖는 현실적인 힘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가 딱 거기에 맞춤... ...
철학의 시작은 글이 아니라 말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이미지 출처 : 이제이북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철학은 글로 한다. 한 철학자가 쓴 글을 읽고 동의를 하거나 반박을 하는 또 다른 글을 쓰고, 그런 식으로 철학은 진행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이 시작된 시기에는 철학은 글로 하지 않았다. 말로 했다.
철학의 역사를 볼 때 소크라테스는 글이라는 매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파이드로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글로 쓰이면, 모든 이야기는 전혀 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똑같이 아무 데나 돌아다니며, 누구에게는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모른다네.”(플라톤, <파이드로스>,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275쪽)
말은 글로 바뀌는 순간 그 말이 나오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말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 대화로 철학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말마따나 실제 대화에서는 질문이나 반박이 생생하게 가능하지만, 글에서는 “누구에게는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모른다." 녹음기가 없던 시절이니 어떻게든 글로 쓰긴 해야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쓴 플라톤은 스승의 뜻을 잘 받들어 대화의 형태로 기록했다.
철학의 역사 자체가 이러하니 철학을 꼭 책으로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현대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한 SNS가 나왔으니 그게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지 모른다. 철학이 전달되는 매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야 한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이나 연극도 철학을 전달하는 훌륭한 매체이다. 그것들은 철학을 토론하고 배우는 보조 매체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철학일 수 있다.
스토리와 재미 갖춘 ‘사고실험’, SF영화에 자주 등장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철학을 공부할 때 ‘사고 실험’을 이용하라고 권한다. 사고 실험은 가상적인 상황을 실험의 형태로 제시한 것이다. 꼭 철학에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이용된다. 얼른 떠올릴 수 있는 예로 갈릴레이의 자유 낙하 실험이 있다. 흔히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사고 실험을 통해 두 공이 똑같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직접적인 실험이나 관찰을 하지 않는 철학의 특성상 사고 실험은 철학에서 특히 애용된다.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등 철학의 전 분야에서 특정 이론을 주장할 때나, 다른 이론을 반박할 때 이용된다. 스토리가 있고 퍼즐 형태로 된 경우가 많기에 사고 실험은 그 자체로 흥미가 있다.
바로 이러한 특성, 곧 스토리가 있고 재미가 있다는 점 때문에 영화에서도 즐겨 사용된다. 특히 철학의 사고 실험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상황을 설정할 때가 많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들어야 주장과 반박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 실험은 SF영화에서 많이 쓰이고, 이른바 B급 영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데카르트 인물 사진(이미지 출처 : flickr)
유명한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 사고 실험을 보자. 데카르트는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절대 의심이 되지 않는 확실한 지식을 찾으려고 일부러 의심해 보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했다. 우리는 2 더하기 3은 5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2 더하기 3은 4인데 전지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나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2 더하기 3을 계산할 때마다 속이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악마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여기까지가 철학 개론 시간에 흔히 배우는 철학 논증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악마 따위가 어디 있는가, 철학자들은 저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구나, 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다. 이 논증이 갖는 현실적인 힘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철학적 회의론이 등장하는 영화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매트릭스>가 딱 거기에 맞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절대 B급 영화는 아니다. 그리고 1편이 1999년에 만들어졌고 그 후 3편까지 나왔지만 지금도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나라는 인간이 태어나 지금까지 사는 세상이 사실은 인공 지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매트릭스라는 것을 영화는 실감 나게 보여 준다. 내가 전지전능한 악마에 의해 속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인공 지능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거짓일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논증을 배울 때는, “어떤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보다.” 정도로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인공 지능이 만든 가상의 것이라는 스토리는 훨씬 더 실감이 난다.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통해 ‘철학적 회의론’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가 현대에 ‘통 속의 뇌’라는 형태로 재탄생 되었다는 것도 덤으로 배우게 될 테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는 통 속의 뇌, 통 속에 뇌가 연결된 슈퍼컴퓨터가 나의 기억을 만들어 낸다는 사고 실험인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없는 것이고 우리가 경험한다고 생각한다고 믿는 것은 실은 슈퍼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경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지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이나 통 속의 뇌 사고 실험을 배울 때 당연히 그것을 비판해 보거나 비교해 보는 연습도 해야 한다. 현실이 없다면 악마에게 속을 수도 없고, 통 속의 뇌도 ‘현실이 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이게 기본적인 반박이다. 매트릭스에서는 그런 반박을 더 쉽게 형상화할 수 있다. 내가 있기에 나아가 매트릭스라는 가상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철학 선생은 물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악마 또는 통 속의 뇌와 매트릭스의 차이는 뭘까? 이런 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훌륭한 철학적 성찰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가 준 빨간 약을 먹고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은 거대 인공 지능이 지배하는 매트릭스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모피어스를 비롯해서 매트릭스 밖에서 활동하는 소수는 매트릭스 밖의 세상이 진짜 세상(철학 용어로 ‘실재’)이고 매트릭스 안의 세상은 조작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회의론은 전면적인 회의론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은 제외한 부분적인 회의론이다. 이것을 데카르트 식으로 말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악마에게 속고 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은 악마로부터 속고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상의 현실 밖에 실제 사람이 있게 되기에 회의론에 반박하기가 쉽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제기한 회의론은 전면적인 회의론이다. 이것을 영화로 만든다면 모피어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매트릭스 안에 살아야 한다. 여기서는 위와 같은 형식의 회의론 반박은 가능하지 않다. 모두가 속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실험’이 없다면 철학은 심각한 빈곤에...
▲사고실험 이미지(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철학적 사유의 날개를 펼쳐 스스로 또 다른 형태의 회의론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도 아니고, 데카르트가 본디 제시된 형태처럼 모든 사람도 아니고, 나 혼자만 인공 지능에 속는 것이다. 나만 매트릭스에 갇혀 있는 것이다. 통 속의 뇌로 말해 보면, 나 혼자만 몸뚱어리가 없고 통 속의 뇌로만 존재한다. 사실 이래도 데카르트가 말하려고 하는 회의론은 충분히 전달된다.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인생은 전부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것이다. 얼마든지 그렇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모두 사실이 아니고, 이것이 바로 회의론자가 주장하려고 하는 바이다. 이 세상은 결국 나의 지식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이것만 가지고도 회의론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
어떤 철학자는 사고 실험을 ‘철학자의 무기고’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철학자는 “철학은 사고 실험 없이는 심지어 과학보다 더 많은 심각한 빈곤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고 실험이 철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크다. 물론 철학자들 내에서도 사고 실험에 대한 비판이 있다. 사고 실험이 상상하는 가상의 상황이 우리와 너무 멀리 있는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실험이 요구하는 조건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실험이 의존하는 직관이 신뢰성이 없어서 증거의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철학에서 사고 실험이 하는 역할을 여기서 토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사고 실험은 우리에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해 준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전지전능한 악마 이야기 없이 철학의 회의론을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가 그 이야기를 영상화해서 보여 준다면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사고 실험이 그리는 가상의 상황이 우리와 너무 먼 세계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을 영화나 드라마가 보여 준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매트릭스>,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 사고실험을 영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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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철학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불편하면 따져봐>,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위험한 철학책>, <논리는 나의 힘>, <변호사 논증법>, <동물을 위한 윤리학>, <동물윤리대논쟁> 등의 책을 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매트릭스>, 데카르트의 전지전능한 악마 사고실험을 영화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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